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내 건강부터 챙기려 찾았던 의료생협 서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동”

2013. 7. 29. 13:23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내 건강부터 챙기려 찾았던 의료생협 서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동”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                  

ㆍ정경란 마포의료생협 이사장

마포의료생활협동조합의 정경란 이사장(54·사진)은 생협을 만나고 “잃었던 미래를 찾았다”고 말한다. 30명의 직원을 둔 중소기업 대표로서 회사 운영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했던 정씨는, 이제 생협 이사장까지 겸직하면서도 여유 넘치는 삶을 산다. 마포의료생협에서 일한 뒤 생긴 변화다.

준비기간 3년을 거쳐 지난해 6월 정식 설립한 마포의료생협의 모토는 ‘건강한 마을공동체’다. 생협을 통해 과잉 진료하지 않는 의료기관을 만들고 지역 주민 모두의 건강권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인들과 지역 주민으로 이뤄진 조합원 400여명이 출자금 3000만원을 모았고 올해 안에 조합원을 위한 진료소를 세울 계획이다. 출자금은 1인당 3만원 이상으로, 월 1만원 이상 정기 출자금을 낼 수도 있다.

마포의료생협은 현재 지역 내 노인, 여성 등 건강취약계층을 위한 찾아가는 무료 건강강좌와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의료나 협동조합 관련 교육 사업 등 지역 건강증진 활동을 주로 진행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개원준비위원회, 건강마을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5개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건강한 출산교실, 안마교실 등 각자 욕구에 따른 소모임 참여도 활발하다.

▲ 의료인과 주민들이 조합원
마을 건강권 지키는 공동체
이사장직 맡고 미래가 든든
조합원인 한의사 김낙희씨(45)는 올해 처음 시작하는 마포의료생협 정기건강강좌에서 한약 소개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동안은 온·오프라인으로 조합원들에게 건강상담을 해왔다. 그는 “병원 만들기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협동해서 다같이 건강을 돌보자는 취지인 만큼 만남과 활동이 다양해서 재미있다”고 말했다.

마포구 주민 박수경씨(36)도 지난해 12월 상담전문가 조합원이 진행한 ‘모성과 자존감’에 관한 건강강좌를 듣고서 마포의료생협에 가입했다. 18개월 된 아기 어머니인 박씨는 “내가 모성애가 모자란 게 아닌가,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지 불안했던 마음이 다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깨달았다”며 “의료생협을 통한 소아과 진료에 대한 기대도 크다”고 말했다. 마포의료생협은 지역 내 의료진과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지역 건강권을 함께 증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심 중이다.

정씨가 마포의료생협을 처음 찾은 것은 단순히 건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1998년 외환위기 후 가계가 무너진 뒤 사업에 뛰어들어 15년간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정씨였다. 휴식이나 친교, 앞날의 걱정은 사치였다. 한참 커가던 세 딸들 밥 한번 손수 지어줄 여유도 없었고, 본인 식사도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때우거나 폭식하는 게 습관이 돼서 당뇨가 생겼다. 자리잡은 줄 알았던 회사는 원청업체 사정에 따라 또 휘청거렸다. 모든 것을 걸었던 회사에도 안정을 기대할 수 없던 때, 우연히 병으로 고통받는 노인을 본 정씨는 처음으로 본인의 노후를 그려봤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막막한 심정으로 마포의료생협의 문을 두드렸다.

생협을 처음 만난 정씨의 인상은 “놀라움이 전부”였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서로 위로받는 삶의 방식이 세상에 있다는 걸 처음 봤어요. 그동안 이기적으로 내 것만 챙기고 살았지만 사실 많은 것을 놓쳤구나 싶더라고요.” 회사 일이 전부였던 정씨는 의료생협의 이사장직을 수락했고, 지금은 생협 의료기관을 준비하는 개원준비위원회에서 활동 중이다.

지난 연말 건강검진에서 정씨는 당뇨가 거의 완치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료생협 활동을 하면서 배운 대로 유기농 현미 위주의 건강식단을 따랐고, 자극적인 음식을 줄인 덕이다. 정씨는 “아프다고 약에 의존하기보다 생활습관과 마음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니 몸이 스스로 회복되더라”고 말했다.

의료생협은 정씨의 건강을 돌려줬을 뿐 아니라, 정씨의 마음에 협동조합식 나눔과 연대의 가치를 심어줬다. 일반 기업을 운영해온 정씨에게 협동조합의 느리고 민주적인 일처리 방식은 낯설고 답답했지만, 지금은 본인의 회사에까지 협동 중심의 업무 방식을 도입했다. 그는 아직 막연하지만 회사를 협동조합 형태로 전환할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정씨는 조합 교육과 대학 강의를 통해 협동조합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일본의 의료생협 현장을 돌아보는 연수도 다녀왔다. 그는 협동조합을 알게 된 덕에 막막하기만 하던 앞날을 상상하는 게 즐거워졌다고 했다. “은퇴는 빨라졌는데, 다들 노후가 불안하잖아요. 저도 회사를 언제까지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는 거고요. 제게는 협동조합이 제2의 사회가 돼줄 거라는 믿음이 있고, 그 안에서 할 일들이 마구 생각이 나서 미래가 든든해요.”

정씨가 가장 주력하는 아이템은 ‘노치원’이다. 노인요양시설보육시설을 한곳에 두고 노인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공동체와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고향 농민들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는 향우회를 협동조합 형태로 구성해 농산물 유통 경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세 딸과 함께 9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협동조합을 통해 만난 지인에게 환경재단의 ‘피스앤그린보트’ 선상 축제를 소개받아 참여했다. 딸들과 함께 선상 기후변화문제 리더십과정을 들었고, 일본 원전 밀집지역 등을 둘러봤다. 가족과 지역 울타리를 넘어서 범사회적인 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정씨는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는 만큼 지구도 빨리 오염된다는 걸 전엔 생각조차 못했다”며 “모두에게 협동조합식 여유와 인내가 필요한 시대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