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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 화유산대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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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역사가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그에 비례해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도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나 있다.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이동희)이 지난 7일 시작한'후백제 왕도 전주'를 주제로 제12기 전주학 시민
강좌를 꺼낸 배경이다. 본보는 견훤과 후백제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왕도(王都) 전주로서의 자긍심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잇도록 다음달 2일까지 8주간 매주 토요일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될 이번 시민강좌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요약해 연재할 계획이다.
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의
이름은 현재 '견훤'으로 읽혀지고 있다. 옥편을 찾아 보면 '질그릇 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홍여하와 안정복은 '동사제강'과 '동사강목'에서 후백제 시조왕의 이름을 '진훤'이라고 읽었다. '증보문헌비고'와 '전운옥편'및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읽었다. 구한 말
국사 교과서에서도 '진훤(헌)'으로 표기 했다. 그 밖에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등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훤'으로 표기하였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지 교과서를 위시하여 모두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 '갈전 2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백제 유민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진훤이 향리를 떠나 군에서 복무했던 곳은 필자가 최초로 밝혔듯이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만 일대였다. 진훤은 순천의 해룡산성과 동일한 지형구인 광양의 마로산성 일대에서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발군의 전공을 세웠다. 마로산성에서는 신라가
일본에 수출하던
동경(銅鏡) 뿐 아니라 남중국의
청자와 백자, 그리고 당나라 동경까지 출토되었다. 이러한 물증은
장보고 사후 50년만에 등장한 진훤의 서남해안 해상권 장악을 시사해준다. 진훤이 전주(全州)로 정도(定都)한 900년에 항주(杭州)에 도읍한 중원의 약소국인 오월국(吳越國)에 신속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도 해상제해권 장악에 대한 열망에서였다.
진훤은 지금의 광주 광역시에서 거점을 북상시켜 전주에 도읍했다. 그와 더불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진훤은 대왕(大王)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정개'에는 '바르게 열고'·'바르게 시작하고'·'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질곡과 파행의 칙칙한 과거사를
청산하고 올곧게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연호였다. 이와 더불어 진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진훤은 정치적 이데아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왕조의 부활자이자, 미륵의 대행자로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포부를 지녔다.
신검(新劒)의 교서(敎書)에 보면 "도탄에서 구해주셨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고"라고 하였듯이 그는 농민들을 과중한 수탈과 질곡에서 해방시켰다. 그의 위세는 일본측 문헌에 "전주왕(全州王) 진훤이 수십 주(數十州)를 격파하여 대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진훤은 인재 기용에도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랬기에 그 주변에는 잘 짜여진 우수한 참모들이
포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922년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요람인 미륵사에서의 개탑(開塔) 의식은 익산 금마산에서의 백제 '개국·開國' 인식과 짝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었다.
진훤은 927년에 경주에 입성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신라 경애왕을 생포·처단하였다. 더구나 구원나온 고려
군대를 대구 공산에서 포위·궤멸시켰다. 그 직후 진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패강(대동강)에 말의 목을 축이는 데 있다!"라고 하였듯이 통일군주에 대한 자신감을 화통하게 피력했다.
결과적으로 진훤왕은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승부에 승부를 거듭하는 전쟁으로 숨도 돌릴 수 없는 난세를 헤쳐가면서,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어 역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혁명가였다. 그는 말세와 같은 암울한 세상에, 그것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농민의 아들이라는 한미한 '옷'을 입고 태어났지만, 결단코 그러한 현실에 짓눌리기를 거부했던 혁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