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는 당나귀답게
-지오의 지성
요즘 정치권에선 노자의 정치론 가운데 ‘무치(無治)’라는 말이 새삼 화두로 떠오른다. 노자는 군주의 등급을 네 개로 나누고 최고 수준을 ‘무치’라고 했다. 최악은 백성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군주라 했다. ‘무치’는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없는 듯 하는 정치’라는 뜻이다.
물론 지금 이 나라의 정치 상황을 보면 ‘무치’에서 멀어도 한참 멀게 느껴진다. 정치난국에 관한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을 도배하다시피하니. ‘무치’ 다음인 ‘덕치’까지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필자는 엉뚱하게도 또 다른 ‘무치’(無恥)를 떠올린다. 즉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권의 행태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대북 심리전을 하랬더니 대국민 심리전을 하고, 나라를 지키라고 군복 입혔더니 댓글 알바나 하고 있다. 또 한 켠에선 나라 위해 헌신한 분들 잘 모시랬더니, 공무원들 불러 ‘반공교육’ 을 하더란다. 심지어 국민과 ‘소통’ 잘 하고 ‘대통합’하라고 큰 자리에 앉혀줬더니 ‘먹통’과 ‘우리가 남이가’로 일관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데서 비롯되지 싶다. 모르니까 욕심껏, 끼리끼리, 닥치는 대로 일을 벌이는 꼬락서니다. 기계를 보자. 기계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야 제대로 굴러간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했을 때 큰 혼란 없이 발전 할 수 있다.
터키 출신 풍자소설의 대가 아지즈 네신은 그의 작품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에서 이 같은 점을 꼬집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어느 나라에 유능한 당나귀 조련사가 있었다. 하루는 서커스 단장이 찾아와 “사람의 말을 하는 당나귀 쇼를 하고 싶으니 당나귀를 훈련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조련사는 노력 끝에 당나귀 한 마리가 사람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었고, 덕분에 서커스 쇼는 ‘대박’났다. 이 소식에 다른 서커스단도 앞다퉈 ‘말하는 당나귀 쇼’를 열었다. 급기야 보통 사람들도 이런 당나귀를 애완용으로 사들이면서, 결국 나라엔 말하는 당나귀들로 넘쳐났다.
이쯤 되자 ‘말하는 당나귀’는 더 이상 쇼가 되지 못했다. 서커스단 단장은 다시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이번엔 거꾸로, 사람이 당나귀처럼 울게 해보면 어떻겠소?
조련사는 다시 노력 끝에 한 사람을 당나귀와 똑같이 울 수 있게 만들었다. 서커스단은 이 쇼로 또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자 다른 서커스단들도 앞다퉈 ‘당나귀처럼 우는 사람 쇼’를 내놓았다. 그러다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선 당나귀처럼 우는 게 대유행이 돼버렸다.
이렇게 온 나라에서 당나귀가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은 당나귀처럼 울음소리를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는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말을 배운 당나귀는 짐 나르기를 잊어버렸고, 사람들도 당나귀처럼 울다보니 본래 자기역할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보다못해 사람들은 지혜로운 자를 찾아가 해법을 물었다. 그의 답은 간단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하고, 당나귀의 일은 당나귀가 하도록 하시오.”
물론, 이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겠다. 70~80년대라면 “학생은 공부만하고, 노동자는 일만하며, 정치는 정치인만 한다”는 논리로 민주주의를 억눌렀을 터.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의 현실에 비춰보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다.
군인에겐 군인의 일이 있고, 국가정보원에겐 국정원의 일이 있다. 검찰에겐 검찰의 일이 있으며, 대통령에겐 대통령의 일이 있다. 그런데 국정원이 정치에 뛰어들고 보훈처가 안보교육을 하며 군인이 댓글 알바를 하는 건, 마치 당나귀가 사람 말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검찰이 정치권 흉내를 내고, 대통령이 국민의 대리인이 아닌 지배자 행세를 하는 것 역시, 인간의 언어 대신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아침에 신문 펼쳐보기 무섭다”는 말은 관용어가 돼버렸다. 세상이 워낙 뒤죽박죽이다 보니, 여기저기 갑론을박에 푸념과 하소연이 넘쳐난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고 딱히 변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속에 담고만 있으면 탈난다. 대숲에 가서 욕이라도 하고 와야 하루 웃고 살 힘이 생기지 않겠나. 무엇보다 입 있는 자는 말하고 살아야 한다. 그거 못하게 하면 진짜 민주주의의 아니니까.
그래서 굳이 한마디 해야겠다. “당나귀는 당나귀답게”.
사진출처-예스24, 푸른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