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국회의장이 11일 국회 본회의 통과 법안을 정부로 이송하면서 국회법 개정안은 일단 빼놓았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정의화 중재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당내에서 논의하기 위해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며칠 동안은 정 의장이 국회법 개정안을 붙잡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정부 이송을 마냥 늦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국회법 개정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박 대통령은 정의화 국회의장을 싫어합니다
'정의화 중재안'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한다'는 문구를 '요청한다'로 바꾸고, '정부가 수정·변경 요구를 처리한다'는 표현을 '검토하여 처리한다'로 바꿔 지금의 조문보다 강제성을 완화하자는 것입니다.
정 의장이 이런 내용의 중재안을 낸 이유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대립적 관계보다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앞장서서 조성하고 있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날카로운 대치를 정 의장이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정 의장은 지금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맡고 있는 황우여 의원과 경선을 거쳐 국회의장 후보가 됐고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됐습니다. 2007년 경선 당시의 새누리당 계파 분류에 따르면 '친이명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박 대통령은 정 의장에게 줄곧 싸늘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마주쳐도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는 것이 국회 관계자들의 목격담입니다.
어쨌든 당장 언론의 관심은 새정치연합으로 쏠릴 것입니다. 정의화 중재안을 새정치연합이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정국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새정치연합 안에는 두 가지 기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재안을 받아들여 타협하자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야당의 '정도'대로 싸우자는 쪽입니다. 뜻밖에도 타협론은 이종걸 원내대표가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의화 의장을 신뢰합니다
이 원내대표는 11일 오전 국회의장 면담 뒤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회의장의 진정성 있는 중재 노력을 존중합니다. 지금 상황은 청와대가 강력한 벽을 치는 느낌입니다. 며칠 안에 우리도 의견을 모으고 청와대도 뜻이 변화하길 기대합니다."
'청와대의 거부권 행사 방침을 거둬달라는 것이냐'고 기자들이 묻자 이 원내대표는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당내 의견 수렴을 더 해보겠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평소 매우 강경하기로 소문이 난 이 원내대표가 이처럼 유연한 태도로 돌아선 이유는 뭘까요?
첫째, 정 의장 때문입니다. 정 의장은 취임 이후 여러 차례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의 충돌을 막고 타협을 이끌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국회의장과 야당 사이에 구축된 신뢰 때문에 국회의장 중재안을 야당 원내대표가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유승민 원내대표 때문입니다. 이 원내대표는 지난 8일 한겨레 정치토크 돌직구에 출연해 유 원내대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검토하는 이유가 새누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 구하기 차원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유승민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경제정책과 관련해서 '중부담 중복지'라든지 박근혜 정권에서 빈껍데기가 돼버린 경제민주화를 되살리려는 태도를 좋게 평가한 것입니다. 우리 당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유승민 원내대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구사대'를 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꽤 많습니다."
- 원내대표로서 실제 대화를 나눠본 유승민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얘기라면 그걸 임기응변으로 넘기면서 회피하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많이 애씁니다. 아주 좋은 소질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도 좋아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사랑 고백' 비슷합니다. 그러나 새정치연합 다수 의원들의 기류는 "지금 유승민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밀리면 무너진다"는 쪽입니다. 유승민 살리려다가 야당이 '사꾸라'나 '이중대'로 몰릴 위험이 있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이 원내대표의 타협론이 새정치연합의 당론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새정치연합 내부 흐름에 밝은 실무 당직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거 잘못 건드리면 이종걸 원내대표가 훅 갈 수 있다. 지난해 박영선 원내대표가 낙마한 것도 작은 실수에서 시작됐다."
이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전직 원내대표들과 오찬 간담회를 했습니다. 전직 원내대표들도 그대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한 전직 원내대표는 "야당이 여당 원내대표를 살려주려들 것이 아니라 오는 순서대로 죽여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며칠 시간을 더 끌더라도 새정치연합이 정의화 중재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국회법 개정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헌법 53조 1~4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①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은 정부에 이송되어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공포한다.
②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제1항의 기간 내에 이의서를 붙여 국회로 환부하고, 그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국회의 폐회중에도 또한 같다.
③ 대통령은 법률안의 일부에 대하여 또는 법률안을 수정하여 재의를 요구할 수 없다.
