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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시리즈7) 권력에 취하면 폐망의길, "다산의 격앙된 고발" 들으시요--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3. 11. 2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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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취하면 폐망의길,  "다산의 격앙된 고발" 들으시요--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의 호가 사암(俟菴, 기다림)이라며 “잘못된 정치는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지만, 아직은 다산처럼 마음먹고 면밀히 주시하며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다산 산문선’ 개정판 펴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사람들 많이 다치겠는데.” 자리에 앉자 박석무(71)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던진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반대의견들에 대한 집권세력의 경직된 대처와 편파적 인사정책을 겨냥한 말이다. “경제는 좀더 두고봐야겠지만 용인, 즉 사람 쓰기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과거에 지탄받은 이들을 권력 핵심부에 앉혔다. 괜찮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 돌리려 하나. 대통령의 의중이 뭔지, 그것 잘 살피고 따르는 것이 승진, 출세 길이 돼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박 이사장은 정조 등극의 일등공신이었던 홍국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젊은 나이에 급작스레 몰락한 사실을 거론하며 “권력에 도취되면 패망한다”고 했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한 영국 역사가 액턴의 경구까지 인용했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가는 건 몰락(패망)구조다. 한말 여흥 민씨나 안동 김씨 척족들도 그랬다. 권력이 집중되면 결국 부패하고 망한다”고 했고, “그럼에도 나라와 역사는 제 갈 길로 간다”고도 했다.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 연구자인 그가 홍국영을 떠올린 것은 역시 당대에 활동했고 정조 사후 신유옥사(1801)로 혈족과 선후배들을 무더기로 잃고 그 자신 18년 유배생활을 한 다산의 수난, 그리고 당대 진보세력이었던 남인 신서파를 천주교도로 몰아 300명 넘게 죽인 노론 벽파와 남인 공서파의 집요한 권력추구와 유혈낭자했던 정적 제거 모략 등이 지금 시대와 닮은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6일, 28년 만에 <다산 산문선>(창비)의 개정판(1985년 초판 발행)을 낸 박 이사장을 서울 중구 서소문동 다산연구소에서 만났다.

 

인터뷰/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지금 개정판을 낸 까닭은?

 

“초판 나온 지 28년, 번역을 끝낸 지는 30년이 됐다. 약간의 오역과 적절치 못한 어구들을 다시 손보고 새로운 것 몇 가지를 추가했다. 번역 당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 시절 나의 한문 실력도 미숙했다. 많은 부분을 가필하고, ‘아버님을 회상하며’(선인유사)와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 두 편을 추가해서 넣었다.”

 

-그 시절이라면?

 

“1980년 광주항쟁 때 신군부는 고교 교사였던 나를 항쟁의 수괴로 지목하고 지명수배했다. 이리저리 피신하다 7개월 뒤인 그해 12월 은신중이던 온양에서 검거됐고, 1982년 3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출소할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그 기나긴 은신과 감방살이 시절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해준 게 이 책이었다. 그때 5·18에 다산 등이 모진 수난을 당한 신유옥사가 오버랩됐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다산의 ‘자찬 묘지명’을 비롯한 산문들을 번역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 200년 전에 그 많은 사람들, 그런 거유(巨儒)들이 죽어나간 데 비하면 나 정도의 수난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유옥사의 진상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산 산문선>은 어떤 내용을 담았나?

 

“다산과 손암 정약전, 녹암 권철신, 정헌 이가환, 복암 이기양, 매장 오석충 등 신유옥사로 모진 고초를 당하다 숨진 다산의 지인 및 선후배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다산은 이들이 벽파·공서파 등의 정적들이 ‘역적을 구실 삼아 함께 섞어서 죄를 주는 옥사에 억울하게 몰려서 사화를 당한 것’(복암 이기양 묘지명)으로 규정했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기록이기도 하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이 수난받던 시대의 생생한 자료로서, 일종의 고발문학이기도 하다. 학자와 권력, 사상과 정치, 선류와 악당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가 어느 쪽인가도 이 기록은 보여준다.

 

6부로 구성돼 있는데, 제1부는 다산 자신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자찬 묘지명’ 형식으로 사실대로 기술한 것이다. 이는 다산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필수자료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조선 사회와 역사를 알 수 있고 또 당시의 학풍과 문풍, 시대적 질곡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다. 제2부는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이가환 등 선배, 지기들의 사적과 그 자신의 감상을 역시 묘지명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제3부는 다산의 집안 어른과 자손들의 묘지명, 제5부는 전기와 사건들을 담았는데, 신유옥사 당시 집권층의 무도한 행위를 폭로하고 고발한다. 특히 ‘죽대선생전’에 그들의 집권욕이 부른 죄악상에 대한 다산의 격앙된 고발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서교(천주교)의 죄목으로 모함하여 사자나 호랑이처럼 으르렁대며 개나 양처럼 몰아대고 독촉을 했다’고 한 ‘죽대선생전’을 보면 다산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 심정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역사를 돌아볼 때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권력욕이다. 권력 때문에 올바른 철학과 사상, 학문과 학자들의 민중을 위한 업적이 얼마나 어이없게 사장되고 말았던가. 신유옥사도 학문적 소신과 정당한 정치적 주장 때문에 선비들이 당한 사화의 하나다. 다산은 생각이 다르다고, 사상이 다르다고 죽여선 안 된다고 외쳤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핵심인 여섯 사람의 기록은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 짓눌린 실학자들이 당한 사화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다산의 기록은 어떤 사화의 기록보다 정확하고 비통하며 처절하다.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인간의 아픔과 죽음의 처절함, 삶의 즐거움을 기록한 일대 서사문학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정조 등극 일등공신 홍국영
급작스런 몰락을 봐라
권력 집중되면 부패하고 망해

