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폴레옹을 꿈꾸다 김경천(金擎天, 1888.6.5~1942.1.2) 선생의 본관은 김해이며, 본명은 광서(光瑞)이다. 서울에서 1888년 6월 5일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현충(顯忠)이다. 부친은 김정우(金鼎禹, 1857-1908)이며 어머니는 윤옥연(尹玉蓮)으로, 5남 1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선생의 아버지 김정우는 갑오개혁 발발 이후인 1894년 11월 경무청 총순서 판임관(警務廳 摠巡敍 判任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95년 5월 당시 35세의 만학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하여 경응의숙에 입학, 동년 11월 21일 경응의숙에 입사(入社)하였다. 부친은 군기(軍器)에 대한 전문가로서 구 한국육군의 최고위층의 인사였다. 선생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다. 특히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였다고 전한다.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존경하였던 점도 있지만 선생의 집안이 무인 가계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러한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자녀들이 작성한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서도, 그런데 그의 경우 이를 위해서는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증조부, 부친, 숙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그의 형들 역시 모두 장군이었다. 정말 한 가족에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김경천은 집안의 다섯 번째 장군이었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생의 열망으로부터 김경천은 일본어를 철저하게 익히면서 지원자들에 대한 면밀한 심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육사에 입학하였다. 정말 당시의 경쟁률은 100:1이었다. 라고 했듯이 선생은 결국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꿈을 이루었다. 선생은 1909년 12월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제23기생으로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육사에 진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 김정우가 일본에서 유학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군사교육뿐만 아니라 중국어, 러시아어 등 어학도 교과과정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은 훗날 선생이 일본의 전략, 전술, 일본인의 심리상태 등을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키워내다1911년 5월 육사를 졸업한 선생은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때문에 육사 26ㆍ27기 후배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1916년 12월 26ㆍ27기생 가운데 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應俊)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인이 되어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만들었을 때 선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까지 회지를 발간하여 동창 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는 한편, 회원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선생에게 결정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준 것은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8독립선언이었다. 시베리아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 온 <동아일보>(1923년 7월 29일자) 기자와의 면담에서 선생은, 일천구백십구년에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리고 각 약소민족에게도 권리를 준다 함에 우리 동경유학생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발하였소. 이때 나는 동경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육군기병 제1연대 사관으로 있을 때이라. 꿈속같이 기쁜 중에도 불 보듯 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소. 그리하여 병으로 수유를 얻어가지고 이월 이십일에 경성에 도착하니 도처에 공기가 이상스러웠소. 라고 하여,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병을 칭하고 서울에 돌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과 이응준도 귀국하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사직동에 있는 선생의 집에 모여 나라의 일에 통분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들의 갈 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다. 그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김경천 선생 보도기사,<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빙설(氷雪) 쌓인 시베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한 실지 경험담(實地 經驗談)”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간단한 이력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일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선생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당구를 치고 밤에는 술집을 드나들면서 헌병대의 눈을 속였다.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만주로 탈출하기 위한 시나리오에 따르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1919년 6월 초 만주로의 망명 기회를 잡은 선생은 평양에 있던 이응준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이응준은 일정 및 코스의 변경으로 함께 가지 못하였다. 1919년 6월 6일 선생은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와의 면담에서 보면, 그러더니 삼월 삼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 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 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 하고 동지 이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넘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라고 하여, 장래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이들의 망명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3·1운동 후 많은 한인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하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현역군인이었으므로 피체될 경우 군법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해졌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이들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일단 신의주 맞은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의 연서로 ‘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는 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 회의에서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중연합을 강조하며 한중공수동맹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청년단의 활동도 동년 8월 총재 안병찬의 체포 이후 세력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선생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시기를 엿보았다. 이 학교에는 구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있었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맹세의 뜻으로 다 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 신팔균, 경천 김광서, 청천 지석규(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을 남만주 3천이라고 하였다. 그때 장길상이 배천택을 시켜 5만원이라는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오자 이 돈을 3인이 공동관리하며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 후창, 또는 혜산진 중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청천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선생은 노령으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한편 노령지역으로 이동하던 선생은 우선 중간 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하였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선생은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파벌간의 갈등으로 정착하지 못한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재차 이동하였다. 러시아를 누비며 ‘김장군’으로 활약하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선생은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가 심해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선생은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 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수청지역의 창해청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청지역의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선생은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경천아일록] 중 일부. 김경천 선생이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선생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백여 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선생이 지도자가 되었다. 선생은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 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1921년 초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선생은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 보도되고 있듯이, 수청의병대는 1921년 여름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의복을 지원받고 수청지역에서 횡행하는 마적들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적군과 무장연합을 추진하였다. 당시 러시아 적군과 한인독립군간에 공동의 적은 일본군대였다. 수청의병대에서는 부대장 이철남을 아누치노로 파견하여 연해주 무력혁명위원회 위원장 월스키와 부위원장 룹쪼브를 만나 무장부대 연합회담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상호간에 연합할 것을 합의하였다. 1921년 10월 선생의 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수청 신영동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선생은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피눈물 나는 이만으로의 이동상황을 선생은 <동아일보>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으므로 백군이 조선군이라고 만나기만 하면 죽일 때이오. 이때 연해주에 적군이 전멸함에 다시 쫓기어 돌아가는데 강낸이죽을 먹어가며 겨울에 박착을 하고 이만 강가으로 이백리를 행군하여 가쏘. 그래서 필경 어떤 산에 가서 얼음과 눈으로 요새를 만들고 지키고 있으니 만일 이때 일본군이나 백군이 들이치면 배산일전하려 하였소. 이만으로 이동한 선생의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말을 타고 비 오는 듯한 포탄을 무릅쓰고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선생의 지휘 아래 2백여 명의 군사로 백군 7백 명이 지키는 이만을 점령한 것은 러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한인 민족운동사상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숫적 열세와 배후의 일본군 때문에 이만에서는 전략상 퇴각하고 말았다. 이어 선생은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백군이 한반도 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선생은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 지역으로 돌격하였다.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이것은 범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장쾌한 모험이었소”라고 하고 이어 당시의 상황을 “불빛에 뻔히 비치는 일본 보초병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흰말을 포장으로 덮어서 데리고 강을 건너는데 강에 배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었소. 마침 19세 먹은 소년 기병 1인이 자원하고 강 위에 가로 질린 철사에 매어 달리어 십여 간이나 되는 강을 건너가서 배를 가지고 와서 전 군대를 건너게 하니 이 때 발각만 되면 몰살이라. 