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3. 00:07ㆍ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한국 시민운동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이론적 모색
정 수 복(사회운동연구소, 소장)
1. 머리말: 시민운동의 힘
언제부터인가 중앙의 일간지들은 시민단체에 대한 지면을 앞다투어 마련하고 있으며 21
세기는 NGO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희망적 예언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시민
단체의 문제제기로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교육부 장관이 사임을 하였으며, 지난 총선시민연
대의 낙천 낙선운동은 낙선자 명단에 포함된 후보자의 70% 이상을 낙선시키기도 하였다.
전 세계적으로는 1999년 말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WTO의 뉴라운드 협상의 개막식이 NGO
활동가들의 시위로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기도 하였으며 얼마전 프라하에서 열린 IMF와
IBRD 총회에서도 NGO들의 세계화에 대한 거센 항의 표출이 있었다. 세계시장의 단일화를
추진하는 WTO와 IMF 등에 대한 지구촌 NGO들의 비판과 항의는 비록 어제 오늘의 이야
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벌어진 NGO들의 일련에서는 세계적으로 80 : 20의 불평등
사회를 낳는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 주도의 세계적 단일시장 형성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모인 NGO 활동가 수만여 명이 '인간의 얼굴을 한 교역'을 주장하면
서 초국적 시민연대에 기반한 광범위한 시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NGO의 중요성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 와서이다.
1990년대 10년 동안에 국경을 넘어서는 초국적인 문제들에 대해 유엔이 조직한 세계 정상
회담이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그리고 그와 병행해서 세계 NGO 대회가 열렸다. 1992년 리
우의 환경회의에서 1996년 이스탄불의 주거회의에 이르기까지 비엔나 인권회의, 카이로의
인구 및 개발회의, 코펜하겐 사회개발회의, 베이징 여성회의, 로마의 식품안전회의 등에서
세계의 NGO들은 정부 대표들의 입장과는 독립적인 의견들을 제시하고 행동강령을 채택하
였다. 이제 초국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개별정부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영역의 NGO들의 참여가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
총장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평화, 개발, 인권 등을 추구하는 데 NGO들과의 협력관계 구축
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전지구적 시민사회의 형성에 NGO들이 주요 행위
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 들어서면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
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범세계적으로 'NGO 혁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양
한 NGO들이 만들어지고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민주화 과정에
들어선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어 시장경제와 민주적 정치체제의 건설
에 들어선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다양한 NGO들이 만들어지고 시민사회의 영역을 만들어 나
가고 있다.
다른 한편 국내적으로 보면 1980년대에는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민중운동이라는 말이 널
리 쓰였다면 1990년대에는 시민운동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
연합'(경실련)이 출범하면서 민중운동과 구분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시민운동
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경실련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전 민중운동의 이념지향성
을 넘어서서 민주화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합법적인 시민참여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
는 사회운동의 지향성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
에 대해 구체적인 비판과 감시 그리고 대안제시 운동을 벌여 나갔다. 1994년 '참여민주주
의를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가 출범하면서 시민운동은 90년대 사회운동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참여연대는 경실련의 온건한 시민운동을 비판하면서 80년대의 민중운동의
흐름과 연대하면서 좀 더 진보적인 시민운동의 지향성을 표방하였다. 참여연대는 소액주주
운동을 비롯한 작은 권리 찾기 운동과 부정부패추방과 법적 소송의 영역에서 다양한 시민운
동을 전개하였다.
