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ea
땅을 여신으로 인격화하여 부른 그리스어.
우라노스(하늘)의 어머니이자 아내이다.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맨 마지막에 태어난 거신(巨神) 크로노스가 가이아와 우라노스를 떼어놓아, 가이아는 다른 거인족 즉 기간테스·에리니에스·키클롭스 등을 낳았다(→ 거인, 키클롭스, 퓨리). 문학과 예술에서 이따금 가이아를 제우스의 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아들 티탄족과 기간테스족이 제우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가이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 숭배를 시작하기 전 그리스에서 숭배하던 모신(母神)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시대에는 이전만큼 숭배받지는 못했지만 꿈을 꾸게 하고 식물과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대지의 인격신. 만물의 어머니로서의 땅을 인격화한 신입니다. 천지창조와 신들의 계보에 대하여 서술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에 따르면, 최초로 ‘무한한 공간’인 카오스가 생기고, 뒤를 이어 ‘가슴이 넓은’ 땅 가이아와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사랑 에로스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가이아로부터 하늘인 우라노스와 바다인 폰토스, 또 산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사랑하여 거인의 신족인 티탄들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는 제우스의 양친인 크로노스와 레아 및 그 5형제, 대지를 둘러싼 대양의 신인 오케아노스와 그 아내 테티스가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가이아는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3인의 키클로프스인 브론테스, 스테로페스, 아르게스와 100개의 팔을 가진 거인인 코토스, 브리아레오스, 기에스를 낳았습니다. 우라노스가 키클로페스와 헤카톤케이르 형제를 모습이 흉하다고 하여 타르타로스의 지옥에 가두자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시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게 하였습니다. 가이아는 모든 신과 인간의 원초(原初)가 되는 신으로서 고대 그리스 인들이 제우스를 제일가는 신으로 받들기 이전에 숭배하던 모신(母神)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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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Gaia)이론과 불교(佛敎)>
(1) 생태계(ecosystem)이론
요즘 온 지구촌이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생태계(生態系)에 혼란이 야기돼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생태계(ecosystem)란 1935년 영국의 탠슬리(A.G. Tansley)에 의해 제창된 개념으로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이 말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것들 상호간의 관계를 지닌 생물과 무기적 환경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천연생태계(a natural ecosystem)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게는 작은 연못의 생태계에서 크게는 지구생태계까지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태계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이 생물적 요소와 비생물적 요소로 대별할 수 있다. 생물적 요소는 영양물질의 순환이라는 기능적 관점에서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분해자로 구성 된다. 생태계 속에 살고 있는 생물의 종류는 아주 다양하지만 양분을 얻는 방법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식물은 광합성을 해서 스스로 몸에 필요한 양분을 만들어 살아가고, 이렇게 식물이 만들어 낸 양분을 사람과 동물이 먹고 산다. 그래서 식물을 ‘생산자’라 하고, 사람을 비롯한 동물은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 못하고, 식물이나 다른 생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어서 ‘소비자’라고 한다. 그중에서 풀이나 나뭇잎을 먹는 초식동물을 1차 소비자라고 하고, 다른 동물을 먹는 육식동물을 2차 소비자라 한다. 2차 소비자는 다시 3차 소비자인 더 강한 육식동물에게 먹힌다. 그리고 세균, 버섯, 곰팡이와 같이 죽은 동식물의 몸을 먹거나 분해하는 미생물을 ‘분해자’라고 한다. 죽은 생물의 몸은 분해자에 의해 분해돼 다시 식물의 거름이 된다.
비생물적 요소는 물질순환적 요소인 무기물질(탄소 ? 인 ? 질소 ? 황 등), 생물적 요소와 비생물적 요소를 연결하는 유기물질(단백질 ? 탄수화물 ? 지방 등), 그리고 공기, 온도, 습도, 기후 등의 물리적 요소로 구성된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과 생물들은 이러한 구분 중의 어느 한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다양한 요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잠시도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한다는 말이다.
