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④ 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국전쟁

2013. 7. 29. 22:38정치, 정책/통일, 평화, 세계화

 

미국과 비긴 중 ‘G2’ 초석 마련…일 과거사 ‘반공주의’에 가려져

 

한국전쟁은 건국 1년도 안 된 중국이 최강 대국 미국에 맞서 비긴 사건이자 동아시아에서 관념과 현실 모두에서 미-중, 중-미 구도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은 13일 오후 강원도 화천군 최전방 평화의댐 공원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아 열린 세계평화합동위령제. 이 행사는 한국전쟁 당시 화천지역 전투에서 산화한 10만여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참가자들이 각국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위패를 단상으로 옮기고 있다. 화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
④ 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국전쟁

중국의 ‘한국전쟁 정전협정’ 참여
서구와 대등한 반열 오르는 계기
내부적으로도 국민통합 이뤄내

일본은 주권국 복귀·경제부흥
전쟁범죄 책임 희석시키는 결과

동아시아 국가들 독재화 빈발
공산주의 저지 명분속 권장되기도

한국전쟁은 현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한국전쟁이 동아시아 질서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 동아시아에 고유한 냉전체제의 구축이었다. 즉 얄타 체제의 도입 실패와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형성을 말한다. 한국전쟁 이전 동아시아 지역질서와 국제관계는 결정되지 않았다. 동북아와 동남아가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계기로 얄타 체제와는 전혀 다른 냉전질서를 탄생시키며 동아시아는 특유의 지역질서를 갖게 되었다. 세계 냉전체제는 얄타 체제와 샌프란시스코 체제 두 기둥이 떠받쳤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후 현재까지 60년 동안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동아시아가 오늘날까지 대립과 갈등을 지속하는 이유는 이 체제 때문이고, 냉전은 물론 식민주의의 유산조차 극복하지 못한 요인도 여기서 연유하였다. 동아시아가 식민과 냉전의 과거를 청산하고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과제 역시 이 체제의 극복 정도에 달려 있다. 한국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질서정초의 전쟁이자 미래 규정의 계기였던 것이다.

■ 동아시아 냉전과 샌프란시스코 체제

유럽에서의 냉전체제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집단안보체제간 다자대결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간의 대결이 대표적이었다. 정점의 주도 국가는 미국과 소련이었고, 중간에 지역냉전을 표상한 지역강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소가 주도하는 다자대결구도로서의 냉전체제는 동아시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얄타 체제는 형성되지도 뿌리를 내리지도 않았다. 또 지역강국으로 부상한 중국과 일본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양자 대결 역시 유럽과는 양태가 현저히 달랐다. 특별히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지역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생존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89년 몰타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냉전의 해체를 선언하였음에도 동아시아 냉전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존재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한마디로 지역 다자안보기구·집단안보기구가 부재한 상황에서 많은 양자동맹 관계와 많은 양자적대 관계가 함께 존재하는 중층적·복합적 지역체제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모든 동아시아국가들과 전면적인 일대일 양자동맹체제 내지는 양자적대체제를 구축했다. 마치 부채의 ‘손잡이’와 부챗‘살’ 또는 바퀴‘통’과 바퀴‘살’ 같은 관계였다. 미국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게다가 소련-중국-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 역시 집단안보기구를 결성하지 못함으로써 동맹과 자주, 연대와 갈등의 양자관계 양상을 띠었다.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 사이도 전형적인 양자관계였다. 독특한 거미줄 형상의 국제관계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과 도중에 동아시아국가들과 미국이 각각 시도했던 집단안보기구 구성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영국 및 일본의 반대 때문이었다. 영국은 유럽안보의 약화를 우려하였고, 일본은 과거 식민국가들인 역내 소국들과 대등한 참여를 거부했다. 한국전쟁 전후에 집단안보기구가 결성되었다면 동아시아 안보문제의 향방 및 영토문제를 포함한 많은 역내문제의 귀결이 결정적으로 달라졌을 것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요컨대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동아시아의 안보질서 및 전후청산에서 숱한 부정적 결과를 양산하고, 지금까지도 변형·지속되며 핵심 지역질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끼친 최대 변화의 하나는 미국 변수의 능동적 도래와 안착이었다. 한국전쟁에의 직접 참전 및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 안보문제에 관한 한 역할과 발언권 측면에서 확고부동한 동아시아국가로 변전했다. 미국은 비로소 아시아-태평양 국가가 된 것이다.

