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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 vs 한국 7대 불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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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 vs 한국 7대 불가사의                                                                        

2013.10.0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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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콜로세움


세계 7대 불가사의

이곳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곳이라고 합니다.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져있는 건축물인데요.이곳은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배경이되기도했었다고 합니다. 또한 죽음을 의미하고있는 패배와 삶을 의미하는 승리의갈림길에서도 필사적으로 싸웠을 검투사들이 떠오르기도합니다.

  
마추피추 
세계 7대 불가사의

잉카문명의 보고 마추피추도 많이 알려져있는 곳입니다 뮤네스코 세계 유산의 목록에도 포함이되어있습니다. 

타지마할

세계 7대 불가사의

이곳은 세계 관광코스로도 유명한곳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궁전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이곳은 무덤이라고 합니다. 순백의 대리석이 태양 각도에 따라서 색깔이 다양하게 빛이난다고 합니다
 
페트라

세계 7대 불가사의

.페트라는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요.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었다는게 정말 믿겨지지않습니다 현대 도시 저리가라 할 정도로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있다고 합니다.


치첸이트사 
멕시코 유카탄반도 북서부의 도시 메리다의 동쪽 약 110km 지점에 있는 마야문명의 대유적지.
치첸,욱스말,마야판 3개 도시 사이에 동맹을 결성을 하게되었는데요.13세기 무렵에 마야판에서는 멸망을 당하면서 치첸인이 흩어지면서 도시가 폐허가되었다고 합니다.
 
브라질 예수상

세계 7대 불가사의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하면서 100년을 기념하면서 세운 탑이라고 합니다. 완성이된지 100년도 되지않았다고 하는데요. 높은곳에서 정교하게 만든 예수상을 보면 건설된지 그리 길지않은 흘렀을데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뽑힌 이유가 있겠죠?
  
만리장성

세계 7대 불가사의

이름부터 거창한 만리장성은 북쪽 흉노족이 침입을하지못하게 하기위해서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았다는 산성이라고 합니다. 만리상정에 쏟아 부은 중국 역대 왕조들의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실효성은 떨어진다는 의견도있습니다. 





『한국 7대 불가사의』

『한국 7대 불가사의』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관측했음을 보여주는 고인돌 별자리, 금 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한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유물인 신라의 황금 보검, 지름 21센티미터의 청동 거울로 그 안에 0.3밀리미터 간격으로 13,000개의 가는 선을 새겨 넣은 다뉴세문경, 말과 기사 모두 철갑으로 무장시킨 고구려의 개마무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 최초로 화포를 선박에 장착한 고려 수군의 함포, 전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문자 체계로 인정받는 훈민정음 등 당시의 지식과 기술 수준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했을 7가지 유산을 역사적, 과학적, 문헌적로 증명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준다. 

<고인돌 별자리>

고대 문명사에서 천문학의 발달 여부가 중요시되고, 기원전 1200년경에 하늘을 관찰했음을 보여주는 바빌로니아 토지 경계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이나 앞선 천문도가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발견되었다.
고인돌에 새긴 천문도는 주로 평양의 고인돌에서 발견되는데, 그 수가 200여 기에 이른다. 고인돌 뚜껑돌에 새긴 홈 구멍이 천문도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이 홈 구멍에 대한 견해가 분분했다.
고인돌에 새긴 홈 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학자들은 널리 알려진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이 '성좌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한 돌에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이는 고인돌이 현대 과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당신의 최첨단 과학 기술 정보를 돌 위에 새긴 것으로 우리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획기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신라의 황금보검>


황금 보검에서 보이는 나선무늬는 통칭 그리스 소용돌이무늬라 일컫는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테두리 무늬로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 등 연속 번개무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동부 유럽의 켈트 지역에서 제작한 이 보검이 정작 발견된 곳은 경주의 대릉원이다. 두 지역 사이의 거리는 약 7천 킬로미터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경험한 현대인의 거리 감각으로는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데 황금 보검은 수천 킬로미터를 넘어 경주의 지배자에게 전달되었다.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비교 검토한 후 그들은 다소 설명이 빈약하기는 하지만 훈족은 원류가 아시아의 최동단,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런 사실은 신라와 훈족의 지배자가 충분히 연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훈족의 지배자 중에서도 395년에 태어나 453년에 사망한 아틸라는 훈족의 왕으로서 세계 3대 제국 중 하나를 건설한 영웅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아틸라의 근거지가 황금 보검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는 트라키아 지역으로 현재 헝가리라는 점이다.
아틸라의 비롯한 훈족의 주력 세력이 한민족과 친연 관계가 있다면 동로마제국에서 만든 황금 보검이 신라로 전해졌다는 추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는 신라가 동방의 고립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당대의 어느 나라보다도 세계성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뉴세문경>