1999년은 경실련 창립 10주년, 참여연대 창립 5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와 같은 국내의 시
민운동은 전지구적 차원의 NGO 활동과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발전해 왔다. 1992년 리우
환경회의 이후 한국 환경운동의 발전,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발전
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9년은 한국시민운동이 세계적 차원으로 관심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의 해이기도 했다. 서울세계 NGO 대회가 1999년 10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렸
다. 우리나라의 인권, 환경, 여성, 부패추방, 경제정의, 교육개혁, 사회복지, 교통문제, 장애인
권리 등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이제 국내적 관점을 벗어나 범
세계적 관점과 기준을 고려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이제 인권, 환경, 여성, 평화
등의 문제는 전지구적 관점에서 문제시되고 있으며 일국적인 시각이 아니라 보편적인 시각
을 가지고 접근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한국시민운동의 관성적 경향을 드러내고 그것의 문
제점을 지적하면서 시민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이론적 작업의 기본 틀을 제시
할 것이다. 한국시민운동의 5가지 문제 영역과 새로운 전환을 위한 패러다임의 모색, 그리고
시민운동에서 문명전환운동으로의 전환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2. NGO와 시민운동론
1) NGO라는 용어의 문제
NGO 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Non Governmental Organization, 문자 그대로 번
역하면 비정부기구라는 뜻의 NGO라는 용어는 원래 국제연합(UN)같은 세계 각국의 정부
대표들로 구성되는 국제기구들에서 정부 대표가 아닌 민간인들로 이루어진 조직들을 총칭해
서 부르면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비(非)정부' 그러니까 정부기구가 아니라는 소극적인 방식
으로 이름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NGO라는 용어보다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활동
하는 단체라는 뜻에서 시민사회단체, Civil Society Organization, CSO라는 용어가 더욱 적
당한 용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세계의 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이 CIVICUS 라는
단체가 CSO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1999년에 들어서 신문, 방송, 잡지 등 언론 매체에서 NGO라는 용어를 무분별하
게 사용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도 이제 NGO라는 용어는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어가고 있
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세계 NGO대회가 서울에서 열림으로써 NGO라는 용어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쓰이게 되었다. 성공회대학교와 경희대학교는 대학원에 NGO 학과를 개설하거나
아예 NGO 관련 여러 학과를 두루 갖춘 NGO 대학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 시민단체들도 싫든 좋든 NGO라는 용어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NGO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 이전 이미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여성단체연합, 참여연대 등의 단체를 시민단체들이라고 불러 왔는
데 NGO라는 용어를 쓰더라도 최소한 그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문자 그대로 '비정부기구'
라고 옮기기보다는 시민단체 또는 시민사회단체로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NGO는 시민단체를 말하며 시민운동은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사회
운동을 뜻한다.
2) 시민운동론
시민운동은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이론에 기반하고 본다. 그것은 사회를 서로 다른
논리로 움직이는 세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국가
영역, 이윤추구의 논리로 움직이는 시장 영역, 그리고 공공선의 추구로 움직이는 시민사회의
영역이 그것이다. 국가영역에서 정부가 주요 행위자라면, 시장의 영역에서는 기업이 주요 행
위자이며,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인 시민사회단체들이 중요한 행
위자가 된다. 여기에서 시민운동은 국가의 권력이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것을 감시하고 견제
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시민의 집합적 요구를 결집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한
다. 다른 한편 시민운동은 시장의 경쟁 논리가 불공정하게 작동하는 것을 막고 경쟁에서 배
제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담당한다. 시민운동론에 따르면 시민사회와 국가 그리고
시장이라는 세 개의 영역이 서로 독자적인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면서 상호 견제하고 협력하
는 관계가 가장 역동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든다. 그러므로 시민운동은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기본적인 틀을 존중하는 제도적인 공간에서의 활동을 자신의 주요 활동으로 삼게
된다. 바로 그 점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제도화가 잘 이루어진 미국에서 시민단체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제도화 정도가 높아질수록 시민단체들의 조직과 활동도 제
도화된다. 시민단체 내부에도 전문화와 관료제화 현상이 나타나고 사회운동적 성격보다는
기존의 제도적 틀 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활동의 폭이 제한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운동은 시민단체 조직 내부의 전문성 높이기나 생
산적이고 효율적인 기금 마련, 회원관리 그리고 정책대안 제시와 효과적인 캠페인에서 끝나
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기존의 제도적 틀 안에서 '문제'로 제기되지 못하는 감추어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본질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은
제도적 틀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문제 제기를 통하여 제도 자체의 개혁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와 시장의 지배를 견제하고 감시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길이 될
것이다.