지구는 약 45억 년 전에 생성됐고, 지구상에 생물체는 약 35억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한다. 지난 35억 년간 태양의 복사에너지는 약 30% 증가했으나 지구의 기온은 생명체가 존속할 수 있는 비교적 좁은 범위에 유지돼 왔다. 이렇게 지구의 기온이 장기간 일정한 범위에 머문 현상은 생물권이 외부의 환경변화에 대해 수동적으로만 적응해 간신히 생존을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고, 그 반대로 지구의 환경을 활발하게 변화시켜 자신을 존속시키는 능동적인 존재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2) 가이아(Gaia)의 이론
그래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Ephraim Lovelock, 1919~ )은 지난 30여 억 년 간 대기권의 원소조성과 해양의 염분농도가 생물권의 존속을 가능하도록 거의 일정하게 유지돼온 현상에 생물권이 깊숙이 관여함을 알아냈다. 러브록은 1960년대에 지구생물권이 주도권을 잡고 주위의 물리 ? 화학적 환경을 능동적으로 조절해 자신을 존속시킨다고 가정하고 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아(Gaia)이론이라 불렀다. 가이아는 모든 신과 인간의 원초(原初)가 되는 신으로서 고대 그리스 인들이 제우스(Zeus)를 제일가는 신으로 받들기 이전에 숭배하던 모신(母神)이었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땅의 여신 텔루스(Tellus)와 동일시된다.
가이아이론의 아버지, 제임스 러브록은 1919년 영국에서 태어나 맨체스터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지구과학자로 기체 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의 가스성분 검출기인 전자포획검출기를 발명했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실시한 화성생명체의 존재여부에 관한 탐구계획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러브록의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가이아이론 때문이다. 1979년에 출간한 저서 <가이아 ;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Gaia ; A New Look at Life on Earth)>에서 지구를 하나의 작은 생명체로 보는 이론을 주창했다.
가이아란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물, 대기권, 대양,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로서,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즉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로 바라보면서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강조했다.
가이아이론은 지구표면에서 진행되는 현상을 지구전체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즉 대기권, 수권(水圈), 암석권, 생물권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으로서 설명하려는 전일적(全一的, holistic) 접근방법을 도입해 현대 지구시스템과학(Earth system science)의 출현에 큰 기여를 했다.
러브록은 육지가 아니라 강의 하구, 늪지와 습지, 그리고 대륙붕의 진흙 바닥 속에 있는 생물종들이 가이아의 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발표 당시에는 학계와 사회로부터 진화론이나 판(板)구조론이 받았던 거부감에 못지않은 홀대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 가이아이론은 과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지구환경변화에 대한 세계과학자들의 선언문인 2001년 ‘암스테르담선언’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또한 최근에는 지구온난화의 재앙을 경고하고 그 대책을 제안한 <가이아의 복수(2008)>, <가이아의 사라지는 얼굴(2009)> 등의 저서를 통해 다시금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줬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 혹은 ‘환경운동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됐으며, 2006년에는 지질학회 최고 메달인 월라스톤메달을, 2000년 네덜란드 왕립미술과학아카데미에서 주는 암스테르담환경상을 받았고, 미국화학회 크로마토그래피상(1986), 노니노상(1996), 볼보환경상(1996) 등을 받았다.
가이아이론에 있어서 ‘지구생태계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설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가이아는 스스로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인간이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가이아는 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둘째 가이아는 생물과 같은 중요한 기관들과 함께 부속기관을 가지고 있어 필요에 따라 신축 ? 생장 ? 소멸이 가능하고, 장소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셋째 가이아는 매우 정교한 자기조절 체계처럼 스스로를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가이아(Gaia)가설은 지구상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물리적, 화학적 환경을 생명현상에 적합한 상태로 유지하는 최적조건을 유지하려고 언제나 자기제어기능을 갖추고 자기 스스로 조정하고 스스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지지자들이 증가해 현재는 지구가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서 자가조절(self-regulating)의 기능으로 환경을 조절해 존속돼 왔다는 주장이 일반화돼 있다. 가이아의 자기조절과정에서 비록 제한된 범위지만 지구환경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특정한 생물종의 번영과 다른 생명종의 쇠퇴를 가져올 수 있다. 즉 다윈의 자연선택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예로서 지구온난화는 인류에게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지만 다른 생물종들은 오히려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이런 가이아이론은 한편으로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게까지 생명의 존엄성을 부여하게 된다. 가령 가이아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인용되는 아메리카 삼나무에 대한 가이아학자들의 답변이 단적인 예이다. 아메리카 삼나무가 생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최고 수십 m에 달하는 이 나무는 물론 살아있다는 것이 정답이지만 가이아이론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거대한 나무의 99% 가량은 셀룰로오스 덩어리, 즉 생명이 없는 물질로 구성돼 있다. 이렇게 보면 삼나무는 살아 있다기보다 오히려 대부분이 죽어있는 통나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만약 이렇게 죽어 있는 부분이 없다면 광합성을 하는 잎사귀 등의 생명 역시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단 1%의 생명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죽어있는 99%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따로 떼어(분별해서) 보면 죽어 있지만 함께 전체를 보면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해 존재한다는 연기론(緣起論)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다].
