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회 구축: 굿소사이어티(Good Society) 담론-헤닝 마이어(런던정치경제대 방문연구위원)경제위기와 세계화 시대의 사회민주주의

2013. 10. 17. 22:44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좋은 사회 구축: 굿소사이어티(Good Society) 담론- 경제위기와 세계화 시대의 사회의
헤닝 마이어(런던정치경제대 방문연구위원)  |  webmaster@selfg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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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17  10: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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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회 구축:
경제위기와 세계화 시대의 사회민주주의

헤닝 마이어(Henning Meyer) / 런던정치경제대학교 방문연구위원


세계 금융위기가 발발한 5년 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세력 다수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금융시장은 규제완화 이후 자체 순환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였고, 경제 전체와의 연계는 점점 약화되고 있었다.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세계경제의 높은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커다란 파급효과가 발생했다. 월스트리트가 무너지면서 런던 등 다른 금융 중심지뿐만 아니라 세계경제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이 위기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제위기로 인해 커다란 정치적 파급효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데이비드 마퀀드(David Marquand)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의 표현처럼 이러한 사태는 “사회민주주의가 힘을 얻을 절호의 기회”가 되어야 했다. 시장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가 오랫동안 견지한 입장이었으며, 시장에서 위기가 촉발된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위기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의 핵심 주장이 실제로 옳다는 점, 그리고 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위기로 인한 사회적ㆍ경제적 충격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고 있는 현재의 복지제도를 설계하고 확대해 온 것 역시 사회민주주의가 아닌가?

