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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방과 변산의 차문화 --허철희의 포토갤러리

정치, 정책/복지정책, 문화 기획

by 소나무맨 2013. 7. 13.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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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방과 변산의 차문화
[12월 달력] 차나무
2011.12.05 12:48 입력

 

 

측막태좌목 차나무과의 상록교목인 차나무(학명:Thea sinensis L.)는 따뜻한 지역인 경상, 전라도에서 주로 식재한다.

 

뿌 리는 아래로 2∼4m 곧게 뻗으며, 곁뿌리는 길이가 15∼20cm이고, 가는 뿌리가 많다. 줄기는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길이 6∼20cm, 폭 3∼4cm의 긴 타원 모양의 잎은 어긋나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끝과 밑 부분이 뾰족하다.

 

꽃은 10~11월에 흰색 또는 연한 분홍색으로 피고, 지름 3~5㎝이며, 향기가 있다. 삭과의 열매는 다음 해 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가을에 익으며 갈색의 종자는 둥글고 단단하다.

 

차 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운남성, 사천성)이라는 설과 인도(아샘 지방)라는 양설이 대립되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許黃玉)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보면,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종자라고 한다.(金海 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 特來之茶種云)”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로왕비 허왕후(許黃玉)는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로서 부왕의 명을 받아 16세의 어린 나이에 수륙만리 이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때 금·은·비단 등 많은 폐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차 씨앗도 함께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 말미에는 “차와 과일 등을 갖추어서 시조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가 가야를 복속하면서 가락국의 차문화는 자연스럽게 신라에 전승되는데, 「가락국기」의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賡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王位田)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 차(茶)와 과일 등을 갖추고 제사를 지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居登王)이 정한 연중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는 기록으로 보면, 신라에서 차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서기 661년에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 수로왕의 15대 방손)의 어명으로 60여 년간 끊어졌던 제사가 다시 이어지게 되면서부터임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 “흥덕왕 3년 겨울 12월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당문종(文宗 ; 826~839년)은 인덕전에 불러서 보고 등급을 가려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興德王)은 지리산(地理山: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기는 했으나, 이에 이르러 성행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구려에는 어떤 경로로 차가 전래되었는지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그게 아니더라도 불교를 따라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백제 또한 어떤 경로로 차가 전래되었는지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그러나 변산 원효방의 원효대사와 백제의 중 사포에 얽힌 일화를 통해 차 문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위의 글은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가 변산의 원효방을 둘러보고 그의 『남행월일기』에 남긴 기록이다.

 

그런데, 사포가 원효에게 달여 드린 차가 신라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백제에서 재배한 것인지 명확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백제의 어느 땅에서 재배했을 것이라는 견해들이 많다. 그 이유로는 원효방이 백제 땅 깊숙한 곳에 있어 신라로부터 수송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신라의 옛 땅보다는 백제의 옛 땅에 차밭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기에 고려시대에도 원효방에 거처하는 어느 늙은 중은 차 생활을 했을 것이고, 그 차는 부안 땅에서 재배한 차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세종실록지리지 부안의 토공(土貢) 품목에는 狐(여우가죽), 狸(너구리가죽), 水獺皮(수달가죽), 沙魚(상어), 天鵝(거위), 黃毛(족제비꼬리털), 席(자리)와 함께 분명히 茶(차)가 들어 있다. 그런가하면, 허균은 그의 저서 <도문대작(屠門大嚼)>에 “차(茶)는 순천(順天)에서 나는 작설(雀舌)이 가장 좋고 변산(邊山)의 것이 다음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 1888~1939) 선생은 그의 『다고사(茶故事)』에 “신라의 차는 당에서 들어왔고 일본의 차는 송에서 들어갔으니 비록 연대의 전후는 있으나 모두 불교를 따라 전래했었고, 또 불교를 따라 발달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로 보면 불교가 성행했던 그 당시 고구려, 백제에도 당으로부터 차종자의 전래가 없었을 리가 없다. 고구려는 북쪽 추운 지방이므로 재배에 부적당하나 백제는 남쪽 따뜻한 지방인만큼 신라보다 오히려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일찍 들어와 재배가 되었더라도 사실이 전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할 바다. 그러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논할 때 신라의 옛 땅이었던 경상도 방면에 비하여 백제의 옛 땅이던 전라도 방면에 차 산출이 더 많다고 한다. 이는 백여 년 전에 된 <여지승람>에도 적혀 있거니와 금일에 이르도록 의연히 변함이 없다. 전라도는 지리산 외에도 모든 명산에 거의 차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망한 나라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다. 호암 선생도 자료 미비로 백제의 차 전래 사실을 밝힐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의 80%가 백제의 옛 땅에서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백제의 차 전래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며, 변산의 차 문화가 간접적으로나마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허철희 huh@buan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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