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01 06:14
동양학자 조용헌은 이를 ‘영지(靈地)’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뭉쳐 있는 장소가 영지고,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몸으로 그 기운을 느꼈다는 것이다.
‘휴휴명당(休休明堂)’은 ‘도시인이 꼭 가봐야 할 기운 솟는 명당 22곳’이라는 부제로 전국의 영지를 소개한다. ‘기운이 솟는다’는 말을 “남자한테 참 좋은데”라는 광고 카피만큼이나 근거 없는 낙관이라고 냉소하는 편이지만,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여행을 떠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일상 탈출, 아름다운 풍광, 낯선 인연에의 기대. 하지만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이런 시각도 있다.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 조용헌이 소개하는 명당 22곳은 대부분 사찰이다. 1600년 전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이 땅의 영지들은 대부분 불교 사찰로 흡수됐다. 산이 내뿜는 영기를 상징하는 산신(山神), 물이 지니는 영기를 대표하는 용왕(龍王),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영기의 칠성(七星). 불교의 시각에서 전국의 사찰을 소개한 책은 적지 않지만, 도교와 선(仙)의 시선으로 한국의 대표 사찰과 암자를 풀어낸 책은 드물다. 기운이 솟는다면 그것대로 또 고마운 일이지만, 그보다는 이런 흔하지 않은 자료와 시선으로 쓴 암자사(庵子史)요, 영지사(靈地史)라는 점에서 더 매혹적이다.
가령 보리암에는 간성각(看星閣)이 있다. 말 그대로 별을 바라보는 건물이라는 뜻. 별에서 에너지가 온다고 믿었던 학파가 도가다. 겨울 남쪽 하늘에 뜨는 별이 노인성(老人星)인데, 보리암의 간성각은 바로 노인성을 바라보는 도가의 풍습을 담은 이름이라는 것.
장성 백양사 약사암(藥師庵)은 민초들이 찾아간 약방이었다. 약사암의 바위는 희귀한 흰색. 봉우리 이름도 백학봉(白鶴峯)이다. 풍수에서는 백학봉 산세를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이라 했다. 신선이 독서하는 형세라는 것. 약사암 옆에는 영천굴(靈泉窟)이 있다. 신령스러운 샘물이 나오는 굴이다. 땅의 기운, 물의 기운이 모두 병을 낫게 하는 곳이니, 약사암일 수 밖에.
땅과 길을 직접 찾아 걸으며 공부한다고 자타칭 ‘강호(江湖) 동양학자’다. 강호 동양학자 조용헌이 이 책에 열거한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독만권서(讀萬卷書) 이후에 행만리로(行萬里路)하라고 했다. 무릇 군자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걸은 후에 세상을 논하라는 것이다. 원래는 명나라 서예가 동기창이 서화에서 향기가 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권했다는 화가(畵家)의 철학이지만, 인생의 철학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물며 이 휴가철의 실천 강령으로서야.
22곳 영지(靈地)를 글로 읽고 직접 밟는 ‘독만권서 행만리로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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