하지만 금융위기 발생 후 5년이 지난 지금, 일련의 사태가 결코 ‘절호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경제위기가 정치에 미친 영향은 극심한 정정 불안과 ‘긴급사태 정치’로 나타났다. 금융부문의 문제로 인해 유로화의 설계에 중대한 허점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금융위기는 유로존과 유럽연합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표면적 조건과는 달리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이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미래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앞으로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주요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판단하려면 우선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먼저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이번 경제위기 이전에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보자. 1990~2000년대에 걸쳐 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1970년대 말 이후 대중이 선거에서 자신들을 외면한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평가와 고민을 거듭했다. 국가별로 상황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공통의 고민은 자유시장 독트린이 힘을 얻으면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낡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오래된 방식’이 선거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평가와 함께 빌 클린턴이 주도한 미국 신민주당(New Democrats) 노선의 영향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 다수가 정치강령 수정에 나섰다. ‘제3의 길’을 향한 이러한 수정은 국가별로 형태와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영국의 신노동당(New Labour), 독일의 신중도(neue mitte) 등 다양한 ‘제3의 길’이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강령 수정은 몇 가지 결과를 낳았다. 우선 신자유주의라는 ‘정통’ 정치이념에 도전하기보다 이에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진정한 정치적 대안과 비전 개발의 필요성이 간과되었다. 특히 복지정책을 포함해 정치의 거의 모든 영역을 ‘효율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하게 되면서 정치담론이 다양성을 잃어버렸고, 비슷비슷한 주장들이 단지 정도의 차이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물론 정치노선은 항상 변화해야 하며, 사회민주주의 역시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로부터 배울 점은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정도가 지나쳐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자신의 핵심 이념을 포기하고 다른 정당들과 차별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3의 길’ 노선은 선거 결과만 놓고 볼 때 한동안 성공적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1990년대 말 유럽연합 회원국 대다수에서 집권하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노선을 바탕으로 과감한 정책의제를 추진했고, ‘제3의 길’이 대세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며,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이 문제가 더욱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시장이 태생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적 입장이 여전히 유효하며, 세계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변하자 위기 이전에는 강점으로 보였던 것이 오히려 약점이 되고 말았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지난 수십 년간 대안적 정치강령 개발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일종의 ‘지적 무방비 상태’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대중에게 제시할 진정한 정치적 대안이 부재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그 동안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세력 상당수가 규제완화 정책을 밀어붙여온 터라 대중의 눈에 이들은 단지 정치적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패한 체제를 만드는 데 일조한 세력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신뢰가 무너졌고, 이미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을 강행하는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던 상당수의 전통적 지지층조차도 등을 돌렸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경제위기 속에서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일련의 위기가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면 당면 과제가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현재의 급속한 사태 변화를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이다. 유로존 위기의 해결을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며, 유럽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몇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만한 해체(slow renationalization)’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 역시 최근까지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안이다. 유럽연합의 핵심 역량만으로 현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 나간다는 구상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으며, 상황을 안정화하기에 역부족이다. 유럽 시민 상당수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로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으며, 혼란과 환멸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과감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준비 부족으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 세계 금융위기가 유로존 위기로 번지면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제3의 길’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정립된 것도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정치인들은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제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대중에게 제시할 정치적 대안을 새롭게 정의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헤쳐 나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과제를 명확히 정의하면 해결로 나아갈 길이 보이게 마련이다. 유럽 전역의 이론가 및 활동가들은 대안적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구상하기 위해 몇 년째 공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 이 모임에서는 ‘좋은 사회(Good Society)’라는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현재의 경제적ㆍ정치적 문제를 철저히 가치중심적으로 분석하여 새로운 정치를 수립하려는 접근법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비전을 개발하는 것이다. 먼저 ‘좋은 사회’를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정치적 경로를 그려보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가치중심의 정치적 ‘나침반’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향후 더 많은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회’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하는 접근법은 이제 생명을 다한 기존의 정치적 기법과 절연한다는 의미도 가진다. ‘제3의 길’이 유행하던 시기,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마치 시장의 거래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여론조사와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통해 유권자라는 ‘고객’의 필요를 파악하고, 이를 충족하는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 변혁적(transformational) 정치는 사라지고 반응적(reactive) 정치만 남았다. 하지만 기존 경제ㆍ정치 체제의 한계와 제약이 명백히 드러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대한 목표를 추구하는 변혁적 정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좋은 사회’ 구상의 접근법과 혁신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관점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잡스는 ‘왜 시장조사를 신뢰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내 접근법은 다르다. 고객이 앞으로 무엇을 원할지 미리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헨리 포드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객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면 아마 ‘더 빨리 달리는 말’이라는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대중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제시할 때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 (중략) …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미리 읽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 월터 아이작슨, <스티브 잡스>에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는 현 상황을 분석하고, ‘아직 오지 않은 정치적인 것들’을 읽어내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를 수립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혁신적 제품 개발에 주력할 때 탄탄한 수익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정치세력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새롭고 설득력 있는 정치의제 개발에 초점을 맞춰야 하며, 특정 유권자 집단을 목표로 설정해 놓고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치의제를 개발하는 앞뒤가 뒤바뀐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좋은 사회’와 같은 가치중심 접근법이 필요한 이유가 또 있다. 현대 사회는 계속해서 개인화되고 있으며, 시장 거래를 모방한 정치적 기법으로 특정 사회집단의 지지를 끌어내 선거에서 승리하려고 하다 보면 계속 작아지고 차별화되는 다양한 사회집단에 어필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자연히 정치과정은 점차 협소해지고 배제적 성격을 띠게 된다. 반면 가치중심 정치의제는 공통의 사회적/경제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고 다양한 사회집단을 단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다음 단계는 차별화된 정치 ‘시장’에 다가가는 전략이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처럼 다양한 사회집단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내는 형태를 띠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변화는 필요조건과 제약조건, 일상적인 정치 속에서 천천히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적 경쟁구도가 계속 변화하기에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의제를 개발하는 작업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지난 선거공약을 보면 그가 ‘제3의 길’을 역으로 응용해 사회민주주의를 일부 수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메르켈은 사회민주주의의 주장 중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으면 독일 내에서는 적어도 수사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메르켈의 국내정책은 유럽연합에 대한 긴축정책과 차이를 보인다. 월세 규제, 아동수당 인상, 교육 및 사회기반시설 투자 확대는 물론 기업 경영진 보수 제한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독일 국민들이 메르켈이라는 인물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거에서 그와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한다. 경제위기가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적 환경의 무게중심이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며,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지금까지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지금의 혼란과 자신감 부족을 털어내고 앞으로의 과제에 철저히 대처하는 시기가 빠를수록 정치적 부활의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현실적 경로 중 하나가 바로 ‘좋은 사회’와 같은 가치중심 접근법이다.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선에서 승리한 프랑스를 비롯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최근 선거에서 승리한 소수의 사례를 보면 선거 승리가 성공적 국정운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경로를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의제는 집권 후 성공적 국정운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준비가 없다면 정부의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리더십이 약화되고 말 것이다. 최근 프랑스의 한 학자는 프랑스 사회당의 유럽정책에 대해 “머리가 없는 닭처럼 좌충우돌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선거 승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분명한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성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전환기를 맞고 있으며, 현재의 정치적ㆍ경제적 여건에 따른 새로운 필요에 적응해야 한다. 부분적 보완이나 수사적 차원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으며, 사회민주주의가 활력을 되찾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요약문]

