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운동론(NL)의 확산과 분화 -- 이창언교수

2014. 9. 11. 13:41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민족해방운동론(NL)의 확산과 분화

[한국사회와 NL-2] 변화 제안을 정치적 불온함으로 거부한 교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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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의 등장 : 반제와 구학련

1980년대 초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운동가 중 일부는「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청취하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호기심이었지 집단적 관심사는 아니었다. 물론 전체 운동권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혁명이론 정립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사회의 모순구조 파악, 즉 사회성격에 관한 탐구로서 1980년대 상반기 학생운동이 보여준 모습은 반독재민주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85년 하반기에 제기된 반제(AI)등장과 더불어 각 대학교 내 이론 투쟁의 두 대립물은 MC-MT에서 MT-NL로 전환하게 되고 1986년의 NL 대두를 예고하게 된다. 이들은 최초로 품성에 기초한 사상운동을 표방하였으며, 서울대 학생운동의 기본 틀인 이념 서클 체계의 즉각적 해체, 종파주의의 척결, 학번제 철폐 및 운동조직에 있어 봉건적 잔재 해소를 주장하면서 이에 대안으로 통일된 학생운동조직의 건설을 제시하였다.

구학련(救國學生聯盟)과 자민투(自民鬪)의 등장으로 이후 학생운동의 주요 행위자와 그룹들은 이념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하는 형태로 변화 체계화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초기 NL의 경우에는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구학련)처럼 전국적인 학생조직의 건설을 지향한 조직도 있었지만 1986년 한 해 동안 계속적인 연대 틀을 모색하며, 사상적 통합에 힘쓰며 86년 10월 애학투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각 대학에 독자적인 세력으로 분산되어 존재하는 형편이었다. 정치노선에 있어서 1986년 학생운동의 한계로 지적되는 점은 NLPDR 이론에 대한 경향성 수준이었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이는 1987년을 거치면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는 NLPDR과 비교해 볼 때 무리한 평가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한국의 학생운동과 주체사상의 관계를 분석한다면 1986년은 한국민족민주운동에서 주체사상을 일단계적으로 확립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결국 1986년 학생운동의 특징은 반제 경향성의 대두와 운동 자체가 전 대학으로 확산(민중운동권)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초기의 반제 급진주의가 곧바로 대중노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중노선은 건국대 사건 이후 혁명적 군중노선을 통해 올바른 대중의식화, 조직화를 실천해야 한다는 반성이 적극적으로 대두하면서 안착화 된 것으로 보인다.

NL의 대중노선의 견지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대중 동원에 성공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NL의 직선제 개헌론은 이제까지 “개헌국면”이라고 파악한 상황인식을 비판, ‘제국주의의 한반도 권력재편기’라고 국면을 정의하고 개헌투쟁의 성격을 “반미자주화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5994" title="전대협" src="http://www.redian.org/wp-content/uploads/2012/06/전대협.jpg" alt="" width="500" height="343" />

NL은 87년 4월 하순부터 군사독재정권을 효과적으로 퇴치하기 위한 학간연대(學間連帶)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새로운 대중조직을 만들게 된다. NL은 대중노선을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서클주의와 종파주의의 극복, 대중노선의 올바른 이해라는 내부적 과제를 학생회 강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확산시켜낼 수 있었다.

초보적인 관심에서 체계적인 수용으로

1987년을 거치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수용 단위도 더욱 넓어진다. 1986년까지 NL의 이론은 정부간행물을 비판적으로 짜깁기한 수준이었다.

강철 김영환도 방송문건과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공산주의 대계』를 열심히 탐독하여 문건을 작성했다고 훗날 말한다. 1987년 하반기부터 1988년 초에 이르러서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로 시작하여 김일성(金日成)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서 북한 건설에 이르기까지 혁명사가 책자로 배포되고, 혁명의 전략전술, 혁명의 대상과 동력, 통일전선의 의미와 범위 등 체계적인 주체사상의 틀이 제시되면서 혁명적 수령관까지 수용하게 된다.