3. 중앙정치 비판형 사회운동의 전통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국가의 존재이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도 잘못된 중앙의 정치를 비판하는 중앙정치 비판형 사회운동을 그 중심 축
으로 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의 사회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1960년 4.19 이후 한국
의 사회운동도 부정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60
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주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산업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이후 권위주의
적 중앙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화운동은 한국 사회운동의 주류를 형
성해 왔다. 80년대에 들어서 사회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학생운동도 최고 집권자인 대
통령과 정부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일군의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맑스주의 계급이
론을 통해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며 학생운동 세력의 일부가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하였지만 대중적 사회운동의 중심 주장은 언제나 '독재타도'와 '
민주회복'에 있었다. 1980년 광주항쟁도 폭압적 신군부정권의 등장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1987년의 6월항쟁도 그 안에 여러 가지 사회운동의 지향성이 섞여있었다 할지라도 기본적인
흐름은 독재의 타도에 있었던 것이다. '넥타이부대'도 '아줌마 부대'도 모두 그 점에서는 하
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활성화된 시민운동은 형식적으로나마 이루어진 민주화 과정에서 합법
적인 운동노선을 취하면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정부의 정책과정에 개입
하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1990년대 형성 발전한 시민운동도 중앙정부 비판형 사회운
동의 전통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경실련 운동이 그 상징적인 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경실련보다 다소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며 전개된 참여연대의 운동도 중앙정부 비판형 사회
운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1989년 경실련 출범 이후 한국의 시민운동의 주요
흐름은 중앙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단위의 시민단체들이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 그리고
대안제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제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지
방자치단체장과 기초 광역의원 선거 등 세 차례의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단순히 선거라는 장치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부
가 퇴진하고 권위주의 체제가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아직도 구태의연한 '법
과 질서'가 강조되고 있으며 과거의 권위주의 체제를 지탱해주던 악법과 잘못된 관행들이
그대로 잔존해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언론에 이어 제 5부로 불리면서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를 향하여 입법과정과 국가예산집행, 정책결정과 정책집행, 사법처리
과정의 합리성과 투명성, 책임성과 설명가능성을 높일 것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는 운동
양식을 발전 시켜온 것이다.
4. 한국 시민운동의 미래를 위한 다섯 가지 문제 영역
한국 시민운동의 미래를 위하여 논의할 주제가 많겠지만 여기서는 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논의해 본다. 첫째로 한국의 시민운동은 중앙
권력과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인가? 현재와 같은 중앙정치 비판형
시민운동은 궁극적으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지금까지도 시민운
동의 지도자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정치권으로 영입되거나 이동한 경우가 있었다. 지난번
선거에서 보았듯이 학생운동출신 386세대의 정치진출, 몇몇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정계 진출
양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정치체제 안에 몇 사람의 신진 인사가 들어간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바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당,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 등 사회운동 세력의 정치세력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의 연속을 경
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는 그리 낙관할 수 있는 전망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운동은 지금까지 해 온대로 감시와 비판 세력으로서 자리를 굳혀나가야 할 것이
다. 시민운동은 비정부(non-governmental), 비영리(non-profit), 비당파(non-partisan)라는 세
가지 원칙을 지키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시민운동은 스스로 우리 사회의 의식과 가치의 이중성을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
가? 우리 사회의 곳곳에는 근대의 도구적 합리성과 봉건적 인연의 사슬이 공존하고 있다.
식민지 과정에서 왜곡된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의식과 관행들을 혁신하는 의식개혁 차원의
시민운동은 말과 구호로만 진행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혈연중시와 가족이기주의, 줄서기와
패거리의 문화, 지연, 혈연 학연의 중시, 상하서열적 위계의 강조와 같은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는 전근대적 유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문화적 가치와 규범을 창출하는 시민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정신혁명, 가치의 혁신을 이루지 못한 채 경제적, 물질적,
외형적 성장만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쉽게 표적이 되는 권
위주의 정권과 싸우고 부패한 정치권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일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에 사
회의 제도와 시민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치문화 차원에서의 이중성과 전근대성을 지속적이
고 심층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한국사회에는 근대적 요소 위에 전근대적 요소가 혼합되어
공존하는 가치문화가 굳어진 상태이다. 그래서 쉽게 가시화되는 독재자와 부패한 정치인과
비합리적 제도에 대한 비판은 쉽게 점화되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작동
하는 잘못된 기존의 의식과 가치, 규범과 관행은 지속적인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
였던 것이다. 겉으로만 볼 때 시민운동은 정책을 변화시키고 재벌을 감시하며 부도덕한 장
