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9. 22:36ㆍ정치, 정책/통일, 평화, 세계화
휴전협상이 시작된 직후인 1951년 11월26일 판문점에서 북한 인민군 장춘산 대령(오른쪽)과 유엔군 제임스 머리 대령이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된 휴전선을 지도에 그리고 있다. 한국군 쪽은 휴전에 반대해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정식 휴전협정은 이로부터 1년8개월 뒤인 1953년 7월27일 조인됐다. 국가기록원 제공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
③ 한국전쟁과 한국문제의 구조 변동
이승만, 정전협정 참여하면
미국이 군사동맹 안맺을까 우려
북진통일 추진에 걸림돌 판단
‘괴뢰’로 여긴 북한 부인 의도도
이후 ‘당사자’ 논란 계속 야기
상호 인정과 공존 모색해야
한반도 안정 가능한 점 깨달아야
한국전쟁은 근대 이래 한국문제에 가장 결정적인 거시 구조변동을 초래하였다. 한국전쟁이 초래한 구조변동은 한국문제의 역사적 분수령들이었던 7세기의 삼국통일과 고구려의 멸망, 16세기의 동아시아 7년 전쟁, 19세기 청일전쟁 이상이었다. 이 사건들은, 특별히 한국문제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국제관계에 있어 가장 격변적인 구조변동의 계기들이었다.
삼국통일과 고구려의 멸망은 단순히 만주의 상실을 넘어 중국제국을 격퇴해온 준지역제국의 조종과 그로 인한 한반도로의 위축을 의미했다. 이후 동아시아질서와 한국문제는 발해의 흥망과 몽골의 한국 및 일본 침략을 제외하면 구조지반 자체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당시 놓인 동아시아 기본질서가 초장기간 지속된데서 볼 수 있듯 이 구조변동의 영향은 엄청났다.
동아시아 7년 전쟁은 해양국가 일본이 최초로 전면적인 한국침략과 대륙진출을 기도한 결과였다. 한중연합군의 힘겨운 합동격퇴에서 볼 수 있듯 전전 일본의 거시적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의 단독적인 일본 저지 역시 불가능했다. 전후 300년 동안 일본이 다시는 대륙을 넘보지 못하는 이른바 ‘300년 평화’를 정초할 정도로, 나아가 중국과 일본의 전후 격동이 왕조 자체를 교체할만큼 한국의 승리는 중대한 질서창출의 요인이었다.
청일전쟁은 동서조우와 서세동점을 계기로 일본이 누천년 중-일관계를 처음으로 역전시켰음을 의미했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은 간단하게 한국에 대한 중국의 천년 종주권을 박탈하였다. 청일전쟁은 한-중-일 3자관계 차원에서도 중화제국이 붕괴되고 일본제국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동서조우로 인한 동아시아의 세계화는 중국 몰락-일본 부상을 결과하며 한국문제를 청일전쟁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이른바 ‘전쟁시대’ ‘전란시대’로 몰아넣었다.
한국전쟁으로 놓인 전후 한국문제의 구조지반인 전후체제=1953년 체제는 국제-국내 상황이 맞물린 절묘한 질서였다. 한국의 53년 체제는 국제차원의 미국 대 소련, 동아시아차원의 일본 대 중국, 한반도 차원의 남한 대 북한이 맞물린 3층 국제분단 및 국제대결 질서였다. 53년 체제의 등장과 함께 한반도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지속된 ‘전란시대’가 일단 끝이 났다. 그러나 ‘전란시대’의 종식이 곧 ‘평화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53년 체제는 위기와 불안, 안정과 파국의 중간타협이었다. ‘구조적 안정’과 ‘상황적 위기’가 공존해온 전후 한국문제는 매우 특이했던 이 전쟁의 종결방식에 직결되어있었다. 근대 이래 세계의 주요전쟁의 종결형태는 승리와 패배가 명확하였고, 책임과 징벌도 뚜렷했다. 전쟁과 종전, 전투와 강화(講和) 역시 분명히 구별되었다. 특별히 세계열강이 참전하는 거대전쟁의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구별되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무승부로 귀결되었다. 세계 자본주의 진영과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사상 최초 무력대결은 무승부였던 것이다. 근대 국제질서의 등장 이래, 특히 세계적 규모의 전쟁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승패가 존재하지 않는 ‘비긴 전쟁’이었다. 정전협상 역시 전투행위를 중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 전쟁의 완전종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기묘한 무승부가 전후 한국문제와 정전체제가 놓인 ‘위기’와 ‘안정’의 방향·정도·진폭을 좌우한 출발요인이었다. ‘종전의 실패’와 ‘휴전의 성공’이라는 전쟁중단 방식은, 전쟁과 평화의 잠정타협으로서의 정전체제를 정초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불안하였음에도 안정되고, 흔들렸음에도 깨지지 않는 일종의 ‘파국적 균형체제’였다.