특히 NL계열은 1988년 통일운동을 통해 국민적 관심을 끌면서 학생운동 내 통일된 역량으로 추진하기 위해 88년 8월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이 서건추(서울지역 대학생 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를 흡수하는 통합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학생운동은 전대협을 중심으로 크게 NL계열로 정리되고 다수의 군소 그룹이 난립하던 시기를 거쳐 89년 하반기에 들어와 급속히 NL-PD라는 양 계열로 결집, 분화된다. 전대협(全大協)은 학생대중조직인 총학생회 대표자 협의체이지만 노선과 인적 자원에 있어서는 NL의 영향력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1988년 6ㆍ10, 8ㆍ15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투쟁, 11월 광주ㆍ5공 청산 투쟁, 1989년 임수경의 평양축전 참가, 1990년 8ㆍ15범민족대회 추진, 광주민중항쟁 10주년 계승투쟁을 주도한다. 핵심간부들에 대한 구속 ㆍ수배 등 정권의 탄압에도 매년 1회씩 거행되는 전대협 발족식은 해마다 규모가 커져 1992년에는 6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전대협은 분신 정국과 박홍 총장의 폭로, 유서변조사건, 학생들의 분신을 비판하는 김지하의 글, 외대 사건(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등 학생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양상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문민정부의 개혁정책으로 말미암아 정권의 성격이 모호해지면서 투쟁에 대한 설득력이 점차 약화하여 갔다. 회원 수 100만, 간부 4만, 핵심간부 1만, 총예산 연 50억 원, 상시전투력 2개 사단, 참가학교 전국 180여 개 대학 등, 정권이 두 번 교체되는 동안 전대협의 활발했던 6년간 활동은 막을 내린다.

전대협은 7기에 이르러 1993년 3월 경희대에서 대의원 총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 1993년 5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발족하였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다양한 부문 대중조직의 성장하고 부문별 운동에 NL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었다.

NL세력의 분화 과정

자주파가 민족해방 노선 내에서 독자적인 길을 표방한 것은 1992년 범민족대회부터였다. 1992년 범민족대회는 대학가의 방북교류가 잇달아 실패한 이후 팩시밀리를 통한 북한대학생들과의 편지교류가 급속히 확산하고 전대협의 국가보안법 어기기 운동 목적으로 몇몇 대학에서 인공기를 내거는 등 통일운동 과정에서 문제점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이때 진보학생연합의 전신격인 생대련(생활진보 대중정치 대학생연합)은 학생운동의 북한 추종적, 자주적 교류중심의 그릇된 경향을 비판하고 나섰다. 생대련의 문제제기는 민족해방파 내 비주류였던 자주파가 북한 사회와 북한추종노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PD계열 그룹과 함께 새로운 학생운동조직을 출현시킨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진보진영의 전반적인 위기를 맞아 과거의 이론체계와 세계관에 근거했던 NLㆍPD의 대립구도가 그 의미를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진보의 흐름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1986년 이래 한국의 운동권을 사로잡고 있던 북한의 영향력이 명백히 퇴조하는 모습과 사회주의 위기를 맞아 북한 역시 맞는 위기적 징후에 대한 남한 진보진영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공안정국부터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한 학생운동은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개혁의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더 큰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80년대와 같이 지극히 포괄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동의기반과 학생회를 통한 공동실천의 균열은 1990년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1991년 5월 투쟁의 패배와 현실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운동대오에서 이탈하는 활동가와 학생이 늘고, 대학사회 전반에 정치적 무기력ㆍ무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91년 6월 외국어대 ‘정원식 계란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대한 권력과 언론의 집중포화에 이어 1993년 문민정권의 출범은 더 광범위한 대중적 이반과 탈정치화를 부추겼다.

