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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4-9. 진보의 10대의제 : 빈곤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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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4-9. 진보의 10대의제 : 빈곤을 잡아라

     

        

잔뜩 흐린날. 바람 마저 매섭다. 서울 지하철 교대역 11번 출구 앞. 깨끗하게 정리된 강남 거리가 펼쳐져 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연말 분위기가 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 곳은 ‘절망의 길’이다. 100m쯤 되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울 중앙지방법원 별관이 나온다. 그리고 별관 1층. 개인 파산신청을 받는 곳이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서울에 사는 극빈자들이 대부분이다. 돈도 희망도 없으니 끝간 데 없는 채무독촉에서 해방시켜달라고 법원에 호소하는 것이다.

지난 6일 서울 중앙지법 별관 남관 1층. 종합접수실 왼편에 개인회생과 파산 등을 신청하는 창구가 있다. 대기표를 뽑아 든 뒤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10여명 남짓. 손에는 각종 서류를 들고 있다. 눈빛은 초조하다. ‘딩동’하고 차임벨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이 창구로 다가간다. 다들 표정이 무겁다. 웃거나 밝은 모습은 없다.

개인회생 81건, 파산·법인회생 399건, 각종 문건 안내 723건. 접수 순서를 알리는 전광판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숫자가 적혀있다. 오전 11시50분. 이날 오전에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았왔다. 법원 파산과 직원은 “파산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개인파산 신청자만 하루 200~250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오후 3~4시쯤에는 업무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모씨(42·여).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 기미가 잔뜩 끼어 있다. 퍼머가 풀려 푸석푸석한 머리를 검은색 머리끈으로 질끈 동여맨 모습이다. 역시 파산신청을 하러 온 사람이다. 기자가 곁에 다가가 질문을 하자 대뜸 지갑을 열고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가족 사진이다. 본인과 세 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아들들이 착하고 공부도 잘 한단다. 한동안 아들 자랑을 하던 이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사연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남편이 자신의 인감을 가져가 대출도 받고, 사업도 했단다. 이혼한 다음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남편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빚은 1억원이 넘는다. 정상적인 직장은 잡을 수 없다. 월급에 압류가 들어가 있어서다. 낮밤 가리지 않고 일용직으로 뛰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나라 도움도 받고, 일도 억척같이 했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어렵게 번 돈이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눈깜짝할 사이 빠져나갔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씨는 “신용불량자여서 기록이 남을까봐 돈을 은행 계좌로 부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돈을 봉투에 넣어서 직접 갖다주는 기분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고 토로했다. 파산신청을 한 뒤 이씨는 종종걸음으로 법원을 빠져나갔다. 법원이 알선한 변호사 무료 상담을 받기 위해서다.

이씨와 같은 개인파산 신청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파산신청자는 지난 11월말 기준으로 8만5천4백여명이다. 시행 초기인 지난 2001년에는 신청자가 672명이었다. 5년새 13배 이상으로 늘었다.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란 게 일반적 전망이다. 그 만큼 삶이 갈수록 팍팍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서울 강동구청 관계자들은 최근 개인파산·회생 설명회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설명회가 열린 구청 5층 강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300여 명이 몰린 것이다. 강의시간도 1시간이나 연장됐다. 구청 기획공보과 김현정씨는 “설명회 참석자는 관내 주민 뿐 아니라 인근 경기도 하남시 주민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심지어 대구와 강원도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파산자의 급증은 정부가 지난 2003년부터 신용회복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선 데도 기인한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장기간 이어진 경기침체와 안정적인 일자리 부족, 소득재분배 실패 등이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2003~2004년 카드 대란을 오늘날한국 사회 빈곤문제의 원인으로 꼽았다. “외환위기 때 한번 크게 술렁거렸는데 그래도 그때 사람들은 벌어놓은 것이라도 있었다. 까먹을 재산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퇴직금이나 전세금이라도 있지 않았느냐. 하지만 지금의 신용 대란은 모아둔 돈을 다 까먹은 사람들이 카드 쓰다 빚더미에 올라 선 것이다. 탈출구 없는 빈곤이다.”

개인파산자 증가를 도덕적 해이 문제 차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파산신청을 해버리는 파산자 개개인의 무책임이 문제라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과)의 입장은 다르다. 전 교수는 지난 10월 열린 경제정의포럼에서 이런 시각을 반박했다.

“가계부채 문제는 단순히 금융기간의 건강성 확보, 경제적 불안정 제거 등의 관점이 아니라 금융활동이 정지되면서 개인이 겪게 될 고통과 인격적 모욕을 완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보험제의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개인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는 기업채무자의 도덕적 해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습니다.”

이인철 파산전문 변호사는 “파산신청 상담자는 대부분 사업 실패나 카드로 생활비를 메우다 채무 곤경에 빠진 사람들로 사정이 워낙 어렵다 보니 신청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노숙자나 기초생활수급자 등 빈곤층의 자활을 돕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기술과 영업 교육 등을 통해 저소득층의 취업이나 창업을 지원한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지난해 2천3백34억원, 올해는 2천6백55억원이 지원된다. 그러나 수혜자들이 일자리를 갖는 일은 드물다. 자활성공률이 2001년 9.5%를 기록한 뒤 떨어져 이후로는 해마다 5~7%대에 그치고 있다.

서울 용산 ‘다시 서기 상담보호센터’는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노숙인들은 여기서 잠 자고, 씻고 세탁도 한다. 하루에만 200여명이 이용한다. 대부분 센터 관계자들에게 낯이 익은 사람들이다. 한 번 온 사람이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 노숙을 하게 되면 그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웅변한다. 이 센터 김자옥 사회복지사는 이 서비스에 참여한 노숙자들의 형편을 이렇게 전했다.

