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개혁의 위기] 전문가 12인 “성장·분배는 동전 앞뒷면”
경향신문은 ‘진보개혁 진영의 과제’에 대해 학계 및 현장 전문가들에게 설문을 구했다. 12명이 진보의 발전전략, 증세논쟁, 사회적 대타협, 성장동력 등에 대해 소상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이메일 설문 또는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김상조 한성대 교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정책실장, 김형기 경북대 교수, 박상훈 고려대 교수, 박주현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양재진 연세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이다.
◇ 진보적 발전과 세금인상…삶의 질 개선 확신부터 줘야
진보 진영이 구상중인 사회·경제 발전 전략은 사실상 ‘증세’를 전제하고 있다. 때문에 보수 진영이 내세운 ‘세금폭탄’ 조어와 프레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이다. 설문에 응한 지식인들은 ‘세금폭탄’을 보수 진영의 담론 투쟁으로 규정하며 정면돌파를 주장했다. 경북대 김형기 교수는 “증세냐 감세냐의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보수 진영이 만든 참주선동적인 ‘세금폭탄’이란 프레임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조세개혁’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전과 발전 전략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한 뒤 그 토대위에서 ‘국민 부담(조세)’과 ‘혜택(복지)’의 조합을 제시, 국민들이 선택하게끔 하자는 주장이다. 이정우 교수도 “한국의 조세부담률 20%는 우리 소득 수준에서 결코 높은 것이 아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서비스를 개선하는 데는 돈이 들며, 세금을 늘릴 필요가 있다”면서 “다만 세금 인상이 나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사회서비스 개선을 반드시 패키지로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는 “한국 사회는 세계 10대 무역 대국에 걸맞은 증세가 불가피하다”며 “적극적 증세와 복지를 통해 안정성을 만들어가는 게 기업과 시장에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서면 인터뷰 전문] 김상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김형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이해영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양재진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조희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박상훈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이정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정이환 교수
정이환 교수는 선(先) 조세 정의 확립을 주장했다. 그는 “우선 조세의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고, 조세 증가가 국민에 대한 실제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면서도 “진보 진영은 모든 것을 조세와 국가에 의해 해결하려는 유혹을 자제하고, 민간 부문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교수도 “증세는 먼저 신규로 필요한 국가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고 이 소요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며 “OECD 국가보다 예산 규모가 작으니까 하는 식으로 접근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나…복지 강화·약자 대변이 본분
박상훈 교수는 “평등”이라고 답했다. 그는 “평등의 조건이 위협받으면 자유 역시 숨쉴 수 없다”며 “지금 한국 사회는 불평등의 과도한 심화가 자유도 위협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교수는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중산층이 하층으로 전락하는 양극화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노동 소득에 의존해야 하는 기존의 중하층의 사회 저변층이 급격히 빈곤화된 데 있다”고 말했다.
김윤철 실장은 “예를 들어 분배 정의가 절실한 상황에서 증세하자고 하는 현실 정치 세력이 없다”면서 “증세를 통해 복지를 강화하자는 유일한 세력이 진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의 본분이 사회적 부나 권력을 분배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도 진보”라고 말했다. 이정우 교수는 “어느 나라든 시장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가는데 우리는 유독 불균형이 심하다”며 “세 가지의 조화, 특히 한국에 빈약한 공공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는 “복지국가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인 사회적 완충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교수는 “좌파 혹은 진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신자유주의와 시장을 진보와 대척점으로 설정한다면, 당분간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 사회적 타협 어떻게…개혁하려면 ‘대타협’은 필수
“사회적 타협은 꼭 필요하지만 현재와 같은 노동-자본 힘 관계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대답이었다.
이정우 교수는 “사회적 대화 모델의 현실적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으면 모든 진보적 발전전략이 허황된 말장난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이환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개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회적 타협은 필수”라며 “타협 자체를 백안시하는 일부 진보진영의 시각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타협인가가 문제다.