군부세력 집권의 종식과 문민정부 집권 초기의 개혁드라이브가 강력한 대중 이데올로기로 전화한 결과다. 여기에 더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신세대 논쟁, 소비문화의 확산, 신자유주의로의 편입과 대학의 시장논리 강화, 학부제 도입 등 변화된 현실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균열이 더해지면서 학생운동의 위기는 급속히 확산ㆍ가속화되었다.

시대적 변화에 대한 능동적 주체적인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거부

그러나 1990년대 학생운동을 포함하여 민족민주운동의 위기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전개된 운동의 내재적 위기, 즉 권위주의 시기 운동의 한 주기를 끝내고,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주기에 능동적으로 조응하지 못함으로써 심화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이후 정치적ㆍ사회적 행위와 갈등을 규정하는 일정한 상호작용의 틀은 변화하였다. 새로운 체제 형성은 그 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권력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정정훈, 2007: 180). 1990년대는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그동안 국가권력이 관철되는 최하부 단위로서 피동적으로만 존재하던 시민사회가 자율적 영역을 확대해 가면서 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NL운동은 1980년대가 추구해왔던 제도적 구조적 전략에 더하여 1990년대식의 문화적 전략을 결합하여 운동의 혁신과 변화를 추구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법적ㆍ제도적ㆍ절차적 민주화를 통해 소통공간의 확장이라는 측면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대중의 정치적 저항을 시민사회라는 체제 내부의 특정한 공간으로 포획하려는 권력의 작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했다.

일부 학생운동그룹에서는 현실가능성, 지속성 여부를 떠나 새로운 시도도 있었다. 새로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운동의 혁신을 제기한 ‘경실련대학생회’의 문제제기(전략적 구호남발이 아닌 현안을 중심으로 변화된 갈등구조에 조응하는 ‘운동전선의 다변화’와 ‘대안제시’, 대중참여형 운동’을 위해 절차의 정당성에 기초한 합법,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는 급진적 학생운동권의 비판에도 성찰을 고민하는 일부 학생운동가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 외에도 ‘21세기진보학생연합’의 ‘주체실천형 운동(하나의 주제에 대해 구체적인 성과를 내올 때까지 집중, 낡은 NLㆍPD의 낡은 틀 탈피와 운동의 재구성, 생활상의 민주화와 다양한 이슈의 결합, 네트워크의 조절자로서 진보정당의 역할재고 및 참여 등) ’, 맑스주의의 전화를 시도한 일부 ‘민중민주계열 의 대장정 학생연합 등(맑스주의에 내재한, 맑스주의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적 사고의 경계를 넘어서기. 성의 문제를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대두시키자- 공동체 학생연대, 주류질서의 전복, 근대 민족국가를 넘어 반(反)근대 정치를 향하여- 대장정)’, 북한관의 변화와 새로운 시대이념의 정립을 촉구하는 민족해방파 일부 그룹의 혁신을 위한 노력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사랑 계열은 변화된 정세와 상황에 대한 재인식, 낡고 관성적인 투쟁에서 탈피, 폭력투쟁에 대한 재검토, 대중단체의 본성에 맞는 학생회의 대중화, 한총련의 비민주성의 극복, 새로운 시대의 요구와 과제를 파악하고 시대이념의 재정립, 학생운동 정치조직의 건설과 우리 정당의 건설 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주체사상파가 주류였던 학생운동(한총련 주류)은 1980년대의 운동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 또는 수정해 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학생운동 지도부와 학생 대중의 의식, 지향, 방법의 괴리와 균열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관성적 실천 속에서 위기는 심화되어 갔다. 아래 인용문은 당시 ‘주사NL계열’의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노동계급의 수령을 중심으로 단결하지 않으려는 소부르주아적인 공명주의와 종파주의가 아직 대오 내에 남아있다. (중략) …… 이 속에서 일부 논자들은 지배자들과 한목소리로 ‘우상화’, ‘개인숭배’ 운운하는가 하면 ‘맹목적 충실성과’ ‘참다운 충실성’을 구분하여 민중의 지도자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역겨워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중략) 충실성을 교양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은덕을 깊이 파악하고 뜨겁게 느낄 것이다.

