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17. 23:51ㆍ종교/영성의 세계에서
동물, 자연환경, 상인, 이탈리아, 샌프란시스코, 필리핀 제도, 밀항자[1]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부제, 증거자
출생
1181년(또는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
선종
1226년 10월 3일, 이탈리아, 아시시
교파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
시성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축일
10월 4일
상징
십자가, 비둘기, 성흔
수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라틴어: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1181년 또는 1182년 ~ 1226년 10월 3일[2])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수사이자 설교가이다.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이기도 하며, 프란치스코 사후 프란치스코회는 작은형제회와 카푸친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의 1회 수도회, 2회 클라라회, 3회 재속회로 나뉘었다.[2]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2]
프란치스코의 부친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매우 번영한 상인이었던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였다. 혈기왕성한 부유층 자제로 태어나 자란 그는 군인으로서 전투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3] 하지만 1204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가던 길에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간 프란치스코는 세속적 생활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3] 로마로 순례를 떠난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보고 깊은 감동을 느껴 이후로 평생 가난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3] 아시시로 돌아간 그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의 삶에 감동을 받아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프란치스코는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가를 받아 남자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여자 수도회인 클라라회와 제3회를 설립하였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이집트의 술탄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를 개종시키려고 하였다.[4] 이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설립 당시보다 규모 면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를 보다 체계화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교황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은 후에 그는 점차 외부 문제를 멀리하였다. 1223년 프란치스코는 처음으로 베들레헴에서의 예수 탄생 사건을 재현한 성탄 구유를 만들었다.[3] 1224년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 당시 그리스도가 받았던 상처인 성흔을 받았다.[5] 1226년 10월 3일 시편 142(141)편을 읊으며 선종하였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동물과 자연환경, 상인 뿐만 아니라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초년 시절[편집]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그의 아내 피카 데 불레몽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피카는 본래 프로방스 태생의 귀족 여성이라는 점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6] 피에트로가 프랑스에서 사업을 하고 있을 때 피카는 아시시에서 프란치스코를 낳았다. 프란치스코는 요한(이탈리아어로는 조반니)이라는 이름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7] 하지만 그의 부친은 프랑스에서 돌아와서, 아들을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치스코(이탈리아어로는 프란체스코)라고 불렀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8] 몇몇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그가 프란치스코로 개명된 것은 매우 어렸을 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훗날 그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데 소질을 보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2] 어린 시절에 프란치스코는 음유시인을 매우 좋아했으며, 알프스 건너편으로 가기를 소망하였다.[2][8] 많은 전기작가들이 프란치스코가 소식적에 화려한 옷을 즐겨 입고,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탐미주의적인 생활을 했다고 쓰고 있지만,[6] 사실 ‘거지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세속에 대한 환멸은 그의 인생에서 상당히 일찍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화에 따르면, 하루는 프란치스코가 부친을 대신해서 시장에서 옷감과 직물을 팔고 있을 때 걸인 한 사람이 구걸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였다. 거래 성사 직전에 프란치스코는 물건들을 내팽개치고 걸인을 뒤쫓아가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모든 돈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 자선 행위를 본 친구들은 그를 크게 비웃었다. 집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는 화가 난 부친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다.[9]
1201년 프란치스코는 페루자 군대와 싸우기 위한 원정군에 참여하였으며, 전쟁 도중 포로로 사로잡혀 1년 동안 콜레스트라다에 있는 감옥에서 죄수로 갇혀 지냈다.[10] 이 당시 포로 생활 경험은 그가 영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203년 부친이 낸 보석금으로 풀려나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걱정 없이 태평한 시간을 보냈다. 1204년 그는 중병에 걸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게 되면서 영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1205년 프란치스코는 페루자 정복을 위한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환시를 체험한 후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영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2]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군대에 지원할 목적으로 길을 가던 중 스폴레토에 있을 때에 환시를 보았는데, 수많은 갑옷과 무기가 있는 방 안에 있던 중에 “주인을 섬기겠느냐? 아니면 종을 섬기겠느냐?”는 목소리를 듣고 “주인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응답하자 아시시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말대로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로 되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아시시로 돌아온 후로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은 물론 친구들과의 연회 참석도 피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친구들이 그에게 웃으면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가난이라는 덕을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칭송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한적한 장소에 혼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아시시 인근에 있는 나병환자들을 수용한 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통해 결정적인 회개 생활로 들어갔다. 로마를 순례한 길에서 그는 성당 문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들과 같이 생활하기도 하였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아시시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아시시 교외에 있는 산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게 되었다. 기도하던 중에 그는 십자고상의 그리스도(산 다미아노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야,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하여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자신이 지금 기도했으며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수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이를 위해 부친의 가게로 가서 값비싼 옷감들을 가져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2][11]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친 피에트로는 몹시 화가 났으며,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리려고 갖은 시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혼을 내다가, 나중에는 체벌까지 가하였다. 결국 피에트로는 최후의 수단으로 프란치스코를 도시 집정관들에게 데려가 프란치스코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종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교회의 판결에 달려 있었다. 도시 집정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상속권은 물론 부친과의 관계마저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심지어는 대중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 뿐만 아니라,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부친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아시시 지역에서 몇 달 간 구걸 행위로 연명해가다가, 아시시 인근에 돌아와 2년 동안 통회의 삶을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아시시 인근의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성당들 가운데 움브리아 평원에 있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안에 있는 작은 경당인 포르치운쿨라는 프란치스코가 가장 좋아하는 거처였다.[11]
