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가 말하는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

2015. 6. 18. 18:18이런저런 이야기/다양한 세상이야기

 

 

 

한비가 말하는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

 

 

1. 법(法)을 소홀이 하고 음모와 계략에만 힘쓰며 국내정치는

어지럽게 두고 나라 밖 외세(外勢)만을 의지한다.


2. 상인들은 나라 밖에 재물을 쌓아두고 대신들은 개인적인 이권만을 취택한다.


3. 군주가 누각이나 연못을 좋아하여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蕩盡)한다.


4. 간연(間然)하는 자의 벼슬이 높고 낮은 것에 근거하여 의견(意見)을 듣고

   여러 사람 말을 견주어 판단하지 않으며 듣기 좋은 말만하는

  

사람 의견만을 받아들여 참고(參考)를 삼는다.


5. 군주가 고집이 센 성격으로 간언은 듣지 않고 승부에 집착하여

 제 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한다.

6. 다른 나라와의 동맹(同盟)만 믿고 이웃 적을 가볍게 생각하여 행동한다.


7. 나라 안의 인재(人才)는 쓰지 않고 나라 밖에서 온 사람을 등용(登用)하여

 오랫동안 낮은 벼슬을 참고 봉사한 사람 위에 세운다.


8. 군주가 대범하여 뉘우침이 없고 나라가 혼란해도 자신은 재능(才能)이 많다고

 여기며 나라 안 상황에는 어두우면서 이웃적국을 경계하지 않아

반역세력(反逆勢力)이 강성하여 밖으로 적국(敵國)의

 힘을 빌려 백성들은 착취하는데도 처벌하지 못한다.


9. 세력가의 천거(薦居) 받은 사람은 등용되고, 나라에 공을 세운 지사(志士)는

내 쫓아 국가에 대한 공헌(公憲)은 무시되어 아는 사람만 등용한다.


10. 나라의 창고는 텅 비어 빛 더미에 있는데 권세자의 창고는 가득차고

 백성들은 가난한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이득을 얻어

반역(反逆)도가 득세하여 권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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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 한비자(韓非子)매일경제|입력2012.02.17. 17:05

실천적 정치이론 집대성…시공초월 제왕학의 고전

기원전 3세기 무렵 한(韓)나라.

말더듬이였지만 논리와 문장이 빼어난 한비(韓非)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살았던 한나라는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 가장 힘이 약했다. 진ㆍ송ㆍ오ㆍ촉ㆍ위ㆍ제 등 강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한나라는 약소국의 비애와 울분을 삼키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비는 이런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공허한 유학에 매달려 경전이나 읊조리고 있는 한나라 왕을 계도하고 싶었다. 한비는 군주가 법(法)을 바로 세우고 그것을 강력한 힘으로 지켜나가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법가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수차례 진언을 했으나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비는 붓을 들어 책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이 '한비자(韓非子)'다.

'한비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뛰어넘는 냉혹한 현실 정치 서적이다. 그러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이다.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大臣)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에 상을 내리는 데 필부도 빠뜨리지 않는다." 혁명적이고 정연한 저술이었던 '한비자'는 슬픈 운명의 책이기도 하다. '한비자'가 세상에 나오자 가장 감명을 받은 사람은 한나라 왕이 아닌 진나라 시황제였다. 강력한 왕권을 꿈꾸었던 진시황은 유가사상을 비난하면서 법치를 중시한 '한비자'를 읽고 무릎을 쳤을 게 분명하다.

진시황은 한비를 정치에 중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은 엉뚱하게 풀렸다. 한비와 동문수학했던 인물 중에 이사(李斯)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한비와 라이벌이었다. 이사는 자신을 제치고 한비가 강대국인 진나라 요직에 오르는 걸 못마땅해 했다. 이사는 진시황을 찾아가 한나라 귀족인 한비를 중용하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모함한다. 결국 진시황은 한비를 잡아 가두고 사약을 내려 죽인다.

한비 운명도 그렇지만 '한비자'의 운명은 더욱 기구했다. '한비자'는 분서갱유 원인을 제공한 책이라는 오명을 쓴 채 역사의 뒤안길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야 했다. 진시황이 유학 서적을 불지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하면서 '한비자'를 그 이론적 근거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빛나는 혜안을 담은 동양 최고 현실정치서라는 '한비자'는 현재 55편 정도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한비자'에는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제시한 망징편(亡徵篇)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한마디로 소름이 돋을 정도다. 중요한 부분만 요약해 소개해보자.

"나라는 작은데 부자의 땅은 넓고, 임금의 권력은 불안한데 신하들 세도가 높으면 나라가 망한다. 법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는 황폐한데 동맹국 도움만 믿고 있으면 나라가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부자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고, 상인들이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 놓으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를 호화롭게 꾸며 백성들 삶이 황폐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한비는 순자의 직계제자다. 그는 순자의 성악설에 뜻을 같이했지만, 예(禮)를 통해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모든 추상적 사상을 공론(空論)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비는 대단한 천재였다. 근현대를 뒤흔들었던 유물론이나 실증주의를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책 한 권으로 보여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