더욱 소년을 구사일생의 경우에 보내고 매우 염려되었었소. 건너간 후 그 날 밤으로 취풍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소”라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선생이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선생을 포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치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경에는 포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선생의 지휘 아래 기마 공격을 강행하였고,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922년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이었고,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선생이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다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922년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졌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선생은 실의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선생은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이 회의는 선생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다. 결국 1923년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였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와 전범령(典範令)을 번역한 것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조선군 참모부는 1923년 7월 5일자 ‘조선내외일반의 정황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근래 러시아령 연해부 및 우수리 지방에서의 김광서(김경천) 세력은 점차 문창범, 이동휘의 세력을 능가하리라고 한다. 그는 지금 이만 부근에 1천여명의 일단을 편성하여 둔전조직에 의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대가 과연 적군의 일부인지, 아니면 적군 양해하에 성립된 순수한 불령선인단체인지 미심스럽다. 또한 선생은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는 니콜스크에 두는 등 자못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정책과 노령 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1926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해ㆍ김규식 등과 함께 민족당 준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한족군인구락부를 통해 산산이 흩어진 조선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선생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첩죄로 체포되어 1936년 9월 29일 원동지방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반의 형을 복역한 후 1939년 2월 4일 카르라가에서 석방되었고, 가족을 찾아 카자흐공화국 카라간다주 텔만스키 구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작업원으로 1달여 동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39년 4월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러시아편에 섰던 한인들에 의하여 다시 체포된 후 동년 12월 17일자로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정강제노동수용소 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선생은 부인 유정화와 편지 왕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시베리아로 이감되었으며, 편지 왕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선생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배되어 아르항겔스코에주 금고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지배하던 시기라 정확한 사망일시나 장소, 사망원인 등은 알 수 없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선생은 모스크바 군관구(軍管區) 군법회의에서 심리되어 동년 2월 19일 사후에 복권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 대한독립군 대장으로서 선생이 공포한 유고문(諭告文) 중에서 (1919. 12) |
15세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
홍범도(洪範圖, 1868. 8. 27∼1943. 10. 25) 선생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선생은 매우 어렵게 성장하였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다.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선생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선생은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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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을 빠져 나온 선생은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3년간 일하기도 하였고, 또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하는 일제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선생의 반일의식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1895년, 선생은 파계한 뒤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이라는 곳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로 사냥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더니,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우리 민중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요, 방일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였다. 더구나 1895년 8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양력 사용을 강용하고, 단발령을 강제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하여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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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 의병활동 시작
이와 같은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각지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와 축멸왜이(逐滅倭夷)를 위한 의병 봉기가 이루어졌다. 선생 또한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이후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한편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은 일제가 이 시기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의병전쟁을 봉쇄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강행한 것이었지만, 총으로 수렵하여 먹고 살던 산포수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산포수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해 민족적 분노와 더불어 생활상의 위협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일제 침략자를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궐기하자고 포수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1월 15일 선생과 차도선은 북청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봉기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선생과 차도선의 지휘 아래 봉기 직후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관리인 안평면장을 처단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날으는 홍범도’ 여러 곳에서 일본군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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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달 22일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선생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1차 망명하기까지 수십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삼수성과 갑산읍을 탈환하기도 하고,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 소각하기도 하고,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 처단하기도 하고, 일본인 금광을 습격하여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실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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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활동의 재기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선생은 연추에서 이범윤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유인석과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추풍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10년 4월 초순 선생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을 출발하여 국내로 진격하였다. 그 해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북 무산에 진입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 차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처음 의병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많았고, 병력 또한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해 5월 중순 다시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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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과 계몽운동의 공동전선 모색
재차 노력 연해주로 망명한 선생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결성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실제 전투력을 지녔던 창의군과 장의군 두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범윤이 창의군총재, 경성의병 출신의 이남기가 장의군총재로 각기 선임되어 도총재 유인석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으로 13도의군의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이진룡, 이갑 등과 함께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되었다. 선생과 이진룡 등은 의병장 출신인데 비해, 신민회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안창호와 이갑 등은 무장투쟁노선과는 종래 그 성격을 달리하던 계몽운동 계열이었다. 결국 이들이 13도의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민족운동선상에서 의병 계열과 대립 혹은 갈등 관계에 있던 계몽운동 노선이 의병과 합일, 공동전선을 모색하여 간 증거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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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인섭(좌)과 선생(우). 엄인섭은 1908년 노키예프스크에서 동의회를 조직하였고 1911년 권업회 결성에 적극 가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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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참여하였던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8월 국치 때까지 불과 2, 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유인석과 이상설은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할 계획 아래 광무황제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병탄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을 비롯한 13도의군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성명회(聲明會)가 조직되었다. 성명회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결사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8월 26일 다시 모인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은 빗속에서 조국독립의 결의를 거듭 다짐하면서 독립 전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을 비롯한 한인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하여 이처럼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권업회와 노동회 조직, 투쟁역량 배양