1960년대 충청남도 지역에서 발견된 다뉴세문경은 기원전 4세기 무렵 청동기 시대에 만든 거울로 '청동기 시대의 불가사의'로 꼽힌다.
이 거울의 뒷면에 새긴 세문 디자인을 찬찬히 살펴보면 누구나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동심원과 선, 삼각형, 사각형을 활용한 섬세한 디자인은 기원전 4세기경에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뛰어난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다뉴세문경의 크기는 지름이 21.2센티미터에 불과한데, 이 좁은 공간에 무려 1만 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이 새겨져 있다. 이 정도의 정밀함과 섬세함이라면 현대의 숙련된 제도사가 확대경과 정밀한 제도 기구를 이용해 종이를 그린다고 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뉴세문경은 그 아름다움과 불가사의함으로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매료시켰고, 이들로 하여금 그 복원 작업에 도전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그 복원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1세기 한국 최고의 두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과학기술원도 다뉴세문경의 복원 프로젝트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기원전 4세기경에 다뉴세문경을 만들어낸 우리 선조들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


고구려의 중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구려가 앞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해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갑옷을 입힌 말을 이르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 했다. 오늘날 우리는 개마무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지만,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달리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단어는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말조차 강철 장비로 무장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한다면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기병은 물론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당시에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철기 문명 수준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구정광대다리경>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보 126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은 아직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다라니경은 인류의 3대 발명 중 하나인 인쇄술이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입증하는 유물이다.
인쇄술 덕분에 정보의 신속한 전달이 가능해졌다. 신속성의 차이 외에 정확성의 차이도 눈에 띈다. 손으로 쓰는 글씨는 틀린거나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인쇄술을 이용해서 읽기 쉬운 글씨체로 올바르게 여러권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
대량생산된 책은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정보의 신속하고 정확한 전파를 통해 인류가 축적한 지적 자산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더 높은 창의력을 촉발했다. 
706년 인쇄된 다라니경의 발견은 인쇄술이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기존 학설의 수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기존에 중국 당나라에서 인쇄술이 발명되었다고 추정하던 시기가 712년에서 756년 사이임을 고려하면 다라니경의 발견이 세계의 학자들, 특히 중국 학자들에게 던진 충격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수군의 함포>
최무선은 고려 말에 화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이후 계속해서 화포를 만들고 이를 고려 수군의 전함에 정착하여 왜구를 상대로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마도 정벌에도 나섰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포해전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서양 역사에서 토 해전 이후 함포가 장착된 함대로 해상권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며,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간다.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침탈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함포 외교이다.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190년이나 앞서, 최무선은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 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인다.
200년 후 최무선의 화약 무기와 함포 전술을 그대로 계승한 조선의 수군이 임진왜란에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당대에 최무선이 창안한 함포 전술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



1940년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책 한권이 발견되었다. 이 책에는 한글에 관한 많은 의문점을 풀어줄 수 있는 설명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이 없다면 한글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만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가치가 큰 만큼 1962년 12월 국보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책이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책이다.
놀라운 것은 세계의 문자 중에서 한글처럼 창제자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한자는 물론, 영어의 알파벳도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으므로 창제자를 찾을 수 없다. 한글이야말로 창제자와 창제일, 창제 동기가 뚜렷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문자이다.
 
- 역사의 아침 『한국 7대 불가사의』中에서 -


대한민국 불가사의의 나라다.  

한반도 자체가 지구의 혈

대한민국 자체가 미스테리입니다. 지구의 혈 자리라는 것을 밝히신 분은 증산도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한번 들어볼까요 ? 


"지구의 혈은 어디인가?바로 우리나라다. 헌데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가 지구의 혈이냐? 내 그걸 하나하나 따져 주겠다. 부산 태종대에서 보면, 날 좋은 때는 일본 구주九州가 다 보인다. 그만큼 바짝 우그러졌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이렇게 감싸주고 있는 일본이 바로 좌청룡, 내청룡이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이 외청룡이다.
또 중국대륙에서부터 저 싱가포르까지가 우백호, 내백호다. “청룡은 비상飛上하고, 청룡은 나는 것같이 보이고, 백호는 순복順伏해야, 백호는 순하게 엎드려 있는 것 같아야” 지리가 되는 법인데, 중국, 그 백호가 오죽이나 실한가. 아주 만첩백호다. 그게 바로 내백호다. 또 저 아프리카가 외백호다. 아프리카는 50여 개국에 약 6억 인구가 산다. 그렇게 지구의 모든 나라가 좌청룡 우백호로 우리나라를 감싸고 있다. "

