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가 쏟아지던 17일 오전 충남 서천군 판교면 문곡리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서 희망택시 운전기사 오혁철씨(맨 왼쪽)의 안내를 받아 택시에 올라타 있다. |
[지역 쏙] 서천군의 ‘노인 복지 14 실험’
콜택시도 아니고 총알택시는 더더욱 아니다. 시골 마을 어르신들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전해주는 ‘희망택시’.충남 서천군이 우여곡절 끝에 내놓은 노인 복지 실험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현장을 찾아갔다.
“총각, 이것 좀 차에 실어서 마을회관까지 태워주면 안 되남?”
17일 아침 7시께 충남 서천군 판교면 문곡리. 김순희(73) 할머니는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옥수수를 가득 담은 자루와 씨름하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찐 옥수수 200개를 팔러 전북 군산장에 가는 참이었다. “7시 반에 마을회관 앞으로 택시가 오거든.” 지난해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집에 불까지 났지만 김 할머니는 옥수수 농사를 바지런히 지었다. 이날이 올해 처음 거둬들인 옥수수를 파는 날이었다.
문곡리 마을회관 앞에는 호미처럼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이 택시를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난 판교장에는 열댓명도 넘게 택시를 타고 나갔어.” 곁에 선 김창하(70) 할아버지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여기는 희망택시 없으면 안 돼. 차 없어봐, 판교면까지 걸어 나가려면 노인네들 걸음으론 1시간도 넘게 걸려.” 문곡리에서 판교면까지는 4㎞ 남짓, 줄잡아 10여리 길이다.
서천군이 지난달 3일부터 시작한 희망택시 운행사업이 농어촌 주민들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농어촌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오지마을 노인들에게 손발 노릇을 하는 희망택시는 그야말로 효자다. 50여가구 80명이 사는 문곡리는 서천에서도 대표적인 오지다. 서천읍은커녕 판교면 소재지까지 가는 데도 고개를 둘이나 넘어야 한다. 한상익(70) 문곡리 이장이 말했다. “예전에는 한겨울 빙판길, 한여름 뙤약볕에도 산길을 걸어야 했어유.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니께 버스가 들어오덜 못하잖어.” 신경자(73) 할머니도 거들었다. “허리고 무릎이고 다 아프니까, 좋다는 병원 있으면 쫓아다니는 게 일이야. 희망택시 생겨서 얼마나 좋아. 병원에 한번 갈 거 두번도 가고 세번도 가고 그러니께.”
몸만 편한 게 아니다. 고쟁이에서 꼬깃꼬깃 접은 만원짜리를 꺼낼 필요가 없다. 서천읍에 갈 때는 1명당 버스 기본요금인 1100원만 내면 된다. 판교면까지 갈 때는 몇 명이 타든 택시 1대당 100원만 내면 되는 ‘100원짜리 택시’다. 문곡리에서 서천읍까지 콜택시 요금이 1만1000원, 판교면까지도 6000원인 것에 견주면 거의 공짜인 셈이다. 나머지 요금은 군에서 다달이 운행 횟수 등을 따져 정산한 뒤 마을 이장을 통해 마을 담당 택시기사에게 전해준다. 박육군(75) 할머니는 “허리 아플 땐 판교면 가서 물리치료 받고 오늘은 서천읍에 있는 안과에 가는 길이여. 군에서 참 좋은 거 해줬어”라고 했다. 선글라스에 꽃무늬 모자로 멋을 낸 박 할머니는 집에서 마을회관까지 30분을 걸어왔다고 한다.
버스 안 다니는 마을 16곳 운행
면까지 100원·읍내 1100원 받아
6월 491차례 씽씽…1237명 이용
사업자 보조금 아닌 교통복지로 지원
조례 제정하고 올예산 5천만원 확보
어르신들 “뙤약볕 걸어 버스 탔는데
이젠 택시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몰라”
문곡리는 지난 한달 동안 희망택시가 운행한 서천군 16개 마을 가운데 이용률이 가장 높았다. 모두 46차례 택시가 오갔고 156명이 이용해 회당 평균 탑승 인원이 3.39명이다. 오지마을인데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다 보니, 그만큼 희망택시가 절실했던 셈이다. 문곡리 희망택시는 서천읍과 판교면 오일장에 맞춰 운행하는데, 보통 10명 이상이 기다리기 때문에 서너차례 택시가 오가며 주민들을 모셔다 드린다고 한다. 문곡리 희망택시를 맡고 있는 오혁철(57) 기사의 친절한 마음씨도 사업 성공에 한몫을 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주민들을 태우는 게 원칙이지만, 오씨는 몸이 불편한 분들이 많은 까닭에 일일이 집까지 찾아간다. “부모님 생각하면서 일해유. 저두 아흔 되신 노모를 모시고 있거든유. 짐도 많고 편찮으시니께….” 오씨는 차 안에서도 어르신들이 지루할 틈 없이 싹싹한 말투로 우스갯소리도 흔히 한다.
