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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잃은 사람들](4) 항의할 권리

정치, 정책/복지정책, 문화 기획

by 소나무맨 2013. 12. 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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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잃은 사람들](4) 항의할 권리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ㆍ119구조하러 가니 왜 늦었냐며 폭행
ㆍ“항변 한마디 했다 죽도록 맞고 징계”

“살려주세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지난 10월18일 오후 8시. 수도권의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119구급대원 이재영씨(38·가명)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목적지는 11㎞ 떨어진 외진 낚시터. 10분 만에 도착해 구급차에서 내리자마자 “늦었잖아, XX들아. 빨리 안 뛰어”라는 고함 소리가 귀를 찔렀다. ‘늘 있는 일’이라 여기고 환자 상태부터 살폈다. 96세 할머니. 응급처치 후 이송을 결정하고 들것을 꺼내기 위해 구급차로 달려갔다. 환자 아들 ㄱ씨(59)는 처치가 빠르지 않다며 구급대원들에게 쉼없이 욕설을 쏟아냈다. 참다못해 “그만하세요. 이러시면 공무집행방해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가슴으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흥분한 ㄱ씨는 이씨의 목을 조르고 가슴과 배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구조하려다 내가 죽을 수 있겠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얻어맞은 이씨는 몸을 굴려 가까스로 이들을 피한 뒤 환자를 구급차에 태워 병원까지 이송했다. 출동부터 병원에 이르기까지 총 20분. 이씨는 응급실에 환자를 넘기고 바로 쓰러졌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폭행의 충격으로 기절한 것이었다. 이씨는 폭행 및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ㄱ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119구급 출동 업무를 수행하던 중 자신을 때린 시민에게 화를 냈다가 징계성 전보 조치를 당한 소방공무원 이재영씨(38·가명)가 22일 자신의 집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이씨의 본격적인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ㄱ씨는 이씨를 폭행 혐의로 맞고소했다. 그리고 이씨가 구급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근무하던 소방서와 소방방재청에 투서도 넣었다. 소방서는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조사결과 ㄱ씨 주장은 모두 허위로 판명났다. 그러나 이씨는 소방서로부터 징계성 전보조치를 당했다. “ㄱ씨는 ‘어머니가 위급한데 좀 때릴 수도 있지 않나’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더 화가 난 것은 소방서 태도였어요. 무조건 참으라고만 해요.”

폭행 사건 이후 이씨는 갑자기 기절하는 일이 잦아졌다. 혈관미주신경성 실신. 3개월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2주가량 병가를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병원비 때문이다. 변호사 선임도 걱정이다. 이씨는 “형사처벌부터 악성민원, 병원비에 이르기까지 소방서가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구급대원 출동 시 경찰관 동행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방관은 위험한 일이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지난 6년 동안 소방관들은 화재 진압과정에서 순직 38명을 비롯해 1843명이 다쳤다. 위험에 노출된 일을 하면서도 해마다 평균 80명씩 소방관들이 민원인들에게 맞고 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 9월 말 현재 소방대원 현장 활동 방해가 일어난 것도 전국적으로 614건에 이른다. 여성 구급대원의 경우 90% 이상이 욕설과 성희롱을 경험했다. 소방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복지 공무원들도 수난을 당하고 있다. 기초생활수급권자나 기초노령연금 대상에서 탈락됐거나, 생계비 지원이 줄었다며 불만을 품은 민원인들이 폭언이나 욕설을 퍼붓거나 가스총으로 위협하는 사례도 일어나고 있다. 콜센터 상담원이나 판매사원들은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들이지만, 일부 공무원들도 민원인들의 언어폭력이나 폭행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에서 감정노동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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