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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하농민혁명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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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무맨 2013. 4.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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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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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 사회경제적 배경  | 고부민란  | 1차 농민전쟁  | 전주화약과 집강소체제  | 2차 농민전쟁  | 역사적 의의  

 

1894년(고종 31)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하에 조선 봉건사회해체기의 제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
 
[개요]

동학의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몰락양반·이서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이었다. 1894년 농민전쟁·동학난·동학 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사회경제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특히 지주제의 모순과 봉건적 수취체제의 제반 모순에 따라 직접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에 대해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종래의 봉건적 모순은 더욱 심화·확대되어갔다. 개항 이후 불평등무역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부농층은 대일 미곡수출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시켜갔다. 이에 반해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들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영세수공업자·상인층도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농민전쟁의 진원지인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호남지역에서는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扶安) 동림서원(東林書院)과 오랫동안 강진에 유배되었던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암암리에 몰락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고 있었다. 농민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그중의 한 인물이다. 이들은 기존의 군현단위의 농민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조직을 주목했다. 동학(東學)은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하여 만민평등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교단은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 등 남접세력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금구집회(1893. 3)를 소집, '척왜척양'(斥倭斥洋)과 '수령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혁명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고부민란]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古阜民亂)에서 비롯되었다. 고부지역은 전통적으로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매우 심한 곳이었다. 특히 1880년대말경부터 봉건정부 스스로도 궁장토의 확대 특히 균전수도(均田收賭) 문제와 같이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거나 지대를 수탈하여 지주제를 확대·발전시키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의 고율수세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했다. 고부농민들은 1893년 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정익서·김도삼 등 농민지도자들은 봉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각 마을의 집강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이들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한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한다'는 등 행동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됨에 따라 사발통문결의는 보류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 12월, 60여 명의 고부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자, 사발통문 결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에 1894년 1월 11일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둑을 허물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정부는 민란수습책으로 고부군수를 새로 임명하여 유화책을 쓰는 한편,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처럼 고부민란은 아직 국지적인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1차 농민전쟁]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이 일단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茂長)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 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어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백산에 집결했다. 3월 25일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추대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백산에서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지를 공략했다.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하여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탐학관리를 비롯한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 2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다. 그러나 장성의 황룡시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의 선발대는 농민군에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길에 올라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양력 5. 31)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화약과 집강소체제]


전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 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이 이에 응하여 5월 7일(양력 6. 10)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진전을 당분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화약 이후 정부의 폐정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자,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전라도 53주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본거를 두고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 본거를 두고 전라좌도를 통할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지방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속과 행정의 말단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 삼정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해 나갔다.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양반유생과 이서층들도 참가했으며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등 군사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충청도의 동조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북접에 전면적인 호응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 전쟁을 준비해 갔다. 한편 전라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경기도 죽산·안성, 경상도 하동·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있었다.
 


[2차 농민전쟁]


1894년 6월 21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리고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역사적 의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이었으며, 이른바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주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민씨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투쟁과정을 통하여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고부민란, 남접, 보은집회, 북접, 전봉준, 전주화약, 집강소, 폐정개혁안)

 

 

 


전봉준[全琫準]

 본문

목차  
개요  | 출신 및 배경  | 금구취당과 고부민란  | 제1차 농민전쟁  | 집강소의 개혁정치  | 제2차 농민전쟁  

 

1855(철종 6)~1895(고종 32). 3. 30.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총대장으로 활약한 혁명가.
 
[개요]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 왜소한 체구 때문에 녹두(綠豆)라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출신 및 배경]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서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바 있는 향반(鄕班)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몰락양반, 즉 잔반(殘班) 출신으로 보인다. 아버지도 의협심이 강하여 군수의 학정에 항거, 민소(民訴)를 제기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고 한다. 5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백구시 白驅詩〉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20, 30대에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다.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고종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1890년 무렵에는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그는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무렵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을 방문하여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금구취당과 고부민란]


