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9. 22:41ㆍ정치, 정책/통일, 평화, 세계화
6·25 전쟁공포 유럽으로 ‘역유입’…냉전속 ‘역설적 평화’ 누려
영국의 윈스턴 처칠,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앞줄 왼쪽부터) 등 연합국 정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패전국 독일의 관리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흑해 연안 얄타에서 개최한 회담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
⑤ 세계급진주의기획 대 세계자유주의기획
자본주의-사회주의 냉전시대
유럽, 미-소 직접충돌 전력 제지
베트남 등 동아시아서 무력충돌
제3세계선 제국주의가 남긴
식민주의 벗어나려 전쟁 빈발
사회주의-민족주의 잇단 결합
미 ‘국가안보’ 개념 세계표준 돼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불린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의 기본적 정치경험을 형성한 것은 의회정부와 민주적 정당기제가 아니라 전쟁과 혁명이었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통찰한다. 그 한가운데 한국전쟁이 놓여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 없이는 20세기 세계사에 접근할 수 없다.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에서 현실로’라는 제목으로 이 전쟁에 참전한 자국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글을 쓴 바 있다. 그의 작품들에서 한국전쟁 참전병사들의 체험은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했다. 한국전쟁은 콜롬비아 국민들이 아시아의 이 나라와 처음 깊은 관계를 맺는 순간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국민들도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한국과 처음 본격적으로 만났다. 미국과 중국의 병사들, 소련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독과 폴란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사회주의 형제국 동포들의 반미투쟁을 돕기 위한 선전과 구호, 물자 수집, 집회와 시위, 노력 동원, 증산 투쟁이 작업장과 거리와 도시를 휩쓸었다. 세계사에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가 등장한 이래 그 진영 국가들이 이토록 광범하고 조직적으로 전지구적 연대성을 표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사회주의 나라들의 단결이 가장 강력하게 표출된 것도 이 전쟁 때였다. 장기간 서세동점에 시달려온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의 불길은 중국혁명 때보다 더 뜨거웠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이 전쟁을 계기로 갈라져 사회주의와 세계를 보는 기본시각을 달리했다. 독점과 세계공황, 나치즘과 세계대전이 낳은 인류사적 참상으로 인해 급진혁명과 사회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세계의 진보 지식인과 시민들 역시 사회주의진영의 선제적 폭력행사에 크게 실망했다. ‘세계평화’를 위해 막 출범한 국제연합은 이 전쟁에 대한 대처를 놓고 끝내 둘로 갈라졌다. ‘세계평화’를 추구한 국제연합의 분열은 곧 ‘세계 분열’과 ‘세계 갈등’을 의미했다. 하나로 합쳐 나치즘과 싸운 지 5년만에 세계는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 6·25 참전국 숫자, 1차 세계대전 수준 한국전쟁은 세계사에서 이토록 크고 중요했던 것인가? 레이몽 아롱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군대가 남한을 침략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언명해, 사태의 크기를 곧바로 짚어낸바 있다. 실제 참전 국가의 숫자와 규모에서 한국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에 버금갔다. 참가국가들의 대륙분포나 세계열강들의 개입강도, 전후 파급효과 역시 1차 세계대전에 못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민족과 인종, 대륙과 지역, 문화와 종교, 국가와 언어를 초월해 전세계를 두 이념과 두 체제와 두 진영으로 쫙 갈라놓고 있었다.
자기 나라의 전쟁도 아닌데 세계인들은 무엇 때문에 이 전쟁을 위해 참전하고, 죽고, 도와주고, 논쟁하고, 투쟁했는가? 이 전쟁은 왜 그토록 전세계적인 참여와 흥분, 관심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나? 세계냉전이 끝난 오늘의 시점에서야 세계는 한국전쟁의 세계사적인 영향과 위상을 깨닫게 됐다.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위치는 바로 근대 이래 오랫동안 길항해온 세계 자유주의와 세계 급진주의의 정면 충돌의 한 정점을 의미했다. 한국전쟁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두 기획은 냉전이 해체될 때까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지구적으로 대치했다. 한국전쟁에서 베트남 전쟁에 이르는 시대는 두 기획 사이의 지구적 대치의 절정의 시기였다. 한국전쟁은 두 기획 사이의 가장 치열한 열전이었던 것이다.