이런 논리로 가이아 학자들은 아메리카 삼나무의 죽은 부분이 바로 지구환경이고 살아있는 부분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집단이라며, 둘은 별개가 아니라 커다랗게 살아가는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만 생명이 아니라 지구자연도 생명인 것이다 - [우리 인간도 가이아적 생명이다. 몸을 구성하는 60%의 수분만 생각하면 우리는 물주머니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런 수분이 없으면 세포 자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가이아이론은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물리 ? 화학적 환경을 유지하는데 전 지구의 생물권이 관여하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인류는 이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구의 다른 생물권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암적인 존재였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이와 같은 가이아이론은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 가르침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불가결의 사상임을 가리키고 있다.
최근 미국 미시간 주립대 연구팀이 ‘네이처 컴뮤니케이션스’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이기주의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지만 이 같은 승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진화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개인이나 집단을 처벌한다는 것이다. 이기적 개체는 짧은 기간 특정 그룹을 상대로 이득을 볼 수 있지만 이기주의는 진화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저질러온 극히 이기적인 인간들의 행태를 경고하는 의미가 있다.
(3) 불교의 입장 - 불교의 생멸관
1) 절대자의 창조설(創造說)
우주를 바라볼 때,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주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거대한 초능력적인 존재가 있어 우주를 창조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초능력자의 존재를 확신해서 인간과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보아 절대자 또는 창조자로 부르고 숭배한다. - 기독교의 창조설(創造說)이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전 우주를 따로 분리하면 ‘나’와 절대자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는 절대자인 창조자의 의지대로 태어나고 사라지며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사는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행위의 최종명령자와 최종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절대자이다. 이렇게 될 경우, 나는 나의 의지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절대자의 의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의지가 다르더라도 나는 절대자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절대자와 다른 내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단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니 나의 운명 또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절대자에 귀의할 때 그 분의 뜻에 따라 결정되며, 행복 또한 절대자의 뜻을 따를 때 내게 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삶의 주체가 개개의 생명이 아니라 절대자, 또는 창조주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나’라는 개인은 언제든 무시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2) 불교의 연기설(緣起說)
그런데 불교의 경우엔 그런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 붓다는 당시 인도 사상계에 대두되고 있던 일체존재가 절대적 존재에 의해 창조됐다는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어떤 사람이 일체가 다 존우(尊祐: 조물주, 창조신)의 지음에 원인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체를 죽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생명체의 존엄을 무시하고 일체는 다 존우의 지음에 원인하기 때문이다. 만일 일체는 다 존우의 지음에 원인한다고 본다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도무지 욕망도 없고 방편도 없을 것이다.”-중아함(中阿含 卷3 度經).
붓다는 이처럼 인간과 세계의 피조성(被造性)을 부인하고,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한 연기(緣起)를 주장했다.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모두의 창조자이자 우주의 모든 변화, 생멸의 원인과 결과이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창조하고 변화하며 성장해 간다. 이 세상의 모든 여래는 이 우주를 몸으로 삼는다(諸佛如來 是法界身)란 불경의 말씀은, 바로 이 우주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이론과 다름이 없다.
