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스러진 사람들]국내 - 실천과 무소유… 야만의 시대에 ‘빛’ 남기고
기획미디어부
입력 : 2010-12-26 21:02:05ㅣ수정 : 2010-12-27 00:02:01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 무소유 법정, 참군인 장태완, 한국의 채플린 배삼룡…. 올 한 해도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수많은 인물들이 삶을 마감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떠난 ‘별’들의 삶을 되돌아본다. 괄호 안은 향년과 사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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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선생(81세·12월5일)
반지성·반민주의 우상의 시대 깨워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 해직당하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된 그의 일생은 ‘반지성과 반민주에 맞선 역정’이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자신 앞에 놓여진 가시밭길을 결코 에둘러 가지 않았다.
자신을 ‘60%의 저널리스트, 40%의 아카데미션’으로 정의한 리영희는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69년 베트남전쟁 파병에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하다 6년간 근무하던 조선일보에서 쫓겨났다.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한 71년에는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76년과 80년에는 각각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신군부의 압력으로 한양대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오는 책마다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젊은 지식인들에겐 편협한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필독서가 됐다. 그는 권력에 의해 무수히 탄압받았지만 야만과 광기가 몰아치던 시대에서 한 줄기 등불로 빛을 발했다.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뒤 반신마비로 고생하면서도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병마 앞에 육신은 약해졌지만, 우상에 대한 그의 비판은 삶을 멈출 때까지 계속됐다.
고인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이들은 그의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부분이자 우리 사회에 남긴 교훈으로 용기, 학문적 객관성, 자기관리, 양심, 선공후사의 정신 등을 꼽았다.
■ 법정 스님(78세·3월11일)
‘무소유’의 가르침 다 비우고 떠나
가는 길도 ‘무소유’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평소의 유지에 따라 스님의 법구(法柩)는 장례절차 없이 연화대에 올라 흙과 물, 불과 바람으로 돌아갔다. 스님은 탄탄한 경전 공부와 뛰어난 문장력으로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의 자리를 몇 차례 맡았을 뿐 그 흔한 주지 자리 하나 차지하지 않았지만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를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대중과 끊임없이 교감했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대중 법회를 열었다.
스님은 사회악과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을 비롯해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93년부터는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이끌면서 나눔과 베풂, 자연보호, 생명사랑 운동을 펼쳤다. 그에게 수행과 세상을 바꾸는 일은 별개가 아니었다. 스님은 생전에 숱한 글로 ‘비우고 살아가기(무소유)’를 가르쳤다. 스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담은 책 <무소유>는 370만권이 나갔다.
■ 황장엽씨(87세·10월10일)
분단 비극 일깨운 ‘주체사상의 대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가정교사를 지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였다.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도 지냈다. 한때 북한 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에 있었던 그는 김정일과의 갈등으로 1997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강연과 방송 등을 통하여 북체제를 비판했다. 그의 망명과 죽음은 남북분단의 모순과 비극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 장태완씨(79세·7월26일)
‘쿠데타’ 신군부에 저항한 참군인
고인은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에 온몸으로 맞선 진정한 군인이었다. 그는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장성으로 진급한 뒤 수경사 참모장, 육군본부 교육참모차장을 거쳐 10·26 직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랐다. 한 달여 뒤 신군부에 의해 12·12사태가 터지자 그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한 뒤 강제 예편됐다. 드라마 <제4공화국>을 통해 목숨을 던져 쿠데타를 진압하는 모습이 소개되면서 ‘군인의 표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 배삼룡씨(84세·2월23일)
바보연기 개척한 ‘한국의 채플린’
고인은 암울했던 시절 몸을 아끼지 않는 코미디로 많은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한 ‘한국의 채플린’이었다. 이른바 ‘비실이 연기’로 19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이주일-심형래로 이어진 바보 연기의 개척자였다. 99년 12월 발간한 자서전 <한 어릿광대의 눈물젖은 웃음>에서 ‘웃음은 남을 주고 한숨은 내가 갖는다’라는 연기 철학을 밝혔다. 그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1980년대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예인 숙정대상 1호’로 지목돼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다.
■ 앙드레김(75세·8월12일)
패션 디자이너로 40년 독보적 지위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 ‘패션 대사’로 불렸다. 1960년대에 영화배우 엄앵란 등의 옷을 만들며 유명세를 탄 그는 80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의 주 디자이너로 뽑혔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40여년 동안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의 패션쇼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등장, 남녀가 이마를 맞대는 장면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 이윤기씨(63세·8월27일)
유머와 교양, 지성의 소설 쓴 작가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입선해 등단했다. 그의 소설은 풍부한 교양과 적절한 유머, 지혜와 교훈을 두루 갖추고 있어 ‘어른의 소설’ 또는 ‘지성의 소설’로 평가받았다. 또한 ‘이윤기체’라 할 만한 개성적이고 맛깔나는 에세이로도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리스·로마 신화 등 신화 연구에 매진해 왔으며 번역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 박춘석씨(80세·3월14일)
이미자 등과 콤비 ‘히트곡 제조기’
네 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검은 뿔테 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1954년 백일희의 ‘황혼의 엘레지’로 작곡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특히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미자 외에도 패티김, 남진, 정훈희 등 스타급 가수들의 대표작을 뽑아낸 ‘히트곡 제조기’였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 이태석 신부(48세·1월14일)
가진 것 모두 바친 아프리카의 성자
1987년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광주 가톨릭대를 거쳐 살레시오회에 들어갔다.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부터 2008년 11월까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톤즈마을에 병원·학교·기숙사를 지어 봉사활동을 해 왔다. 그는 나눠줄 것이 참으로 많은 사제였다. 하루 300여명을 진료하는 의사, 교사, 브라스밴드 지휘자, 작곡가, 벽돌공, 건축가, 공사장 일꾼, 그리고 성직자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세상에 내놓은 뒤 떠났다.
■ 박용하씨(33세·6월30일)
일본서 큰 인기 누렸던 한류스타
드라마·영화·연극 등 연기는 물론 가수로까지 활발히 활동하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큰 인기를 누렸던 그의 자살 소식은 일본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랑이 꽃피는 교실>(1995), <스타트>(1996), <눈꽃>(2000) 등에 출연했다.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부드러운 이미지의 라디오 PD 역으로 인기를 끌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 옥한흠 목사(72세·9월2일)
자발적 가난 추구 개신교계의 어른
1972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78년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 교회’를 개척해 현재 재적교인 8만명, 출석교인 4만5000명의 대형 교회로 키웠다. 평신도 운동과 ‘자발적 가난’을 추구했던 그는 한국복음주의 교회를 이끄는 큰어른으로 존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