희망택시 운행사업은 애초 나소열 서천군수가 2010년 지방선거 때 내놓은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공약이 현실로 이뤄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사업에 앞서 조례를 만들 때 근거 법령을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으로 삼은 게 문제였다. 법령상 대중교통이 아닌 택시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은 기부행위에 해당한다는 선거관리위원회와 충남도의 지적이 나온 것이다. 몇몇 시·군에서도 희망택시와 비슷한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지만 바로 이 대목에 발목이 잡혔다. 서천군 희망택시도 그렇게 물거품이 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지난해 초 정해민(45) 서천군 교통담당은 발상을 완전히 바꿨다. 문제가 됐던 근거 법령을 지방자치법으로 삼았다. 지방자치법(9조2항2호)에는 ‘주민의 복지 증진에 관한 사무’가 명시돼 있다. 희망택시 사업의 알짬이 택시에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농어촌마을의 교통 복지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외딴 마을인데다 도로도 좁은 탓에 농어촌버스 자체가 운행하지 못하는 곳의 주민들이 인근 마을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거나 비싼 요금을 주고 콜택시를 이용하는 현실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 담당은 “국토교통부나 선관위로부터 ‘법령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법제처에 또다시 질의를 했는데, 운수사업자에 대한 재정 지원이 아니기 때문에 조례 제정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지난 5월31일 ‘서천군 농어촌버스 미운행 지역 희망택시 운행 및 이용 주민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됐고, 올해 운영예산 5000만원을 확보했다. 조례 제정에 앞서 지난해 말부터 올해 3월까지 22개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동 패턴표’를 일일이 작성해 최적의 운행 날짜와 시각을 소상히 파악했다. 조사 결과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65살 이상이고, 목적지는 시장·병원이 있는 읍·면 소재지, 운행 필요 시기는 병원은 평일, 시장은 장날에 집중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6월 한달 동안 5개 읍·면 16개 마을에서 운행한 희망택시는 491차례, 이용 주민은 1237명에 이른다.
희망택시는 노인 복지뿐 아니라 군의 재정 여건에도 도움이 된다. 농어촌버스 미운행 지역 23곳에 새로 배차를 하려면 최소한 버스 2대가 더 필요하고 해마다 2억5000만원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희망택시를 운행하면 1년에 6000만원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빠듯한 군 살림살이에서 해마다 2억원 가까운 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셈이다. 희망택시 도착지가 서천특화시장 근처여서 전통시장 활성화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군은 기대하고 있다. 희망택시 사업 출범에 이바지한 정 담당은 이달 초 모범 공무원으로 뽑혀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시동을 켠 지 한달 남짓 된 희망택시는 운행 마을도 늘려나가고 있다. 6월 첫달 16개 마을을 다닌 데 이어 이달 들어서는 22개 마을이 대상이다. 농어촌버스가 하루 2차례가량 운행하는 지역에도 조례를 개정해 추가로 희망택시 운행을 검토중이다. 나소열 서천군수는 “희망택시는 그동안 노인을 비롯한 교통 약자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점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정책이다. 효율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복지 차원에서 이들의 교통권이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잠시 멈췄던 장맛비가 다시 쏟아진 17일 오전 11시30분. 서천군 서천읍 ㅁ치과 앞에서 임재석(78) 할아버지가 부인 박종희(76) 할머니와 희망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 희망택시를 타봤다는 임 할아버지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택시 타니까 어떠냐구? 거 참 좋지. 전에는 내가 경운기 끌고 판교면까지 갔어. 30분은 족히 걸리거든. 거기서 서천읍까지 가려면 1시간에 1대 다니는 버스를 또 기다렸다구.” 잠시 뒤 ‘문곡리 마을 희망택시’라는 표지가 붙은 오혁철 기사의 택시가 어김없이 도착했다. 오 기사는 걸음 걷기가 어려운 박 할머니를 조심조심 택시 뒷자리에 태운 뒤 문곡리 마을로 떠났다.
서천/글·사진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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