④ 재의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국회는 재의에 붙이고,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은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
앞으로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정 의장은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을 다음주께 원안 그대로 정부에 이송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이의서를 붙여 국회로 환부하고 재의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때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재의를 하지 않고 자동 폐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국회법을 어기는 방안입니다. 좀 비겁해 보이지만 그렇게 하면 유 원내대표가 자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대가로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했다는 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둘째, 헌법 규정대로 재의에 부치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새누리당 내부 기류로 보면 꽤 많은 의원들이 재의에서 반대 표결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국회법 개정안이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되면 유 원내대표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직을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박 대통령 뜻대로 되는 것이지요. 또 앞으로 국회에서 박 대통령과 여당이 야당의 협조를 구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법 개정안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면 한 가지 매우 이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인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데도 박 대통령이 위헌이라고 못을 박고 나선 배경입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그리고 새누리당 의원 대부분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국회 사무처에서 유권해석까지 했습니다. 국회의원을 오래 한 사람들은 법률의 위헌성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국회 사무처는 그런 판단으로 밥을 먹고사는 전문가들입니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위헌이라며 거부권 행사 방침을 밝혔습니다. 법무부와 법제처가 위헌이라고 입장을 냈지만 그건 박 대통령을 따라서 뒷북을 친 것에 불과하다고 봐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도대체 왜 국회법 개정안에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왜 '사소한' 일에 정치적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
몇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째,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잘 믿어지지 않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냥 '사람'이 싫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김무성 대표도 박 대통령이 그냥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권여당의 대표와 원내대표를 대통령이 '그냥' 싫어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둘째, 박 대통령 특유의 '무오류' 확신입니다. 박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큰영애'라는 공인이었습니다. 사생활은 없었습니다. 부모를 차례차례 잃고 청와대에서 쫓겨난 뒤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외환위기를 계기로 다시 정치의 무대로 진출했습니다. '나라와 결혼한 사람'은 자신이 언제나 선이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악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셋째, 두번째와 비슷한 이유인데 박 대통령은 일종의 피해망상적 성향이 조금 있습니다. 그를 보좌했던 정치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 대통령은 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합니다. 정치인들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측근 '4인방'(지금은 3인방)을 멀리하라고 조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사람들은 나를 위해 사심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인인 당신과 달리) 출마할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반박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나 자신의 측근들을 건드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 반발인데, 1970년대 말 최태민 사건 때 생긴 트라우마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금 행정부 수반입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 자신의 최측근은 새누리당 지도부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청와대와 행정부에 포진해 있는 관료들일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심없이 일하는 관료들의 손발을 묶는 국회법 개정안을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정말 싫어하는 건 국회입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생각은 국회가 행정부의 권한을 침해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일겁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런 생각은 정치의 권한을 축소시키려는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은 자본의 이득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사람과 집단입니다. 이들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선호합니다. 쉽게 말해 국회의 힘을 가급적 축소시키고 대통령 1인 지배구조를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지난 10일 자유경제원은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 : 국회 독재를 비판한다'를 주제로 정치 실패 연속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 단체가 보낸 보도자료의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논란의 국회법 개정안 - 입법을 마트 물건 '끼워팔기식' 품목 정도로 여기는 여야 국회 지도부의 심각한 입법 경시 풍조가 낳은 결과"
"헌법무시는 기본, '입법' 통해 '3권' 위에 군림하려는 '국회 독재'"
"'합의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 - 다수 여당 새누리의 무기력, 소수 야당 새민련의 제왕적 태도 때문, 국민 이익과 의견을 목숨처럼 여겨 그에 합당한 입법 힘써야"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과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자본세력은 '1원'을 기본단위로, 사람세력은 '한표'를 기본단위로 작동합니다. 쉽게 말해 재벌은 자본세력, 정치는 사람세력입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지금 사람세력이 아니라 자본세력과 똑같은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단기적으로 그게 자신에게 정치적 이득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금 자신이 하는 생각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언론도 문제입니다. 언론은 사람세력 편을 들어야 할 텐데 자본세력의 편을 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언론사 최대 수입원이 재벌의 광고와 협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를 비롯한 정치 관련 기사나 논평을 읽을 때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