이후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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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한인 빨치산 간부 사진(1922). 뒷줄 제일 오른쪽이 선생이다 대한독립군을 편성, 봉오동전투에서 대승거두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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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봉오동 전투 지역 사진.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 상촌의 독립군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으며 홍범도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은 동, 서, 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 격파하였다
- 2 일본군이 작성한 봉오동 전투 약도로 독립군의 진공로를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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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독립군의 항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역은 한인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선생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회의 격전을 치렀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자유시 참변 후 한인 권익보호운동
이후 선생은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의 전격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그것이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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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07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의병활동 1910 러시아로 망명, 성명회,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등 활동 1920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 대승, 청산리전투 참가 |
다시 한번 마음을 진정하고 반성함으로써 냉정한 이성을 회복하여 한결같은 민족적 양심으로 정성 단결하여 다같이 자주통일의 길로 총 진군 할 수 있는 날에 비로소 이 겨레의 앞에는 통일과 자유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 [민성(民聲)] 誌 (1949. 7)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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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음)~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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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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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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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
일본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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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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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사형은 면하였지만 석방은 되지 않자, 선생은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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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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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년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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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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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경부국장 시절의 가족사진(1919~1922) 가운데가 맏아들 김인이며, 오른쪽이 부인 최준례 여사이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월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월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월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년 4월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월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년 3월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월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년 3월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년 8월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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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앞 중앙)과 한인애국단원 사진(1932년으로 추정) 그리하여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 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년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년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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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피난 중이던 시기 가흥에서 촬영한 사진. 중앙의 선생을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그 부인들이 보이고,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이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월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월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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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11.3, 맨 앞줄 가운데가 선생)과 선생의 영결식 장면(1949.7.5, 서울운동장)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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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08년 신민회 가입 활동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 역임 1930년 한인 애국단 조직, 의열 활동 지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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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선생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인(日人)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과 가능성을 안겨줬다. 이 선생이 터뜨린 한 발의 수류탄은 당시 침체일로에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에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
‘이 모든 수모와 설움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0. 8. 10~1932.10.10)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고, 만주로 옮겨 남만(南滿)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은 피지배민족이 정복 민족의 수괴를 처단한 의거임을 깨닫게 됐다. 안 의사의 비장한 구국정신이 선생의 어린 가슴을 흥분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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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로 일본 생활을 익혀 이봉창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남만에서 철도원 생활을 그만 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 생활을 익혔다.
1931년 1월의 중국 상하이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대륙을 휩쓸고 있던 반제국주의와 시민혁명의 열기도 식어가는 듯 했다. 국제정세도 그러했다. 제국주의자들의 횡포 앞에 피압박민족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다. ‘거인(巨人)’ 중국이 그러할 때 이미 일제에 합병당한 조선은 말할 나위 없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호에 소재한 우리의 임시 정부는 당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2가지 운동노선을 겨우 접목시켜 기틀을 잡았으나 뚜렷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침체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 조짐까지 나타나 독립운동은 생기와 역동성을 잃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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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한인애국단 선서문(1931). 이봉창이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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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일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동료 국무원들과 함께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 “그 자는 하오리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오리는 일본식 남자 옷을 말한다. 백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검정색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창 밖의 바람이 잠시 가쁜 숨을 멈춘 사이, 백범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현재 그 젊은이를 조사하고 있으니 저에게 맡겨두시지요.” 임정 국무원 회의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이 젊은이는 한국 태생의 일본인을 양부(養父)로 두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로 밝혀졌다. 일본에서 상하이로 건너올 때도 이 같은 일본식 이름을 썼다. 기노시타 쇼죠. 상하이 양수포(楊樹浦) 소재 일인 인쇄소 점원, 나이 31세.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봉창 선생의 모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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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6년여의 ‘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하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해, 임시정부 청사와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같은 사실이 백범에게 전해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만남 같기도 하고, 역사적 우연처럼 비치기도 한다. 백범은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선생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봉창 선생이 단순히 ‘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 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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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아우의 집에 가 수류탄 들고 맹세