좋은 사회 구축: 경제위기와 세계화 시대의 사회민주주의

글로벌 경제 위기가 휘몰아 쳤을 때, 많은 논평가들은 이때야말로 사회 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다고 믿었다. 누구나 규제되지 않은 시장이 갖고 있는 태생적 불안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의 붕괴로 전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고에서 지배적인 지적 흐름이었던 신자유주의의 주요 도그마 역시 불신 받게 되었다. 5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의 시기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9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어 온 근래의 사회민주주의의 발전상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세계화와의 관계 때문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좋은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과 조화를 이루는 글로벌 사회 민주주의를 향한 개혁 경로를 제안하려고 한다.

Building the Good Society
: Social Democracy in Times of Economic Crisis and Globalisation

When the global economic crisis hit many commentators believed that this was a social democratic moment. The inherent instability of unregulated markets was there for everybody to see. The crash of the global economy also discredited the main dogma of neoliberalism, which had been the dominant intellectual current in political and economic thinking around the world. Five years on it is fair to say that the social democratic moment has yet to materialise. The reason for this lies in social democracy's recent development since the mid 1990s and its unresolved relationship to globalisation. This presentation will analyse the underlying problems and suggest a reform path towards a global social democracy, that is in tune with the general idea of a Good Society.
 

   

   
 
세계화 시대의 사회민주주의당: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정당들은 지금까지 세계화에 대처하기 위한 균형 잡힌 사회민주주의 컨셉트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냉전 종식 후 초기에 있었던 회의주의는 90년대 중반에 세계화 열풍과 함께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세계화라는 상위개념 아래 외부로부터 도입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비판 없이 환영했다. 이것이 정계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영국 노동당인데, 토니 블레어 수상은 옛 것과의 차별화를 위해 당에 ‘신노동당(New Labour)’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바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이러니한 일은, 이러한 사회적 상승과 미래희망에 대한 염원의 새로운 정치가 신노동당에게 강력한 사회적 결합 효과와 3회 연속 선거 승리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이를 통해 무비판적 세계화 열풍이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세계적 경제위기가 닥치고, 당시 아직 일종의 사회체제 형태였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그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사회적 상승과 탄탄한 미래에 대한 약속은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그들이 오히려 문제의 일부분이 되는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시민들 눈에는 이토록 취약한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그들도 한 몫을 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외부적 요인에 외출되면서 국내 차원에서의 정치적 입지도 취약해졌다. 게하르트 슈뢰더가 말했던 원칙인 ‘개혁하느냐, 개혁되느냐’는 당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외부의 압박으로 인해 국내 체제가 강제적으로 변화해야 했다고 할 때, 국내 체제가 개혁 필요성이 항상 있었다는 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불투명했던 소위 ‘상황강제’에 대해 비판 없이 이를 당연한 상황으로 여긴다면, 근시안적 판단이다.

