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대기업 ‘부품’ 같던 삶에 회의… 모두가 즐거운 경제 위해 일해

2013. 7. 29. 13:21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신년 기획 - 왜 사회적 경제인가]“대기업 ‘부품’ 같던 삶에 회의… 모두가 즐거운 경제 위해 일해”

홍재원 기자 jwhong@kyunghyang.com                  

ㆍ정우식 지리산꾸러미 대표

정우식씨(45)는 LG전자에서 부장 진급을 앞두고 2009년 지리산으로 떠났다. 이곳에 정착해 현지 유기농산물 등을 서울 가정으로 정기 배송해주는 영농조합법인 ‘지리산꾸러미’를 2년째 운영 중이다. ‘이윤의 70%를 지역사회를 위해 쓴다’고 정관에 명시한 ‘사회적기업’인 만큼 큰돈을 벌지 못한다. LG전자 때의 연봉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퇴직을 앞둔 것도 아닌 정씨가 번듯한 서울의 직장생활 대신 벌이도 적은 산골 마을에서 사회적기업을 운영하게 된 이유가 뭘까.

정씨는 1일 “매일 임원이 되기 위해 경쟁하고 조직의 일 할당을 채우느라 급급했다”며 “17년간 회사의 부품으로 살았지만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또 회사 수익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에 큰 회의가 생겼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개인과 사회의 건강한 생태를 위해 이익의 규모보다 이익을 올리는 과정과 공평한 분배가 중요해 보였다”며 “대안적인 경제, 즉 ‘사회적 경제’가 필요하다고 보고 새 시도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우식 지리산꾸러미 대표가 1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농협 매장을 찾아 물품을 점검하고 있다. 전북 남원에 있는 지리산꾸러미는 지역 농민이 생산한 제철 작물을 도시 소비자에게 직접 배송·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이다. |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 농민은 제값에 팔고
소비자는 싸게 사고
직원도 흥겹게 일해


정씨는 서울의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LG에 취업했다. 그땐 다들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능력을 입증받으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씨도 지지 않기 위해 대기업에 입사했다. 한때 겉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했다. 고급 승용차를 굴려보기도 하고, 품위를 갖춰야 한다며 유명 브랜드 옷만 챙겨입기도 했다. 역시 서울에서 외국계 회사를 다니는 아내를 만나 결혼 잘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정씨는 “5000만~6000만원인 대기업 차장 말호봉급 연봉은 맞벌이 부부에게 그리 부족한 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기업 조직문화에 회의를 갖게 됐다. 1980년대 학번으로 막연히 기대했던 ‘평사원 CEO 신화’는 현실엔 없었다. 상무조차 달기 힘들었다. 그 생존자가 되기 위해 직원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는 “대기업은 그 경쟁 과정에서 나오는 성과를 취하고, 나중엔 대부분 구성원들을 내치는 구조”라며 “기획, 대관 등 여러 업무를 했지만 왜 이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경쟁 속에 빨려들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건강도 많이 상했다. 업무 걱정에 속쓰림이 극심해졌고, 통증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대기업의 수익이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정씨는 “전자 대기업의 원재료 비용이 20%라면, 제품가격 중 나머지 80%는 누가 가져가는지 의문”이라며 “결국 ‘99%’가 ‘1%의 수혜자’를 위해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대기업의 이윤이 결국 소비자뿐 아니라 협력사 등을 ‘쥐어짜야’ 극대화되는 구조라고 느꼈다.

그는 ‘이익에 기여한 사람들이 공평하게 혜택을 보는 시장’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정씨는 “대기업 중심의 경쟁적 시장구조는 이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며 “자본 중심의 이윤 분배가 아닌, 형평성 있는 이윤 추구가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우선 농촌에서 터전을 잡기 위해 지리산 인근에서 1년 이상 농사일을 배웠다. 2011년 전북 남원 산내면에서 다른 귀농자와 인근 농가 등 20여명이 50만원1000만원을 모아 지리산꾸러미를 설립했다. 여기에 물품을 대는 주변 농가는 100여곳에 이른다. 지리산 일대의 제철 채소와 두부, 달걀 등 유기농 작물을 작은 꾸러미에 담아 서울 고객들에게 보내주는 일이다. 한달에 4번씩 보내주고 12만원을 받는다. 지난해 여름 한때 서울의 고객수가 3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첫해엔 1000만원 넘는 적자를 봤지만 최근 월별 이익을 내는 등 연간 기준으로 손익분기점 정도까지 왔다. 우선은 농림수산식품부의 사회적기업 지정에 따른 지원금으로 5명의 상근 직원들이 100만원씩 월급을 받는다. 정씨는 “물가 등을 고려하면 농촌에선 월 30만원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며 “100만원 수준의 월급만 받을 수 있어도 농촌에선 상당히 안정적인 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물론 정부 지원금 등을 낭비하지 않도록 지속가능한 사회적기업으로 빨리 자리 잡는 게 급선무라고 여긴다. 작물 수급관리 노하우 등이 쌓인 만큼 올해엔 흑자 달성이 가능하며, 월급도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정씨는 설명했다.

지리산꾸러미 일을 하자 속쓰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하는 풍경도 달라졌다.

일례로 예전엔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전쟁을 치르듯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거나 거래처 사람들을 찾아가 접대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꾸러미 직원들이 가정집 등에 모여 함께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꾸러미를 활용한 조리법을 개발해보기도 한다. 일터에서도 누구의 명령을 받는 대신 20여명의 조합원들과 1인1표제로 함께 사업관련 의사결정을 하니 조직의 부품에 불과하다는 회의도 사라졌다. 정씨는 “무엇보다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농산물 유통구조를 고쳐나간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인근 농민들도 대형 유통사의 ‘가격 후려치기’ 대신 소비자가의 70%를 받고 작물을 팔 수 있어 즐거워한다. 신선한 먹거리를 중간 유통단계 없이 소비자에게 전해주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

한마디로 농민들은 작물 가격을 제값을 받고 팔 수 있고, 꾸러미 직원들은 많진 않지만 월급을 받으면서 즐겁게 일하며, 소비자들은 신선한 먹거리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경제주체들 모두 불만이 없고 제품 품질은 높아지며, 폭리를 취하는 이가 없는 시스템이다.

서울에 남은 아내도 처음엔 심하게 반대했지만 지금은 정씨의 뜻을 이해해주는 편이라고 했다. 아내가 일을 그만두면 지리산 근처에서 함께 터를 잡을 생각이다. 서울에 살던 누이 내외도 지난해 지리산에 합류해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정씨는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니 조합원들이 ‘작은 구본무(회장)’며 꾸러미는 ‘건강한 LG’인 셈”이라며 “대기업 위주의 성장과 경쟁 위주의 경제시스템이 공동체적 대안을 찾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