관을 퇴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시민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심각한
비일관성에 대한 문화적 대안 제시의 차원에서는 매우 허약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운동은 시민들의 삶의 현장
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중앙정치 비판형 시민운동은 결과적으로 지역에서 전개되는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시민운동의 양식을 개발하는데 큰 힘을 기울이지 않
았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중앙의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제도권 비판과 대안 제시에 주력
해왔다. 그래서 시민단체의 지역 조직들은, 단체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보건대,
마치 정당조직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결정된 운동의 노선과 내용을 지역에서 실행하는 하
부 조직처럼 인식되었다. 기업이나 정부 조직과 마찬가지로 시민운동단체의 조직방식도 위
로부터 아래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지역의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시민단체의 성장이
미약하고 지역 고유의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지역 주민자치운동은 깊이 뿌리내리지 못
하고 있다. 지방자치제의 실시 이후 많은 시민단체들이 지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강조하였
지만 시민운동의 주요 인적 물적 자원은 항상 중앙정부 비판에 투여되었다. 그러므로 앞으
로의 시민운동은 중앙정치 비판과 더불어 지역의 자치와 공생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삶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중앙의 거대 시민조직의 하부조직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
의 일상의 삶에 관심을 갖고 지역의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 작지만 강한 주민자치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한국시민운동의 주요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네 번째 문제로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성큼 다가온 남북 화해 협력 시대 시민운동의 과
제와 역할에 대한 것이다. 그 동안 한국의 민간 통일운동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비롯하
여 다양한 운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민간 통일운동은 반공 반북이라는 이념적 장벽 앞에서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만 활동해 왔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운동
을 전개해온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민간 통일운동은 단순한 북한 돕기 차원이 아니라 남북
한의 화해 협력을 위한 이념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민운동의 관점에서 전
개하여야 한다. 그것은 중앙집권적 체제에 대한 비판과 분권형 사회로의 점진적 접근의 길
이며 냉전적이며 국가 중심적 사회체계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인정되고 시민의 자율성이
강화되는 사회로 이동하는 것이다. 또 남한에서의 다양한 시민운동은 북한 사회에 대한 심
층적 이해를 통하여 통일된 사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구성해 나
가야 한다. 환경보호, 경제정의, 정치개혁, 문화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교육개혁 등 여러
영역에서 남북한 전체를 고려하는 새로운 비전과 프로그램을 수립해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
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문제는 시민운동이 산업사회의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넘어서는 21세기의 대안
적 발전모델을 제시하는 문명전환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사회주의
의 붕괴 이후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유토피아 사상은 거의 종말을 고하였다. 이제 시장경제
와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세계화로 불리는 대외개방정책은 지구촌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마가렛 대처는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고
주장하였고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인류의 미래는 없
다는 진단이 계속 나오고 있다. 월드워치 연구소의 레스터 브라운 소장은 "지난 세기의 산
업화 모델이 21세기에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인류는 환경친화적인 새로운 성장 모델
을 찾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류 전체의 보편윤리를 모색
하는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은 말한다. "인류는 이제 근대성의 성취가 가져온 부정적 영향
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있다. 이성의 산물인 과학 기술, 산업화, 국민국가 등이 인간의 문제
를 해결해 주는 만능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유럽은행 총재였던 프랑스의 경제
학자 쟈크 아탈리는 "아무리 늦어도 21세기 중반이면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 현재의 발전모
델을 휩쓸어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앙권력 비판을 넘어서 산업문명 자체를 비판하고
대안문명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의 역할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아래에서 대안문화
운동이며 동시에 문명전환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볼 것이다.
5. 기계론주의 패러다임에서 생태주의 패러다임으로
어느 사회이든 전통과 신념, 이데올로기와 철학들이 종합되어 만들어진 크게 보면 하나
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여기서 세계관이란 실재(reality)와 세계에 대한 일련의 가정들을 말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넓은 의미의 세계관을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다섯 번째 문제 영역에서 제시한 문명전환운동은 현재 지구가 처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지구화되고 있는 과학기술 산업문명의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있
는 기계주의적이고 데카르트적인 세계관(Mechanistic/Cartesian World View)에서 생태주의
적이고 전체론적인 세계관(Ecological/holistic World View)로의 이동해야 한다(아래의 표-1
을 볼 것). 문명전화운동은 결국 세계관과 패러다임 수준에서의 전환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앞서 말한 레스터 브라운을 비롯한 새로운 대안 문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생태주의적 패러
다임이 기계주의적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미 이론과 사상의 차원에서는 문명전환을 위한 패러다임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생
태주의적 패러다임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확산시키는 것이 문명전환운동이 될 것이다.
