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말의 진지’ 구축, 배제된 자들의 삶 속에서 ‘정치’ 발견하겠다”
글 김종목·사진 김정근 기자 jomo@kyunghyang.com
ㆍ실천적 지식인으로 복귀, 격월간 ‘말과 활’ 창간호 준비
ㆍ“미성숙 상태의 진보·자발적 복종에 대한 고민 담으며 즐겁게 싸울 것”
2011년 여름 어느 날 희망버스가 당도한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담벼락 밖 집회 현장에서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66)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중앙무대 뒷발치에서 홀로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곤 인사를 건네는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집회 행렬이 이동할 때는 혼자 그 뒤를 따랐다.
돌이켜보면, 그는 늘 가장자리에 머물렀던 것 같다. 재능교육, 쌍용차 투쟁 현장에서 가끔 마이크를 잡기도 했지만, 주로 자리잡은 곳은 가운데에서 떨어진 경계쪽이었다. 홍 발행인이 제안해 만든 학습 협동조합 이름이 ‘가장자리’라고 전해 들었을 때, 그 경계를 지키거나 버티던 자의 긴장된 모습이 떠올랐다.
5일 오후 서울 서교동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말과 활’ 창간호 출간을 앞둔 그를 만났다. 59.5㎡(18평)인 사무실은 방 하나, 거실 하나였다. 예닐곱명의 예비조합원들만으로도 가득 찰 정도로 협소했다. 접근성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좁은 공간에는 조합원들의 웃음과 이야기 소리가 넘쳐났다. 출발점에 선 협동조합의 활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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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발행인이 지난 5일 서울 서교동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새로 창간하는 격월간지 ‘말과 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가장자리’는 벼랑 끝 사람들이 맞잡은 연대의 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그가 머물렀던 가장자리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냥 어색해요. 가운데 하고 높은 자리는 영…. 제가 글도 못 쓰지만,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건 더 못하니까요.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말도 못해요. 깜냥이 안되는 거죠.” 자신의 가장자리는 애써 의미를 축소했지만, 학습 협동조합 ‘가장자리’의 의미는 이렇게 부여했다. “삶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벼랑 끝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이죠. 중심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중심이 점 하나라면, 가장자리는 평등한 점들이 모여 만드는 선입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맞잡는 연대의 선인 거죠.”
‘가장자리’는 이달 말 격월간 ‘말과 활’ 창간호를 낸다. 홍 발행인은 2012년 4월 진보신당 대표직을 내려놓으면서 당원들에게 ‘하방의 길을 찾아서’란 글로 인사했다. 그는 “지금 준비를 시작하려는 것은 말(言語)의 진지를 구축하는 매체의 발간과 정치·철학교실”이라고 했다. 그 계획은 1년 남짓 만에 실현 단계에 이르렀다. 모양새를 드러낸 ‘말의 진지’인 ‘말과 활’에서 말은 사유를 의미하고, 활은 실천을 은유한다고 그는 말했다. 활은 ‘활동’의 활(活)과 무기 활을 함께 뜻한다. 그가 2000년 <아웃사이더를 위하여>에 쓴 다짐과도 맥이 닿아 있다. 당시 “척박하나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고 썼다.
홍 발행인은 ‘흡연의 해방구’라고 부르는 사무실 안방에서 ‘말과 활’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술은 많이 못하지만, 담배는 열심히 피우고 있다”고 웃으며 담배 한대를 권하며 말했다. “편집 방향과 기조는 배제된 자들을 위한다는 겁니다. 오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지각한 토대에서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이야기할 거예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떨림’에 관한 것도 자주 다룰 겁니다.”
창간호에 참여한 글쓴이들의 면면과 특집, 기획에서 ‘말과 활’의 지향과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권두 기고는 슬라보예 지젝의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이다. 특집 ‘자본의 시대, 존엄을 위한 저항’에는 하종강·이창근·박점규·정진우·이혜정 등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김상봉 교수가 ‘노동자 경영권 재론’을 썼고, 이택광·서동진 교수가 기획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이다’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김진호·박권일·박병학·박성준·박형근·심보선·정희진·천정환 같은 지식인·활동가들이 두루 글을 실었다. 홍 발행인은 ‘말과 활’의 성격을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라고 소개했다. ‘종합’이란 말에는, 인간의 삶(죽음을 포함하여)과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영역과 주제에 시선을 보내고, 그 속에서 ‘정치’를 발견하려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가장자리’나 ‘말과 활’을 만들려고 한 것은 미성숙 상태인 진보의 문제와 교양 문제 때문이다. 이 문제는 노동과 정치에서 교육, 언론까지 여러 부문에 걸쳐 있다. 홍 발행인은 5일 출범한 초·중등교육 위기 진단과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 비상 원탁회의’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상황과 문제는, 세상 보는 눈을 뜨려면, 학교 교육을 통하는 게 아니라 선배를 잘 만나야 하고, 이 문제가 한국 사회 지배체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했다. 자발적 복종은 인문학적 소양, 사회문화적 소양을 길러내지 못하는 교육 문제와 이어진다. 그는 “암기하는 기계로 만드는 지금의 교육은 우리 아이들을 민주공화국의 주체로 만들지 못할뿐더러 사유하는 주체로도 대접하지 않는다”며 “학생들에게 생각을 묻지 않는 학문이 어찌 인문사회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대학 서열화는 인문사회과학마저 줄 세우는 학문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자발적 복종에 빠지게 됐다는 말이다. 조합원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생각의 좌표’ 프로그램의 첫 텍스트로 16세기 혁명적 지식인 라 보에티가 자유와 독재에 관해 고찰한 <자발적 복종>을 택한 것도 이런 문제를 같이 깨닫고 싶어서다.
