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전노투와 87년 민주노동자 대투쟁의 서막 ( 새 전북신문에서) --노동자 대투쟁 의 서막에서

2023. 11. 28. 22:35소나무맨의 경력 및 활동/지나온 활동(환경노동의제)

김택천

 

 

[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

전노투와 87년 민주노동자 대투쟁의 서막


기사 작성새전북신문 
- 2006.07.24 14:19

83년 이후 학원자율화 조치로 성장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북지역 내에는 노동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정치소그룹이 만들어졌다.

당시 소그룹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학생운동 때부터 노선을 달리하는 경우였다. 이들의 차이는 노동현장조직 활동방식과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한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였다.

정치소그룹의 수준은 거의 비슷해 노동자 대중과의 결합력이나 활동력은 미비한 상태였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현장취업을 하며 노동자로서의 삶을 배우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훈련 초기에 소그룹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불심검문에 검거되면서 자취방에 있던 자료와 동료들의 명단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렵게 현장훈련을 하고 있던 활동가들이 연달아 붙잡히고 때마침 동양물산에서 동료에 의해 고발된 다른 그룹의 활동가까지 함께 엮여 이른바 전북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사건으로 조작, 발표됐다.

당시 공안기관은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벌여 수도권을 중심으로는 수십 명씩 구속하고 수백 명에게 수배를 내렸었다. 전북에서는 전주, 익산, 군산 3개 지역단위에서 현장 활동가 모임을 구성하고 그 현장 활동가 모임의 지역대표들을 중심으로 협의체 형태의 조직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준비하면서 일부는 위장취업의 형태로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곧 당시 이들의 활동은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 10여 명 정도가 정치학습을 하면서 노동자로 살기 위해 현장취업을 한 수준이었는데, 검찰은 이를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구성 혐의를 덮어 씌워 체제전복 세력으로 조작 발표하면서 전북지역의 정치적, 조직적 노동운동의 성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사건으로 전희남, 신은채, 신귀종, 노철호, 장현주, 김강수, 김인수, 이현주, 김금순 등이 구속과 수배생활을 했다. 이 사건 관련자들은 876. 29선언을 계기로 대부분이 풀려나게 되었다. 초기 과정이 그렇듯 조직적이지 못한 개별적 활동은 많은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열심히 활동했던 노동자들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기 전에 생활전선으로 돌아갔고 소위 학생운동 출신자들도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갔다.

또한 초기의 구심역할을 하였던 가톨릭노동청년회도 자기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단계로 이속되었고, 야학을 통해 의식화된 노동자들도 전망을 찾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는 주체역량을 탓하거나 탄압만을 핑계 삼을 일이 아니었다.

남한의 노동운동이 1945년 해방 이후 거의 전멸되었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기초적인 생존권마저 박탈당해왔던 역사적 조건을 고려해 본다면 80년대 초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지도구심 없이 자생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물론 박복실 열사와 같은 걸출한 현장출신의 노동자가 선진의식으로 무장하여 열정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노동야학이나 현장투쟁을 통하여 성장한 노동자들은 허허벌판에서 몸뚱이 하나로 싸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노동자들은 거대한 국가권력의 탄압을 이겨낼 무기와 힘을 지니지 못했다. 더구나 농민운동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전북지역에서 노동자의 존재는 가려져 있었고, 학생운동 출신의 지식인 활동가를 제외하고는 노동운동에 관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87년 이전의 민주노조운동의 경험조차 없었던 노동자들은 무엇이든 처음부터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고, 이것저것을 시도하면서 역량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눈물겨운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삶이었고, 이름없이 역사를 만들어 온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노동운동의 구심과 조직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시도하는 사이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다가왔다.

87년이 되자 전북 노동자들은 한순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86년 봄, 신민당의 개헌현판식을 계기로 해 활력을 찾고 있던 차에 876월 민주항쟁이 활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 중에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일용공노동자, 독재정권에 불만을 가졌던 선진노동자들은 누군가가 외치는 구호를 힘차게 따라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들은 연일 계속되는 가두행진에 참가해 전경을 향해 돌을 던지고 쏟아지는 유인물을 받아 집집마다 돌리면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공장 내에서도 거리시위에 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분명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거리에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해도 국가권력은 침묵하였으며 불어나는 인파 속에서 노동자들은 우리도 데모를 하자.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태우의 기만적 6. 29선언으로 전국이 조용해졌을 때,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일순간에 들고 일어났다. 전북지역은 택시기사들의 파업으로 878월 노동자대투쟁의 경종이 울려퍼졌고 공장마다 노동조합 설립과 임금인상투쟁이 전개됐다.