거사 준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경과도 교제를 하면서 속수무책인 건달 행세를 했다.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런 후 수류탄을 양 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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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사진(1931). 일왕 히로히토의 저격을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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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궁성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 일본인을 가장하고 12월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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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한 것에 대한 한국독립당의 선언(1932.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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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이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어 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깨끗이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선생은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미혼이었으며 처자식이 없는 순국이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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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사는 2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 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19세였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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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민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은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운동은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의사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 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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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계몽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의사는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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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의사였다.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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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선언문 사본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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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자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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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 홍구 공원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피체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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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거사 직후인 1932년 4월 30일 North China Daily에 실렸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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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
부친의 개화사상으로 근대적 사고 키우며 성장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 지주였다.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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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집안은 갑신정변 직후 해주를 떠나 신천군의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이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따라서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부터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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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여순감옥 수감 중 면회 사진.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 ‘토마스(도마)’ 부여 받아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의사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 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이 다시 강력하게 양곡 반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인근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J. Wilhelem)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1897년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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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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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그 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 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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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부대를 이끌며 일군과 전투, 박애주의 근거해 포로 전원 석방해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 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의병부대였다. 김두성이 총독,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이었던 의사가 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을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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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하여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사가 독립전쟁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09년 1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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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총과,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을 그린 인체 도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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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 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는데,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이후 의사 일행은 유동하, 조도선 등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키고 만주 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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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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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5분전에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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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을 선고 받고, 거사 이유를 밝히는 저술에 심혈을 기울여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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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07 사립학교를 건립, 민족교육 실시 1908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의군중장으로 국내 진공 1909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10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 중 사형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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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계몽운동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민족의식을 함양
유관순(柳寬順) 선생은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중권(柳重權), 모친은 이소제(李少梯)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친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 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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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 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 굳건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8년 봄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것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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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의 발판 마련
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므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을 중심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기독교 측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과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인 이승훈(李昇薰), 양전백(梁甸伯)이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전선 형성 제안, 즉 교단과 종파를 아울러 민족 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하나로 응집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민족대표의 선정, 거사일, 독립선언서 배포의 역할 분담,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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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 3.1운동의 시작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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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위 결사대 조직, 만세 시위에 참가
선생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갔다. 이로써 선생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 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芝靈里)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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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연설로 더욱 고취된 만세 운동의 열기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선생의 이러한 연설은 군중들의 애국심을 한층 고조시켜 장터는 이들이 내뿜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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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중 부친과 모친을 눈 앞에서 모두 잃어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부친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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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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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선생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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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 순국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게 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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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됨에 따라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서울복심법원 판결문. |