진안 용담댐 불가사의



용담이란 '용 용(龍)'자에 '못 담(潭)'자를 쓰는 지명으로, '용이 자리를 틀고 있는 못'이란 뜻입니다.용담면에 살던 주민들은 왜 이곳의 지명이'못 담'자가 들어가는 용담인지 의문스러웠다고 합니다. 주위에 못은 없고, 안천과 주천, 정천이라는 작은 강이 흐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1992년부터 댐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댐이 완공되면서 금강 상류에 댐과 함께 거대한 연못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은 이곳의 지명을 깊은 연못을 뜻하는 '담(潭)'자가 들어가도록 지은 선인들의 선경지명에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댐이 완공되고 수몰 지역에 물이 차오르자 용담이라는 말 그대로 용의 형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용담댐을 내려다본 조종사의 입에서 나온 증언입니다 . 즉 하늘에서 용담댐 주위를 내려다보면 이 계곡 저 계곡으로 물이 굽이굽이 차오른 것이 마치 힘차게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 놀랍죠?
 
 해돋이 명소 간절곶(艮絶串)의 신비한 유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해가뜨는 곳 울산 간절곶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에 ‘간절곶’이 있습니다. 간절곶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일원의 바닷가입니다. 간절곶 등대 주변의 이 지역은 바다로 불쑥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넓습니다.  
간절이란 명칭은 어부들이 먼 바다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긴 간짓대(대나무로 된 긴 장대)처럼 보여 간절끝(艮絶)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간절곶에는 간절한 사연을 보낼 수 있도록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망우체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간절곶의 한자를 유념해서 보지 않습니다. 그저 간절하다 할때의 간절인줄 압니다. 그런데 실제 간절하다 할때의 한자는 懇切이지 간절곶의 艮絶은 아닙니다. 
간절곶을 알려주는 교통 표지판에는 한자가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간절곶의 실제 유래는 더 심오합니다. 
그러면 간절곶艮絶串의 실제뜻은 무엇일까요?  간절곶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우주변화의 원리를 통달했던 선인(仙人)들의 소위(所爲)입니다. 간절곶의 간(艮)은 간방을 뜻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간절(艮絶)은 간방이 여기에서 끊어진다, 끝난다는 뜻입니다. 즉, 간방의 기운이 일본으로 넘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끝난다는 것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 조상님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습니다. 

천부경 

천부경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이법과 하늘의 우주 통치법의 기본정신을 그린 하늘문자. 그 상징 언어로 내려주신 경전이 천부경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전하는 구어. 인류 문화사는 언어의 발전사다. 마음과 마음으로, 마음의 진리 정신을 형상화한 최초의 문자다. 

   
동서인류문명은 바로 이 그림한장에서 탄생한 것이다. 천부경은 동서 4대문명권 지금은 5의 문명, 요하문명, 북방문명, 다른 말로 홍산 문화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요하문명이 동서 4대문명을 탄생하게한 시원, 진정한 원형 문화다. 그래서 그 문화를 만든, 이 창세문명의 원형정신이 바로 이 그림 한장 천부경에 담겨있기 때문에 천부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잇다는 것은 인류의 뿌리문화, 문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문화 창조의 혼을 되찾고 이를 확인하고 이것을 직접 81자 천부경전속에서 체험하는 일이다. 이렇게 정의를 해볼 수가 있다. 천부경은 이 글이 주로 수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류문화가 수와 더불어 탄생을 했고, 수학으로써 인간의 문화와 역사가 함께 발전해왔다. 천부경은 우리 한민족과 동서 4대문명의 시원, 근원, 뿌리가 되는 최초의 나라 환국에서 탄생했다. 삼성조 역사문화의 근본을 깨달아가면서 내 몸 속에서 체화되어 가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깨달음의 경계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볼 수가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역주자 안경전 천부경 강독 중에서 발췌 >

하나님 강세를 예비한 금산사 미륵전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 자락의 금산사. 이곳은 인간으로 강세하신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과, 상제님의 수석성도이자 9년 천지공사의 식주인이며 대두목의 상징인 김형렬 성도의 자취와 숨결이 서려있는 증산도의 성지입니다 또한 미륵불이신 상제님을 친견하고, 상제님 강세를 준비하며 미륵전을 창건한 진표대성사에 관한 역사적인 일화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미륵전의 창건과 역사
 금산사 미륵전은 진표대성사가 미륵불의 계시를 받고 중창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50년 전(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는 금산사 숭제법사에게 사미계(불교의 십계)를 받은 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했습니다. 공부를 마치던 날 문득 천안이 열리고,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어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며“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다니.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이로다.”하고 찬탄하였습니다 이후‘밑없는 시루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4년에 걸쳐 금산사에 미륵전을 완공하게 됩니다.
 
