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② 후백제 궁궐 어디에 있었을까동고산·물왕멀 일대 추정, 전라감영 발굴터 가능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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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성 전주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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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코드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후백제 왕도로서의 전주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이다. 두가지 코드를 전주는 충분히 활용하여 전통도시로서의 발전을 지속시켜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주가 수도로서 기능한 시기는 후백제시기이다. 왕도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은 현재의 우리 몫이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해는 900년이다. 후백제는 고려의 왕건에 의해 936년에 망했다. 그러니까 전주가 36년 동안 후백제의 왕도였던 셈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보자면 너무 짧은 기간이지만, 14년간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에 비하면 배가 넘는 기간이다. 철원의 풍천원에 세워진 태봉의 도성은 외성 12.7㎞, 내성 7.7㎞이었으며, 태봉은 궁궐과 누대 등을 극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36년 동안 전주에 세워진 후백제의 도성은 적어도 그 이상의 위용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견훤은 외교관계를 중시해 주변 여러 나라와 통교를 지속하였다. 이때 외국의 사신이 후백제를 들리기도 하였다. 이를 대비해 궁궐과 도성을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화려하게 만들어졌던 도성과 궁궐은 현재 전주의 어디에 있었을까. 동고산성에 오르면 9부 능선 부근에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2층 건물로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터를 찾을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여러 건물지의 흔적도 찾아진다. 이 건물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도 찾아졌다. 이를 근거로 이곳이 상성·중성·내성을 갖춘 궁궐터였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몇 가지 점에서 궁궐로 보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다. 먼저 이곳은 거의 동고산정상부에 위치하여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커다란 건물지에 추운 겨울에 대비한 온돌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에서 찾아지는 견훤이 전주부의 북쪽 5리(현재의 물왕멀 일대)에 토성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을 근거로 그곳을 궁궐터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 편찬된 '전주부사'에 의하면 1만여개의 주춧돌이 찾아져,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견해들은 전주천의 물길을 기준으로 해석된 견해들이었다. '완산지'에 의하면 전주천은 한벽루를 지나 오목대를 거쳐서 흘렀다고 한다. 이 견해가 '전주부사'에서 전주천이 오목대를 거쳐 구철도를 따라 북진하여 모래내를 만나고, 이어서 덕진지를 거쳐 추천으로 흘러갔다고 해석됐다. 그렇게 때문에 견훤은 전주천을 넘을 수 없어 궁궐을 물왕멀일대와 동고산에 조성했다고 주장됐다.
최근 전라감영이 발굴됐다. 이 발굴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발굴된 지층에서 통일신라 건물지가 나온 것이다. '전주부사'의 견해에 의하면 전주천이 흐르고 있는 곳에 건물지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굴로 인하여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주천이 현재와 같은 물길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1912년에 만들어진 지적도에 의하면 전주는 격자형 도로 구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로구획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의 중심지였던 남원·광주·상주·청주 등에서 찾아지는 도로구획과 거의 동일한 격자형 도로구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격자형 도로 구획의 중심지는 대략 조선시대의 치소와 일치하고 있다. 조선의 치소는 고려의 치소를 이어받았으며, 고려의 치소는 통일신라의 치소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후백제의 궁궐도 당연 이곳에서 찾아져야 되지 않을까 싶다.
※ 이 글은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후백제 왕도 전주'의 강좌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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