즉 냉전시대 두 진영 사이의 체제 대결과 무력 갈등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였다. 중국혁명을 포함해 냉전시대의 3대 전쟁은 전부 동아시아에서 전개됐다. 세계사의 누적적 갈등 구조가 이곳으로 전이·집중·응축돼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당시 38선은 얄타 합의를 통해 유럽에서의 경계 획정을 마친 이후 동아시아 분획을 위해 경쟁하던 두 기획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세계의 인계 철선이었다. 한국전쟁은 세계 인계 철선이 폭발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대결전을 치룬 세계 두 기획은 이후 단 한 번도 이 때처럼 대규모로 정면 충돌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냉전시대 세계의 열전들을 국지전과 내전으로 한정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은 두 기획의 충돌을 세계화하고 다시 제한한 가장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절대 왕정에 대한 시민 저항을 계기로 세계는 유럽을 중심으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등장을 목도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혁명과 내전들은 모두 군주정을 넘어 근대 공화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국가 간 전쟁과 왕조교체전쟁이 주류였던 인류 전쟁사에서 왕정이냐 공화정이냐, 군주정이냐 민주정이냐의 체제 전쟁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전쟁의 등장이었다. 근대 기획을 위한 출발로서의 시민 혁명 또는 내전·시민 전쟁이었다. 시민 전쟁·혁명의 도래 이후 세계는 바람직한 관념과 사상, 체제와 제도를 놓고 자유주의 기획과 급진주의 기획 사이의 기나긴 대립과 각축으로 접어들었다.
근대 공화주의의 등장 직후 어떤 체제인가를 놓고 먼저 주도권을 장악한 쪽은 자유주의기획이었다. 국민 주권, 사적 소유, 의회주의, 대의제 정부가 그 기획의 중심 가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기획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점차 인민 주권, 평등, 직접 민주주의, 민중(계급) 혁명을 향한 급진주의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세계의 주요 사유와 체제 구상들은 두 흐름으로 뚜렷이 나뉘었다. 근대와 계몽의 여명 이래 홉스로부터 로크, 칸트, 매디슨, 윌슨, 슘페터, 루스벨트, 그리고 루소, 헤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구상은 점점 확연히 갈라졌고, 끝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로 귀착됐다.
자유주의 기획은 30년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베스트팔렌 체제, 베르사유 체제, 국제연합 체제를 탄생시키며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세계 평화 기획을 추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변방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으로 연속 무너졌다. 1차 세계대전의 근원은 영국 대 독일의 패권 경쟁이었으나, 정작 전쟁의 시작은 발칸 문제였다. 2차 세계대전은 독소-독불 전쟁을 우회해 폴란드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냉전은 미국 대 소련의 패권 경쟁이었음에도 변방 한국에서 폭발했다. 이 모든 세계 대결들에서 주연인 영국과 독일, 독일과 소련, 미국과 소련·중국은 처음에 직접 붙지 않았다. 대신 조연이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먼저 붙었다. 세계 대결의 불행한 대리인들이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주도한 반동주의 기획은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모두에 대한 극단적 거부였다. 두 기획이 강력한 반동주의의 도전에 맞서 잠정 연합을 형성해 저항한 것이 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러나 반동적 도전의 패퇴와 함께, 러시아 혁명 때부터 내장된 두 기획 사이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냉전이었다. 냉전은 세계 자유주의 기획과 세계 급진주의 기획의 전지구적 차원의 대치를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유럽에서 냉전은 없었다. 냉화(冷和)가 있을 뿐이었다. 파리, 런던, 로마, 마드리드, 베를린은 냉전 시대 동안 거의 평안했다. 전쟁과 무력 갈등에 휩싸인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들과 비교할 때 너무도 평화로웠다. 유럽으로서는 근대 이래 가장 긴 평화였다. 즉 냉전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별하는 서구의 시각들은 틀린 것이다. 군비 경쟁, 찬반 집회, 첩보 대결, 상호 선전과 이념 논쟁이 있었다고 해서 유럽을 ‘냉전의 중심부’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왜곡인 것이다.
■ 유럽 이외 지역에서는 갈등 악화 유럽의 ‘장기 평화’를 정초한 한 요인은 한국전쟁이었다.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장기 평화를 유지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과 함께 한국에서의 전면 충돌로 인한 압력의 전이와 공포의 역수입 때문이었다. 근대 이후 전쟁이 끊이진 않던 ‘전쟁 대륙’ 유럽에 장기 평화를 정초한 제1의 계기가 2차 세계대전이이었다면, 제2의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중의 정면 충돌을 목도한 유럽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모두 미-소의 직접 충돌을 회피하려 온갖 노력을 집중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두 기획과 두 이념의 대결이 동아시아로 확산돼 폭발한 한국전쟁이 다시 환류되며 유럽의 안보질서를 안정시켰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장기 안정, 유럽 이외 지역 갈등의 악화와 유럽 안정의 심화 사이의 비례관계는 20세기 세계 질서에서 최대의 역설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유럽에 제2의 전선을 형성할 여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확실히 유럽 평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나토는 강화됐고, 유럽 분단도 고착됐다. 서독과 동독은 상대의 침략에 대한 우려로 더욱 깊이 미국과 소련의 품안으로 들어갔고, 서유럽과 동유럽의 방위 역시 개별국가 차원을 넘어 미소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범국가 서독은 한국전쟁 중에 주권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재무장 제한의 빗장도 풀렸다. 한국전쟁은 전범국가 서독과 일본을 모두 국제사회에 복귀시켰던 것이다.