서울에서 내려온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 그 결과 1893년 3월 무렵 전라도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 〈동도문변 東徒問辨〉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민란의 주체로서,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 사상을 일단 수용하여 실천적인 사회사상으로 승화시킨 농민 반대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침략의 정치운동으로 기울게 하려고, 3월말경에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취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초 고부 고을 농민 40여 명과 함께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에게 나아가 그의 학정을 시정할 것을 등소(等訴)했으나, 전봉준은 일시 구속되고 등소는 거부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 하순에 최경선(崔景善)·김도삼(金道三)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의 점령, 조병갑의 처형, 탐관오리의 처단, 전주성의 점령, 서울로의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때마침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어 이 계획은 보류되었다. 1893년 12월 전봉준은 고부 고을 농민 60여 명과 함께 전주의 감영에 가서 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고부의 폐정을 시정해달라고 등소했으나,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었던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에 고부군수로 잉임(仍任)되었고, 2일 뒤인 1월 11일에 고부민란이 일어났다. 이 민란은 앞의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 전봉준·최경선·김도삼·정익서(鄭益西) 등의 사전계획과 준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전봉준 등이 지도한 농민들은 조병갑의 일련의 악정을 시정하고 읍내에 진을 치고 있다가 1월 17일에는 마항(馬項) 장터로, 2월 25일에는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한편 조정에서는 고부민란 발생의 책임을 물어 조병갑을 체포·국문하라는 처벌을 내리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안핵사로 임명했다. 박원명은 부임 후 회유와 설득에 주력하여 난민은 대부분 해산했는데, 3월 2일 역졸(驛卒) 800여 명을 데리고 고부에 들이닥친 이용태는 갖은 야만적인 노략질을 자행하여 난민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인해 소생산자로서의 생활을 위협받게 된 소농·빈농, 장시의 확보와 화폐경제의 발전이 흐려지자 위기를 느낀 소상품생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방행정을 시정하기 위하여 봉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부민란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더 확대된 차원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일신상으로는 조병갑에게서 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백성'과 '세상'이라는 더 넓은 지평(地平) 위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제1차 농민전쟁]


고부민란은 해산되었으나 이용태의 야만적 진압으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과 동학 신도들이 크게 분개하자, 전봉준은 국면 전환을 꾀했다. 전봉준은 2월 29일경 금구 원평에서 약 3,000여 명의 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여 3월 11일경 금구 원평을 출발, 부안을 거쳐 무장으로 나아가 3월 20일 손화중부대·최경선부대와 합세하여 무장에서 재봉기했다. 이것이 제1차 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날 탐학 수령을 처벌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포고문을 전라도 일대에 배포하고 일제히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주로 전라도 서해안 지역의 10여 읍에서 많은 농민군이 봉기했다. 전봉준부대는 3월 23일 다시 고부를 점령했고, 25일에는 고창·흥덕·부안·정읍·태인·금구·김제 등지에서 몰려온 약 5,000여 명의 농민군과 함께 백산에서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농민군은 제세안민(濟世安民)·축멸왜이(逐滅倭夷)·진멸권귀(盡滅權貴) 등의 4대명의(四大名義)를 발표하고,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김개남(金開南), 총참모 김덕명(金德明)·오시영(吳時泳), 영솔장 최경선의 진용을 짰다. 그러나 농민군 전체가 단일한 지휘체계에 의하여 움직여진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지역 농민군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개별 농민군부대로 나누어져서 각 부대장의 지휘에 따라 행동했다. 따라서 전봉준도 형식상으로는 농민군 전체의 총대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개별 농민군부대의 지도자였다. 3월 26일부터 개별 농민군부대는 전라도 각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그 목적은 탐학한 수령을 징벌하고 각 고을의 폐정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전봉준부대는 4월 7일 고부의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했고, 4월 23일 장성의 월평촌에서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격파했다. 이어 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에 입성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조정에서는 4월 28일 청(淸)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청병 3,000여 명이 5월 5일 아산에 상륙했다. 한편 어떻게 해서라도 청과 일전을 벌여 청을 압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5월 6일 약 4,000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갑자기 조선이 국제분쟁의 무대가 되자 조정과 농민군은 화전(和戰)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교섭 끝에 5월 8일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합의하고 휴전했다. 이 폐정개혁안은 보편적이고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폐정을 시정하려는 것으로서,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씨척족정권의 퇴진과 대원군정권의 성립을 요구했고, 봉건 말기적 현상을 시정하려는 반봉건의식, 외국상인의 침투로 말미암은 폐해를 시정하려는 반외세·반침략 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집강소의 개혁정치]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과 조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봉준은 5월 11일~18일 순변사 이원회(李元會)와 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原情)을 제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촉구하고, 개혁이 실시되지 않으면 농민군의 무장과 조직을 풀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씨척족정권은 그 정치적 기반이 극도로 취약해져서 폐정개혁을 단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에 5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를 사실상 인정하고 기존의 감사-수령의 행정질서와의 타협과 공존을 제의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집강소 질서의 통일과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6월 15일경에 남원에서 농민군대회를 열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뽑아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하령했다. 이에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52개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집강소질서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6월말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한 후 공주로 남하할 태세를 보이자 김학진은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편지를 보내 관과 농민군이 타협하고, 함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전봉준은 7월 6일 전라도의 군정을 자신이 맡고 집강소질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타협을 성립시켰다. 집강소는 형식상 김학진의 예하로 되었지만, 사실상 집강소가 행정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집강소질서가 설분(雪憤) 위주에서 벗어나서 폐정의 제도적 개혁 위주로 바뀌었다. 그 결과 7월 하순에는 폐정개혁건 12개조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봉건적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철폐되었고, 봉건적 토지제도는 생산력 발전을 주안점으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 균분(均分) 제도에 의하여 크게 개혁되었으며, 반일·반침략의 자세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집강소 개혁정치는 지방자치의 차원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권력문제에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제2차 농민전쟁]