바로 여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겪은 두 번째 아이러니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당 강령에 따라 세계화를 매우 긍정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 그들의 정치적 ‘경기장’은 여전히 국내였다. EU 회원국 과반수 여당이 사회민주주의당이었던 시절에도 그들은 전지구적 차원이든 국지적 차원이든 뚜렷한 특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보다는 국내 사안에 집중한 제3의 길을 모색했고, 이것은 초국가적 차원에서 강령에서 원했던 정치적 동맹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 형태의 제3의 길들이 국내 선거 성공을 위한 전략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원인은, 세계화에 대한 무비판적 입장으로 인해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와 같은 초국가적 정책 특성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적어도 EU 차원에선 의외인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약속했던 ‘사회주의적 유럽’은 이때도 전혀 실현되지 못 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리스본 조약 전략 외에는 이렇다 할 유럽 차원의 프로젝트가 없었다. 그나마 이것도 실패한 프로제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 방향이 세계화의 여파로 완전히 붕괴되자, (예상할 수 있듯) 한 동안 방향 상실의 기간이 지속됐다. 이 상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예가 영국의 ‘블루 레이버(Blue Labour)’ 운동이다. ‘블루 레이버’란 경제위기에 대한 지식인층의 대응과 사회민주주의 당내 전문화가 반영된 강령적 운동을 뜻한다. 그런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근본 개념은 오히려 상실되어갔고, 탄탄했던 사회적 뿌리는 쇠약해졌으며,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 연합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블루 레이버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사회주의(communitarism)를 통해 특히 세계화에 대해 잠정적인 위협을 느끼는 경제위기 발발 후 낙오되었다고 느끼는 시민들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이로써 기술관료적 성향이었던 2000년대 초반의 정책은 감정에 호소하면서 일정 부분 보수적 가치(가족, 공동체)에 기반을 둔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노동당을 이끄는 새로운 주류로 떠오른 블루 레이버 운동 옹호자들은 기존 사회민주주의 강령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해나가기 시작했지만, 이와 동시에 다른 문제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블루 레이버 방식의 정책은 실천 측면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국내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우물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국내 사안 중심적 경향으로의 회기는 정치적인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다. 국민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계화의 문제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 문제들은 한 국가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세계화를 너무나 비판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전지구적 변화를 무시하고 국가중심주의로의 회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될 위험성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화에 대한 반대 세력과 옹호 세력으로 갈린 양극화는 새로운 사회 갈등 발생 현상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대한 독일 정치학자 볼프강 메르켈과 네덜란드 정치가 르네 쿠페루스의 설명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이들은 열린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낙오되는 이들, 그리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득을 얻는 고학력자들 사이에서 간극은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간극은 비평등과 부당 분배와 명백한 직접적 연관이 있으며, 정치 정당들은 이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강령을 마련하는 데에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현재 마치 소용돌이 속에서 맴도는 듯이 보이고, 진영을 정하는 데에 갈팡질팡 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에 던져진 도전은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을 통해 사회적 간극을 다시 좁히고, 사회적 화합을 지켜내는 것이다. 이 간극의 발생 요인이 국가중심주의였다고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극복은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면에서도 기존의 걸림돌들을 강령, 그리고 실천면에서 제거할 수 있는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는 다자적 원칙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가치를 전지구적 정치와 경제에 적용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사회적 연대, 민주주의 정치, 시장 효율성으로부터 균형적 혼합을 이루어야 하기에 국가 중심적 체계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수정하고 복제하는 작업이다. 이로써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는 국제 법치주의의 확장, 정책 결정의 투명성, 글로벌 거버넌스에서의 책임감과 민주주의 원칙 확대, 사회적 정의에 대한 책임 강화, 사회 각층의 공동체 보호와 지원, 글로벌경제로부터 공정하고 규제적 체제로의 전환 등의 과제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 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설득력 있는 컨셉트는 공동체사회주의적 뿌리의 재발견과 범세계적(cosmopolitan) 차원에서의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성질이어야 한다. 범세계적 가치는 여러 가치 원칙들로 표현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반적 규범들 중 특히 중요한 8개 원칙을 소개한다.

