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5. 22:57ㆍ시민, 그리고 마을/지역 마을공동체 활동
농촌문화가 변해온 과정, 앞으로의 방향
구자인(진안군 마을만들기지원팀장)
잘 알려져 있듯이 문화(culture)라는 용어는 라틴어에서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사용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고, 또 그 관점과 별개로 사람들 사이에 익숙해져 있는 이미지도 있다. 흔히는 농촌 사회에 전래되어 오는 전통적인 풍습으로 그려지고, 그래서 농촌 체험을 한다는 것은 농업생산이나 전래놀이, 풍습 등을 체험하는 정도로 좁게 생각한다. 필자는 농촌 문화의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농촌 마을의 역사와 구조를 연구하고 농촌 현장에서 살기좋은 마을만들기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한 사람으로서 농촌 문화가 변해온 과정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농촌이 살아야 문화가 산다
<그림 1> 농촌문화의 다양한 구성과정
농촌 문화를 나름대로 분류하고 구성과정을 정리해보자면 다음 <그림 1>과 같다. 이 그림은 진안군 백운면에 사는 옹기작가 이현배씨가 정리한 개념에서 빌려와 필자가 조금 수정, 보완한 것이다. 먼저 기본 구성요소인 흙과 사람, 땅을 매개로 각각 농업, 농민, 농촌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각이 상호작용하면서 농촌 문화는 농경문화, 생활문화, 민속문화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에 가족과 마을, 자급이라고 하는 농촌적인 고유한 생활양식이 발현된다.
농경문화는 농업 생산활동에 고유한 것으로 계절별로 이루어지는 행위와 각종 시설, 기술적 체계 등으로 볼 수 있다. 생활문화는 생산자 농민과 가족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농산물 가공과 농업 자재 생산, 의복, 주거 등의 영역이다. 민속문화는 마을과 지역에 고유한 세시풍습, 의식, 규율 등이 해당한다.
물론 자연적 특징이나 역사적 과정 속에서 각각의 상대적 크기나 상호작용의 결속력, 외부와의 개방 정도 등에는 지역적인 편차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도시와 달리 농촌은 ‘흙’(자연)을 상대로 한 노동이 있고 ‘땅’(공간)에 상대적으로 고착되어 있으며, ‘사람’(노동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 농촌 문화는 이러한 구성요소가 서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농촌 문화의 가장 밑바탕에는 무엇보다 농업이란 생산활동이 있다. 이 생산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한 기술과 사람들의 협업체계, 또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가치관이 결합되어 있다. 농촌의 다원적 기능이니 환경적 기능이니 하는 것도 이런 생산 활동이 지속될 때 가능한 것이다. 계곡 자락의 다락논도 논밭을 가로지르는 수로도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나 마을숲, 모정 등도 이런 농업 생산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개별 요소가 잘 결합된 시스템은 이질적인 것이 들어와도 천천히 수용하고 조금씩 변하면서 스스로의 회복력이 크다. 그래서 농촌에서 문화란 ‘농촌의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저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귀농귀촌인들이 ‘텃세’라고 부르는 것도 외부인을 마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문화적 장치인 셈이다. 농촌 문화는 생산과 소비, 폐기라는 물질순환 고리의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어 사회를 안정시키고 위기에도 강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농촌 문화를 재생한다고 할 때 문화만을 따로 떼어 바라보아서는 절대 안된다. 농업 생산활동이 건전하고 유지되어 농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농촌 마을이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뀌어갈 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박물관의 박제품처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농촌이 살아야 문화도 산다”란 표현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농촌과 농촌 문화가 변화해온 과정
이러한 농촌문화의 특징들은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안정되고 선명하게 유지되었다. 물론 유교문화와 지주-소작인의 봉건적인 억압 장치가 이것을 강제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1백년간 농촌 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지난 20세기 1백년의 농촌 역사를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그림2>와 같다. 이를 통해 농촌 문화가 바뀌어온 물적 토대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연을 상대로 한 농업이 석유화학에 의존하는 공업적 생산방식으로 바뀌고, 생산자이자 자급자족의 주체였던 농민이 소비자로 전락하고, 농촌 사회에 직주분리와 쇼핑, 개인주의 등 도시적 생활양식이 광범위하게 정착되었다. 시장을 통해 공업적으로 생산된 기계와 자재, 식료품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생산된 농산물은 도시로 대량 소비되며, 국가의 보조예산에 의존하는 농업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천과정에 따라 농촌 사회가 가진 고유한 자급의 힘도 마을의 힘도 잃어버렸다. 도시에 지나치게 노동력을 공급(인구가 감소)하면서 가족관계는 해체되었다.