이처럼 민족해방파 내 일부 자주파의 북한관의 변화를 포함한 운동의 현대화에 대한 제언은 주사파에게는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사파는 자신들이 주사파가 되기까지 가졌던 무수한 고민, 문제의식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정서나 담화구조에 전혀 맞지 않는 비판을 일단 낯설게 생각했으며, 뿌리 깊은 ‘적(敵)과 아(我)’라는 이분법적 인식과 운동 내부의 정파가 양립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의도의 불순성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을 교조적으로 수용한 상태에서 사상의 종주국인 북한이 변화하지 않는 한 주사파도 변화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북한 내부의 비판세력 부재로 자정능력이나 창조적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 담화체계에 영향을 받은 남쪽의 주사파도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고 해결을 모색하지 않았다.

통일운동을 둘러싼 갈등과 분화

통일운동을 둘러싼 민족해방파 내부의 의견 대립은 1995년 8.15 민족공동행사를 전후한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당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은 1990년부터 이어진 범민족대회가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선도적으로 제기한 성과가 있었지만, 국민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고 평가하고 대중적인 통일운동을 위해 다양한 민중ㆍ시민단체를 포괄하고 당국과의 합의를 통해 합법적인 공간에서 대회를 치러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가 1992년 8월 범민족대회를 전후하여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소와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를 제안하면서 갈등은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새통체 주창자들은 범민족대회가 출발할 당시에는 많은 화제를 낳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적인 흐름으로 전환되었고, 남한운동권에 부담으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범민련은 결성 당시 3자의 운동수준과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상설연합체를 하향식으로 꾸려내는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또한 조성된 정세를 뛰어넘는 정치구호를 제시함으로써 남한의 통일운동을 하나로 묶기 위한 노력에 어려운 상황을 조성됐다는 것이다. 더욱이 열린 공간(김영삼 정권의 이중정책)과 시민운동의 인간띠잇기운동 등 새로운 형태의 통일운동이 전개되면서 그 입지는 점점 축소되었고, 따라서 운동권의 자족적인 연례행사 정도로 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일운동에 대한 반성적 평가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199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범민련의 발전적 해소와 새로운 통일운동체의 건설을 위한 노력은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이하 민족회의)’의 창립으로 이어지게 되고, 통일운동 진영에서는 민족회의와 범민련, 대중적 통일행사와 범민족대회로 크게 나뉘는 인식과 실천의 편차가 조직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민족해방파 내부의 갈등은 범민련 남측본부가 8.15 공동행사와는 별도의 범민족대회를 치르는 과정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주사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한총련은 범민련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범청학련 축전의 성사를 위해 남한 학생대표를 북한으로 파견했다. 한총련 내부는 혁신계열(사람사랑)이 한총련 자주계열(주사)의 이러한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한총련 자주계열(주사파)과 범민련은 범민족대회에 소극적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갈등구조는 깊어만 갔다.

당시 전국연합 내부에는 지역별(지역연합)로 정파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전국연합 소속 부문 대중조직의 조율과 일정한 정치적 타협에도 두 개의 대회가 각기 치러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통일운동을 둘러싼 민족해방파 내부의 갈등은 통일운동의 정치방침, 통일방안, 3자 연대, 통일운동 진영의 단결 문제를 둘러싼 시각 차이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통일운동체 주창자들은 통일 주체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통일 개념과 의미에 대한 재조정과 사회적 합의의 확산을 강조한다. 여기서 대북관의 변화는 대중적 통일운동을 위한 전제로 제시된다.

