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선론과 진보정치의 지체
통일전선론의 수용은 곧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 수준에 머물던 프레임을 넘어 변혁과 권력의 전략이 운동권에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통일전선의 문제의식은 국제적ㆍ국내적 조건 및 계급 관계 등 유물론적 기초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서 주요 모순, 주적(主敵), 지도와 동맹 등의 구조를 갖는 내부의 계급적 대항을 파악하고 주요한 측면의 전환을 실천적ㆍ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통일전선론의 확산이 급진화를 설명하는 증거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타도와 고립의 대상과 운동 동력의 재설정을 통해, 미국뿐 아니라 북에 대한 인식 상의 변화를 수반했다는 점 때문이다.
1980년대 중후반 등장한 급진적 운동노선인 NL과 PD(CA)의 경합과정에서 계급과 당중심성, 독자적 정치세력화보다 민족과 통일전선론, 야당과의 연대를 강조한 NL론이 담론과 실천상의 우위를 점해왔다.
그 이유는 오랜 기간 형성된 주변부적 멘탈리티와 무계급적 비생산 주체로서 상대적 자율성을 가졌던 학생과 지식인들의 특성에 기인한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NL론은 학교 교육을 통해 내면화된 민족적 에토스를 간직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쉽게 접합될 수 있었다.
분단체제의 “과잉 민족주의적 상황은 한국의 타락한 보수적 민족주의자에 대한 반감으로 북한의 민족주의적 현상에 우호적인 태도를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민주주의 차원의 정치적 실천의 제시와 함께 이들이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들의 단합’, 민족통일국가라는 ‘상상된 공동체’로의 귀속감, 타 공동체가 갖지 못하는 문화적 예외주의를 형성”함으로써 과거의 고통과 저항의 집단적 기억을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당대 NL 운동가들은 광주를 혁명의 표상으로 재구성하는 한편 여기에 ‘희생자 담론’과 ‘부채 담론’을 접합하여 경계와 전략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미국이 광주학살을 방조하고 군사독재를 지원한 행위로 불거진 자생적 반미의식에 식민의 기억을 접합하고, 식민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된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매개로 민족경계를 재구성한다. 반미주의 확산은 군부와 외세가 적이 되고 북한이 민족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해 북한은 민족의 적에서 통일 대상, 나아가서는 주체 조국으로 그 의미가 재구성되었다.
강한 민족주의적 애국주의적 실천 낳아
우리 사회의 모순이 외세와 분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해석틀의 수용은 식민과 독재의 이분법적 구도, 강한 민족주의ㆍ애국주의적 실천을 낳았다. 한국전쟁 이후 운동진영 내부에 상존하던 변혁운동의 단절(복원)론적 해석보다 ‘연속론적 해석’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반제통일전선론의 확산이 미친 사회운동의 문화적 결과(cultural consequence)라 할 수 있다.
치열한 고난을 이겨낸 노력으로 끊어진 혁명 전통의 줄기를 되찾았다고 보는 견해(NL적 시각)와 1980년대의 변혁투쟁은 그 이전 어느 시대의 투쟁경험과도 완전히 무관하고 새롭게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임을 주장하는 견해(PD적 시각)는 한국사회 성격규정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북한과 북한정권에 대한 입장과 태도의 상이함을 반영한다.
계급노선과 달리 반제노선은 현실적인 개량투쟁노선과 민주대연합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화 전략을 추구함으로써 민주화라는 기본 틀과 크게 충돌하지 않았다. NL론의 확산은 PD와 비교해 기존의 가치관과 관행으로서의 사회적 정신 내지 사회의식(societal mentality)에 근거해서 ‘집합행동의 틀’을 구성하였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민중지향성과 운동의 전체성과 적대성을 반영하는 연합과 동맹에서 아와 적의 경계를 구분하는 NL의 반제통일전선론(엄밀히 말하면 야당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민주대연합 노선)의 선택은 가능한 행동노선을 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과 비용, 주체의 능력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어 있었다.
통일전선론은 운동의 ‘대중화’에는 기여했지만 ‘독자성’은 약화시켜
NL의 등장과 함께 민중연대의 주류적 노선이 되었던 ‘통일전선론’은 민주화운동의 연대와 협력 폭을 넓히면서 1987년 시민항쟁의 성공에 이바지하였지만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운동의 독자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주변부 민족해방이념의 수용은 정통성(민족주의/정통이념)이라는 기표의 투쟁을 통해 민족의 적과 운동 내부의 적(타 정파)과의 헤게모니 투쟁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였고 군중노선과 민주대연합은 일정한 시기 운동 대중화에 효과적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이후 2000년대 초까지 민족해방계열의 주류적 흐름은 최소한 일관되게 합법정당 건설과 관련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합법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전선운동의 보조조직으로 바라보았다.
반미구국통전론은 사실상 합법정당 건설의 과제를 부차적인 과제로 만들었다. 동시에 남한의 독자적인 전위당 건설 노선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재는 영향력이 상실되었지만 일부 민족해방계열(주사파)이 ‘당 중심성’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는 외세 지배 하에서 당적 조직이 갖는 제약과 한계(탄압과 개량화)라는 측면보다는 이미 당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고에 기인한다.