 

정적 제거 정치탄압 ‘신유옥사’로
보수파 권력 등에 업고 호의호식
하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승자는
민중 위한 변혁과 변화 애쓴 다산

 

 

-다산도 죽은 이가환과 권철신 등을 천주교도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으로서 서학을 수용한 사람들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죽은 이들 중에는 물론 천주교도도 있지만, 다산과 5명의 주요 인물은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긴 했으나 신자로서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학문, 세계관으로서의 서학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가환은 역상학(천문학 및 역학), 정약전은 수리학(기하학 및 수학)에 깊은 관심과 식견을 갖게 되는데, 기타 농정, 수리(水利) 등 모두 천주교가 아니라 학문으로서 서학을 그들은 접했다.

 

그들은 모두 남인 고가의 후예들로 경신대출척(1680년)에서 정조가 등극한 1776년까지 거의 100년간 중앙무대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이다. 모두 실세 노론에 반대했고, 한결같이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과 학문을 잇는 학통의 계승자들이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의 영수 번암 채제공과 뜻을 함께한 직계 후배들이었다. 그들이 정조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총애를 받자 목만중, 홍낙안, 이기경, 박장설, 홍의호 등 남인 공서파가 정조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노론의 벽파와 손잡고 천주교를 구실로 제거작업에 나섰다.”

 

-다산 등이 실세가 될 경우 사도세자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기득권층인 벽파 쪽이 천주교를 빌미 삼아 정적 제거 작업을 벌인 정치적 탄압이라는 말인가?

 

“일제 패망 뒤 광복 직후의 ‘빨갱이 사냥’도 그런 면이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사상이 아니라 정치였다. 신유옥사도 명분은 천주교였지만 종교를 빙자해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한 정치탄압이었다. 정조 치세 24년, 정조는 진보 쪽이었고, 그에 맞선 노론 벽파는 보수 쪽이었다. 정조 치세에 진보는 많은 것을 성취했으나 그의 사후 보수파의 반격으로 ‘잃어버린 24년’이 되고 말았다. 재집권한 노론은 극보수의 반동으로 흐르면서 정조 때의 진보적 업적들을 다 뒤엎어버렸고, 진보세력을 제거했다. 보수 벽파들은 그들을 그냥 둘 경우 언제든 사도세자 죽음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 움직임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정조에게 ‘너의 당대엔 아버지(사도세자)를 복권시키지 마라, 그러면 죽는다’고 한 것도 실세였던 보수파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집요한 ‘노무현 때리기’와 ‘종북’ 타령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지. 그래도 역사적 승자는 다산 쪽이라고 봤다.

 

“계속 지배층이 되고 싶었던 당로자(중요 직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귀호강을 영속화하기 위해 당시의 관학인 성리학을 신봉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민중 편에서 찌든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비참한 실정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우국충정이 있던 사람이라면 성리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문으로 지배논리를 분쇄하려 했을 것이다. 역사적 안목이 없는 썩은 당로자들은 자기들의 지위 유지와 안정만을 바라서 변화와 변혁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역사는 침체됐다. 한때 그들이 호강을 누렸다 해도 긴 역사로 보면 역시 승자는 변혁과 변화를 바라던 쪽이라고 본다. 다산이 ‘악인’, ‘악당’이라고 한, 개인적 영달만을 바라서 모함과 아첨으로 역사를 거역한 공서파 소인배들을 누가 옳다고 하겠는가. 다산 제거에 광분했던 정적 홍희운이 ‘천 사람을 죽여도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지만, 승자는 다산이다. 그게 역사의 정의다.”

 

-다산의 위대함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게 있다면?

 

“다산 평전 작업을 지금 마무리하고 있다. 다산을 새롭게 재검토해본 건데, 새로 발견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옳다고 여기는 이론은 반드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말로만 민생을 얘기한 게 아니라 구체적 조처를 취했다는 것, 이론과 실천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걸 잘못하면 임금도 쫓아낼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은 황해도 곡산 부사 시절에 전임 수령에게 저항했던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데서도 확인된다.

 

500권 가까운 그의 저술 중 232권이 경학 해석인데, 성리학·주자학의 교과서적 해석, 실천과 행동 없는 관념만으론 안 된다는 걸 거듭 설파하고 있다. 위당 정인보는 다산의 해석을 두고 ‘민중적 경학(經學)’이라고 했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 또 하나는 공렴(公廉)이다. 28살 문과에 급제한 뒤 다산이 지은 오언율시 ‘둔졸난충사 공렴원효성’(鈍拙難充使 公廉願效誠, 둔하고 졸렬해 임무수행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지성껏 봉사하리)가 그걸 잘 보여준다. 다산은 공공을 앞세우지 않는 자는 공직을 맡으면 안 된다고 했다. <목민심서>도 전부가 공렴이다. 그의 모든 저술엔 이 공렴이 관통한다. 평전 작업 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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