조국통일이 민족의 단순한 단합의 실현을 넘어 상호변화를 통한 항구적 공영을 도모하는 것이라 할 때, 상호공존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체제라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통일운동에서 대중화를 저해하고 이분법적(통일/반통일) 사고를 심화시켜 왔던 원인 중 하나가 북한을 대안 체제로 인식해 온 운동진영의 편향적 사고를 문제 삼고 있었다.

<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5995" title="한총련" src="http://www.redian.org/wp-content/uploads/2012/06/한총련-e1339402972489.jpg" alt="" width="550" height="417" />

이들은 아직 친북적 이미지로 남아있는 연방제를 대중적 구호로 제기하는 대신 대중이 통일문제를 깊이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계기를 마련하고, 이 공간에서 공존, 공영, 흡수통합의 반대 원리를 공유하면서 연방제로 개념화할 것을 주장한다.

또한, 남ㆍ북ㆍ해외 실정에 맞는 3자 연대를 통해 남한의 통일역량을 보존하며 통일운동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을 해결해 나갈 것을 주장한다. 북ㆍ남ㆍ해외의 3자 연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남한 통일운동의 준비정도와 남한의 정치현실(법적ㆍ제도적 제약)을 고려하여 계획적으로 추진되면서 대중의 통일의식 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3자 연대는 연대 대상의 상이한 역량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3자의 다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상황변화와 필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탄력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 주창자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목표로 하되 미군기지반환운동과 한미행정협정 개정운동 등과 같이 대중적인 반미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범민련-한총련 주류로 대표되는 주사파가 강경한 태도에 선 이유는 북미ㆍ남북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북을 배려하려는 의도도 깔렸었다. 1994년 6월13일 북한의 IAEA 공식 탈퇴, 6월 15일 빌 클린턴 미 행정부의 북한 핵시설 폭격까지 포함하는 대북제재 결의안 초안을 발표로 긴장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힘입어 10월 북ㆍ미는 제네바 합의를 체결함으로써 전쟁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북한과 협상할 수 없다”며 북과 대화를 거부하였고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조문파동이 벌어지면서 남북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북한은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통해 남한 배제전략을 사용했다. 1994년 이후 북한은 지구적인 거대한 전환(동구사회주의 몰락, 세계화)과 남한의 민주화 진전, 변화된 운동 모색과 실천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동구사회주의 몰락, 93부터 94년까지의 북핵 위기 상황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반미ㆍ반정부운동을 촉구했고 이 과정에서 ‘범민련’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방했다.

북한이 김영삼 정권에 대한 강력한 견해를 밝힌 가운데 한총련은 8.15 범민족대회에 대한 무력탄압, 김영삼 정권의 북한적대정책, 1996년 12월 노동법ㆍ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한보 비리와 김현철 비리 사건으로 불거진 대선자금문제를 거론하며 ‘전민항쟁노선’으로 전환한다.

전민항쟁노선은 이미 문민정부 등장 이후 정권의 성격을 둘러싼 내부의 논쟁(주사파와 새벽그룹)이 표출된 1993년부터 제기되었으나 내부 논쟁이 첨예화되자 전민항쟁노선을 공식적으로 표면화시키지는 못하였다.

범민련과 한총련은 조문과 주사파 파동(1994), 두 개의 통일행사(1995), 연세대 사태(1996) 등을 거치면서 보수ㆍ진보 양자 모두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에도 투쟁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한총련은 1996년 연세대 사태가 있고 나서 급속하게 전민항쟁 노선으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1997년 한총련 대의원대회 등 각종 회의를 거치며 전민항쟁 노선은 민족해방파 학생운동의 기본방향이 되었다. 김영삼 정권을 타도하는 제 2의 6월 항쟁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준비기, 고양기, 분출기 등 다단계, 계단식 투쟁을 추진했다.

아래는 ‘당면정세와 한총련 대의원대회에 대한 서총련의 입장’이라는 문건에 나타난 NL주류의 시각이다.

