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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섹시한 도시가 되는 방법, RAW Citybition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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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섹시한 도시가 되는 방법, RAW Citybition 전략

뉴욕 판 ‘응답하라 1993’이 등장했다

매년 전국 지자체가 참여하여 각 지역 관광지를 홍보하는 박람회 등에 참석할 때마다 아쉬운 점이 있다. 지역마다 하나씩의 부스를 가지고 있는데, 읽기도 귀찮은 두꺼운 브로슈어 외에는 그 지역의 개성과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 주는 별다른 컨텐츠가 마련돼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이들과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비누 만들기, 양초 만들기 등 지역 특성과는 무관한 내용일 때가 많아 별다른 인상을 받을 수 없다. 기껏해야 전통 의상을 입어 본다던 지, 그 지역의 유명인사 피규어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던지 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뉴욕 맨하튼에서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방법이 발견됐다. 뉴욕 판 “응답하라 1993”이다. 스케일이 대단하다. 무려 맨하튼 전체를 캔버스 삼고 있으니 말이다.

 

길모퉁이 공중전화에서 20년전 맨해튼의 목소리를 듣다. 

  • 응답하라 1993 뉴욕, < Recalling 1993 >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면, 20년 전 이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 말해준다고?”
약간 소름이 돋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그런데 실제로 맨하튼 곳곳에 있는 5,000개의 공중전화를 통해 20년 전의 ‘과거’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들을 수 있다. 화자는 20년 전 이 장소에 살았던 이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없이 친근하고, 일상적이다. 이 곳에서 어떤 범죄가 일어났었는지, 어떤 패션이 유행이었는지 아주 편한 말투로 이야기해준다. 바로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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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는 뉴욕 New Museum에서 열리고 있는 “Experimental Jet Set, Trash, and No Star”라는 전시회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전시회는 ‘1993년, 뉴욕’이라는 시공간을 채웠었던 혼돈의 에너지와 거친 문화를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우리에게도 90년대가 IMF, 연예사업의 대형화 등을 겪은 격동의 시기였던 것처럼 1993년의 뉴욕도 뉴요커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93년의 뉴욕은 범죄와 섹스 산업, 마약, 그리고 펑크로 가득한 불명예의 도시였다. 누구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했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맨하튼은 <섹스 앤 더 시티>의 화려하고 허영심 가득한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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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에 있는 5천 개의 공중전화를 통해서, 다양한 옛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운동선수부터 기자, 연예인, 역사가, 예술가, 펑크족, 히피 심지어 포르노 스타까지 20년 전 그 장소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준다. 이러한 친근한 이야기들은 심지어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일지라도 도시를 더 생생하고 깊게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말해주기 때문에 특정 주제에 대한 정보 습득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1993년 뉴욕의 부동산 시장은 어땠는지, 밤 문화는 얼마만큼 번성했는지, 어떤 종류의 범죄가 극성했는지 등등 말이다. 그야말로 ‘가까운 역사’를 담기에 가장 알맞은 캐쥬얼한 사료(史料) 전시 방식이다.

프로젝트는 도시 전체를 갤러리로 사용한다.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는 예술작품을 거리로 끄집어내는 것은 이제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거리 갤러리(Street Gallery)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는 전시 무대인 맨하튼이 스스로 역사를 전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공중전화를 통해서 도시 전체가 ‘맨하튼 그 자체’를 전시하는 거대 박물관이 된다. 또 전문 도슨트나 오디오 가이드가 아닌 바로 그 자리에 살고 있던 이웃으로 20년 전 도시의 역사가 전달된다는 점도 재미있다. 그것도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가고 있는 공중전화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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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는 현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웹사이트를 통해서 체험해볼 수 있다. 구글맵을 통해 맨하튼 어느 곳에 공중전화가 설치되어있는지도 찾을 수 있고, 가상으로 공간을 탐색하며 이웃의 음성도 들을 수 있다.

 

RAW하게 도시를 전시하다, RAW Citybition 전략

마케팅 용어로서의 ‘RAW(날 것의, 가공되지 않은)’는 꽤 오래전에 출현했고, 단어에 대한 정의도 분야별 업종별로 제각각 이지만 그 귀결점은 ‘진정성’ 정도가 될 것이다.

프로젝트가 참신하게 와 닿는 것은 바로 ‘날 것 그대로의 맨하튼’을 기념하고 전시하기 때문이다. 지난 어두운 과거에 대한 어떠한 수치심도, 은폐도 없다. 오히려 글루미하고 터프했던 90년대가 뉴요커 정체성의 일부라는 듯 받아들이는 쿨하고 위트있는 태도는 멋지기까지 하다. 또 동시에 1993년이 지금의 맨해튼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첫 해라는 점도 잊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프로젝트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마케팅 전략 중 하나인 ‘RAW 컨셉’을 적극 활용해 다시 한 번 맨하튼이 매력 있고 멋진 도시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단발성의 전시 작품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공적인 도시브랜딩의 기회를 보여준 사례로서도 평가할 수 있다.