불교에서는 세상만물은 끝없이 변해가는 것으로서 그 속에 영원불변의 독자적인 실체를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기본입장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근본원리, 근본이치를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첫째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하듯이 하나의 결과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둘째는 인연법칙(因緣法則)이다. 세상만물의 변화는 인(因)과 연(緣) 즉,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에 따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싹이 트는 데는 씨앗이라는 직접적인 원인[인(因)]뿐 아니라 적당한 온도와 수분, 햇볕 등의 간접적인 조건들[연(緣)]도 똑같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다. 만물은 인과와 인연의 법칙에 따르고 있지만, 개개의 사물들은 다시 서로가 의존해서 존립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되려면 자식이 있어야 하지만, 자식은 또 부모가 있어야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이치들을 잘 헤아려보면 만물에는 일정한 법칙이 내재돼 있고, 그런 법칙성이 바로 만물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즉, 세상만물은 그 자체가 진리를 담고 있고, 또 그 진리야말로 만물을 만물이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한 마디로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서로가 서로를 말미암아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불교사상은 모든 존재의 연기적 상호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핵심으로 한다. 삼라만상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연기론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자각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철학적 지평이 확립된다.
3) 화엄(華嚴)의 세계
가이아이론에 의하면 흘러가는 흰 구름, 푸른 하늘, 말없는 꽃 한 송이 역시 그냥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있는 내 생명과 함께 아름답게 꽃피울 절대존엄의 또 하나의 생명들로 다가오게 된다. 여름 날 아침 창가에 이슬 머금고 맑게 핀 나팔꽃과 눈앞에 재롱떠는 강아지가 나의 즐거움, 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고 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 그런 장식물,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자격을 가지고 이 지구, 나아가 우주를 구성하는 절대절명의 생명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존재가 등가(等價)의 가치를 가지고 온 우주를 생명의 불로 환히 타오르고 밝히는 것을 불교에서는 꽃 ‘화(華)’, 장엄할 엄(嚴)을 써서 ‘화엄(華嚴)’이라 부른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차별이 없다. 잘난 자 못난 자, 있는 자 없는 자가 똑같은 가치를 가진 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생명의 노래를 힘차게 합창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 없이 많은 갈등이 물결치고, 수 없는 생사 역시 오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 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생명이 생멸거래(生滅去來) 없이 언제나 생명의 대 합창을 울리고 있는 세계가 화엄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상(實相)이다.
불교의 화엄사상 중에서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란 말이 있다. 일과 다는 서로를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지만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즉,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하되 하나와 전체가 혼동되지 않는다는 말로서 하나는 전체에 들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 무애자재(無碍自在)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가 있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유하고 있어서, 하나와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상입(相入)을 말한다.
상입이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여 걸림이 없이 융합하는 것이다. 하나란 하나라는 자성(自性)을 가진 확정적인 하나가 아니라 연기(緣起)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지만, 하나는 하나로서 전체가 아니고 전체는 전체로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가 아니고 전체도 하나가 아니다. 각각 제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화엄사상에 의하면 생태계의 일부가 인위적으로 변경 파괴되는 생태계의 위기란 바로 지구 생태계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
이와 같이 우주만유가 모두 인연 따라 얽혀있는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것을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 우리나라 화엄종을 중심으로 성립되고 발전됐다. 법계우주만유는 천차만별이지만 피차가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하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만유를 모두 동일한 수평선 위에 두고 볼 때에는 중생과 불(佛),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등과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실제는 모두 동등한 것이며,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어서 만유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으로 있게 된다.
그래서 화엄종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를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주장하고, 하나의 사물은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라는 뜻에서 한 사물을 연기법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우주성립의 체(體)요, 힘인 동시에 그 사물은 전 우주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우주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해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 한다. 이 사상은 불교연기론의 극치로서 우주연기의 주체를 어떤 한 사물이나 이체(理體)에 국한하지 않고 그 하나하나를 만유의 합당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다.