<표-1: 패러다임 이동의 기본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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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주의적 패러다임 생태주의적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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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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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주의, 환원주의, 객관주의, 기술중심적 유기체주의, 전체론, 참여적, 생태중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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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가치상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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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객체의 분리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
-인간과 자연의 분리: 지배관계 -인간과 자연의 비분리성: 시너지 관계
-분리되고, 가치중립적, 경험적, 통제하는 지식 -비분리적, 가치관여적, 경험적이며 동
시 에 직관적이고 감정이입적 지식
- 분석이 이해의 열쇠 - 종합(synthesis)이 더 강조됨
-직선적인 시간관과 인과관계 -순환적인 시간관과 인과관계
-자연은 불연속적 부분의 총합이며 -자연은 상호 관련된 전체로 이루어지며
전체는 부분의 총합일 뿐이다 그것은 부분의 총합보다 크다
- 개체의 힘(돈, 영향력, 자원)이 안녕(well-being) - 체계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질이 안
녕
- 양적인 것을 강조 - 질적인 것에 관심
- 물질적 현실 강조 - 자연적, 형이상학적 실재에 관심
-사실과 가치의 무관함 - 사실과 가치의 밀접한 관련성
-윤리와 일상생활의 분리 -윤리와 일상생활의 통합
- 수단적 가치 -체계의 가치를 통해 통합된 내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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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체계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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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집중화(centralization) - 권력의 분산(decentralization)
- 전문화 - 다차원적 접근
- 경쟁을 강조 - 협동을 강조
- 동질성의 증가와 해체 - 다양성의 증대와 통합
- 기술적, 생태학적 한계의 불인정 - 생태학적 한계가 기술적 한계 결정
- 획일적인 경제 성장 - 안정 상태의 경제 또는 질적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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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표는 아래의 글에서 재구성 한 것이다; Sterling, Stephen, 1992, "Towards an ecological
world view," J. Ronald Engel and Joan Gibb Engel(ed), Ethics of Environment and Development,
Arizona: The University of Arizona Press: Pp. 77-86.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경제적, 도덕적 생태적 위기는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과 세계관
에 기초한 과학기술문명,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계, 불평등한 국제관계 등 여러 요인이 하나
로 얽혀 생겨난 것이다. 현재의 위기상황은 사회체계 전체의 목표와 가치, 인식과 지식의 체
계, 생산양식, 정치구조, 교육의 내용, 인성의 구조와 연결된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시민운동이 해 왔던 바 단순한 정책과 제도적 차원의 개혁만으로는 해결되
기 어려운 것이다(표-2를 볼 것). 현재의 복합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
연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체계의 짜임의 방식, 생산과정, 과학기술과 소비 양식을 기존의
기계주의 패러다임에서 생태주의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시켜야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
는 이념에 이어서 생태주의라는 이념이 기존의 사회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
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표 2: 생태주의 가치관의 항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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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상태에 대한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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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지구상의 생명체의 생존의 긴급성을 인식한다.
2. 인류는 다른 생물종과 지구생태계에 대하여 겸손해야 한다.
3.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생명체의 장기적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확대된 시간관을 갖
는다.
4. 인간사회는 좀 더 지속적인 기술적, 물리적 기초 위에서 재구성되어야한다. 현재 인간
의 삶의 방식 가운데 여러 측면은 근본적으로 일시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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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사회의 구성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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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형태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동시에 복잡한 생태적 그물망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2. 민족주의적이거나 고립주의적이기보다는 전지구적 관점을 취한다.
3. 정치권력의 분권화와 인구의 분산화를 선호한다.
4. 매사에 자율과 자치를 지향하며 좀 더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정치과정과 행정구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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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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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술이나 '근대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삶을 추구한다.
2. 인간 욕구 앞에서의 과도한 소비를 혐오한다(이것은 극단적으로는 금욕주의의 형태를
띤다).
3. 예방의학, 식이요법, 운동 등이 인간의 건강의 유지와 향상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하
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건강에 관심을 갖는다.
4. 계절과 생활환경, 기후와 자연물들의 아름다움을 인식한다.