약력
1919년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만세시위 참여 충남 천안군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 옥중에서 만세 항쟁 1920년 고문으로 옥중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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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선생은 1919년 3월 1일 개성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개성 3.1운동 발발에 도화선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옥중에서는 유관순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출옥 후 계성여자교육회에서 활동하며 근우회의 개성지회 설립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
개성에서 감리교를 만나 근대적 여학교 교육을 받다
어윤희(魚允姬 1881-1961)선생은 1881년 충북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워 학업의 기초를 닦았다. 아버지가 늘 강조했던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란 글귀를 가슴에 새겨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선생은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894년에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 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군이 되어 집을 떠났으며 불행하게도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창졸간에 남편을 잃은 선생은 시댁을 떠나 본가로 돌아와 지내던 중 1897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을 떠났다. 아마도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녀는 10여 년을 황해도 평산, 해주 등지를 전전하다 1909년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였다. 그 후 선생은 우연히 개성 북부교회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아 기독교에 입문하여 북부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시기 기독교와의 만남을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충효사상을 익힌 까닭에 나라를 위해 나서려는 마음에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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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09년 6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개성북부교회 등에서 전도하던 갬블(Gamble, Rev. 甘保利)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갬블의 주선으로 개성의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재학시절 선생은 이미 교육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개성동부교회 부속학교의 교사로 활약하였고,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호수돈 여학교에 입학하여 35살 되던 1915년 3월 졸업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민족독립을 위해 희생할 준비된 여성으로 재무장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다져나갔다. 개성 3.1운동에 앞장서다
개항 이후 추진된 정부주도의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 선교사들의 여성교육운동을 통해 깨어난 여성들은 점차 진정한 사회구성원이 되어 갔으며, 여성운동의 진전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조직적인 항일 여성투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경험은 1910년대의 준비기간을 거쳐 3.1운동에서 다양한 활약으로 이어졌다. 한편 1919년 전민족적 항일투쟁인 3.1운동의 추진주체였던 민족대표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종교 교단조직과 학생조직을 이용하여 3.1운동의 지방 확산 및 대중화를 계획하였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화영 목사는 개성지역의 연락을 책임지고 2월 중순부터 적임자를 물색하며 아우 오은영과 실행계획을 세웠다. 1919년 2월 28일 개성에 급파된 오은영은 독립선언서 100매를 개성북부교회 목사 강조원에게 전달하였다. 강조원은 독립선언서 배포방법을 모색하다가 3월 1일 아침 이 선언서를 전도사 신공량에게 전달하였다. 신공량은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직접 배포하지 않고 배포할 사람을 찾았지만 선뜻 위험을 감수할 자가 나서지 않았다. 이 거사를 비밀리에 전해들은 선생은 자신이 선언서를 배포하겠다고 의사를 전하여 배포자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독립선언서 약 80매를 전달받은 선생은 전도부인 신관빈과 함께 오후 2시경 그 일대의 거리에서 ‘조선독립선언서’ 라고 알리면서 조선인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에게 배포하였다. 이후 개성지역의 3.1운동이 송도고보와 호수동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선생은 곧바로 일본경찰에 끌려갔지만 독립선언서 배포로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개성지역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이 된 그녀의 독립선언서 배포는 3.1운동 당시 이루어낸 여성의 역할 중 빛나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에 연행된 후 선생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해 4월 11일 보안법위반으로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정작 독립선언서를 선생에게 전달한 강조원, 신공량은 7개월 집행유예 3년형으로 확정된 것과 비교해 보면 3.1운동 당시 그녀가 감당한 역할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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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함께 3.1운동 1주년 만세투쟁 계획
선생은 재판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생 역시 유관순이나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들처럼 감옥에서 쉬지 않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함께 수감되었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옥중투쟁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중인 선생을 비롯한 여성투사들은 투쟁의지를 더욱 강고히 하여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에 옥중만세시위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무도한 탄압과 모진 악형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여성투사들은 1920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3.1운동1주년 기념 만세투쟁을 감행한 것이다. 1920년 2월 말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선생은 유관순 등과 함께 이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통방이라는 감방 안의 비밀통신방법으로 17개 여자감방의 세를 모아서 3월1일 오후 2시 일시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투쟁을 전개하였다. 간신히 시위를 진압한 일인교도관들은 주도한 사람을 색출하고자 여성 투옥자들을 고문하였으며 유관순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또한 선생은 일본인 간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밥을 나르던 우리나라 여인을 붙잡아 반민족적인 행동을 질책하고서 따끔한 훈계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한 뒤 도리어 독립투사들의 비밀연락원 역할을 감당케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렇게 1년 이상 투옥되었던 선생은 1920년 4월 28일의 사면령에 따라 출감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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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개성지회의 중심인물이 되다
출옥 후 선생은 개성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신앙 이외에 민족의식고취와 계몽교육활동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선생은 3.1운동에서의 항일투쟁경력을 인정받아 개성지역의 종교 및 민족운동 단체에서 주요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선 선생은 개성지역을 넘어 감리교내의 여성지도자로 성장하여 1920년 12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1회 남감리회여선교대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될 정도로 중요인사로 부상한 것이다. 이 시기 선생은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우선 해외에서 작전을 위해 잠입한 독립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위험한 임무를 감당하였다. 예컨대 1920년 10월 발생한 대한독립의군부 군자금모집사건이 그 사례다. 또한 선생의 활약상은 1920년대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에서도 빛을 발했다. 즉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와 근우회의 개성지회 등에서 지도급인사로 이 지역 민족독립투쟁과 여권신장활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폭압적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기만적인 통치정책으로 전환하자, 제한적이나마 한국인의 사회운동도 다소나마 활동 공간을 갖게 되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1920년부터 전국에 여자청년회가 다수 발족되면서 여성교육과 의식계몽운동이 활발해졌고, 신교육여성들 주도의 여성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성운동 내부에서 제기된 여성해방은 사회개조의 기초로써 이는 곧 반봉건 근대화의 기치를 확립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남녀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여성운동의 선결과제는 바로 여성의 계몽과 교육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주도된 1920~23년의 민족운동은 교육계몽운동적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개성에도 이어져 1920년 7월15일 이 지역 여성지도자들이 개성여자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선생 역시 이에 동참하였다. 개성여자교육회는 3.1운동 직후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조성하려는 분위기 하에서 신교육여성들이 주도해 여성의식을 계몽시켜 여성의 인격과 사상 및 행동을 개조할 목적으로 창립했던 것이다. 즉 조선여자교육회와 같은 국권회복과 여성의 권익신장을 목표로 하며, 강연 등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의식을 자각시키고 세계관을 넓혀주고자 하였다. 이것은 후일 (1929년경) 교육회 회장에 취임했던 선생의 여성교육운동의 목적이요 방향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개성신간지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개성지회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갔다. 선생은 1927년 7월 신간회 개성지회의 설립준비단계부터 간사로 참여한 이래 1931년 1월 임시대회준비 및 해소까지 줄곧 간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1927년 2월 15일 민족단일당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였다. 신간회운동의 급속한 확대를 위해 전국적으로 지회설립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개성지회 역시1927년 8월 8일 설립되었고, 선생은 이성득, 하보항과 함께 선전조직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근우회 개성지회 설립의 주역이 되다