? 사사무애(事事無碍)
삼라만상 사사물물이 각기 독립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서 화엄종의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말로 사사무애(事事無碍)란 표현이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아무 걸림이 없고,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도 아무 걸림이 없으며,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아무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사사무애는 모든 것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으로 하나의 세계가 무수한 세계이고, 또한 무수한 세계가 하나의 세계이며, 세상은 넓지만 그 속의 모든 존재는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사무애에서 사(事)는 우리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 펼쳐지는 제각각의 현상들이다. 삼법인에서 말하는 제행(諸行)과 제법(諸法)이 다 사(事)이다. 무애(無碍)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현상은 걸림 없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 화엄학의 관점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제각각의 현상들을 살펴보자. 한 숟가락 밥을 그냥 생긴 밥일까? 흙, 물, 해, 바람, 공기, … 등과 농부가 없이는 밥이 성립될 수 없다. 이 모두가 한 숟가락의 밥의 성립에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밥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연료 속에는 또 많은 인연들이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흙이 자신의 모습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면 한 숟가락의 밥이 만들어질 수 없다. 물이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면 한 숟가락의 밥이 만들어져 입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흙은 흙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하는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찰나찰나 변해간다. 물 역시 물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하는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해간다. 해, 바람, 공기도 다 그렇다.
그러니 한 숟가락의 밥은 밥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줌 햇볕이며, 물이며, 바람이며, 공기이다. 이들이 개별적으로 분리 독립돼 있지 않고 모두가 그물의 그물코처럼 끊어질 수 없는 연기관계 속에 있다. 따라서 이들이 분리 독립된 다른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같다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의 나타나는 형태와 양상이 다르기에 결코 같다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이런 관계를 용수(龍樹)는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했다. 사사무애는 일체의 모든 존재들이 불일불이라는 것,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즉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물을 비유해서 설명할 때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다라망(因陀羅網) 세계관이라고 한다.
? 인다라망(因陀羅網) 세계관
불교에는 인다라망(因陀羅網, 산스크리트어 인드라얄라/indrjala)이라는 이론이 있다. 인드라의 보석그물이라는 뜻이다. 불교신화에 따르면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보석그물로서,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하나의 구슬마다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비치며, 구슬마다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쳐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을 상징하며, 나아가서 절실하게 자신을 아는 개체는 전체를 안다고 하는 불교철학을 상징한다. 즉, 끊임없이 서로 연결돼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말이 이에 해당한다. 걸림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작용하면서 어우러져 있는 장엄한 세계를 비유한다.
의상(義湘)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비슷한 말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란 말이 있다.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세계, 온 우주가 있다는 말이다. 부분 속에 전체가 녹아들어 있다. 중심이란 게 따로 없다.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이다. 여기에 이르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의 구별이 녹아버린다.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얽혀 있고, 이곳과 저곳이 한 공간에 중복돼 있다. 이러니 ‘나’와 주변[우주]을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4) 동체대비(同體大悲)
인간을 포함한 무수한 생명을 불교에서는 ‘사뜨바(sattva)’라고 한다. 이를 중국에서는 ‘중생(衆生)’이나 ‘유정(有情)’으로 번역했다. 중생이란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리(Boddhi)’에 상대되는 말이므로 중생이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말이다. 불교는 바로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한 무수한 중생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불교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이기도하지만 현실적 지평에서 실천해야 할 불자의 과제는 무수한 생명들을 보살피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중생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지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생이 살아가는 공간은 육도(六道)로 표현되는 추상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세계는 크게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삼계로 구분되고, 그 중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이며, 그것은 다시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 인간(人間) ? 하늘[天]로 세분된다.
불교는 이상과 같이 육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인간과 동일한 범주에 있는 ‘중생’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불교적 관점에서 생명을 바라보면 생명의 문제는 살인, 자살, 낙태, 안락사와 같이 인간중심의 담론에만 국한할 수 없다. 중생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을 넘어서서 보편적 생명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동일한 중생이라면 생명존중의 범주 역시 인간을 넘어 육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무수한 중생들은 하나 같이 자비심으로 보살펴야할 생명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삼계(三界) 중생의 고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며, 사생(四生)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된다.
이런 사상은 선종(禪宗)으로 계승돼 선승들의 정신세계를 형성한다. 즉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에서는 “여래는 온 삼계를 집으로 삼고, 사생의 중생들을 모두 자식으로 삼는다.”라고 했다.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사생자부(四生慈父)]라는 불타관(佛陀觀)을 통해 보면 태(胎) ? 란(卵) ? 습(濕) ? 화(化)로 태어나는 무수한 생명들은 모두 평등한 지위, 평등한 가치를 지닌 생명인 것이다.
역시 법성게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이란 말이 있다. 하나인 가운데 많으며 많은 가운데 하나이다. 태 ? 란 ? 습 ? 화 사생육도(四生六道)의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각각 형체가 다르지만 실은 자성(自性)은 하나이다.