5. 사람을 평가할 때 솜씨, 예술성, 노력, 성실성 등의 비물질적 기준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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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aehlke, Robert. 1989. Environmentalism and the Future of Progressive Politic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44-45쪽에서 항목을 만들고 순서를 바꾸어 재구성하였음
6. 새로운 세기, 새로운 가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시민운동에서 희망을 찾
고 있다. 사회문제와 사회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 치고 시민단체의 역할에 기대를 걸지 않
는 사람은 없다. 시민단체들이 그 동안 꾸준히 우리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일해 왔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의 시민운동은 중앙정치 비판형 사회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문명전환운동의 차원을 경시해왔다.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한국의 시민
운동은 기존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고쳐나가는 일과 동시에 대안적 가치와 대안적 삶의
양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을 새로운 가치와 비전으
로 재구성해 나가는 문명전환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시민운동 말고는 다른 어떤 집단
과 조직도 새로운 가치에 입각한 대안문화를 구상하고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명전환운동이자 대안문화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은 먼저 기존의 사회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근본적인 가정과 지향점들을 점검하고 새로운 가치 지향성과 세계관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운동은 그와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행동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래에서는 21세기형 시
민운동으로서의 대안문화운동이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네 가지 가치
를 제시해 본다. 생태주의적 전망, 탈 물질주의적 삶의 양식, 영성의 재발견, 여성주의적 시
각이 그것이다.
첫째, 21세기형 시민운동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적 세계관에 터해야 한다. '중단
없는 전진', '지속적 고도성장' 이라는 구호를 대신하여 '하나뿐인 지구', '환경은 생명이다'라
는 구호를 모든 시민운동의 밑바탕에 깔아야 한다. 선진국 모델이 세계의 지배적 발전 모델
이 되는 한 머지않아 지구 자체의 생존이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주의적 전망은
21세기형 시민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21세기형 시민운동은 탈물질주의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지난 30-40년 동안 우리는 물질적 욕망의 추구에 모든 것을 걸어 왔다. 의
미 있게 살고 보람 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시민운동은 '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덜 소유하
지만 더 행복한 대안적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와 같은 대안적 생
활양식의 실천은 현재 우리의 삶을 근저에서 붙잡고 있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얼마나 벗
어나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로 21세기형 시민운동은 영성을 중시하는 심신수련문화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
다. 현재의 시민운동은 현실세계에 매몰되어 있어 새로운 문명전환을 위한 영성의 차원이
빈곤하다. 그런데 최근 참선, 명상, 기공, 단전호흡, 요가 등 심신수련법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으며 새로운 정신문명을 추구하는 수련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신수련은
개인적 깨달음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두 운동이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심신수련은 사회
의식의 차원을 갖게 되고 현실세계에 매몰된 시민운동은 초월적 영성의 차원과 만나게 될
것이다.
넷째로 21세기형 시민운동은 여성주의적 시각에 서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
이의 관계를 지배와 정복의 관계로 설정한 남성주의적 시각을 벗어나 모든 생명체들 사이의
관계를 보살핌과 나눔의 관계로 보는 여성주의적 시각은 시민운동의 또 하나의 전제가 되어
야 한다. 여성주의적 시각에 설 때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노인, 아동, 장애인, 실업자,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 동포와 북한 동포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여성의 권익 신장만이 아니라 보살핌과 나눔이라는 여성주의적 사회적 관계가 확산
됨으로써 세상의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으로써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7. 맺는말: 시민운동에서 문명전환운동으로
기본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추구하는 문명전환운동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과거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정치경제적 수준에서 폭력적인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한 혁명이며 보이지 않는 혁명이며 비폭력적인 운동의 노선을 채택한다. 문명전
환운동은 사회구조의 개혁에 앞서 개인 주체의 변화와 집합적 주체의 형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개인적 주체의 형성은 '대안적 삶의 양식'(alternative lifestyles)을 추구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지배적 삶의 방식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
서 앞서 말한 생태주의적 패러다임 안에서 네 가지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성장은 지속되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구분되어야 한다" "학교는 꼭 다녀야 한다" "성적인 애정의 교환은 이성간에만 이루어져야
한다" 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주장들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경
제성장보다 자연 속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 "남녀간의 역할 구분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제도권 학교 밖에서도 교육은 가능하다","동성들 간에도 성적인 애정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고 주장하면서 대안적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차원에서 기