전주시내 27개 택시회사소속 운전기사 250여명은 8787일 사납금 인하 등을 요구하며 운행거부와 함께 시위를 벌였다.

7일 새벽부터 전면 운행을 중지한 전주시내 27개 택시업체 가운데 22개 업체 운전기사들은 이날 오전 10시 전주시 덕진동 전북택시운송 사업조합에 모여 원일기업은 노조가 회사측에 제시한 13개 조항을 전면 수용할 것택시사업조합 이사장 및 임원은 모두 퇴진할 것사업주는 단체협약 및 임금 협정에 성실히 응할 것 등 3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5개 회사가 가세한 27개 업체 운전기사 대표 250여명이 팔달로를 따라 가두시위를 벌이며 전주시청 앞 광장에 도착, 연좌농성을 벌인 뒤 다시 전주시 덕진동 택시운송 사업조합까지의 가두시위 등 8시간 동안의 빗속시위를 계속 벌이기도 했다. 전주시내버스와 전주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도 대다수 기사들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 이날 오전 6시부터 운행을 거부한 채 농성에 들어갔다.

이로써 전주시내 개인택시를 제외한 영업용택시, 시내버스, 시외버스까지 완전운행이 중단됨으로써 결국 10일 오전 6시를 기해 전주시내 대중교통수단이 사실상 마비됐다. 그러던 중 군산시내 12개 택시 390여대도 12일부터, 익산시내 11개 택시회사 영업용택시 317대는 19일 오전 6시부터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운행을 전면중단했다.

이들 택시회사 노동자 668명은 각 회사별로 기본급 24만원, 상여금 4%지급 완전월급제 12교대 실시 등 10개항을 요구하며 19일 오전 6시부터 각 회사 사무실에서 요구사항이 전면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운행 중단, 농성에 들어갔다.

87년 노동자투쟁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없었던 조건에서 세 도시(전주, 이리, 군산)노동자의 집으로 상담과 지원요청이 쏟아졌다. 몇 명 되지 않았던 실무자들은 때마침 현장투쟁과 전노투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지식인 활동가들과 기존의 JOC 회원들과 결합하여 민주쟁취 전북노동자 공동대책위를 구성해 전북노련이 결성되기까지 공장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원했다.

8월 택시기사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소식은 삽시간에 공장으로 퍼져 8월초 군산의 우민주철, 이리 동양물산 등에서 연일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개되었다. 공장이 있는 곳이면 한 번씩 파업을 경험할 정도로 9월까지 파업투쟁은 연일 진행되었다.

군산의 세풍합판, 세풍제지, 우민주철, 군산여객, 우성여객, 서안주정과 이리의 동양석재, 이리모방, 김제의 풍원제지 등에서는 파업현장에서 노조를 결성했다.

신규노조들은 노동조합간의 정보교류의 필요성과 노조활동의 발전을 위한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동자의 집주선으로 101178개 노조대표자간의 만남이 이루어져 1268개 노조대표자들이 모여 전북민주노조연합회를 결성하게 됐다.

전민노련은 이후 88820일에 결성된 전라북도 노동조합 연합회결성으로 이어져 노동운동의 중심조직체가 됐다.


[김택천씨 인터뷰]

“80년대 중반 당시 도내 택시기사들의 근무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이직율이 60%를 넘을 정도의 최악의 노동환경이 87년 전북지역 노동자 대투쟁의 시작이 택시노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이었다.”

1987년 민주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을 알린 도내 택시노조 파업의 중심에 섰었던 김택천씨(52·지방의제21 전국협의회 사무총장·사진). 당시 택시기사이자 전북택시노조의 노보 편집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했던 그는 당시 11차제에 따른 하루 16시간의 근무와 사납금제, 에어컨도 자비로 마련해야 하는 열악한 근무여건으로 고통받던 기사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이처럼 도내 택시업계의 노동환경은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훨씬 열악했고 결국 이것이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됐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전주고) 졸업 후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86년 전주교통 직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노조설립을 추진했다. 876월 원일기업·조양교통을 시작으로 9월까지 전주시내 26개 택시회사중 20개 회사에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파업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갔다. 878월 각 회사노조 대의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파업 찬반투표에서 98%에 달하는 찬성으로 파업이 결정됐고 월급제 전환 등 123건에 달하는 단체협약건이 채택됐다.