하나인 진성(眞性)이 업(業)을 따라 각각 나투었으나 결국 하나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마치 허공에 일월(日月)은 하나이지만 수 만 가지 그릇에 물을 떠놓으면 그릇마다 달빛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릇 물을 버리면 그 달빛은 다시 일월체(日月體)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인 것 같아도 많고 많으면서도 하나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진여(眞如)의 하나가 여러 가지로 형태를 벌렸지만 인연이 다하면 곧 근본체(根本體)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에 속한 다(多)요, 다(多)가 곧 하나이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관이 가진 특징이다. 특히 확장된 생명윤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다. 그러니 식물을 포함해 무정물까지 생명의 범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준동함령(蠢動含靈)---꿈틀거리고 움직이며 정을 가진 모든 것, 즉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준동함령 개유불성(蠢動含靈 皆有佛性)이라 하셨다. 즉, 움직이고 정이 있는 것은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이다.
풀과 나무까지도 생명의 범주로 생각한다. 따라서 함부로 나무를 벌목하거나 강과 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비록 서툰 방법이긴 했으나 천성산(天聖山)이나 사패산(賜牌山)에 터널을 뚫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나 새만금간척사업을 반대한 것도 이 같은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시작한 생명에 대한 성찰은 여기에 이르면 움직이는 동물의 범주를 넘어서 자연적 존재로 그 대상이 확장된 것이다. 강과 산이 있어야 숲과 나무가 있고, 숲과 나무가 있어야 동물이 살아갈 수 있다면 이 둘은 별개가 될 수 없다.
이처럼 점차 확장되기 시작한 생명에 대한 성찰은 개체생명에 대한 테두리를 넘어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관계성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확장돼 우주적 자아를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 한편으로는 전체와 분리된 개체존재의 무아(無我)를 체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은 연기적 관계성의 산물이므로 연기적 관계성을 벗어나면 개체존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생명과 무정물과의 경계 또한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개체존재의 육신을 구성하는 물질적 근간을 사대(四大)라고 한다. 우리들의 몸이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으로 구성됐다면 생명은 생명 아닌 것들로 인해 존재한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면 생명은 산과 강과 같은 무정물(無情物)과 둘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개념을 불교에서는 의정불이(依正不二)라고 말한다. 즉, “자신과 환경이 하나이다.”라는 의미로서 생명 주체[정(正)]와 그 주위 환경[의(依)]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명과 그 생명이 존재하는 관계 고리를 성찰해 가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넘어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깨닫게 된다. 생명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경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임의적 구분에 불과하다. 여기서 윤리도 생명중심의 윤리(biocentric ethics)를 뛰어넘어 생태중심의 윤리(ecocentric ethics)로 그 영역이 확장된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이 무정물과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물론 아니다. 생명과 무생물의 관계를 불교적 사유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중도(中道)의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정과 무정의 관계는 완벽하게 똑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존재도 아니다. 이것이 용수(龍樹)가 말한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연기적 관계성이라는 보편적 동일성과 개체생명이라는 개별적 차이가 조화롭게 소통되는 관계가 바로 중도(中道)인 것이다.
불교적 생명관은 바로 이와 같이 개체적 자아의 공성(空性)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담론은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그 속에 담긴 내포(內包)를 깊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에 대한 외연(外緣)을 무한히 확장해 가는 과정이다. 나는 나로 인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흙[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이라는 타자(他者)로 인해 있다. 개체적 존재인 나는 오직 내가 아닌 타자들과의 연기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생태중심적 윤리는 이와 같은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에 대한 성찰에 근거해 있다.
불교에서는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 ‘한 몸[同體]’이라고 말한다. 나와 나 아닌 것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이란 말이다. 중생을 향한 자비는 ‘나’라는 독립된 주체가 ‘나’ 밖에 있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와 한 몸인 더 큰 나를 자각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한 몸 인줄 알게 되면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생명을 바라보고 배려하게 된다. 그와 같은 시선에서 비로소 나와 아무 관계도 없을 것 같은 다른 생명을 사랑할 수 있고, 나와 상관없는 존재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무연자비(無緣慈悲)인 동체대비(同體大悲)가 가능해진다.