한편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개성지회의 결성은 선생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927년 5월에 설립된 근우회는 민족독립운동의 통합조직인 신간회 창립에 자극 받은 한편, 그 동안 분산된 여성운동계도 단결된 단일조직으로 통합함으로써 근대 한국여성운동사상 일획을 긋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은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향상이었고, 운동 목표로 봉건적 굴레와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였다. 근우회 조직은 지도부의 민족주의계(종교계),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는 물론 여학생, 직업여성 등 지식인 여성과 여성농민, 여성노동자, 전업주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을 망라하였고1930년까지 118개 지회가 설립되는 세를 과시하였다. 근우회 개성지회가 창립된 것은 1929년 6월 15일이었다. 즉 개성지회는 개성여자교육회를 기반으로 창립되었는데 설립대회 임시의장은 근우회 본부에서 온 정칠성이 맡았다. 그런데 개성지회의 설립에는 근우회본부와 신간회 개성지회의 후원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근우회개성지회는 신간지회에 비해 설립이 지체된 것으로 보이며 1927년 12월경 근우회지회설립 촉진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개성여성운동계의 대응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9년 1월 신간회간사였던 선생이 개성여자교육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비로소 이 단체를 근간으로 근우회개성지회가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양 단체에 관여했던 선생을 매개로 근우회 개성지회가 창립되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국 근우회 개성지회의 설립을 출범시켰던 숨은 주역이었고 할 수 있다. 선생은 근우회가 지향하는 여성지위 향상과 민족독립투쟁이란 목표가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전도부인이란 종교적인 신념에 구속됨이 없이 민족독립운동전선에 동참해서 여성계몽과 교육을 통한 여성해방과 민족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여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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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설립한 유린양육원 어린이들과 함께 1931년 5월 신간회해소 이후 선생은 민족운동단체에서 물러나 아동복지활동에만 헌신하였다. 1937년 감리교의 지원 하에 개성 유지의 도움으로 개성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 이를 재건하여 복지활동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선생은 1961년 11월 18일 유린보육원에서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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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명문세가(名門世家)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思考)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역사는 선생을 독립운동가 또는 아나키스트로 평가하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기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
9대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손
이회영(李會榮, 1867. 3. 17~1932.11.17)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이조(吏曹)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다. 백사 이래 이유승(李裕承)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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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 항일한 후 20여명만 살아남아
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 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하겠다.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 형제가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석영․ 회영․ 호영 3형제가 만주와 중국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가며 장렬하게 순국했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간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형 석영도 말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살을 도려내서 실행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 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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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 등이 많은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군 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곳으로 만주 삼원보 지역의 농촌. |
여동생이 청상과부가 되자, 관습 깨고 과감하게 재혼시켜
우당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대 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긴 우당의 한 단면이다. 선생의 혁명가적 기질은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들을 개가(改嫁)시킨 데서도 나타난다. 당시 정서로서 판서 집 딸이 재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아무도 모르게 누이동생을 시집으로부터 데리고 온 뒤 “이 판서 집 딸 아무개가 급환(急患)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訃告)를 냈다. 그런 후 간단하게 장사를 치르고 새 혼처를 찾아 개가(改嫁)를 시켰음은 물론이다. 선생의 이 같은 풍모와 대인(大人)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이승을 떠날 때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반상(班常)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고치고,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지하고, 개가 재혼을 장려하는 등 선생의 혁명적인 사고 전환과 실천은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실로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선생은 21세 때인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 이상설(李相卨) 이범세(李範世) 서만순(徐晩淳) 조한평(趙漢平) 여규형(呂圭亨) 이강연(李康演)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의 계몽, 신진 정치가들의 협력, 내치(內治)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가는 나라 일을 수습하려 힘썼다. 선생은 이 같은 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선산(先山)인 풍덕(豊德)에 인삼 밭을 경작, 경영했는데 1901년 채삼기(採蔘期)에 이르러 일인(日人)들이 작당, 착취․노략질해가는 것을 일경에 엄중 항의하는 한편,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진언케 했다. 이를 전해들은 고종은 선생을 “실로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예”라고 칭찬하고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를 제수했으나 강직한 선생은 벼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처럼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음에도 어떤 단체․모임에서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당(友堂)은 아우 시영의 그늘에 가리워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아우 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림으로써 우당의 6형제들이 50여 가족들을 데리고 ‘솔가망명(率家亡命)’한 저력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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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사관과 일본군 수송선 폭파, 청산리 전투 주역 배출한 불꽃 같은 삶
송일본정부서(送日本政府書, 1922.7) 이회영과 김창숙 등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명의로 일본정부에 보낸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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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당이 명문(名門)을 팽개치고 형제․가족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독립투쟁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3.1운동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며, 둘째는 중국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 격렬한 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이 과정에서 선생이 해온 일들을 꼽아 보면 이렇게 된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규탄(1905년),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활동(1906년),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1907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의 상동 청년학원 개설(1908년),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1911년),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재(在)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년),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년)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 선생이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생애 막바지에 사른 혁명의 불꽃이다. 상하이 북역 사건,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천진항 일본 군수 물자 수송선 폭파 사건, 천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등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의거는 사명감 속에 계속 실행됐다. 이 같은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의 기운 속에 이듬해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실현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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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5세에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 추진하다 체포돼 순국 그러나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中央日報) 사회면에 실린 3단짜리 기사가 피압박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 이 같은 기사의 실체는 즉각 확인되지는 않았다. 일경(日警)이 사실을 은폐하고, “그 노인이 이회영(李會榮) 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선생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선생이 “유치장 안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거짓말이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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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5세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받고 순국한 것이었다.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하였다. 일(日) 군국주의의 서곡인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지 1년만의 일이다. 1932년 초 선생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 받았으며, 11월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옮겨가려고 하던 차였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선생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이 1990년 세워졌고, 2001년에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으로 옮겨졌다. 그의 묘소는 국립현충원에 모셔졌으며, 2000년 중국 정부는 우당 선생에게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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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 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 1919년 9월 선생이 작성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서 중에서 -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한 민족에 대한 사랑