미성숙 진보의 행태와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도 노동 부문이다. 홍 발행인은 범진보 세력 내 적대성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관의 세계’가 가깝기 때문에 ‘일상의 세계’에서 만나는데, 한국 사회 범진보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공동의 세계관의 극복대상’보다 더 적대적”이었다고 했다. “생태주의나 여성주의는 그것대로 유연하지 못하고, NL(민족해방)은 모든 문제가 분단과 미국 때문이라는 ‘민족주의적 전유’를 보입니다. 선배를 만나 세상 보는 눈을 얼핏 뜨는데, 그걸로 모두 이해한 것처럼 생각하고, 선배가 누구냐에 따라 정파가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참 답답했어요.” 권력 지향의 자폐적인 서클주의 속성을 보면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가 아닌지 자문했다고 한다.
홍 발행인은 노동에서의 ‘자유주의적 전유’가 심각하다고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자본은 파견법, 정리해고법 같은 포섭과 배제의 전략을 관철시키며 노동을 분할했고, 성장 위축이 불러온 충격의 절반 이상을 노동이 수렴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자유주의적 정권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는 진보를 표방한 정당, 시민사회단체, 언론에 기득권과 주류 세계의 시각이 녹아난 ‘자유주의적 전유’가 퍼져 있다고 했다.
지난 총선·대선 때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말을 아끼다 “노동자를 주체화하는 것이 정치 세력화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민주노총 상층의 권력·세력 관계에서 노동자는 우위를 점하기 위한 동원의 대상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진보신당을 탈당했던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에 대해서도 감정의 여운이 남은 듯했다. 그는 “각자 다른 길을 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둬야 했는데, (진보신당 탈당의) 방식은 온당치 않았다. 결국 세 개의 진보정당으로 나눠지지 않았나.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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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오른쪽)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서울 서교동 카페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 “당 대표는 상황의 부름에 응답… 이젠 평당원으로”
‘말과 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녹색의 가치다. 홍 발행인은 진보신당 대표로 있을 때 ‘녹색 가치의 깃발을 든 전태일’을 당의 표상으로 삼았다. 창간 대담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과 가진 것도 그 표상을 이어가려는 의지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담은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겨 시작됐다. 홍 발행인은 “‘녹색평론’의 열혈 독자”라고 했다. 출판 선배인 김 발행인은 “홍 선생! ‘말과 활’이 소문 다 나서 안낼 수가 없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그는 “왕년에 좌익 청년들 중엔 녹색활동가로 간 사람들이 많다. 좌파는 푸르게, 녹색파는 좀 더 푸르게”라며 웃었다. ‘두 발행인’은 교양의 의미, 기본소득, 노동과 성장, 인문학, 원전, 금융, 북한 문제에 관해 3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가장자리는 출판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삶과 이론, 실천을 매개하는 현장 활동도 중심 사업이다. 오는 10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30분 대한문 분향소에서 쌍용차 노동자들, 현장 활동가들과 함께 ‘홍세화가 묻다-2013 대한문, 저항을 선택하다’ 인문학 강좌를 시작한다. 홍 발행인은 “인간에 대한 고민 없이 사회과학적 성만 쌓은 것은 아닌지 돌이켜봤다. 노동 현장의 최전선인 대한문 분향소에서 자기를 되돌아보는, ‘존재의 떨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실천적 지식인으로 다시 돌아온 홍 발행인에게 당 대표를 맡을 때의 ‘정치인 홍세화’에 관한 소회를 물었다. “‘상황의 부름’에 응답했을 뿐입니다. 당원으로 남은 1만3000여명의 개인사적·역사적 궤적을 소중히 생각했어요. 그 소중함이 경멸되는 것이 참기 어려웠죠.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는데, 거북하고 계속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했어요.” ‘상황의 부름’을 다시 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너털웃음을 치며 말했다. “안 합니다. 계속 평당원으로 있어야죠. 힘도 없고요. 젊은 분들이 해야죠. 좌파정당은 현장 노동자 출신이 나서서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