조선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던 일본은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 청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개화파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민군 토벌에 발벗고 나섰다. 전봉준은 9월 14일 삼례에서 각지에 반일기의를 호소하고, 항일전쟁을 위한 군비를 준비하여 10월 14일 삼례를 출발, 논산에 둔거(屯據)하면서 농민군을 널리 모집하여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봉준은 여러 차례 경군(京軍)과 충청감영군 그리고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항일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약 2,500명의 정부군 및 약 200명의 일본군과 2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 전봉준이 목적했던 것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며 나아가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법'에 의한 권력기구를 수립함으로써 전국의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5차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언도받았고, 3월 30일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成斗漢)과 함께 처형당했다.

鄭昌烈 글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Taiping Rebellion]

 본문

목차  
개요  | 배경  | 전개  | 좌절  

 


청대(淸代:1644~1911/12) 말기 홍수전(洪秀全)이 창시한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그리스도교 비밀결사를 토대로 청조 타도와 새왕조 건설을 목적으로 일어난 농민운동(1851~64).
 
[개요]

근대사회로의 지향성을 띠고 있어 단순한 농민반란이라기보다는 혁명성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평가된다.
 


[배경]


일반적인 배경으로는 왕조 말기적인 현상, 즉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완, 관료와 군대의 부패,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의 심화, 자연재해의 빈발 등과 이로 말미암은 보편적인 사회적 무질서현상을 들 수 있다. 특히 청 말기에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고 아편유입의 격증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은가(銀價)가 등귀함으로써, 농민의 가계가 더욱 악화되어 향촌사회 내부의 불안과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의 진원지인 광시 성[廣西省]은 이런 일반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종족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복잡했고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충격여파가 크게 미치고 있었다. 산악지역의 광산노동자와 숯장이 등은 독자적인 무력집단을 형성했고, 광저우[廣州] 삼각지의 해적들은 내륙지방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와 연결되어 있어 치안유지상 문제점이 많은 지역이었다.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전통적으로 대외무역의 독점을 누리던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로가 갑자기 불황에 빠지면서 실업자가 된 운송업자와 전쟁 후 해산된 지방군으로 인해 사회불안의 요소가 배가되었다. 게다가 1840년대에 영국 해군에게 쫓겨 광둥[廣東]과 광시의 내륙으로 들어온 해적들은 천지회의 지도하에 광시 성 내의 수로에서 노략질을 함으로써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광시 성의 불안한 상황은 청조를 타도하고 명조(明朝)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가진 정치적 비밀결사 천지회의 반란으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독특한 방언과 관습을 보유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광둥 성으로부터 유입되어온 커자[客家]와 먼저 이주해온 한족(漢族)의 자손인 본지인 사이에 1840년대 중반 이후 집단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커자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부업이나 전업으로 숯장이·탄광노동·고용노동의 일을 하고 있었다. 향촌공동체에 기반을 둔 본지인들은 신사(紳士)를 중심으로 단련을 조직하여 무장하고 있었지만, 커자는 한족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응집력도 없었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 커자를 배상제회라는 종교결사로 조직하여 출발했다.
 