존의 사회문화체계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새로운 삶
의 양식을 실천하는 운동이 문명전환운동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단순히 기존의 삶의 양
식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그치지 않고 옛 삶의 양식을 대신할 수 있
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집합적 움직임이 그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도 '시민운동'에 이어서 '문명전환운동'이 그 모습을 드러
내고 있다. 시민운동이 민주화된 체제 안에서 더 많은 참여 민주주의와 올바른 공공정책의
형성을 지향한다면 문명전환운동은 정치적인 차원보다는 문화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문명전환운동은 기존의 사회체계를 떠받드는 근본 패러다임 자체에 의문을 제기
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보기를 들자면 기존의 체제 내에서 정부
의 환경정책을 비판하는 환경운동이나 여성의 정치참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은 문명전환운
동이라기보다는 시민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제일주의를 거부하고 생태 공
동체마을 만들기 운동을 벌이거나 도농직거래운동, 지역화폐운동 등을 통해 비시장적
(non-market) 대안경제를 만들려는 노력은 문명전환운동의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
다. 여성운동이 가부장제를 거부하며 보살핌과 나눔의 문화를 모든 사회적 약자와 함께 나
누며 파괴된 자연을 살리려는 운동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문명전환운동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개혁운동에서도 입시제도 개선을 위한 운동이 시민운동이라면 학교를 거부하는
탈학교운동, 대안학교운동, 가정학교운동 등은 문명전환운동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전환운동의 주체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 하나의 보기로 귀농운동에 참
여한 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어보자. 먼저 귀농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하고 비판한다.
"세상은 더 간교하게 인간을 자연과 스스로의 노동보다는 기계와 돈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도록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남보다 앞서가고 소비를 잘하는 것이 성공
한 삶이라고 부추기고 있는데 미친 바람과도 같은 그것을 거슬러 갈 수 있을까."
"난 더 이상 내 인생을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낭비하고 싶진 않습
니다. 더 이상 이런 무가치한 대기업체 생활에 몸과 정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
니다. 지난 15년 동안 힘들었고 지쳤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을 생각하면
암담합니다. 현재의 내 노동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고 따라서 흥미와 열정도 없
습니다. 지금까지 몸담고 살면서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잇는 이 회사가
과연 이 사회, 대중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 돈벌이에만 집착하면
서 구성원을 소외와 질곡으로 빠뜨리는 자본주의의 첨병이 아니가하는 회의
적 생각을 한순간도 떨쳐버리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현실과 타협하고자 회사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식으로 자기최면을 하기도 했습니
다만 사실이 아니기에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한 최면은 지속적
일 수 없었지요."
이와 같은 기존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회의는 도시를 떠나 대안적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데로 나간다. 그것은 단순하고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삶이고 돈을 벌기 위한 노동
이 아니라 삶을 위한 노동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인적 삶의 근거와 존재 방식을 송두리째 전
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우리는 '생태학적 개종'(ecological convers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계주의적 패러다임을 버리고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을 채택하는 것
을 말한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생태학적 개종의 작은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 혹독하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하여 자신에 대해 회의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사회, 살아남
은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을 경쟁의 대열에서 채찍질하며 자신을 죽여 가는 사회,
사람다운 삶의 크기가 새로운 욕망, 무한한 욕망을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생
각 없는 사람들의 사회를 벗어나 사람다운 삶의 새로운 모습을 작게나마 만들
어 보고 싶다."
"더 똑똑해지고 싶었고, 좋은 차, 넓은 집의 사람이 부러웠고, 맛있는 것 먹으
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당연히 바쁘게 살았다. 그것이 유일한 최선이
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또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조금만
욕심을 줄이면 세상이 다르게 보임을 알게 되었다. 반드시 남보다 앞서 가지
않아도 되었고, 덜 가져도 불안하지 않고 편해지기 시작했으며, 요란하지 않게 단
순 소박하게 살고 싶어졌다."
"인생의 절반을 살고 나니, 남은 절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선 가난하게 살아야지요. 가난은 선택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주어
진 것이 아니었나요. 하지만 가난을 벗어버리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한결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더구나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없는 대
로 불편한대로 살아가는 가난정신이 꼭 필요한 것이겠지요. 두 번째는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머리나 입보다는 정직하게 몸으로 땀흘려 일하며 살래요. 다
른 사람과 경쟁하고 남을 이겨야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 도시의 삶이 너무 고
단하군요.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자연과 친하게, 함께 어울려 살고 싶어요..."