상반기 한총련 투쟁은 미-김 일당의 정권재창출 음모를 걸음 걸음 파탄내며 결정적 승리를 눈앞에 당겨온 승리의 나날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민중들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고양해온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중들은 올해 민주기본권과 생존권마저 짓밟는 김영삼 파쇼정권을 타도하고 깨끗한 참 민주정권 수립을 절실히 요구해왔습니다. (중략) 민중의 요구가 김영삼 조기퇴진 투쟁으로 모아지고 있는데 근거해 김영삼 타도 투쟁을 더욱 완강히 벌여나가면서 자주, 통일투쟁을 총체적으로 벌여나가야 할 것입니다.(중략) 올해 우리 민족 앞에 나선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범민족통일전선체이며 민족대단결의 실체인 범민련이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주사파의 이러한 인식은 대단히 원칙적이었지만 전민항쟁을 뚜렷한 대안 없이, 단지 투쟁 방식의 폭력성 여부에 초점을 맞춘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원인을 제공한다.

범민련과 한총련 투쟁의 결과는 김영삼 정권을 대선자금 궁지에서 탈출하게 하였으며, 학생운동은 반대로 고립무원화된 상태가 되었다. 범민련의 통일노선에 반대하는 전국연합의 내부의 NL계열과 학생운동 내부 사람사랑계열은 한총련이 김영삼정권에 대한 비현실적ㆍ주관적 견해에 근거해 1996-97년을 대격돌기로 규정한 점, 분노와 적대감만을 자극하는 폭력투쟁 일변도의 관성적 운동방식을 고수한 점, 대중과의 교감 부재와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으로 학생회와 한총련을 운영한 점 등을 비판한다.

현실에서 사상이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으로서 현실을 규정해버리는 경직성

정치투쟁 위주의 사업내용과 간부중심의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대중단체로서 한총련의 본성을 찾아나가자는 혁신계열의 비판에 대해 범민련과 한총련 주류는 “패배주의와 개량주의를 조장하는 소리”, “주관주의적 견해를 내세워 그것을 시대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변혁의 중심을 일탈시키는 혼란과 갈등”으로 규정하면서 운동노선의 변화를 단호히 거부한다.

한총련 주류는 “민족자주로 나아가는 세계사 발전으로 보나, 자주화의 기치 아래 자주ㆍ민주ㆍ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변혁운동의 성격을 보나, 민주화운동의 시대를 넘어 자주화투쟁과 통일투쟁을 전면화ㆍ대중화하는 민족운동의 시대로 나아가는 현 단계 변혁운동의 발전수준으로 보더라도 ‘자주시대 민족주의’가 올바른 학생운동의 사상”(한호명, 1996)이라고 강변한다. “한국이 여전히 미국에 예속된 식민지이며 그 형태가 다소 완화됐을 뿐 본질은 여전하며 따라서 민주대 반민주 전선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1997년 대선에서 독자후보전술이 아닌 반(反)신한국당 노선을 견지하게 된다.

한총련 혁신을 주창해왔던 사람사랑 계열은 자신들의 문제제기가 한총련 내부에서 관철되지 않자 각급 대학과 한총련은 경선체제로 돌입하는 한편 종국에는 학내 총투표나 의견개진운동 등의 절차를 밟아 한총련을 대대적으로 탈퇴한다.

과거 NL대오의 분화가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사람사랑, 새벽 등의 갈래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사람사랑 역시 지역별로 분화되었다. 사람사랑 그룹 중 전북총련과 새벽그룹,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은 ‘한총련’을 탈퇴한다.

1997년 대선방침을 둘러싼 갈등은 통일운동 논쟁에 이어 학생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파 전체에 정치조직을 둘러싼 갈등과 분화를 촉진한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이후 민족해방파는 다음과 같은 분화를 경험한다. 전국연합의 대선/정치방침에 반대하면서 국민승리21에 잔류를 선택한 일부 자주파는 전국연합으로부터 이탈하여 국민승리21을 정치조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