프란치스코회 설립[편집]
1209년 성 마티아 축일에 프란치스코는 미사 중 낭독된 마태오 복음서 10장 9절, 곧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한 구절을 듣고 큰 감명을 받으면서 그의 인생은 영원히 바뀌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2]
성년기[편집]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생겼고, 수도회가 생겨났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수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수도자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형제 공동체는 그 숫자가 꾸준하게 늘어갔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 공동체는 노동과 묵상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프란치스코 수도회인 작은형제회에서 수사들이 약 1개월동안 세속에서의 노동을 함으로써 실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고향 아시시에서 수바시오(Subassio) 산에 운둔처를 세웠는데, 이는 후에 카르체리 수도원(은둔소)이 되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복음에 기초한 간단한 수도규칙을 써 주었다. 그리고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여 자신들의 수도회를 인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는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의 생활 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 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 속에 쓰러져가는 성 라테라노 대성당을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약함과 가난을 실천하는 교회가 아닌, 권력과 부자가 된 교회의 타락을 개혁하는 종교개혁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다음날 수도규칙과 수도회를 정식 승인하였다.
1211년 그리스도의 수난 성지주일 날, 귀도 주교의 허락 아래 클라라가 아씨시의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포르치운쿨라로 왔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도 프란치스칸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래서 그녀는 성모상 밑에서 머리를 자른 다음 자신의 귀족 옷을 벗고 회개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프란치스코는 몇몇 수도자들과 함께 그녀를 안전한 장소인 분도회의 한 수녀원으로 피신시켰다. 클라라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집으로 되돌아올 것을 요청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갔지만, 외부인에게 대해서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수도원의 규칙 덕분에 클라라는 그 곳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얼마 후 클라라의 동생 카테리나도 언니를 따라 프란치스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촌인 모나르도가 와서 강제로 카테리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클라라의 어머니 오토라나와 또다른 여동생 베아트리스도 입회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동료 수녀들을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보냈다. 훗날 클라라와 수녀들은 가난한 자매들의 회(클라라회)의 수도자가 된다.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더불어 창설한 이 클라라회는 반봉쇄 수도회로, 지금도 프란치스칸 2회로 분류된다. (흔히 작은형제회라 부르는 수도회는 남자 수도회로서, 프란치스칸 1회라 부른다. 1회는 분파가 갈라져 최종적으로 세 분파로 나뉘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세 분파를 각각 '작은형제회'(OFM), '꼰벤뚜알 작은형제회'(OFMconv.), '카푸친 작은형제회'(OFMcap.)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는 1213년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고, 이어서 시리아와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으며,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 알 카멜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했으나, 포로 신세가 되었으며 술탄을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뒤 1220년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시리아까지 선교 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작은형제회가 살기 시작하였다.
1215년 11월에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인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또다른 위대한 수도회의 창설자인 도미니코를 만난 것은 이 때였을 것이다. 이 공의회는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새롭게 창설된 수도회들의 수도규칙을 승인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교황이 이미 1209년에 구두로 인준해 주었기 때문에, 1223년 수도규칙을 승인받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성흔(오상)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생전 십자가에 매달릴 때 입은 상처가 성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1224년 8월 15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 산에서 단식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이 지난 9월 17일 프란치스코는 기도를 하던 도중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을 목격하고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는데, 이것은 로마 가톨릭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다. 하지만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이 사건은 프란치스코에 관한 중세의 믿을 만한 사료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엘리야 총장의 회람편지,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성 보나벤투라의 대전기 등).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질 무렵에 프란치스코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 141편을 기도한 후에 “어느 누구도 죽음의 포옹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1228년 7월 16일 프란치스코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성 조르지오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1939년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그의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가난하고 겸손한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성자를 따르게 하시고,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주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하느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대한성공회의 감사성찬례에서 그의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 하느님, 주님의 종 프란시스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불타게 하시어 세상의 찬란한 빛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성인이 보여주신 사랑과 절제를 본받아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일화[편집]
수도사가 된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성적인 욕망을 느끼고 이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하느님과 예수님께 자신의 음욕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피어난 장미들에는 가시가 없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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