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는 오늘 7시 35분에 운명하셨습니다. 빈소는 차리지 않을 것이고, 친구분들이 오빠를 위하여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 XX이, 잘 가서 편히 쉬시게. 얼마나 폭폭하고 힘든 삶이었던가?

 

굳게 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아름다운 곳에서 어머니 뵙고 근심과 걱정 없이 사시게. 그 동안 품었던 맺힌 것들은 다 풀고 가볍게 가시게. 부족한 친구 조년 드림” 이렇게 친구 동생의 전화번호로 위로인지, 작별인사인지 모를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는 무연고자로 돼 있었어요. 구청과 경찰을 통해 친권자를 찾고, 그분들이 시신인도를 하면 그렇게 장례를 치루고, 그렇지 않으면 무연고장례를 한대요. 그 때 저희에게 연락이 올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생각하게 될 것이에요. 우선은 장례식장 냉동고에 모시고 내려왔어요.”

이렇게 복잡하게 된 내력은 이렇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본 부인 이외에 한 여인을 알았고, 그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시간이 되어 그렇게 얻은 아들이 크게 되었고, 학교를 갈 나이가 되었다. 본처 이름 아래 호적에 올려야 했다. 그 때 본처는 4남매를 두고 있었다. 가정의 갈등은 표면화 하였고, 그 아들을 낳은 여인은 분리되어 자기의 삶을 찾아야 했다. 그 여인은 정식으로 다른 분과 결혼하였다.

이 아이는 아버지 집으로 왔다. 천덕꾸러기가 됐다. 똑똑하고 주관이 분명하며 활달하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 때문에 많이 부딪쳤다. 집에서는 식구들 사이에서 귀염을 받지 못하였다. 학교에서나 밖에 나가서 놀 때는 아이들과 다툼이 많았다. 무엇인가 조금, 아주 조금 방향이 틀어지는 것을 다 느꼈다. 가정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닌 듯 따돌림을 당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독립심이 강했다. 용돈도 혼자 벌었고, 오늘날의 말로 하면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궁벽한 그 시골구석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럭저럭하면서 군대에도 갔고, 직장도 잡아보았고, 정치계에도 들어가 보려 하였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이끌려고 참으로 노력을 많이 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대학도 자기 힘으로 졸업하였다. 삶이 풀릴 듯 썩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는 것이 친구들이니 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어느 누구에게는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 썩 잘 그 도움에 대한 대가를 되돌려주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친구들 사이에는 나쁜 사람이라는 평이 돌았고, 깊은 맘에서 교류하지를 못하였다. 만남은 그냥 겉도는 듯하였다.

그러나 자기를 이기고, 자기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런 여러 가지 냉소와 따돌림과 멸시 비슷한 분위기와 눈치를 잘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에 드나들면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였다.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 일이 되었다. 돌아올 때마다 작은 선물들을 친구들에게 하기 시작하였다. 교류도 많아졌다. 그러할 때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아야 했다. 영세민 혜택으로 병원비를 정리하였다. 건강을 매우 조심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병이 났다. 이번에는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에 대한 수술도 받았다. 어느 정도 잘 된 듯하였다. 그러나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하여 병원을 옮겨서 받았다. 그 때부터 어려워졌다. 황달이 아주 심하였다. 먹을 수가 없을 만큼 식욕도 없고, 입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위하여 음식을 정갈하게 하여 줄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끓여먹는 것, 음식점에 나가서 사서 먹는 것으로는 큰 수술을 받은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다. 간병인을 만났지만 만족스러울 만큼 철저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기 여러 해 전 맘에 걸려 있는 문제를 해결했다. 낳아준 어머니를 찾아보았다.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그가 사시던 곳에 가서 수소문하여 산소를 찾았다. 자주 찾아 성묘를 하였다. 그러다가 동생들을 찾았다. 무척 반가워하고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러나 너무 늦게 만났다. 형제자매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여건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시간도 많지가 않았다. 그러나 맘만은 피붙이를 찾았다는 안도감을 얻었다. 그러던 중에 병원에 입원하였고, 위급할 때 동생들에게 병원에서 연락을 하였다.

연고자라고는 그곳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 집으로 있는 형제자매들과는 인연을 끊었다. 한 식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서,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분배하여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무연고자가 되었다. 친척으로 돼 있는 이들은 연고를 끊었고, 피붙이는 법률상 전혀 남으로 돼있기 때문에 연고가 없게 되었다. 이것들이 밝혀질 때까지 그는 병원 냉동고에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이 때 나는 다시 묻는다.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살며, 어떻게 떠나며, 떠난 뒤에 무엇이 남는가? 결혼하지 않은 그는 후예를 남기지 않았다. 영세민 등록이 된 그는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굉장한 이름을 날리고 영예를 얻은 것도 아니다. 남이 본받을만한 출중하게 훌륭한 인격으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는 누구를 원망하지를 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원망하지 않고, 그냥 자기가 자기 삶을 독립하여 꾸리려고 노력하다가 그렇게 갔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왔다가 다시 그곳으로 가면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빈손으로 갔다. 훨훨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 날아갔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지낼 것인가? 또 그것을 묻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