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대기업 12년차 30대 여성의 쫓기는 삶

2013. 7. 29. 13:25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대기업 12년차 30대 여성의 쫓기는 삶
ㆍ임원들이 매일 실적 평가 아이 뒷전, 학교행사 못가
ㆍ“생계 때문에 퇴사도 못해”


연말 인사고과를 앞두고 이유정씨(36·여·가명)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올해 실적이 좋았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테지만 그의 팀은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다. 팀장인 이씨는 팀 실적에 따라 책정된 등급대로 10명의 팀원을 평가해야 한다.

팀이 최고등급인 A를 받았으면 팀원 평가에서도 A를 줄 수 있는 사람 숫자가 늘었겠지만 팀 성적에서 C를 받다보니 팀원 중 누군가에게는 최하점수인 D를 줘야 할 처지다. 그는 인사고과 때마다 팀원들을 1번부터 10번까지 속된 말로 줄세우는 게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점수를 매긴다. 이 고과는 그대로 연봉에 반영된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회사에서 12년째 근무 중이다. 영업으로 시작해 현재는 5년차 마케팅 팀장이다. 입사동기들보다 빠른 승진이었고 팀장 1년차에는 그가 맡은 브랜드가 초고속 성장세를 보여 전 사원 앞에서 상을 받았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그의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솔직히 그는 남들보다 이른 승진이 달갑지 않았다. 당시 결혼 5년차로 큰아이와의 터울을 생각해 둘째를 임신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팀장직 인사는 회사 측의 일방통보로 이뤄졌다. 이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팀장을 맡지 않는 방법은 회사를 그만두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엉겁결에 팀장을 맡아 스트레스로 피부병을 앓으며 개인 시간도 없이 업무에 매달렸다. 딱 1년만 하고 그만둬야지 했는데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가 난관에 부딪힌 건 상을 받은 이듬해부터였다.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브랜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워낙 신생 브랜드라 기존 브랜드들과 경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브랜드가 자리를 잡은 걸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더 눈에 띄는 성장을 바랐다. “기대가 컸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는 말이 나돌았다. “빨리 승진한 만큼 내려오는 속도도 빠르구나”라며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인생”이라고 핀잔을 주는 동료들도 있었다.

이씨는 매일 출근하자마자 전산 시스템으로 각 팀의 실적을 확인한다. 다른 팀장들도 마찬가지다. 따로 실적을 보고하지는 않지만 임원들도 매일 전산망을 통해 각 팀의 실적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최근엔 아이디어가 고갈됐는데 더 새로운 것을 요구받는 상황이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며 “성과에 대한 조바심은 나는데 나만 열심히 해서 끌어올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언제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결론 안나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최근 전략·기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보기좋게 깨졌다. 상사의 지시대로 발표했건만, 그 상사는 전략을 왜 이렇게 짰느냐며 프레젠테이션(PT)의 논리가 맞지 않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팀장들과 부하직원들이 모두 있는 자리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인민재판 받듯 당했다”며 “실적이 인격이다. 그 순간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던 동료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사건’은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회사 생활이 가시밭길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적이 좋았다면 말 좀 버벅거렸다고 그렇게 면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료들은 “네가 그동안 곱게 자라서 그런 것”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영업은 더 심하지 않으냐”고 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매달 매출 마감 때가 되면 영업 지점장들은 출근하다 말고 본사로 불려오는 일이 다반사다. 전화로 인격모독을 당하는 것도 부지기수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영업전략 회의에서도 매출이 가장 안 좋은 지점부터 타깃이 돼 몰매 맞듯 지적을 당한다. 그러다 실적이 안 좋으면 연말에 계약 해지된다. 이씨가 비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면직 발령이 나기도 전에 그 자리의 신규 발령 공고가 붙는 것이다.

회사 일에 매달리다 보니 가정에는 소홀해졌다. 이씨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얼마 전 담임 선생님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검사를 권했다. 주변 동료들만 봐도 아이의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회사 행사와 겹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이씨는 “몇 년째 학교 행사에 가지 못한 동료가 있는데 그 딸아이가 ‘나는 커서 일하지 않는 엄마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며 “남의 일이 아니라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왜 회사를 그만두지 못할까. 이씨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신의 상황을 “생계형 직장인”이라고 짧게만 설명했다. 이씨는 “지난해 40대 초반의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해고되는 것을 봤다”며 “우리 회사에서 미래를 그리지는 않는다”고 씁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