53년 체제의 불안정성은 전쟁의 당사자인 남한의 정전협정 불참에도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침략을 당한 남한의 정전협정 불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한의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불참한 이유는 명백했다. 즉 정전협정 참여로 인한 미국과의 군사동맹 체결의 실패 또는 지연 우려 때문이었다. 그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이 여러 차례 미국으로부터 배반을 당해왔다고 믿고 있는 이승만으로서는 정전협정에 참여하여 종전이 실현될 경우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의지를 믿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존재했다. 정전협정 당사자로 참여할 경우 이승만으로서는 전후 군비강화와 북진통일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반공통일의지에 불타고 있던 그는 정전협정과 북진시도 사이의 정면충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서명참여 후 예견되는 미국의 정전협정 준수 압박도 커다란 제약요소였다. 물론 북한 부인과 정통성 독점 역시 결정적 요소였다. 대한민국의 유일 국가성과 배타적 정통성을 주창해온 이승만으로서는 괴뢰 북한과 대등하게 서명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한반도의 유일국가’ 대한민국이 ‘반란집단’ ‘괴뢰’ 북한과 대등하게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경우 남한은 의도하지 않게 북한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서명불참과 정전협정 참여거부는 전후 남한의 정전협정-평화협정의 당사자문제를 계속 야기해 남한에게 심각한 불이익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승만의 북한 부인 정책의 고수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국익을 침해하는 역설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는 서로 차원이 다른 한미상호방위조약 참여와 정전협정 불참을 교환재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한의 참여 없는 한반도 안정과 평화구축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전후 두 분단국가의 많은 이익들은 상호 부인과 배제가 아니라 상호 인정과 공존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국문제의 구조변동은, 미소대결과 세계냉전을 제외하더라도, 질서 격변기 한국문제 전개방식의 매우 오래된 두 가지 양태 사이의 최종 접합의 측면을 안고 있었다. 이 때 말하는 두 양태 사이의 ‘최종 접합’은, 앞선 시기 동안의 장구한 한국문제 전개양태로부터 배우지 못한 한국민들이, 끝내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종의 집단적 응보였다. 즉 그들이 치른 미증유의 비극은 아래의 두 차원이 함께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국제 차원이었다. 동아시아 7년 전쟁과 청일전쟁 때 이미 일본과 서구제국들은 한국에서의 충돌을 방지하고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분단을 제안하였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결정적 시기에 열강들 사이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분할이 고려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국제사회는 두 번의 추진 구상 끝에 세 번째 격변기를 맞아 마침내 한국을 분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세계와 동아시아가 미소 두 진영으로 완전히 갈라지는 세계분단 시점에서 한국분할을 저지하기 위한 지혜와 전략은 훨씬 더 컸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둘째는 내부 차원으로써 질서변동의 시기 한국민들의 대응은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즉 국제질서의 변동시점에 한국민들은 자기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늘 극단적 분열이라는 일관성을 보여왔다. 동아시아 7년 전쟁을 포함한 전통시대 국란 시점의 친명파와 친원파, 주전파와 주화파, 동인과 서인, 그리고 근대 이행시점의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로의 분열과 갈등은 외부위협에 대한 노선대응의 차이를 훨씬 뛰어넘어 명백히 외부세력을 이용한 내부 이견세력 타도와 권력장악의 추구에 연결되어 있었다. 외부를 동원한 내부 타도의 시도였다. 국권 망실의 시점까지도 이러한 파쟁·분열과 외부의존 및 동원은 중단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역시 유사하였다. 53년 체제의 형성으로 인한 두 분단국가시대의 시작은 한국민들로서는 1945년 이후 분열과 갈등의 귀결인 동시에, 외부제국을 동원해서라도 민족의 절반을 타도하려던 전쟁전략의 완전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한국문제 구조 변동기의 두 전개양태인 국제적 국내적 방식이 최악의 형태로 만나 최종 봉인된 것을 의미했다. 즉 53년 체제의 등장은 해방 이후의 모든 평화적/무력적, 내부적/국제적 통일노력이 실패한 산물인 동시에, 열강의 한국문제 해결방법의 하나였던 국제분할이 극단적인 내부 적대와 만나면서 마침내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한국전쟁의 종전과 함께 놓인 53년 체제의 등장은 본격적인 두 분단국가 시대의 시작이었다. 분단시대는 한국의 거시역사에서는 통일신라-발해의 남북조 시대에 이은, 두 번 째의 남북(조) 시대였다. 이 말은 한국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단일 정치공동체를 유지해왔는지, 남북시대 개막이 얼마나 이질적인 현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불완전하나 남한과 북한은 한반도에서 최초의 근대국민국가였다. 전통시대 오랫동안 왕조국가의 단일백성이었던 적은 있지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두 국민은 한 번도 단일 근대국가의 국민인 적은 없었다. 단일 근대국가를 건설한 적도 없었다. 조선왕조, 대한제국, 일본 식민국가, 망명정부 어떤 것도 영토와 국민과 주권을 갖춘 근대국가는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신구 제국, 미·일·중·러가 모두 한국문제에 직접, 그리고 깊숙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의 종전을 계기로 한국은 세계최강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과거 중화제국과 일본제국이 행사했던 영향력을 일거에 극복하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이 동아시아를 벗어나 세계중심제국과 맺은 최초의 안보조약이었다.
