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5일,
발렌타인데이로 기억되는 이 날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더욱이 안중근 의사를
일본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 열기가 더욱 확산되었다. 독도, 위안부 문제 등 끊임없이 일본의 망언이
구설수에 오르는 요즈음, 삼일절을 맞아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효창공원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묘'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김구 선생이 그의 유해를 찾아와 묻기 위해 묘비만 세워 놓은 자리다. 안중근 의사가 최후의 유언에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중략)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을사조약에
개탄해 하던 안중근 의사는 1907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다. 의병 활동 등으로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안의사는 1909년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왼손 약지를 끊어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써 의지를 굳게 했다.
- 조선닷컴 인포그래픽스보기: '불멸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거 104주년1909년 10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 의사는 그를 저격하기로 결심하고,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안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외에 3명의 일본인 인사를 저격하고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후 순순히 체포되었다.
- 조선닷컴 안중근 특집 사이트: 10.26 의거 이후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3월 15일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한 뒤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한다. 조국이 광복을
맞은 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발굴하지 못했다.
◆ 도쿄 한복판서 日王에 수류탄 던진
이봉창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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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던진 수류탄이 제 때 터지지 않아 실패한 의거로
끝났기 때문이다. 일본 강점 시절 일본인에 비해 항상 차별과 수모를 겪던 이봉창 의사는 1931년부터 항일 운동에 나섰고,
김구 선생을 만나 일왕 폭살(爆殺) 계획을
추진했다. 마침내 1932년 1월 일본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사병관식을 끝내고 지나가는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지만 불발되고
말았다. - 소년조선일보: 이봉창 의사, 그는 누구? 도쿄 한복판서 日王에 수류탄 던져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그 해 10월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 이후 한인애국단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 한명이 윤봉길 의사였다. 항일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었다.
◆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백정기 의사
백정기
의사도 의거를 이루지 못한 독립운동가다.1931년 9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배일운동을 이어갔다.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가 상해 훙커우에 있는 일본요정에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키스트
이강훈,원심창과 함께 습격하려다가 밀고로 체포되고 만다. 광복 후에 살아서 돌아온 이강훈, 원심창과는 달리 백정기 의사는
옥사하였다. - 조선일보: 중국 상해 '육삼정 의거' 80주년 기념행사 열려
광복을
맞이한 후 1946년 6월 15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제외한 삼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효창공원에 김구 선생과 함께
묻혀 있다. 목숨을
버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들의 의거를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들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과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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