I RAW + CITY + EXHIBITION = “RAW Citybition”
이처럼 RAW한 방식으로 도시에 관련된 컨텐츠를 전시하여,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고 긍정적 브랜딩 효과가 나도록 돕는 것을
RAW Citybition 전략이라고 명명한다.

RAW Citybition 전략의 실행을 위한 세 가지 필수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RAW한 주제를 담고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에서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은 ‘터프하고 거친 반항아로서의 1993년 맨하튼’ 그 자체이다. 자신의 단점을 숨기지 않고 ‘자학개그’를 위트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감이 넘쳐 보여 멋지게 느껴진다. 맨하튼도 그렇다. 이제는 긍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부분마저도 자신 있게 드러내면 개성이 되는 시대가 됐다.

둘째, RAW한 전달자가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에서는 과거 지역 주민이 직접 도슨트 (전시 작품 해설자) 역할을 한다. 과거에 대한 해석자와 전달자 자체가 전문 도슨트가 아닌 RAW한 인물들이다 보니 그들이 전달하는 컨텐츠 자체도 진솔하고 일상적이다.

셋째, RAW한 전시공간을 사용한다.

“맨하튼의 모든 길모퉁이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세요” 프로젝트의 슬로건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길모퉁이에 있는 공중전화로부터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처럼 지역의 일상적인 공간과 친근한 매개체를 통해 전시회는 본래의 주제를 더욱 진하게 어필해 나간다.

RAW Citybition 전략은 관광객에게 오락적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그곳에 살고있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도시의 개성과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에 거대한 조형물이나 건물을 지어 랜드마크를 형성하는 것보다 비용적으로 저렴하면서도 비슷하거나 혹은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RAW Citybition 전략으로 매력적인 도시를 브랜딩하기 위한 Tip

도시브랜딩의 관건은 도시 고유의 정체성을 개발하고, 다른 도시와의 차별성을 갖는 지점에 있다. 그런데 도시 간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존재한다. 어떤 도시는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유물, 유적지가 풍부해 그것만 개발해도 유명한 관광도시가 되지만, 내세울 만한 유무형의 자산이 없어 마케팅 컨셉을 잡기가 어려운 작은 도시들도 많다. 이런 도시들은 도시마케팅에 투자할 수 있는 비용에도 한계가 있어, 억지로 큰 건물을 짓거나 축제를 여기 어렵다. 이렇듯 작고 특징 없는 도시들에게 RAW Citybition 전략은 전혀 새로운 개념의 도시브랜딩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단점을 자신 있게 드러내라.

도시가 개발이 덜 되거나 다소 가난한 것도 이제는 숨길 일이 아니다. 모두가 매끈한 최첨단 도시임을 뽐내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러한 단점들을 겉으로 꺼내어 놓음으로써 진솔하고 독특한 도시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베를린 시장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는 베를린에 대해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베를린은 거친 황폐함과 허름함까지 껴안고 있는 도시이다’라고 말했다. 훌륭한 이미지 메이킹이다. 단점은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의 재료이다.

2. 시민을 스토리텔러로 내세워라.

도시민에 의한 도시브랜딩이 어떠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이미 “Made by Citizen” 브랜딩으로 도시의 본색을 드러내다. 라는 아티클을 통해 조명한 바 있다. 풍부한 전통문화가 부족하다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시민의 생활, 풍경 자체가 마케팅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화자가 시민일 때, 이 메시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3. 아날로그적 일상공간을 활용하여 컨텐츠를 전시하라

작은 도시의 입장에서 지역사를 상시 전시할 박물관을 따로 건립하는 것은 비용 부분에서도 부담이 될뿐더러, 더 이상 차별화된 도시마케팅 방법도 아니다. 보다 더 인터랙티브하면서도,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바로 RAW Citybition 전략이다. 버스 정류장, 지하철 역, 길모퉁이의 공중전화, 우체통 등 지역 곳곳에서 관광객으로 하여금 통일되고 일관된 도시 이미지를 만날 수 있도록 하자.

이제 개발과 성장은 도시의 목표가 아니다. 어떻게 더 개성 있고 매력적으로 자신을 세계에 드러내는가, 그것이 중요한 시대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작은 도시들도 자신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들고 세계 시장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한다. RAW Citybition 전략은 작은 도시들이 보다 재미있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RAW Citybition 전략을 통한 ‘작지만 섹시한 도시’들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정새롬

정새롬

정새롬(Sae Rom Jeong) Editor / 누가 읽든 쉽게 이해하고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마이크로 트렌드는 사소한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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