[전개]


배상제회의 창시자이자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인 홍수전(洪秀全)은 광둥 성에 이주한 커자의 중농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나 몇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한 지식인이었다. 낙방 과정에서 읽게 된 그리스도교 선교 팜플렛을 토대로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를 형성하여 배상제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홍수전의 친구이자 커자 출신인 풍운산(馮雲山)의 노력으로 광시 성에서 커자 신도가 늘어나면서 1846년에는 새로운 종교결사인 배상제회가 결성되었다. 배상제회의 확산 과정에서 광시 성 출신의 지도자로서 숯 굽는 일을 하던 양수청(楊秀淸), 빈농 출신의 소조귀(蕭朝貴), 지주 출신의 위창휘(韋昌輝), 부농 출신의 석달개(石達開) 등이 등장했다. 이들의 등장으로 운동은 정치성을 띠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배상제회 회원들은 우상파괴와 향촌민의 개종을 적극 추진했으므로 향촌사회 여러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무장조직화했다.


1850년 7월 진톈춘[金田村]으로 소집된 배상제회 회원들은 가옥과 재산을 처분하여 병영 내의 성고(聖庫)에 넣고 균등하게 지급받을 공동재산으로 삼았으며 남영(男營)·여영(女營)의 군사조직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변발을 자르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후일 청으로부터 장발적(長髮賊)으로 불렸다. 2만여 명의 강력한 무장집단을 이루게 된 이들은 신사층과 연계된 청의 지방군대와 충돌했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3월 천왕(天王)에 즉위했다. 태평군은 청군과의 격전을 거치며 북진하여 9월 광시 성 중부의 융안[永安]을 점령하고 다음해 4월까지 체류하면서 초보적 정권체제를 정비했다. 12월에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운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翼王)에 봉하여 군사·정치적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1853년 1월에는 후베이 성[湖北省] 우창[武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풍운산·소조귀가 전사하고 병력은 50만 명으로 급증했다. 1853년 3월 강남(江南)의 중심지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이곳에 천경(天京)을 건설할 즈음에는 200만 명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봉기에서 천경 수립까지의 짧은 기간은 태평천국운동이 혁명운동체로서의 내적 역량을 양성한 기간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의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매개로 형성된 특이한 성격을 가졌다. 즉 천왕 홍수전도 상제에게 구속되고 상제의 의사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면서 군주의 사적 전제권력을 통제했다. 태평천국 내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의 규제를 받았다. 술·담배·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 또한 엄격히 금지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은 융안 점령 이후 반청혁명의 대민선전을 본격적으로 명문화하여 제시했다. 선언문들을 통해 반만(反滿)과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선전했는데, 즉 배상제교의 종교적 이념을 기초로 청의 지배를 타도하고 중국을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전에서 가장 중시한 한족 전체의 통일전선구축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농민·광산노동자·유민·비밀결사회원 등 피지배층의 호응을 받은 반면 같은 한족이면서도 기존의 사회지배층인 신사, 지주, 부유한 상인의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운동이 단순한 반청민족주의나 종교적 교리보다는 사회경제적 현실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한 태평군의 대민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1853년 가을에 간행된 〈천조전무제도 天朝田畝制度〉는 태평천국의 새로운 지향점이 될 정치·경제·사회의 체제이념과 정책을 정립한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태평천국 지도층은 전제적 왕조권력 아래 신분계급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25가(家)를 사회의 최말단 자치행정조직으로, 1만 3,156가의 군(軍)을 최고급 자치행정조직으로 구성했다. 토지와 생산물을 포함한 만물을 상제의 소유물로 보아 국가가 관리·분배하는 국유 성격이 강해 잉여생산물의 국가귀속과 강력한 통제를 규정했다. 토지분배의 경우 토지등급을 엄격히 조정하여 노동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되 분배를 위해 기존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이 제도는 대체로 사유권의 강력한 통제를 통한 균등한 경제체제를 지향한 것이다.