1. 동등한 가치와 존엄
2. 시류 형성에 대한 적극적 참여
3. 개인적 책임
4. 합의
5. 투표를 통한 공공사안 집단 결정
6. 포용성과 보완성 원칙
7. 고충 예방
8. 지속가능성

공공재화의 제공은 더 이상 국가 차원으로는 불가능하며, 다자적 기관 간 조정이 보조되어야 가능하다는 분석에 근거해볼 때, 위에서 언급된 범세계적 원칙들은 그 기본 가치에 매우 충실하다고 여겨진다.

이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 원칙들을 가지고 초국가적 정책을 마련해나가야 한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책 실현의 장으로 이제는 한 국가의 차원을 떠나, 그리고 여기에 더해 유럽은 EU 차원을 떠나 초국가적 영역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세계화 과정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정책적으로 계획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의 압박에서 개혁되어야 할 것은 국가 차원의 체계뿐이 아니다. 많은 경우, 전지구적 공간을 대상으로 정책적 계획을 세움으로써, 각 국가에 지워진 극단적 압박을 경감시킬 필요가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현존하는 권력구조, 그리고 부의 분배 방식을 모든 정치적 차원에서 개혁 혹은 수정하는 것을 목표로 두어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사회민주주의 업적들이 인정받고 보존될 수 있다. 세계화 정책은 일방통행이 아닌 상호작용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존하는 질서 위에 확장할 수 있는 적절한 제도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마련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 당들은 경제 공간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정치적 공간 또한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 갈수록 시급해지는 환경문제와 안보정책에 놓인 새로운 도전, 세계경제의 총체적 불안정 등 외에 다국적 기업 규제, 국제 탈세 방지 등 구체적 사안들은 최선의 경우 공공조직 재정의 수용불가적 사회적 단절의 결과, 그리고 최악의 경우 재정 해체의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안정적 경제체계는 전지구적 발전과 부의 확대에 있어 중심적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틀 안에서 지속가능성과 분배 기준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시장 세계화로부터의 교훈에 따르면, 이는 독일의 예처럼 시장친화적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민주주의 친화성을 요구하고 회복하는 형태여야 하며, 이 또한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의 중심적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U라는 지역적 차원에서 보면,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주체를 엘리트층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자들로 전환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정치적 제도들이 있다. EU는 유로화 지역 경제위기를 계기로 향후 수년 간 근본적으로 변화될 예정이다. 이는 제도적ㆍ정치적 변화를 통해 사회민주적 유럽을 건설할 수 있느냐 혹은 당분간 못 하느냐에 관한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그리고 특히 유료화 지역의 정치적 차원에서는 잘못된 정책과 시장구조가 굳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민주주의 당들은 사회주의 유럽에 대한 약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 과정에서 결연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결론

사회민주주의는 새로운 글로벌 정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국내적으로는 그들의 사회적 뿌리를 재확인하는 엄청난 과제를 안고 있다. 두 과제의 양극성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지만, 이는 ‘좋은 사회’ 컨셉트를 지속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이므로,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초국가적 정치 차원에서는 유럽 사회민주주당(SPE: Sozialdemokratische Partei Europas)과 같은 국제적 당 연합을 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유럽 사회민주주당과 같은 연합을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 정당의 전지구적 과제 수행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국내 정당은 향후 초국가적 방안 모색, 전지구적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선거운동이 국내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과거와 현재에서 사회민주당의 시각을 좁게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 사회민주당은 정책적ㆍ강령적 차원에서 국내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만들어내고, 이에 대한 실천 메커니즘을 모색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초반에 언급했듯, 우리는 ‘좋은 사회’는 국재 정책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독일 사민당은 지난 150년 역사를 통해 적지 않은 도전들을 극복했고, 다른 국가들에 모범이 되었다. 이제 세계화 시대의 사회민주주의는 현 세대 사민당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도전이 매우 힘든 과제임을 알고 있지만, 넬슨 만델라가 말 했듯, “모든 것은 극복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해 보이기 마련이다”는 점을 인지하고 노력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