<그림 2> 농촌 사회에서 생산과 생활의 변천형태
적어도 1970년대 이전(전형적으로는 조선시대)까지의 농촌 사회는 자연지형에 맞는 규모에서 마을을 형성하고, 자연과의 일상적인 노동과정을 통해 자급적인 물질순환이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외부로부터의 자본이나 생산물의 유입도 최소한으로 그치고, 생산과 소비, 폐기라고 하는 순환 고리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일상적이고 전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농촌에서는 자연과의 접촉이 기계를 통한 노동과정으로 한정되고, 그것도 단절적이고 부분적인 관계일 뿐이다. 반면에 생활범위는 확대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편리함도 늘어났지만 국가와 시장, 도시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져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치의 힘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물론 이런 변천과정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고, 식민지 통치나 한국전쟁, 새마을 운동 등 역사적 계기에 대항하고 수용하는 방식에 따라 시간의 완급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 자체는 거의 모든 농촌에서 나타났고 그만큼 국가와 시장, 언론 등을 통한 외부적 압력이 강력했던 셈이다.
농촌 문화를 살리는 기본 방향
농촌 사회에서 우리가 다시 돌아봐야 할 문화적 유산은 적지 않다. 당장 논과 밭, 수로와 같은 생산시설이 있고 이를 관리할 기술이 있다. 또 다양한 농가공품과 발효 음식문화가 있다. 여기에 당산나무와 모정, 마을숲, 공동산과 같은 경관이 있고, 두레와 품앗이 같은 공동체적 풍습이 있다. 모든 것이 농업 생산활동과 주민 생활에 면밀하게 연결된 것이고 따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화적 유산을 이어받아 현대에 맞게끔 재생, 재창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그 방향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우려스러운 움직임을 보며 농촌 문화를 살리는 기본 방향을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농촌문화 재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살고 있는 주민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외부자적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문화를 인식하고 만들어가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그 지역의 주민들이다. 지역과 주민의 입장에 서게 되면 문화란 것도 생산, 교육, 복지, 환경 등과 별개가 아니고 모두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관광, 축제, 체육, 예술 등도 마찬가지다. 행정 중심의 발상이나 전문가적 편견에 빠지면 이런 모든 것들이 별개가 되고, 농민들에게도 여유있는 사람들의 ‘사치품’으로 보일 뿐이다. 요즘 흔한 지역 축제가 주민들의 일시적 ‘환각제’로 작용하는 현실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각종 시설보다 사람과 프로그램이 중요하다. 필요성 자체가 모호한 시설(특히 공공시설)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미 방치되는 시설도 너무 많다. 문화시설이라는 것도 정부 예산체계에 맞추어 계층별로 분리되어 지어지는 현실이다. 정미소나 폐교, 물레방아, 모정, 농기계창고 등 이미 있는 다양한 시설들이 주민들의 생산, 생활과 연계를 더욱 가지도록 지원하고, 이를 연계하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며, 각종 프로그램 사업을 더욱 많이 시도해야 한다. 그래서 흔히 ‘지붕없는 농촌 박물관’으로 번역되는 에코뮤지엄의 관점이 중요하다.