난징에 도읍을 둔 이후 태평천국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일정한 통치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난징을 본거지로 했으며, 양쯔 강 상류로 서정군(西征軍)을 보내고 베이징[北京]으로 북벌군을 파견했다. 1856년 중반 무렵까지는 태평천국군이 군사적 우세를 보여 양쯔 강 유역의 향촌을 상당수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향촌질서에 기초한 지방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향관(鄕官) 제도를 도입하여 향촌민에게 향관을 천거시킴으로써 행정기구를 재편성하고자 했는데, 향관직을 기존의 향촌지배층이 장악함으로써 지주제를 토대로 하는 정권으로 변질되었다는 평도 받고 있다. 또 지주제를 토대로 과거와 같은 조세징수제도를 도입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전통적인 지식층을 광범위하게 흡수하고자 했다.
 


[좌절]


태평천국운동이 몰락한 가장 중요한 내적 계기는 지도층의 내분이었다. 난징에 도읍을 둔 이래 천왕은 명목상의 군주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동왕 양수청이 장악했다. 양수청의 전횡에 대한 반발로 1856년 9월 북왕 위창휘가 양수청을 급습하여 그의 친족과 부하 2만여 명을 살해했다. 이는 태평천국군 정예군의 상실을 의미했다. 대학살을 중지하도록 권한 익왕 석달개는 위창휘의 의심과 암살위협을 받고 난징을 탈출했으나 그의 가족과 휘하 관원들이 학살당했다. 석달개는 북왕 토벌군을 모집했고 천왕도 북왕의 핍박 속에 위기를 느껴 잔존한 동왕세력과 천왕의 군대로 북왕세력을 처단했다. 살육전이 끝난 후 난징에 돌아온 석달개는 천왕과 형제들의 의심과 위협 속에 다시 난징을 떠나 운동의 주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하던 끝에 청군에게 섬멸당했다. 이러한 내분을 분수령으로 하여 태평천국운동은 몰락으로 향하는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태평천국군 병사에서 성장한 진옥성(陳玉成)·이수성(李秀成) 등의 새로운 군사지도자는 또다른 반란세력인 염군(捻軍)과 제휴하여 국부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청조와 자신들의 향촌에서의 세력을 보위하기 위해 조직된 한인 관료 및 지주의 무장 자위군은 태평천국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한편 이 운동의 말기에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洪仁)이 개혁을 시도하여 〈자정신편 資政新篇〉을 간행했다. 이는 중앙집권의 강화, 서양기술과 문물의 도입, 서구열강과의 우호적 외교와 교역관계 증진에 의한 부(富)의 축적 등 개량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인간의 개혁을 실현시킬 만한 경제적 근거지의 확보 내지는 정권의 안정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태평천국운동이 1864년 7월 19일 천경의 함락과 더불어 몰락함으로써 운동의 말기에 등장한 근대적 개혁안도 좌절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의 몰락을 가져온 외적 요인으로는 열강의 간섭과 지식층의 적대적인 태도를 들 수 있다. 제2차 중·영전쟁을 통해 청조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이권을 모두 얻어낸 열강은 청군에 대한 근대적인 무기와 훈련의 제공, 중국인 용병부대에 대한 외국인 지휘관의 참여,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무력간섭 등을 통해 청조를 지원했다. 특히 태평천국군이 상하이를 장악하지 못하게 되어 동쪽으로의 활로타개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은 데는 열강의 청조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또 전통적인 체제의 옹호자인 신사층은 태평천국운동의 혁명이념과 배상제회의 교리에 대항하여 향촌사회에서의 기득권과 전통적인 이념을 보위하기 위해,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 등으로 결집하여 태평천국운동을 몰락시키는 주력군 역할을 했다.  

 

 

 

홍수전[洪秀全, Hung Hsiuch'uan]

 본문

목차  
개요  | 초기생애  |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 태평천국운동  

 

(병)Hong Xiuquan (웨)Hung Hsiuch'üan.
1814. 1. 1 중국 광둥 성[廣東省] 화 현[花縣]~1864. 6. 1 난징[南京].

중국의 종교적 예언자, 태평천국운동(1850~64)의 지도자.
 
[개요]

1853년 난징에 입성하여 태평(太平)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자신을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2,000만 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규모 농민봉기는 현대 중국사의 흐름을 크게 뒤바꾸어놓았다.
 