여기서 우리는 문명전환운동의 의미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따져볼 수 있다. 첫째로 문
명전환운동은 사회체계가 순조롭게 작동하기 위해 개인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보다는 개개
인의 삶의 욕구와 의미를 중요시한다. 진정 자기가 원하는 가슴 뛰는 삶을 살려는 주체적
삶의 의지를 표명한다. 더 많은 소유와 소비가 더 큰 행복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덜
소유하고 덜 소비하지만 더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문명전환운동의 기반이 되고 있
다. 그래서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발
견하고 남과 어울려 자연 속에 사는 삶의 양식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남성이
기 이전에 또 여성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
각한다. 둘째로 문명전환운동은 인간의 자연착취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에 기반 하는
산업사회적 삶의 양식을 거부하는 반체제운동이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문명전환운동의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것을 중앙에서 결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작은 단위로의 분권화를 주장하면서 지역을 재발견하고, 수직적이고 서열적인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수평적이고 호혜적인 인간관계를 지향하며, 획일적인 기준보다는 다양한 기준이
작용하는 다양성의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현재 우리사회에서도 생태공동체운동, 유기농산물의 도농직거래운동, 귀농운동, 지역화폐
운동, 대안교육운동, 생태여성주의운동, 동성애자운동 등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기
존의 시민운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찾는 언론매체
의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그 실체가 현실보다 크게 과장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들의 주장이 널리 확산되는 기회가 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문제는 문명전환운동이 고
립된 소수자들의 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지배문화에 도전하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인가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민운동과 대안문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영향력의 수준에서 보건대 시민운동이 대안문화운동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
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민들의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의미체계의 면에서는 대안
문화운동이 시민운동보다 훨씬 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부정부패추방, 경제정의 실현
등의 의미체계는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키
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다운 진정한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대안문화운동은 한번
시작하면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는 개종의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기
한국의 사회운동이 정치체계의 민주화의 차원과 더불어 대안문화운동의 차원을 갖게 될 때
그 의미와 영향력의 차원이 더 확대 심화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삶의 의미세계까지 파
고 들어가지 못하는 메마른 의미체계로는 전문가들과 활동가들의 운동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운동이 되기 어렵다. 시민운동이 진정한 삶을 위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안문화운동의 차원과 결합할 때 그것은 한국적 맥
락을 넘어서 지구촌 수준에서 영향력 있는 대안운동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문명전환운동은 소수의 사람들의 자기들만의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운동이 되
기 쉽다. 문명전환운동은 경쟁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의 운동이 아니다. 문명전환운동이 지배
적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좀 더 넓은 사회적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익과 공
공선을 위해 생각하고 움직이는 시민운동과 적극적으로 결합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차원의
시민운동과 문화적 차원의 문명전환운동이 합쳐짐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행위의 주체가 보다
깊은 의미체계에 뿌리내린 사회문화운동의 물결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메마른
일상의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지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대안적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거시적인 문명전환운동의 일환이 될 것이다. 21세기형 시민운동은 이
와 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문명전환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보다 장기적 전
망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형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천하며,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일구어 내는 문명전환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높게 날 수 있으면서도 지상의 일에
관여하고, 지상에서 활동하면서도 보다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시민운동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쓴이 소개: 정수복(鄭壽福)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
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다음 프랑스에 유학하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귀국 이후 연
세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환경운동연합, 경실련, YMCA등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크
리스챤 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으로 일했다. 현재 '사회운동연구소'(Center for Social
Movements Studies)의 소장인 그는 1999년 KBS TV의 "정수복의 세상읽기"를 진행한 바
있으며, 현재 CBS 객원해설위원, 「시민의 신문」논설위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로는 『의
미세계와 사회운동』, 『녹색 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단
체의 역할과 정책과제』, 『현대의 위기와 새로운 사회운동』(공저), 『교양환경론』(공저),
『한국인의 일상문화』(공저)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구조주의와 현대 마르크시즘』,『현
대 프랑스 사회학』,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 『현대성 비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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