통일전선론은 한국사회의 성격과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등과 같은 변혁의 동력과 대상, 전략과 전술을 둘러싸고 “친북적인 NL진영과 북한에 비판적인 PD진영 간 남남갈등을 전면화”하기도 했다. “냉전적 국가 대 진보적 시민사회의 대립이라는 과거의 갈등 틀 외에도 진보적 시민사회 대 진보적 시민사회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남남갈등(손호철 2006, 34-35)”이 형성되기도 한 것이다.
이는 반미구국통전이 제국주의 절대 규정론, 원초론적 민족이론에 근거한 북한에 대한 편향적 인식과 태도, 존재하지 않는 동력(민족자본가)을 포함한 광범위한 역량편성, 남한의 자주적인 당 조직 건설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일반민주주의에 한정된 실천에 집중하는 예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직획득을 통한 효용 극대화’ 선거연대의 양 측면
수많은 예 가운데 작년 NL계열(경기동부연합 등)이 추진한 3자통합과 4.11총선의 야권연대 전술은 헤게모니 정치를 통한 진보의 사회적 기반의 강화도 급진적 의제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었다.
‘노동정치의 실종’으로 비판받는 통진당 총선 전략은 민노당 당권파(NL계)의 진보대통합 논의가 시작될 무렵부터 예견되었다. 민노당은 지난해 6월 19일 정책 전당대회를 열어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한다’는 표현 등을 삭제하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한다’와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계급적 좌파정당의 성격을 상실한 자신의 주된 정체성을 당 강령에 최종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국참당 및 통합연대가 함께 만든 “통진당은 민노당 세력이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계급적 이념 면에서는 당 노선을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 불리기도 하는) ‘혁신자유주의노선’을 채택했으며, 총선에서 야권연대와 탈급진정당화 등을 추구함으로써 이젠 더는 노동자정당은 물론 진보정당으로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김세균 교수의 페이스북 글 https://www.facebook.com/#!/sekyun.kim)”
공천과정과 선거전략에서도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상에 전면으로 위배되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발생했다. 일례로 야권단일후보 선정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 결여, 창원과 울산의 도의원 사퇴 및 총선출마에 대한 도덕적 지탄, 일부 지역구 예비후보 경선과정의 패권주의 논란, 비례대표 후보 경선과정의 부정선거 의혹, 직능과 부문을 대표하는 노농 비례대표 후보 후순위 배정, 관악을 여론조작 의혹 문자 파문, 성추행 의혹 전력의 후보 공천 등은 후보와 당원, 진보진영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한편, 이정희 대표의 김용민 막말 옹호 등 진보적 성찰성의 결여로 전통적 지지자 외에도 유권자의 감흥을 반감시켰다.
통진당 당권파가 추진한 야권연대(선거연합)는 정당 간 이념적 근접성을 중요한 요소로 보는 ‘정책중심 접근’이 아닌 ‘공직획득을 통한 효용 극대화 중심’의 선거연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선거연합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승리를 위해 공직을 획득하여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실행할 권력을 가지는 데 있다는 점에서 배타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공직의 획득 이외의 진보적 정책과 이념의 실현이라는 선거연합의 목적은 간과되거나 실종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한 경쟁정당(새누리당)과의 정책적 적대성이 선거연합의 형성이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지만 통진당은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상태와 삶을 변화시키는 진보적 의제의 실현(일례로 비정규직, 사회적 양극화 해소, 탈핵 등)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부족하였다.
결과적으로 온건 보수정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중간지대를 확보하여 외연을 확대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전통적 지지기반을 상실하거나 이념과 가치, 정체성의 약화를 가져와 독자적 생존의 길은 요원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례후보 사퇴를 계기로 당권파가 ‘진보의 재구성’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자유주의세력과의 연정을 통해 정치적 활로를 개척하려는 특정정파가 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원내의석과 당권을 놓지 않으려는 상황이므로 진보정치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유연성 간의 불균형은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 총선에서 보여준 야권연대가 “비정규직을 비롯하여 불안정노동에 처한 사회적 약자는 볼 수 없고 기껏해야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켰기에 새로운 진보좌파정치운동의 출현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통일전선론(민주대연합 노선)은 민주화 이후 다원적이고 다차원적인 저항과 적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 속에서 운동 기반이 내파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NL의 주요활동가들의 보수정치권으로의 선택적 포섭과 국가와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제한적 투쟁이 이를 바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사실 NL론과 그 실천은 기존의 권력화된 지배가치의 대립과 초극, 기존의 제도화된 실천방식과의 차별적 초월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이념의 근본성과 공유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가 어려우며 ‘민주화’라는 기본 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NL이 주류가 될 수 있었던 배경과 함께 민주화 이후 NL운동의 주요 활동가들이 왜 제도정치로 흡수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이 부분은 다음 호에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1980년대 중후반 이래 NL운동이 남긴 유산의 역사화와 재보편화, 부정적 역사 성찰을 통한 우리 시대 저항 과제를 현재화한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넘어 우리 내부에 각인된 식민지적 낡은 지배의 관계들에 대한 더 급진적인 내부 비판이 필요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