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베르 뵈브메리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말하라
,바보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진실은 슬프게 말하라"
<르몽드>편집장 위베르 뵈브 메리:"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려고 했던 사람과 함께 이 논쟁을 땅에 묻고 있을 때 하늘도 축복하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상처가 그대로 있다면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상처를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이 묘지 옆에서 다시 시계추를 제대로 흔들리게 한다면,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범한 과거와 현재의 과오를 정직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과오란 대게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하고, 그럴 경우 힘을 합쳐 공동의 미래가 마주칠 곤경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1951)
르 몽드 (프랑스의 권위있는 일간신문)
프랑스어로 ‘세계’라는 뜻으로 스위스의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더불어 유럽 대륙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파리가 나치스 점령에서 해방된 1944년 12월 18일 드골이 이끄는 새 정부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에 대한 필요한 의견을 수렴하는 수단으로 창간되었다. 타블로이드판(版)으로 사진이나 만화를 싣지 않았으며, 첫 편집주간은 《르 탕 Le Temps》지의 편집장 위베르 뵈브메리였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논설 방침의 자주성 확보를 위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창간된 지 5년이 채 안 되어 15만 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확보했다. 국제문제에서는 프랑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기자들은 자유롭고 소신있는 견해를 피력하며 일관된 이념적 색채는 띠지 않는다. 외국 관계의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세계 각국에 40여 명의 특파원이 주재한다. 일간 《르 몽드》의 기사를 발췌한 주간 《르 몽드》와 월간 《디플로마티크》를 발행하고 있는 외에 영국의 《가디언》지와 제휴하여, 《가디언 위클리》에 《르 몽드》의 발췌문을 영역하여 싣고 있다 |
'반나치'의 아름다운 전통
자본가 신문 제압한 <르몽드>… 정부의 무력화 음모는 독자들이 막아내다
<르몽드>는 철저한 과거청산이라는 토양 위에서 ‘독립언론’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뒤 드골은 나라를 대표하는 새로운 지성지를 구상했다. 이전에 지성지 구실을 했던 <르탕>은 나치에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폐간되고 사옥까지 몰수된 상태였다. 이 사옥을 인수한 <르몽드>는 1944년 12월18일 2면짜리 창간호를 발행했다. 과거 <르탕>에서 일하다 해고된 기자들과 나치에 대항해 싸웠던 레지스탕스들,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지식인들이 속속 <르몽드> 편집국에 모여들었다.
<르몽드>의 창간자이자 초대 사장을 지낸 위베르 뵈브메리도 <르탕> 기자 출신이다. 1938년 프라하 특파원이었던 뵈브메리는 히틀러의 체코 슈테텐 지역 합병을 프랑스와 영국이 용인해준 뮌헨조약에 대해 <르탕>이 찬성하는 논조를 보이자 회사를 떠났다. 이후 대중지의 특파원으로 일하던 뵈브메리는 해방된 뒤 드골이 하루빨리 ‘세계적인 대신문’을 만들 것을 제안하자 “이 시기에 많이 있는 광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라며 창간작업에 뛰어들었다.
1956년 4월 좌파신문인 <르몽드>가 영향력을 얻어가자 이를 집중 공격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르탕 드 파리>라는 신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도리어 이 신문이 팔리지 않아 <르탕>의 부활은 석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해 11월 중도파 연합의 기몰레 정부 역시 <르몽드>를 무력화하기 위해 신문가격 인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르몽드>를 대거 구독하기 시작했고, 인상하려 했던 가격과 실제 가격의 차이만큼을 기부금으로 보냈다.
<르몽드>가 다른 신문보다 국제기사에 비중을 두는 이유도 뵈브메리가 남긴 전통이다. 바로 이웃나라인 독일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조차 모르고 있었던 ‘프랑스의 게으름’이 패전의 원인이라고 본 그가 창간 때부터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겨레21 1999년 10월 28일 제280호
1989.08.06 '르 몽드(Le Monde)' 창간 뵈브-메리(Hubert Beuve-M?ry) 사망
프랑스어로 ‘세계’를 뜻하는 일간지 '르 몽드(Le Monde)'는 유럽 대륙의 대표적인 신문의 하나이다. 하루 50여 만 부가 발행되지만 평균 독자수가 하루 217만 명이 넘는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는 창간자 위베르 뵈브-메리(1902.1.5~1989.8.6)의 각고한 노력 덕분이다. 법학자인 뵈브-메리는 1928~1939년 체코 프라하의 프랑스협회에서 법률·경제 담당으로 지냈다. 1934~1938년에는 '르 탕(Le Temp)'지의 외교문제 담당 특파원도 겸했는데, '르 탕'이 히틀러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특파원을 그만뒀다.
나치 점령 하에선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런 성품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샤를 드골 행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창립자금 100만 프랑도 2년 만에 다 갚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외교에 잘못이 있을 땐 가차없이 비판했다. 신문사 재정이 대기업 광고수입과 신문판매 수입이 3대7 정도로 광고의존도가 낮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매일신문
뵈브 메리[ Hubert Beuve-M?ry ]
1902. 1. 5 프랑스 파리~1989. 8. 6 파리 근처 퐁텐블로.
프랑스의 신문발행인·편집인.
1944년에 〈몽드 Le Monde〉를 창간하고 1969년까지 이를 이끌었다. 그의 주도 아래 〈몽드〉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독자적인 신문의 위치로 올라섰으며, 국내외적으로 많은 독자를 보유한 유명한 일간지가 되었다. 뵈브 메리는 1928~39년에 프라하의 프랑스 협회에서 법률·경제 담당 이사로 일하는 한편 1934~38년에는 일간신문인 〈탕 Le Temps〉의 외교문제 담당 특파원도 겸했다. 그러나 〈탕〉과 그밖의 프랑스 신문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탕〉의 특파원 자리도 내던져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 그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다. 1944년 샤를 드골 대통령은 그에게 당시 나치스에게 협력한 죄로 징계를 당하고 있던 〈탕〉을 대신할 만한 민족적인 자유언론지를 창간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에 뵈브 메리는 드골에게서 완전한 독립성을 확약받고서 그 제의를 수락했으며 곧 〈몽드〉를 창간했다. 그는 오랫동안 '시리우스'라는 필명으로 시사논평을 썼다. 그는 여러 가지 쟁점들 가운데서도 특히 프랑스의 대미(對美) 외교정책과 인도차이나 및 알제리 정책을 비판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결과 〈몽드〉는 정부당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압을 받고는 했다. 그러나 뵈브 메리의 주도 아래 〈몽드〉는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권위 있는 신문이 되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많은 일을 했고, 더불어 많은 책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중요 저서에 〈대독일을 향하여 Vers la plus grande Allemagne〉(1939)·〈정치적 반영 R?flexions politiques〉(1951)·〈제4공화국의 자살 Le Suicide de la IVe R?publique〉(1958)·〈11년간의 통치 onze ans de r?gne:1958~69〉(197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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