[초기생애]


홍수전은 가난하지만 자부심이 강한 커자[客家] 출신으로, 네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커자는 수세기 전에 중국의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해온 근면한 종족으로 그들의 오래된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았다. 어릴 때부터 홍수전은 대단한 재능을 보여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의 면학을 지원해주었고, 그가 과거시험을 통해 정부 고관이 되어 가문과 친지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주기를 희망했다. 1827년 홍수전은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초시(初試)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과거시험 응시생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음을 감안할 때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후 여러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고, 그때마다 당시 대외무역의 중심지이며 성도(省都)인 광저우[廣州]로 가서 시험을 쳤다. 1837년 3번째로 과거시험에서 낙방하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아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정신착란 속에서 흑의금발(黑衣金髮)의 고귀한 노인을 만나는 꿈을 꾸었다. 그 노인은 세상에 사악한 악귀가 들끓는다고 불평을 터뜨린 뒤, 이 세상의 악마를 퇴치시키라는 부탁과 함께 홍수전에게 칼과 인장(印章)을 주었다. 홍수전은 또한 그 꿈속에서 이 세상의 악마를 퇴치하라고 지시하면서 조언해준 중년의 사람도 만났다.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정신착란에서 회복된 뒤 홍수전은 고향으로 돌아가 훈장으로 일했다. 1843년 마지막으로 4번째의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또 낙방했다. 그 직후 그의 사촌이 홍수전의 서가에서 〈권세양언 勸世良言〉이라는 색다른 책을 발견하고 이것을 그에게 보였다. 한 중국인 선교사가 쓴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홍수전이 1837년 과거시험을 보러 광저우로 가던 길에 입수한 것이었다. 홍수전은 그당시 〈권세양언〉의 내용을 잠깐 훑어본 뒤 그 책에 대해서 잊어버렸던 것 같다. 사촌이 그 책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다시 읽어보고는 정신착란중에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신착란을 일으킨 가운데 천국으로 인도되었음을 알았다(→ 종교체험). 흑의금발의 노인은 하느님이었고, 중년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홍수전은 또한 자신이 중국을 구제하기 위해 하느님이 보낸 그의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권세양언〉에 포함되어 있는 일부 성서 내용을 읽으면서 홍수전은 그 책에 있는 성서 내용에 자신을 비교해보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린 뒤 그때부터 자신이 그리스도교도라고 생각했다(→ 메시아). 홍수전은 자신의 친지와 친척들에게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도하여 개종시킨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그의 제자인 풍운산(馮雲山)이었다. 1844년 홍수전은 훈장으로 있던 향리학교에 모셔져 있는 공자의 위패를 부숴버렸기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는 이웃의 광시 성[廣西省]으로 설교 여행을 떠났고, 풍운산이 그를 따랐다. 홍수전은 그곳에 남아 홍수전의 새로운 교리를 신봉하는 종교단체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했다.


1847년 홍수전은 광저우로 가서 미국 선교사인 I. J. 로버츠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 교리를 연구했다. 그가 로버츠 목사와 함께 보낸 2개월 동안이 그리스도교 교리를 정식으로 공부한 유일한 기간이었다. 그의 저작을 살펴보면 중국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죄와 구속(救贖)의 그리스도교 원리는 무시되었고, 마찬가지로 겸손과 친절을 중시한 〈신약성서〉의 가르침도 무시되었다. 그대신 그는 숭배와 복종의 대상인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난 신(神)만을 강조했다. 아편·도박·매춘 같은 사회악의 일소를 주장하고 나섰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궁극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한편 홍수전은 서방의 그리스도교와 접촉하면서 세상에는 중국 이외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통적인 중국우월주의 대신에 그는 하느님의 지도 아래 모든 나라들이 동등한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임을 주장했다. 더욱이 당시의 중국문화에 대해 우상파괴적인 태도를 취했고, 중국문화는 악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매도하면서 그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태평천국운동]