박상훈 교수는 “현재 사회적 타협은 주로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확대, 재벌의 소유권 보장, 노동의 임금억제, 생산성 향상 중심이고, 노동의 시민권에 대한 관심은 매우 약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회적 타협을 주관하고 향후 그 협약을 지속시킬 정치적 힘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신정완 교수는 “스웨덴이 19세기 말 사회적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노조의 힘, 사회주의 물결이 있었기 때문 “이라며 “그러나 민노당의 사회연대방안은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며 진단했다.
김상조 교수는 “작은 성공 경험의 확립과 규칙 위반에 대한 제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공 못한다”고 말했다.
◇ 성장동력 우선순위는…中企·부품소재 산업 묶어라
중소기업, 지식산업, 여성, 지방, 부품소재 산업, 서비스산업…. 개별 부문들 가운데 학자들은 대체로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산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상조 교수는 “진보적 성장모델은 산업정책의 대상을 중소기업과 소재부품 산업으로 명확히 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이환 교수는 “대기업의 수출이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감소 중”이라며 “부품소재 산업이 대개 중소기업의 몫이니 둘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성장동력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훈 교수는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산업은 한국의 제조업이 강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말했다. 김형기 교수는 “지방에 있는 부품소재 산업의 중소기업을 혁신적 지식기업으로 육성하는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식기반 산업과 서비스업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서비스산업이 ‘성장의 엔진’으로서의 역할은 크지 않지만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간재’로서 중요하다”(김상조)는 주장이 있는 반면 “서비스산업은 대안이 될 수 없다”(박상훈)는 의견이 있었다. “현재 한국 제조업 수준으로는 향후 지식산업을 통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과 “벤처산업의 여러 결과들이 입증하듯 지식기반 산업의 담론은 과장이 많다”(박상훈)는 의견이 맞섰다.
◇ 참여와 연대, 그리고 환경…실용·생태 적절한 조화 필요
진보의 소중한 가치라는 점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의 핵심가치, 최우선 순위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의가 존재했다.
조희연 교수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것을 하면 잘 살 줄 알고 진행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재검토해야 한다”며 “국가는 거대한 토목건설 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고 개인은 어떻게든지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는 이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이환 교수는 “참여와 연대가 진보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며 “그러나 한국에서 단기간에 진보가 생태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박상훈 교수는 “어느 사회든 물질적 기초의 생산이 기본이고 이를 둘러싼 계급의 문제가 중심이고 이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갈등과 국가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이에 대한 기초 없이 비물질적 가치에 초점을 둔 이른바 신정치학(new politics)을 과도하게 불러들이는 것은 결국 중산층적 비전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어째 참여정부의 슬로건 이상이 아닌 듯하다”며 “국내차원의 문제에 갇히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화 레짐의 개혁도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교수는 “이 가치들이 진보 이념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이 때문에 문제해결적인 실용주의적 처방이 경시되거나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해 실용주의가 회피되는 운동적 차원의 접근이 적어도 정치사회 내에서는 사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 성장과 분배의 관계…성장정책도 소홀히 말아야
많은 응답자들이 “성장과 분배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부터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해영 교수는 “성장과 분배를 동일면에 놓는 것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데올로기라 본다”며 “성장의 지표로 제시되는 GDP 몇% 따위의 지표 자체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의 도구이므로,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박상훈 교수는 “현 상황에서는 분배 효과가 큰 정책을 더 많이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며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은 비현실적이고 문제를 자주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도 “지구화 시대에 분배와 성장의 단순대립은 구 모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분배를 희생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정우 교수는 “한국처럼 성장일변도로 국가를 운영해온 나라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며 “그런 불균형과 비대칭을 과감히 제거하기 위해 성장과 분배는 동행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이 분배와 평등을 절대시 하지 말고 성장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양재진 교수는 “서구 좌파가 성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면서 “한국 좌파의 성장에 대한 무관심, 성장을 논하면 우파인 양 몰아세우는 듯한 분위기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기 교수는 “그동안 진보의 정책대안에서 분배와 복지만 강조되고 성장은 소홀히 해왔다”며 “한국경제는 앞으로 적어도 20년간은 5%대의 경제성장을 유지해야 선진복지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이환 교수는 “진보 진영이 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분배나 평등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종목·손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