유럽의 안정과는 달리, 많은 제3세계에서 냉전 시대는 유럽이 씨를 뿌린 ‘제국주의’의 유산인 탈식민 의제와 두 세계 기획 사이의 대결이 중첩된 ‘열전 시대’였다. 한국전쟁을 필두로 냉전 시대 동안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전쟁과 폭력이 빈발했다. 민족주의 과제 때문이었다. 즉 냉전 시대 구미 이외 지역에서의 혁명·전쟁·무력 갈등은 두 기획 사이의 세계 갈등의 일부인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유증된 탈식민 민족주의 과제가 표출된 것이었다. 독립, 민족해방, 근대 국가건설, 통일의 과제와 급진 혁명 노선의 조우를 말한다. 급진주의 기획이 탈식민 의제를 내장하고 있었다는 데 냉전시대 제3세계국가들의 혁명과 전쟁이 갖는 핵심 특징이 놓여있었다. 따라서 이념 충돌과 진영 대결의 논리는 탈식민주의 기획을 함유해야 했다. 세계시민전쟁 명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제국 미국과 소련이 ‘모두’ 중국과 북한과 베트남을 놓친 까닭이 여기에 있었고, 상대 제국에 대한 대처보다 제3세계 급진 민족주의 관리에 더 애를 먹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서 중국·북한·베트남의 급진 민족주의 기획들과 대면한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중국 혁명은 불개입 정책을 통해 ‘방임’했고, 한국전쟁은 즉각 참전했으나 ‘무승부’였으며, 베트남전쟁은 적극 개입했음에도 ‘패배’했다. 미국이, 유럽 이외 지역의 급진주의가 사회주의 기획인 동시에 민족주의 기획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면 냉전시대의 세계갈등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지 몰랐다. 소련 역시 이들의 민족 사회주의 성격을 몰랐기 때문에, 사회주의 모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나라들을 모두 놓쳤고 이들보다 훨씬 먼저 붕괴됐다. 북한을 포함해 급진주의 기획과 민족주의 기획을 결합한 국가들이 세계와 절연된 채 오랫동안 독재와 폐쇄 체제를 견지한 것은 두 세계 기획 모두와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진주의 기획의 우두머리 소련과 스탈린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 진영의 공격 가능성을 무기삼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동유럽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을 행사했고, 북한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이름으로 관장할 수 있었다. 서구와 제3세계 급진주의 세력에 대한 구심 역할도 소련의 소득이었다. 그러나 소련 국가 안보와 이익 관점에서 타산된 주도면밀한 주변 활용, 치고 빠지기, 은폐 전술을 반복한 스탈린은 이 전쟁을 계기로 중국과 마오쩌둥을 잃었다. 한국전쟁으로부터 촉발된 ‘미-중 전쟁과 중-소 접근’은 훗날 ‘미-중 접근과 중-소 갈등’으로 극적으로 역전되며 ‘중국 부상과 소련 퇴락’의 토대를 놓았다. 그 역전은 장차 냉전 종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자유주의 기획’ 미국, 세계제국으로 자유주의 기획의 맹주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대서양 제국을 넘어 아시아·태평양 제국을 겸장하며 비로소 전지구적 세계 제국이 됐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이제 거꾸로 (세계와) 유럽을 방위하는 최강 제국이 됐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사상 최초의 세계 제국이 됐다. 게다가 막 등장한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 관념과 법률과 제도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확고한 국가 지표 및 세계 기치로 안착했다. 미국이 설정한 국가 안보 관념은 이후 제도와 정책에서 세계 모든 국가들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세계적 표준이 됐다. 전후 민주주의, 인권, 경제발전, 자유는 ‘국가안보’ 기치 아래로 밀려났고, 미국과 소련을 포함해 세계의 국가들은 ‘안보 국가’로 변전됐다.
한국전쟁은 ‘국가 안보’와 ‘안보 국가’ 관념을 세계에 확고하게 정착시킨 분수령이었다. 그리해 전후 냉전시대 동안 자유주의 기획은 이른바 냉전 자유주의로 변전, 자유주의 본래의 진보성과 개혁성을 크게 침식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우월성은 분명했다. 사회주의 체제가 일당 독재를 지속하며 급진주의 기획이 추구했던 민중성과 혁명성을 상실한 채 전체주의 체제가 됐기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민주성조차 실종된 전체주의는 끝내 자유주의 기획에 패퇴하고 말았다.
급진주의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조종 이후 세계는 신자유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시장국가 대 복지국가의 길항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두 한국은 오늘날, 한쪽은 신자유주의의 첨단을 걷고, 다른 한쪽은 전체주의 세습 독재 체제로 퇴영하고 있다. 결국 오늘날 이곳에서 극단적인 두 체제가 수렴·통합되는 평화와 통일을 상상한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한국민들은 두 세계 기획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충돌했던 자신들끼리의 한국전쟁과 냉전 대결로부터 거의 배우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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