로버츠 목사와 헤어진 뒤 홍수전은 풍운산 및 배상제회 회원 등과 합류하여 그 단체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당시 농촌지방의 생활형편은 참담했고, 이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통치한다는 데 대한 국민감정도 악화되어 있었다. 그결과 홍수전과 풍운산은 반란을 꾀하고 1850년 7월부터 봉기하기 시작했다. 홍수전이 지휘하는 반란군들은 이웃 성까지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그가 37세가 되는 1851년 1월 1일을 기해 태평천국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자신에게 천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태평천국 군들은 비옥한 양쯔 강[揚子江] 유역을 따라 북상했고, 그들이 통과하는 농촌지역에서는 모두 그들을 환영했다. 태평천국군들은 수천 명에 불과한 비적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정예군대로 발전했고, 이 군대는 남녀 군인으로 구성된 여러 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태평천국교도들은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했으나 남녀간의 교제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성적 접촉이 금지되었다. 1853년 3월 10일 홍수전의 군대가 중국 중부의 큰 도시인 난징을 함락하자, 그는 군대의 북진을 멈추고 그 도시를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아 천경(天京)이라고 개명했다. 청조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함락하려는 북벌은 실패했지만, 태평천국의 군대는 여러 곳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홍수전의 심복 풍운산은 난징으로 진군하던 도중에 죽었고, 홍수전은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에게 군정(軍政)의 실권을 맡겼다. 태평천국 정부와 태평군(太平軍)을 조직한 것은 양수청이었다. 양수청은 홍수전을 비난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천왕의 대권을 전횡하기 시작했다. 양수청은 자신의 권위를 합법화하기 위해 가끔 몽환(夢幻) 상태에 빠지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곧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그같은 몽환 상태에서 양수청은 마침내 홍수전을 비난하면서, 그가 무고하게 첩을 버렸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태평천국교도들은 이성과의 성적 접촉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많은 여성을 거느릴 수 있었다. 1856년 9월 2일 홍수전은 양수청의 전횡을 시기하던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를 시켜 양수청을 살해했다. 그뒤 위창휘가 다시 오만해지자 그마저 살해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홍수전은 유능한 교도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정사(政事)를 무능한 가형(家兄)들에게 위임했다. 그는 오랫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종교적 명상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1862년 그의 장수들은 난징의 상황이 위급하므로 난징에서 퇴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 계시를 믿는다고 하면서 퇴각을 거부했다. 그는 신이 도움을 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난징이 포위될 경우에 대비하여 식량을 비축하는 것조차 승인하지 않았다. 1864년 6월 1일 그는 지병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했다. 그의 어린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이 뒤를 이어 천왕에 등극했다. 난징은 1864년 7월 19일 함락되었고, 입성한 관군이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여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태평천국의 잔도(殘徒)들이 발호했으나 1866년에 완전 소탕되었다.

L. N. Feigon 글

 

다음 검색 백과사전 검색

각각 검색어 '갑오농민전쟁', '태평천국운동', '전봉준', '홍수전' 사용

 

 

 

 


어렵나요? 제가 몇가지만 추가하지요.

 

 

 


동학농민운동과 태평천국운동

 

 

 

<공통점 >

1. 둘 다 농민출신 혁명가(전봉준, 홍수전)가 운동을 이끌었다.
2. 종교를 모태로 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세력을 확장시켰다.
3. 농민운동으로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을 지녔다.
4. 농민들의 지지로 전국토의 상당부분을 실질적으로 차지하고, 자신들의 개혁안을 실행했다.
5. 외세와 기존 봉건세력(국외 서양세력 + 국내 지배층 + 국내 지주세력)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 차이점 >

1. 동학농민운동은 크리스트교의 내용을 일부흡수하기는 하였으나, 동양의 도로 서양의 도를 극복할 수있다는 부분이 강했다.
  태평천국운동은 유교질서에 환멸을 느껴 크리스트교를 강조하였고, 실제 크리스트교(서양의 도)가 중심이었다.

2. 동학농민운동은 새로운 정권수립까지는 나아가지 않았고, 집강소체제를  정부에 의해서 (일종의 암묵적으로)인정받고 집강소를 통해 개혁을 실행했다.

  태평천국운동은 난징정부를 구성하여 그들의 목적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3. 동학농민운동은 좌절될때까지 외세와 봉건세력에 맞서 끝까지 싸웠고, 거의 패퇴할 무렵 측근의 배신으로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은 일정정도 세력이 커지자 내부분열이 발생하여, 외세와 봉건세력에게 패퇴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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