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 ②] 부자간 세습은 거부감 일으키지만, 딸의 세습은 부정적 이미지 희석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친구는 게이코 후지모리가 끝내 페루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게이코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피와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반여성주의자야. 뭐, 그래서 지지자가 많긴 하니까 대통령은 되겠지… 게이코가 당선되면 페루 민주주의와 여성인권은 크게 후퇴할 걸." 친구와 대화를 한창 나눈 2012년 9월은 우리나라도 제18대 대선을 석달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일 때였다. 특히 박 후보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 구호를 앞세워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표를 모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게이코와 박 후보가 꽤나 겹쳐보여서, 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후보도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여성들에게 표를 얻고자 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자 친구는 "응, 박 후보는 그래서 12월에 대통령으로 선출될 거야. 다만, 여성들 지지 때문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지지자들 덕택에 말야. 여성주의자들은 게이코와 박근혜를 싫어하니까"라고 답했다. 그 해 12월 박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록 그는 비선실세 국정논란 등 여러 혐의로 2017년 3월 탄핵됐지만, 어쨌든 그 전까진 대통령으로서 △구미시 상모사곡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옆에 새마을공원을 짓는 사업 추진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새마을 운동 되살리기(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새마을운동은 개도국 개발협력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새마을운동으로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발판을 마련했듯이 이런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언급) 등에 나섰다. 이 같은 이유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을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꾀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사례는 많다. 페루 전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도 이 사례에 해당하고,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딸 마리아 이멜다 마르코스,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 파키스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르티 전 대통령도 이에 해당하는 사례로 꼽힌다. 딸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 알렉산드라 무솔리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그들의 남아있는 지지세력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들은 '독재자의 딸'이자 '여성 정치인'인 이들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바라볼까. 여성주의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만큼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의견은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이들을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문화적·사회적 개념인 '젠더' 측면에서는 여성이 아니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모린 머독이 분석했던 유사남성처럼 말이다. 이들의 아버지들은 권위주의 체제하 비주류 세력의 권익을 묵살하고 오히려 인권을 탄압했다. 자연히 이들 체제에선 여성 역시 눈요깃거리나, 술자리에 필요한 장식 정도로 전락했다. 즉 이 같은 상황을 보고 자랐음에도 '독재자의 딸들'은 아버지에 본인을 투영했기에, 소수자로서의 여성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젠더로서의 여성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여성학자 정희진도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박근혜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면서 "그의 정체성은 '공주'이지 여성이나 시민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또 강제 불임수술은 사전 진료·진단 없이 이뤄졌고, 후지모리 행정부는 거부할 경우 의료혜택을 박탈하겠다는 협박까지 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페루의 안데스 및 아마존 원주민 여성기구(ONAMIAP)에 따르면 불임시술 과정에서 2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불임수술 정책으로 1990년 여성 1명당 3.7명이었던 출산율이 10년 뒤 2.7명으로 떨어져 후지모리가 원하던 성과는 얻어냈지만, 인권은 퇴보했다. 소모스 2074는 "게이코는 불임수술이 자행되던 때 영부인을 대행했다"면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여성인권은 퇴보할 것이다"라면서 허벅지에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 페인트와 자궁으로 디자인 된 벨트를 착용하고 거리를 행진했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여성권을 비롯 인권 운동가들의 반대에도 3수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답은 2021년 대선에서 나온다. 그의 동생 겐지 후지모리 의원이 2021년 대선에선 누나에게 도전해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선전포고한 상태지만, 무슨 일인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게이코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겐지 의원의 부패 스캔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인 정당 '민중의 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해왔는데, 지난 6월 겐지 의원은 부패 혐의로 의원 자격을 정지당했다. 그는 자신의 혐의는 누나 게이코의 공작이라며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게이코가 여성이라 반감이 더 적은 것도 이유다. 이에 대해 정희진 여성학자는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기 용이한 이유는, 부자간 세습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딸의 세습은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첫 '생물학적' 여성 대통령이었다. 아마 페루에 탄생할 첫 생물학적 여성 대통령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게이코가 될 것같다. 젠더적 '여성' 대통령이 나오긴 어렵지만, '독재자의 딸'은 대통령 필승 키워드니까. 민주주의 불모지, 페루에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 참고문헌 페루 아시아계 이주민의 정치적 성공과 인종 갈등: 후지모리 사례를 중심으로, 중남미연구, 박윤주 페루 대통령 선거 결과와 향후 경제정책 전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미숙 페루 정당체제의 탈제도화와 민주주의의 지연, 라틴아메리카연구, 김유경 페루의 이중적 부패 구조와 반부패정책의 한계, 글로벌정치연구, 김유경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①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