김마리아(金瑪利亞)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사이에 세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마리아는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주신 것이다. 선생의 집안은 만석꾼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뒤 송천리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개화인사였다. 안창호(安昌浩)와 결의형제를 맺고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필순(金弼淳)은 선생의 셋째 삼촌이고,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이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순애(金淳愛)는 선생의 셋째 고모였다. 선생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개화 지식인이자 애국지사였던 부친과 삼촌,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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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부친이 세운 소래[松川]학교에 들어가 고모·언니들과 함께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평등사상에 입각한 신학문을 익혔고, 1901년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선생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면서 1906년부터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점증되던 국망의 위기의식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고, 또 삼촌의 집에 드나들던 안창호·김규식·이동휘(李東輝) 등 애국지사들의 초조한 발걸음을 보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갔다. 1910년 6월 16일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근무하던 전남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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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정신여학교 수학교사로 재직 중 일본유학
그러나 그 해 8월 조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교육 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의 꿈을 접지 않고, 한 톨의 밀알이 밀밭을 이루듯이 민족문제 해결에 여성들이 앞장설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은사들의 추천으로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듬해 선생의 재능과 조국에 대한 열정에 감동한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재정 지원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선생은 히로시마의 금성학원(金星學院)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익힌 뒤, 1915년부터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선진 학문을 습득하여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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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
이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써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선생과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선생과 황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2·8독립선언 당일에는 동경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하였다. 나아가 황애덕과 같이 등단하여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성토 규탄하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일제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2·8독립선언 대표들은 물론 선생을 비롯한 수십 명의 학생들도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다행히 석방된 선생은 이같은 독립운동이 동경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하여야 조국 광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선생은 국내의 독립운동은 전 여성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기로 결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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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 열기를 국내 전파
이 같은 인식 아래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2월 15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우연히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한 큰고모부 서병호(徐丙浩)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만났다. 이들은 안희제(安熙濟)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로 가서 활동계획을 논의하였고, 이 후 선생은 대구로 가서 기독교계 동지들을 찾아 자신이 가지고 온 2·8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대전을 거쳐 큰언니 김함라와 막내 고모인 김필례가 살고 있던 광주에 도착하였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위치한 김마리아의 동상 <출처: Wikipedia(JeongA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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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은 이곳에서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있던 큰언니와 고모의 주선으로 교직자와 간호원들을 초대하여 여성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런 다음 2월 21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애덕을 다시 만나 함께 이화학당 교사인 박인덕(朴仁德)·신준려(申俊勵) 등을 만나 동경 2·8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독립운동의 전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어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며 보성사(普成社)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李鍾一)은 그의 비망록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 와 동경 한국인 남녀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은 2·8독립선언 직후 그 같은 민족 독립운동의 열기를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촉발케 함으로써 조국 광복을 성취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이 발발한 그 날에도 황해도 봉산(鳳山)과 신천(信川) 등지를 돌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다. 또한 3·1운동 소식을 듣고는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고자 서둘러 상경하여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달려갔다. 이 날이 서울의 학생들이 남대문역(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3월 5일 바로 그 날이었다. 물론 이 날 만세시위에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대다수 참여했기 때문에 일경의 방문조사가 이루어지게 됐는데, 이 때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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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뒤, 3월 27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약 6개월간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았지만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으로 이를 이겨내, 결국 8월 4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하는 예심 면소(免訴) 결정으로 다음날 석방될 수 있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더욱 강인해진 독립의지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강구하였다. 그런 가운데 선생은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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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
선생이 피체된 뒤 정신여학교의 동창들은 3·1운동으로 투옥된 남녀 애국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의 보호를 위해 혈성부인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여성들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조국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임시정부의 지시로 이들 두 단체는 통합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때문에 선생은 출감 후 자주 만나던 황애덕과 상의하여 이 단체를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하는 한편, 임원 개선을 통하여 침체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선생은 출감 후 기거하던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의 집에서 애국부인회 임원진을 만났다. 여기에서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 황애덕을 총무부장으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애국부인회의 본부 및 지부 규칙을 제정하고, 부서 개정과 임원 개선 등을 단행하여 조직을 혁신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과 이들 임원들은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고 하는 설립 취지문을 채택하고, “본회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는데 있다”고 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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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이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선생과 주요 임원들은 조직 확대 작업에 들어가 서울,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 전주, 진주, 평양, 원산 등 남,북한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였고,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략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그 해 11월까지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11월 28일 선생을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황애덕과 함께 3년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1921년 6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 사이 선생은 일제의 고문과 악형을 당하여 병보석으로 1920년 5월 22일 출감한 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중국 망명을 계획하였다. 선생은 1921년 7월 10일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인천에서 배편으로 탈출하여 약 1개월 간의 여행 끝에 8월 초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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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대의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약