셋째, 귀농귀촌하시는 문화예술인의 역할을 중시하되, 학습과정이 중요하다. 사실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능을 몸에 익힌 문화예술인이 농촌에 많이 들어오고 있다. 또 이런저런 좋은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분들이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아주 많고 소중하다. 다만 농촌적 관점에서의 학습이 충분히 필요하다. 농촌 사회의 고유성에 대해 눈뜨지 못한 채 이질적인 내용과 방법을 강요하는 우려를 범해서는 안된다. 공공미술 작업에서 이런 문제가 잘 나타난다. 그래서 먼저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고, 농촌과 지역사회에 녹아드는 ‘시간과의 싸움’을 거쳐야 한다.
넷째, 도시와의 관계에서도 ‘적절한’ 교류가 필요하다. 농촌은 서서히 변하는 사회이고, 지나치게 외부에 개방되면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이 크게 흔들린다. 도시민과의 ‘인간적 교류’는 장려되어야 하겠지만, 교류 자체에 매몰되어 일상적이고 대량으로 이루어지면 농촌 문화는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소비대상이 되어버리기 쉽다. 지리산 둘레길이 ‘1박2일’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에 나타난 문제점처럼 우리는 ‘농촌이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사적 공간’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문화를 통한 살기 좋은 농촌 마을만들기
현대의 농업과 농촌, 농민은 앞의 <그림2>에서 도식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크게 변했다. 이 과정에서 농촌 문화도 크게 변했다. 좋은 전통은 단절되고, 새로운 문화는 형성되지 않은 채 도시에 계속 편입되어가고 있다. 국적 불명의 종자와 농업기술이 계속 도입되고, 농촌 경관에 이질적인 비닐하우스와 조립식 판넬 건물, 도시적 생활양식의 대표격인 24시간 편의점과 대형마트 등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또 파괴된 마을공동체를 대신하는 형태로 개인주의와 사적 소유권 의식이 강화되고 있다. 문화는 단지 문화단체의 프로그램이나 행정 사업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최근 들어 농촌의 살기좋은 마을만들기란 주민 공동활동도 많아지고 있다. 행정 사업이 매개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주민들이 마을을 스스로 바꾸어볼 수 있는 좋은 계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런 활동에서조차 나타나는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제2의 새마을운동처럼 관 주도의 하드웨어 사업이 농촌 문화를 더욱 왜곡시키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소득향상과 같이 경제 영역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조립식 판넬 건물이 늘어나고 도시민 왕래가 지나치게 잦아지며 시설 위치나 이익 분배 등을 둘러싸고 마을내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나 마을 내에서 농업의 존재방식, 농촌다움의 회복, 농민으로서의 자존심 등과 같은 원론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업 그 자체만 선행한 결과인 셈이다.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 활동조차도 주민 개개인의 생활양식이나 의식의 변화과정과 연동하지 못한 채 새로운 문화적 전통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농촌 마을만들기에서도 여전히 ‘좋은 전통은 단절되고 새로운 질서는 미형성’된 채로 진행중이다. 물론 이런 결과는 개개의 마을 단위에서 대응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그러한 인식과 실천을 가로막는 외부적 압력(제약요소)이 그만큼 거대하다.
그러므로 농촌 마을만들기도 농업생산이나 생활양식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역 내부의 내발적 역량을 재구축하려는 장기적인 노력, 또 그 역량을 해체시키려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대한 ‘의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결국 자본주의화, 근대화, 도시화라고 하는 과정이 초래하고 있는 결과를 다시 한번 엄숙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농촌의 위기’가 자주 거론되는 시대에서 농촌만이 가진 고유한 자원과 특성에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화는 역으로 ‘힘’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우고, 닫힌 마음의 문을 열며, 서로의 연대관계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땅의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상상력으로 무장하여 농촌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고 새로운 농촌 문화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농촌이 살아야 문화가 산다”는 표현도 맞는 말이지만 ‘문화를 통한 살기 좋은 농촌 마을만들기’도 꼭 필요하다. 누가 실천할 것인가?
참고자료
구자인, 2002.3, 「農山村の自給力ㆍ自治力の変遷と現状:広島県西城町大佐地区の事例調査に基づいて」(농산촌의 자급력 및 자치력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 상황 : 히로시마현 사이죠쵸 오오사지구의 사례조사에 기초하여),『林業経済研究』48(1),69-7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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