그는 당시 파업이 결정된 후 낮부터 노조원들이 시내 곳곳에서 파업동참을 호소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노조 집행부는 각 회사를 돌며 유인물을 배포했고 규찰대들은 차를 끌고 나온 기사들을 설득하기도 했다하지만 운행을 강행한 일부 비노조원·개인택시 기사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파업 3일째 날, 노조원들이 운행중이던 140여대의 차량을 전복시킬 정도로 파업 분위기는 과격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8월 중순께 다가공원에서 노조원 1,4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결의대회가 열리면서 파업이 절정으로 치달았다는게 그의 설명. 노조원들은 정부규탄과 단체협약 이행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한 후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후 관통로 사거리와 종합경기장까지의 시위 과정에서 운행중이던 일부 택시가 파손됐고 노조원들은 현 한국노총 자리에서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경찰들은 전동성당 진입과정에서 노조원들과 충돌한 것을 제외하고는 노조원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이때 택시노조의 첫 파업은 평균 한달 이상 지속됐는데 서울, 부산 등지에서 단체협약이 잇따라 타결된 후 사측과 단체·임금협약서를 작성하고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사측에서는 개인택시를 주겠다는 등 여러 당근으로 노조 간부들을 집요하게 회유했었다이런 어려운 여건속에서 진행된 택시파업은 이후 해마다 사측과 노조간에 임단협을 가능하게 한 계기가 됐다. 또한 택시기사들이 노동자로서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인식하게끔 돕는 소중한 역할도 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그는 93년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한 이후 사회운동가로 변신해 활동하고 있다.


[전희남, 허정씨 인터뷰]

“80년대 중반 당시 많은 학생운동 출신자들(학출)이 각 노동현장에 진출했었다. 이들은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주도하면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어내는 시금석 역할을 했다.”

지난 1980년대 초께 학내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학교(전북대)에서 제적당한 후 공장에 취업, 노동운동을 벌였던 전희남(45·민주노동당 전북도당 부위원장허정씨(45). 이들은 86년 이른바 전북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 사건에 연루되면서 각각 경찰에 구속되거나 수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동양물산에서 일하던 전희남씨는 872월 익산에서 체포돼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은 후 전주교도소에 수감됐었다. 그는 당시 전노투 사건은 정권 말기에 이르러 시민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명백한 조작사건이다이적단체의 구성요건인 운동강령이나 규약조차 없고 단순하게 모여서 노동법을 공부하던 정치학습 모임을 이적단체로 몰아 조작, 발표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주·광주교도소에서의 6개월간의 수감생활에 대해 “30분을 버티지 못한다는 이른바 비녀꽂기라는 고문을 2차례에 걸쳐 받은 적이 있다. 이후 관절이 상해 두 달간 걷거나 화장실도 못갈 정도로 후유증에 시달렸고 치료를 위해 똥물까지 먹어야 했다나는 검찰의 그림(조작)이 어느 정도 나온 상황에서 잡힌 거라 이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초기에 체포된 다른 동료들은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과 인권유린에 시달려야만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한 전노투 사건은 도내 PD(민중민주주의 계열)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전까지 도내 노동운동은 섬유공업이 발달한 익산과 전주, 군산이 중심이었지만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학출에 대한 일반 노동자들의 거부감 등으로 인해 이들과의 자생적 결합도 상당히 어려웠다. 특히 10여만원 안팎에 불과했던 낮은 임금수준과 가혹한 노동 등 현장에서의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허정씨는 이처럼 일 자체가 힘들다보니 일반 노동자들에 대한 의식화는 최소 1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힘들었다하지만 노동상담소 등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찾기나 의식전환을 위해 노력한 덕분에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씨를 당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도피생활을 하다 87년 경찰에 자수한 허정씨와 전희남·신은채씨 등 전노투 사건 연루자 10여명은 지난 2004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또한 전희남씨를 비롯해 허정·신은채씨 등 3명은 최근 모교인 전북대로부터 명예졸업자로 인정돼 20여년 만에 졸업장을 받게 됐다.

/전준형 기획의원, 한재일 기자 hji@sj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