■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변화한 미국

모든 역내 국가들이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안보조약을 맺었다. 필리핀(1951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9월), 일본(˝ 9월), 남한(1953년 10월), 대만(1954년 12월), 동남아조약기구(7개국·˝ 9월)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동맹국가가 되었다. 이 일련의 조약들은, 이 국가들이 대부분 미국과 최초로 맺은 안보조약이었을 만큼 한국전쟁이 미국과 동아시아의 관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 원인에 관한 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은 정반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은 일본의 미국 본토 공격으로 인한 수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전은 전혀 달랐다. 미국은 자기 영토가 직접 침략받지 않았음에도 신속하게 참전 결정을 내렸다. 전후 최초의 대규모 참전이자 능동적 참전이었다. 미국의 능동적 참전을 초래할 만큼, 한국전쟁은 미국을 본격적인 동아시아국가로, 아시아-태평양국가로 전변시킨 요인이었다. 한국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에 이은 제2차 아시아-태평양전쟁인 이유다. 중국의 참전으로 인해 이 전쟁이 미-중 대결, 중-미 대결로 상승하면서 한국전쟁이 갖는 제2차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졌다. 제1차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중국과 연대해 일본과 싸웠고, 제2차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과 연대해 중국과 싸웠다. 단 5년 만에 연대와 적대 국가가 정반대로 역전됐다. 국제관계사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사례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그토록 격변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최대 요소의 하나인 중국에 관한 한, 한국전쟁은 신생 중국 을 동아시아 지역강국으로 부상시키고 중국분단을 고착시킨 동시에 미래 세계대국의 초석을 놓은 계기였다. 한국전쟁은 중국이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비김으로써 급격하게 대국으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실제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숱한 불평등 조약들을 딛고 중국이 서구국가들과 대등하게 맺은 최초의 협정이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당한 패퇴를 고려할 때 건국 1년도 안 된 중국이 최강 대국 미국에 맞서 비긴 사건은 세계사적 충격이자 반전이었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나아가 세계 최강과 건곤일척을 겨룬 대전은 새 지도자 마오쩌둥의 권력장악을 확고히 하였고, 건국 직후의 내부 이질요소들을 척결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전쟁은 신생 중국의 국제관계, 국가통일, 국민통합의 일대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세계 최강 미국과 비겼다는 점은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자신감으로 이어지며 동아시아에서 관념과 현실 모두에서 미-중·중-미 구도를 본격화하였다. 지역강국으로의 부상을 넘어 역내 미-중·중-미 양자구도를 설정하는 계기였던 것이다. 실제 지역문제들의 전개과정을 볼 때 전후 중국은 동아시아 문제에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을 넘는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이는 한국전쟁의 유산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던 데탕트와 미-중 국교정상화를 거치면서 점차 세계적 차원에서도 미-중 양강구도의 장기초석을 놓게 된다. 한국전쟁이 G-2 구도의 시발요인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결과한 특별한 변화는 미-중 관계 못지않은 중-소 관계였다. 전전 명백했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위상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에서 현저하게 추락하였다. 중국혁명, 대만 해방, 한국전쟁 결정 및 중국 참전, 무기 지원, 휴전 과정에서 계속된 스탈린-마오쩌둥의 ‘불안한 동맹-날카로운 신경전’은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오래된 긴장을 더욱 심화시키며, 한국전쟁의 종식 및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미국을 둘러싼 견해의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미국과 직접 충돌했던 중국은 단기적으로 더욱 반미적이며 급진적인 노선을 추구하였고, 소련은 그 반대였다.

미국과의 대결 이전, 전후 소련과의 긴장으로 인해 급진주의 노선으로 달려간 마오쩌둥은 국내적으로는 좌경적 실책을 반복했으나 국제관계는 달랐다. 미-중전쟁에 이은 중-소갈등은 매우 이른 시점부터 중국이 소련을 제치고 동아시아 문제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도록 만들었다. 미-중전쟁에 맞서기 위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본을 국제사회에 복귀시킨 결정 역시 중국의 부상을 촉진한 역설적 계기였다. 물론 중국의 참전으로 북한이 구출되면서 북한 문제에 관한 한 건국자인 소련보다 구원자인 중국의 발언권이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되었다. 결국 한국전쟁으로 구축된 ‘남한-미국-일본 연대’ 대 ‘북한-중국-소련 연대’ 사이의 균형추는 전자로 크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중국 문제에 끼친 한국전쟁의 또 다른 영향은 중국 분단의 고착, 즉 대만 안보의 구축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중국마저 통일전쟁을 결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한국전쟁이 대만해방전쟁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미국 역시 신속하게 대만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한국전쟁이 대만을 살렸던 것이다. 중국혁명이 북한의 전쟁 결행과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가능케 하여 남한 구출과 한국 분단의 고착을 낳은 데 비추어, 한국전쟁이 대만 구출과 중국 분단의 고착을 초래한 것은 중국혁명과 한국전쟁을 매개로 한 4개 분단국가들 사이의 기묘한 연쇄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국 통일은 미래의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 세계보편 문제로 남게 된 일본 문제