 미륵전이 있는 자리는 원래 용소(龍沼)라는 깊은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상제님께서 진표율사에게 그 용소 자리에‘나를 그대로 받아 세우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진표율사가 아무리 흙으로 연못을 메우려 해도 메워지지 않았다. 궁리 끝에 온 사방에 눈병을 퍼트리고는 숯을 들고 와 금산사의 용소에 붓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깨끗이 낫게 하니 마침내 숯으로 가득 메워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1987년에 한 토건회사에서 공사를 하려고 땅을 팠을 때도 숯이 나왔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밑없는 시루의 비밀 
미륵전 앞에는 돌로 만든 연화대(蓮花臺)가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보통 이 연화대라고 하는 연꽃 풀방석 모양의 돌 위에 세우는데 금산사 미륵불은 특이하게도 밑 없는 커다란 시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유인즉 진표율사가 처음에 돌로 된 연화대 위에 미륵불상을 세우려 했는데, 자고 나면 미륵불상이 다른 곳으로 나가 떨어져 있고 또 제자리에 갔다 놓으면 다음날 다시 다른 곳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진표율사는 왜 이런 조화가 생기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밑 없는 시루를 받침대로 하여 미륵불상을 세우게 됩니다. 연화대가 불상을 받치지 않고 외딴 곳에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은 어느 절에도 없는 금산사만의 독특함입니다. 시루 위에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 것은 증산 상제님의 존호인 시루 증(甑) 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곧 ‘시루’에는 설익고 미완성된 선천의 모든 문명을 총체적으로 익히고 성숙시켜 만사지(萬事知) 문화를 연다는 도적 비의(秘意)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마이산 1억년의 비밀
말의 두 귀 모습을 한 바위산과 기묘한 돌탑을 보기 위해 전북 진안의 마이산도립공원을 찾는 사람은 한반도가 생긴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토목공사’ 흔적과 만나게됩니다. 자연은 시공자가 되어서 돌과 모래와 같은 원자재를 비벼서 만든 ‘천연 콘크리트’로 수 km 거리를 2000m 두께로 쌓았습니다. 지하 8000m에서 단단한 바위로 굳힌 뒤에 주변보다 400m  이상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비바람과 얼음의 힘으로 장기간 깎아내는 것입니다.  마이산의 두 봉우리는  세계 최대 역암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약 1억년 전 진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마이산의 신비, 위로 크는 고드름 이야기 
마이산 안에서 겨울철 정화수를 떠 놓으면 사진같이 얼음기둥이 하늘로 솟아 오르는 역고드름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는 다른곳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마이산만의 신비한 현상이며 특히 은수사와 탑군 주변에 그런 현상이 자주 일어 나고 있습니다. 

마이산의 산주 이갑룡 처사는 생전에 상제님을 뵙게 됩니다. 그 과정이 증산도 도전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정성 기도 중에 마이산을 계시 받은 이갑룡

4   임실 사람 이갑룡(李甲龍)은 경신생(庚申生)으로 본명은 경의(敬義)요, 호는 석정(石亭)이라. 
5   열여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3년 시묘살이를 하다가 산의 영기(靈氣)에 크게 감응되어 
6   시묘살이 후 백두에서 한라까지 전국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3·7일 기도를 올리니라. 
7   이 때 갑룡이 ‘나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러 나온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기도에 정진하더니 
8   하루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기도 드릴 때 혼몽 중에 두 봉우리가 선연하게 보이니라. 
9   그 후 마이산에 가 보니 그 기이한 산세가 꿈에 보았던 바로 그곳이거늘  10  갑룡이 마이산에 자리잡고 공부를 시작하니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더라.     (증산도 道典 5:89)



마이산에 계실 때 
1  상제님께서 마이산에 가시면 7일 정도 머무르시며 많은 공사를 보시는데 때로는 마이산신을 불러 공사를 행하시니라. 2  이 때 갑룡이 진지를 대접하고자 하나 자신도 산초장에 참기름을 넣어 먹고사는 형편이라 곤궁하여 진지 올리기를    송구스러워하니 “그냥 내어 오라.” 하시어 함께 드시니라. 

갑룡과 함께 공사 보심 
8  갑룡이 상제님을 모시고 어두운 밤길을 갈 때면 상제님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빛이 나와 험한 산길도 어려움 없이  가게 되니 상제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더라.       (증산도 道典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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