이상과 같이 불교사상은 모든 존재의 연기적 상호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핵심으로 한다. 삼라만상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법계연기론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자각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철학적 지평이 열린다. 이 같은 인식으로부터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한 몸으로 보는 큰 자비를 실천하고, 인연 없는 중생까지 자비심으로 교화하는 분’이 된다. 이처럼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생명을 한 몸이라고 받아들이고 깊은 자비심을 일으킴으로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불살생(不殺生)은 불자의 핵심적인 실천윤리가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상 모든 존재가 한 몸임을 알고 일으키는 한계 없는 자비, 동체대비! 즉, 연기적 전체성과 생태중심의 윤리로 확장된 부처님 나라는 가이아이론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이 덕 호(아미산)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이기화 교수님, 서재영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인용함에 있어서 일일이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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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가설이란
'가이아Gaia'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을 일컫는 말로, 지구의 생물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는 자비로운 신이다. 이 책은 그 신화를 과학으로 대체했는데, 1970년대 초 영국의 대기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의 역사와 생물 진화에 대한 종래의 견해들과는 전혀 궤도를 달리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살아 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구 생물권을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해서 간신히 생존을 영위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오히려 지구의 제반 물리/화학적 환경을 활발하게 변화시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러브록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에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라고 명명했다.
먼저 러브록은 지난 30여 억 년 동안 대기권이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 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돼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는데, 만약 생물이 지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탄소, 질소, 인, 황, 염소 등 지구를 구성하는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오가며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는데, 놀랍게도 이런 물질들의 매개자가 전적으로 생물이라는 점 또한 알아냈다. 생물들은 기후를 조절하고 해안선을 변화시키고, 때로는 대륙을 이동시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브록은 자연스럽게 이 지구가 생물과 무생물의 복합체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20여 년간에 걸쳐 지구와 생물의 유구한 역사를 연구하면서 지질학, 생물 진화학, 기후학 등에 담겨진 최근의 이론들에 근거한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소개♣
-가이아 가설의 증거와 특징
러브록은 NASA 태양계 조사에 참여하면서 지구의 대기 조성이 주변 행성과는 크게 다른 점을 발견했다. 금성과 화성의 경우, 두 행성은 모두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95%를 차지하는 데 비해 지구의 0.03%는 매우 다른 수치였다. 이에 대해 러브록은 원시 지구의 이산화탄소 비율은 금성, 화성과 비슷했지만, 지구가 생명체를 배태하면서 이 생명체가 지구의 대기조성을 바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광합성을 하는 세균, 조류(藻類) 등이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내뿜어 지구 대기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지구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 성분이 지난 30억 년 동안 거의 일정하게 유지돼왔다는 사실에 각별히 주목했다.
먼저, 대기 중의 산소 농도이다. 러브록은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가이아 가설의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산소가 존재하지 않던 원시대기에 광합성 박테리아의 출현 이후 산소 농도가 증가하다가 현재 상태인 21% 수준이 유지되어 생물체가 살 수 있는 것은, 지구 자체가 하나의 생명처럼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기 중의 산소 농도는 과거 2억 년 동안 15∼20% 범위에서 유지돼왔는데, 이것은 지구가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광합성과 호흡양의 조절, 그리고 물질순환을 통해 대기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오존층의 존재이다. 오존층은 지구의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시켜 주고 생물체에 유해한 자외선을 차단시켜 주는 것으로, 이것은 바다 표면에 서식하는 말류의 화학 작용에 의해 조절된다. 오존층이 형성되면서 자외선의 강도가 약해졌고, 따라서 지구 곳곳에 많은 생물들이 등장해 활발한 광합성으로 대기 중의 산소 농도를 현재처럼 21%로 유지하는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용량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지구 대기의 약 0.03%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화석연료의 사용, 산불, 화산 활동 등에 의해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증가하지만, 열대우림의 광합성에 의해 많은 이산화탄소가 고정되기 때문에 일정량의 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지구 자체의 생물체가 유기적으로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조절하게 되는 셈이 된다. 러브록은 그 밖에도 해양의 염분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현상 역시 가이아 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상의 근거들을 요약하면 결국 지구상의 다양한 생물 요소들이 지구의 대기와 해양의 조성을 조절하면서, 대기와 해양의 상태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는 스스로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 즉 가이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이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가이아는 스스로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 조건을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인간이 가이아의 기능에 지장을 줄 정도로 간섭하지 않는다면, 가이아는 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2) 가이아는 마치 생물처럼 중요한 기관들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부속 기관을 가지고 있어 필요에 따라 신축, 생장, 소멸이 가능하고 장소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3) 가이아는 매우 정교한 자기 제어 시스템처럼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다