한국전쟁이 동아시아에 가져온 특별한 지역현상은 ‘일본 문제’의 등장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완전히 다른 국가가 되었다. 우선 일본은 한국전쟁 도중의 주권회복을 계기로 최악의 전범국가에서 주권국가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본을 국제사회에 복귀시켜주었던 것이다. 둘째 한국전쟁은 미-일 동맹을 초래하여 전후 일본에 확실한 안보지반을 제공하여주었다. 셋째 전쟁의 후방기지 구실을 수행함으로써 ‘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장기 경제부흥을 가능케 하였다. 보수정치체제를 제도화한 ‘55년 체제’ 역시 한국전쟁과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산물이었다. 한국전쟁이 없었을 경우에도 일본이 과연 이토록 빨리 주권국가로 복귀하고, 미-일 동맹을 체결하며, 경제부흥을 이루고, 보수정체를 공고히 할 수 있었을까를 반문해 보면 이 전쟁이 현대 일본에 끼친 영향은 가위 절대적이었다. 넷째 일본은 동아시아국가들과 미국의 집단안보기구 결성 노력을 저지하여 역내에 자기의 역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끝으로 일본의 일련의 복귀·동맹구축·부흥·체제정초·역할증대가 2차 세계대전에서의 반인륜적·반평화적 전쟁범죄에 대한 철저한 국제 진상조사·책임규명·처벌·배상·사과 없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미국의 일방적 시혜조처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전쟁범죄에 대해 해당 국가들 및 국제사회에 응당한 도덕적·정치적·국제법적 책임을 치르지 않은 채 국제사회에 복귀함으로써 향후 영토갈등, 전쟁범죄와 배상,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왜곡 문제 등에서 심각한 도덕적·정치적·법적 판단 마비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무임승차는 21세기까지도 숱한 문제를 반복하는 전인류적인 인권문제요 평화문제이자 과거청산문제로서의 ‘일본 문제’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 문제’는 한일·중일을 포함한 구식민국가와 제국주의 사이의 양자 문제나 민족주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 인권·평화의 문제이자 전쟁범죄의 극복 문제인 것이다.

말을 바꾸면 일본의 전쟁범죄 인정과 재발방지 약속, 사과와 배상을 통한 문명국가로의 전환은 일본과 동아시아와 세계의 공통 과제인 것이다. 특별히 독일 문제의 극복과정을 깊이 고려할 때, 만약 동아시아에서도 식민국가 한국과 베트남 대신 전범국가 일본이 정상적으로 분단되고, 나아가 일본이 한국전쟁을 기화로 국제사회에 무임승차하는 횡재를 하지 못하였다면, 식민통치배상, 침략 인정, 위안부 문제 해결, 영토갈등, 역사왜곡, 야스쿠니 참배 등에서 과연 그토록 무도한 발언과 정책을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을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국제질서의 산물이자 세계 보편문제로서의 일본 문제는 결국 일본과 동아시아와 인류 전체의 정의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이른바 ‘전후 극복’, ‘전후 청산’이 불발·지연·왜곡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본 문제’의 등장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질서’가 ‘아시아-태평양전쟁 전후 질서’를 대체하였기 때문인 동시에, ‘한국전쟁의 기억’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기억’을 압도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개의 ‘전후’와 두 개의 ‘기억’ 중 반공주의가 식민주의를 눌렀던 것이다. 동아시아 소국들의 독재 역시 한국전쟁 이후 빈발하였다. 반공을 명분으로 군사쿠데타들은 저지되지 않았으며, 종종 권장되기도 하였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독재가 확산·지속되는 중대 계기였던 것이다. 미국 역시 반공을 위해 쿠데타를 수용하였고, 독재정부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공산주의를 저지하려 하였다. 전후 공산주의 반대는 정의·인권·양심·국제법·민주주의 가치에 우선하였던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의 유산을 극복하는 정도는 동아시아가 과연 인권, 과거청산, 민주주의의 보편의제에서 세계표준과 문명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이 정전된 지 두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과 동아시아와 세계는 날카로운 양심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한국전쟁의 영향에 중첩된 G-2 시대를 구가하는 지금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또 다른 보편주의와 문명표준으로서의 역내다자협력과 평화체제를 향한 지혜와 책임을 엄중히 요구받고 있다. 동아시아는 아직 한국전쟁의 핵심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베를린 자유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