1949년의 미군철수는 물론 1945년의 미·소 분할점령,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의 대한정책, 더 올라가 1905년의 태프트-카쓰라 조약과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고려할 때 미국이 한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것은 대한정책의 일대 전환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아시아대륙국가와 최초로 맺은 군사동맹이었다. 물론 한국전쟁은 미국이 냉전시대 국지전쟁에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참전한 전쟁이었다.
거함 중국대륙의 침몰에도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의 대규모 참전은 한국문제의 위상과 성격을 일순간에 바꿔놓았다. 특히 한미군사동맹은 한국문제를 동아시아 역내 제국들 간의 문제로부터 탈출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북한방어를 넘어 일본견제, 중국봉쇄, 소련 저지라는 복합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한미동맹은 한국문제에 대한 전통적 행위자들과 제국의 이해관계와 접근방식을 일거에 해체시켰다. 특히 한미동맹으로 인한 한국문제에서의 일본의 배제와 탈락은 가장 결정적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문제의 본질을 바꿔놓은 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정전협정 불참으로 인한 남한 당사자성의 흠결에서 보듯 한미동맹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은 것이었다.
중국 변수 역시 중대한 변환요소였다. 1895년 텐진조약과 190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한국문제에서 축출되었던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한국문제에 대한 과거의 영향력을 단번에 회복하였다. 한국문제에 관한 한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미국과 함께 국제차원의 양대 결정요소가 된 것이었다. 소련의 후퇴도 주목할만 했다. 1945-50년 시기의 한국문제가 미소대결 양상이었다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이후 한국문제는 미-중 대결로 전이하였다. 한국전쟁을 매개로 한국문제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역학관계는 역전된 것이다. 1945-53년의 시기 절정이었던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중국의 전면참전을 계기로 다시 과거 러시아처럼 중국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이 끼친 한국문제 구조변동의 한 측면은 한국인들 자신의 역할증대였다. 이토록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한국민들이 자기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이들이 얼마나 철저히 자기문제에서 소외되어왔는가를 반증한다. 근대 이후 한국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할 국제논의에 초대받지도, 참여하지도, 발언하지도 못했다.
식민으로의 길이었던 1885년의 텐진조약(청일),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청일), 1905년 7월의 태프트-카쓰라조약(미일), 8월의 제2차 영일동맹(영일), 9월의 포츠머스 조약(러일)을 거치는 동안 열강들은 한국인들의 참여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한국문제를 논의하고 이익을 나누었다. 한국 없이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와 일본이 차례로 이익을 교환한 귀결이 1905년 11월의 강제조약이었다.
분단으로의 도정이었던 38선 분할결정과 일반명령 1호, 모스크바 3상 회의, 미소공동위원회, 유엔의 총선결정, 분단국가 수립에 이르는 동안의 결정에도 한국민들은 소외되었다. 그들은 지지나 반대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통합이나 통일과는 거리가 먼, 분열과 적대를 촉진할 뿐이었다. 미국과 소련에 대한 지지 및 저항과 함께 한 좌파와 우파의 상호 적대는 식민과 분단의 길이 유사한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정전협정 참가와 남한의 한미군사동맹 체결은 한국인들이 가공할 비극을 대가로 자신들의 운명결정에 참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상호 인정과 타협의 공간은 아직 전무했고, 국제 열강과의 대등성과 주체성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정치, 정책 > 통일, 평화, 세계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⑤ 세계급진주의기획 대 세계자유주의기획 (0) | 2013.07.29 |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④ 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국전쟁 (0) | 2013.07.29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② 한국전쟁은 도대체 무엇을 남겼는가? (0) | 2013.07.29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①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0) | 2013.07.29 |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경제공동체 구상 (0) | 2013.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