-가이아 이론과 환경오염
가이아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러브록의 환경오염에 대한 시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러브록은 범지구적인 환경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과학자들의 편향적인 시각이나 환경보호주의자들의 편협한 인간중심적인 태도, 그리고 정치가들의 독선과 일반 대중들의 맹목적성 등을 모두 경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인간만을 위한 환경보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모두를 위한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환경보전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는 범지구적인 환경문제가 자칫 오도되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어느 일방에게만 전적으로 혜택이 돌아가거나 또는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는 환경보전운동의 위험성을 항상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1970년대 초에 일부 생태학자들과 과격한 환경보호주의자들 때문에 알래스카에서 미국 본토까지 파이프라인의 건설이 지연되었던 결과 1974년에 오일 쇼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그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 스웨덴의 래프족 거주 지구에서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유일한 식량이라 할 수 있는 순록을 수천 마리나 살해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그는 오직 순록에만 의지해서 생활하는 래프족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처방의 결과가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그들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이론적인 암 발생률의 증가 이상으로 더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을 직시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범지구적인 환경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러브록은 아직까지 우리들의 지식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보다 다양한 전일적인 시각에서 환경문제에 접근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앞에서의 CFC와 오존층 파괴의 예에서 러브록이 보여주는 관점은 평범한 과학자들이 갖는 시각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데, 이러한 그의 입장을 고려해봄으로써 우리들은 동일한 환경문제에 대해서 전혀 다른 해결책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러브록이 인류의 장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로 핵폭탄과 산성비와 오존층 파괴가 아니라 3C, 즉 승용차(car)와 가축(cattle)과 기계톱(chainsaw)을 꼽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러브록은 가이아가 대단한 자가조절 능력을 발휘하는 거의 불멸의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가이아가 몇 가지 환경적 재난에는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을 크게 강조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팔다리의 중요성과 두뇌, 허파, 심장의 중요성이 서로 다르듯이, 지구를 구성하는 가이아의 각 부분도 그 중요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브록은 감기와 폐결핵에 대한 인체의 저항력이 다른 것처럼 환경오염도 그 종류에 따라서 가이아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러브록은 열대우림 지역을 지구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방대한 양의 수증기를 발산하고 동시에 구름의 형성을 돕는 여러 종류의 가스와 입자상 물질들을 엄청나게 방출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흰구름은 그 자체가 태양열을 반사해서 외계로 빠져나가는 에너지의 양을 늘리고 또 구름들에서 비를 내리게 하여 대기권의 온도를 낮추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열대우림을 손상시키는 일은 대규모적인 핵전쟁보다도 더 가이아에 끔찍한 일이라고 그는 우려한다.
러브록은 행성 지구가 현재 지구온난화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는 기상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가이아 이론은 이러한 지구온난화의 추세가 열대삼림의 파괴에 덧붙여질 때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우리 인류를 포함하는 생물권에 엄청난 재난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를 발하고 있다.
가이아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을 일컫는 말로, 지구의 생물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는 자비로운 신이다. 이 책은 그 신화를 과학으로 대체했는데, 지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로서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최적의 생존 조건을 유지하도록 항상 자기조정을 하며 스스로 변화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뒷바침하기 위해 20여년간에 걸쳐 지구와 생물의 유구한 역사를 연구하면서 지질학,지구 화학, 생물진화학, 기후학 등에 담겨진 최근의 이론들에 근거한 과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서문-가이아, 지구는 살아있다.
1장 서론
2장 태초에는
3장 가이아의 인식
4장 사이버네틱스
5장 대기권
6장 해양
7장 가이아와 인간
8장 가이아와의 공존
9장 에필로그
옮긴이 해제
용어 해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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