“서울시에서 공공근로 형식의 자활 근로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노숙인들이 관심을 갖고 이 서비스에 참여하지만 실제로 빈곤에서 탈출하는 것은 어려워요. 주로 건설현장 등지에서 막일을 하는데, 한 달에 15~20일 밖에 일할 수 없을 뿐 더러 그나마 오전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는 돈은 40만~50만원입니다. 일을 하려면 주거지가 있어야 하는데, 쪽방 마련하는데 월 20만원 들고, 먹고 입고 하면 남는 돈이 없어요. 계속 그 일을 하며 지낼 수는 있지만 노숙자 신세를 벗어날 방법은 안됩니다.”

서울 강서 등천자활후견기관 장재승 실장은 “자활서비스가 효과를 보려면 자활하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과정이 보완돼야 한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활훈련을 통해 일자리를 갖지만 일부는 후견기관을 돌아다니며 월 수십 만원의 지원금만 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렇게 해도 자활사업을 받는 사람들 자체가 대개 고령자나 여성 등이어서 성공률이 낮을 것으로 내다봤다.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은 정부의 자활사업으로는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정부가 빈곤층에게 주는 일자리는 고용이 불안하고, 저임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소득층을 일용직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정책에 다름 아니죠. 또한 창업정책도 살벌한 경쟁시장에서 덜렁 가게 하나 마련해 주고 알아서 자립하라는 수준입니다. 창업지원자금도 결국 빚입니다.”

빈곤의 또 다른 문제는 대물림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는 적다. 결국 소위 ‘명문대학’, 안정된 직장을 들어갈 수 없고, 결국 빈곤층으로 편입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서울 신림동 거주 중 2년생 이모군(14)의 예를 보자. 그는 학원 종합반에 다니고 싶어 한다. 주변 친구들은 거의 다 다닌다.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답은 없다. 방 두칸 짜리 전세 빌라에 사는 처지에 종합반 다닐 여유가 없는 것은 자신도 안다. 김군은 수학이 싫다. 교과서에 있는 문제에도 절절 맨다. 성적은 반에서 하위권이다. 학원에 ‘못 다니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린다. 그럼에도 김군은 집 근처에 있는 서울대에 가고 싶다. 아버지의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3년 동안 서울대 입학생 중 사회계층의 하위 20%에 속하는 빈곤층이 입학한 비율은 전체의 2%에 불과했다. 김군 아버지는 택시운전사. 2004학년도 서울대 신입생 조사에서 아버지 직업이 화이트 칼라인 경우는 67.%에 달했다. 블루 칼라는 서울대 학생의 부모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빈곤층에 대한 정의는 명확치 않다. 정부는 최저생계비 이하 가정을 빈곤층으로 잠정 규정하고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저생계비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7만 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청의 ‘빈곤 인식’ 조사결과를 보자. 자신을 상류층이라고 답변한 사람은 1.5%였다. 중산층은 2003년 조사 때보다 2.8% 포인트 감소한 53.4%였다. 대신 하류층은 늘어 45.2%를 기록했다. 국민 절반 가량이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신빈곤’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신빈곤층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해, 일자리는 불안해졌지만 소비는 늘고, 물가가 오르면서 예전처럼 자신의 소득으로 원하는 만큼의 소비를 할 수 없게 된 계층이다. 한국도시문제연구소는 최근 ‘한국사회의 신빈곤’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신빈곤이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다고 규정했다. 신빈곤층의 주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하층민으로 내려온 예전의 중산층들이다. 인구 대다수가 빈곤층이던 1960~70년대의 절대적 빈곤과는 다르다.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은 “예전에는 실직을 하거나 아파서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빈곤층에 편입됐지만 이젠 ‘일 하는 빈곤층’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는 2000년대 이후로 새롭게 등장한 빈곤의 형태”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2004년 대통령 직속 빈곤격차·차별시정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빈곤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유의선 사무국장은 “정부 정책으로 빈곤층 문제를 푸는 데 한계도 있겠지만 위원회 내에서도 이견이 많아 재정경제부 등의 반대로 사업이 제자리 걸음인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양승조 열린우리당 의원은 “결국 빈곤은 좋은 일자리 창출로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당이 이 부분에 소홀했고, 실패했다”면서 “특히 중소 제조기업의 붕괴 등을 예상해 각종 지원책을 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감이 있다”고 말했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의원은 “빈곤의 양과 질이 매우 나빠진 상황”이라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도 이런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현 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확대, 건강보험 급여확대, 국민연금 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 국회 내외에서 수십 차례 토론을 하고, 뛰어다니며 입법 추진을 했지만 결국 허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현의원은 “앞으로는 복지예산 내에서의 증액이 아니라 예산배분시 복지 중심으로 근본적인 틀을 새로 짤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 김다혜 팀장은 논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복지 문제는 예산처와의 싸움입니다. 정부가 주장하는 성장을 우선하는 경제논리에 대한 반박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치밀한 준비를 하지 못했지요. 그러다 보니 밀리곤 했습니다. 결국 일반 국민들도 정부의 경제논리에 동화되고, 진보진영의 주장을 단순 비판으로 치부하는 경향까지 생겼습니다.

빈곤 문제는 결국 원인을 따라 올라가면 주택문제와 사교육비 문제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사적인 영역으로 판단하는 바람에 문제의식이 부족했어요.”

〈황인찬기자 hi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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