선생은 상하이에서 서병호의 부인인 큰 고모 김구례(金求禮)와 셋째 고모인 김순애의 도움으로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면서 건강 회복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상하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임시정부는 1921년 1월 26일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임, 이어 5월 12일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 주요 국무위원의 사퇴, 그리고 정부 조직 후 처음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여 정무에 임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돌아감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때문에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거리로 등장하였다.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사퇴한 날인 1921년 5월 12일 상하이 3·1당에서 열린 유호(留滬, 상하이)동포연설회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그 촉성기관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발기하였다. 나아가 그 해 6월 6일 정식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출범시켜 본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짐에 따라 상하이는 물론 만주·노령·미주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여기에 참여하였고, 또 이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에서 1922년 1월부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극동 인민 대표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여기에 대거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도 없이 1922년 2월 초 두 회의가 끝나자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 속에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자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3월 8일 회의에서 임시정부 법통성의 고수와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각원 개선 등 개조 방안을 제시하였다.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敵)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이다. 임시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 먹는다. 적은 가끔 임시정부의 몰락을 선전하여도 인민은 안 믿는다. 소수로 됨은 혁명 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만의 유혈로 성립되어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 지 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하고 외인(外人)은 의혹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하지만 이 같은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논쟁을 거듭하였다. 그러더니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제(諸) 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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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중 '근화회' 조직
이 같은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난맥상과 파벌싸움에 식상한 선생은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그 해 6월 21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11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선생은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도움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 뒤 선생은 1924년 9월 미국 미네소타주 파크빌시에 있는 파크대학에 입학하여 2년 간의 수업을 마치고, 다시 1928년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며 학부과정과 연구과정을 마친 끝에 1929년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이 같은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12일 황애덕, 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이 회의 회장으로서 회원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일반 운동을 적극 후원”하는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1930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Biblical Seminary)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 1933년 늦은 봄 13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말미암아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元山)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하였다. 이 때에도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 3월 13일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망령되게 공상을 꾀하여 오로지 타력(他力)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는 5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문화가 발달하여 인심이 고상하고, 2천여만의 단일민족으로서 이루어졌다. 10여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왔음은 독립 자치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확신 때문이었다. 금일에 이르러 근본적 해결을 하지 않고 오직 지엽적 미봉에 그친다면 평화 실현의 날은 무(無)할 뿐만 아니라 침략자의 편리를 조장하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1921년 선생이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낸 독립요구서 중에서 |
가난한 편모 슬하에서 홀로 공부하여 검사가 됐으나, 의병 처벌 거부. 국치를 맞자 사표 던져
홍진(洪震, 1877.8.27~1946.9.9) 선생은 개항 직후인 1877년 8월 27일 서울 차동(車洞 : 현재의 서소문)에서 풍산 홍씨(豊山洪氏) 재식(在植)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면희(冕熹), 호는 만오(晩悟) 또는 만호(晩湖)이다. 명문의 가난한 선비 집에서 출생한 선생은 불행하게도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으나 어머님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을 뿐 아니라 남달리 시국의 혼란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일찍이 눈을 뜨고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선생은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되었다.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忠州)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선생은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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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제의 식민지 관리가 되어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하는데 앞장설 수 없다고 하는 선생의 투철한 민족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검사직에 있으면서도 일제에 저항한 의병에 대한 논고(論告)를 거부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 13도 대표자 대회 열고 한성정부를 설립
이후 선생은 서울과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와 변론에 노력하였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생은 충북 청주군의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내에서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수립을 계획하였다. 이는 요원(燎原)의 불길마냥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3․1운동을 지도하고, 또 일제 타도 이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원대한 구상에서 1919년 3월 17일 선생은 한성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서울의 한성오(韓聖五) 집에서 가졌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김사국(金思國) 등과 한성정부의 수립을 논의한 뒤,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어 정부 조직과 조각(組閣)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그 소집 책임을 선생이 맡았다. 그리하여 4월 2일 선생의 주도로 인천(仁川)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이 정비 확정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하였다. 상해로 망명. 한성정부, 상해 임시정부, 러시아령 국민의회정부를 통합
선생은 이 같은 사실을 국외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하여 4월 8일 미리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선생을 통하여 국내의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자극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같은 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공포하였으며,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5월 2일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선생은 당장 시급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독립공채(公債)의 발행․독립의연금의 수합․세금의 징수 등을 제안하여 실시케 하였다. 그리고 법조 경력이 풍부했던 선생은 7월부터 임시의정원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초기의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과 불비한 법률의 제정 등 근대적 법치의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노령에서 수립된 국민의회정부를 통합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구성하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선생은 13도 대표자 회의에서 조직과 조각이 이루어지고, 또 국민대회를 통하여 그 수립이 공포된 한성정부가 국민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내세워 한성정부를 정통 정부로 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정부가 통합하는 형식을 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이 통과됨에 따라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한성정부를 그대로 승인함으로써 선생의 주장이 관철되었고,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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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들의 태평양 회의 앞두고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 발송
홍진 선생 국무령 취임 기사(《독립신문》1926년 9월 3일자). 1926년 임시의정원 선거 결과에 따라 선생이 국무령에 취임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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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선생은 1921년 4월 상해 한인교민단(韓人僑民團) 단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면서 한인동포들의 지위 향상과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선생은 제3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 때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 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 축소 문제와 극동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위싱턴에서 태평양 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평양 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 평화 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고자 이승만(李承晩)을 전권대사, 서재필(徐載弼)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선생은 임정의 독립 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8월 상해에서 대(對)태평양 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하여 간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우리 대표단의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선전과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의원 25명의 서명을 받아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세계의 평화, 동아(東亞)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하여 한국 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함으로써 한국대표단의 독립 외교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상해의 정국은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 개최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독립운동은 답보 상태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1922년 7월 안창호(安昌浩)․신익희(申翼熙)․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민대표회를 조기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명실 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통괄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3년 1월부터 9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는 임정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첨예화되더니 결국 파국으로 끝나 임정은 더욱 왜소화되고 말았다. 이같은 독립운동계의 난맥상에 상심한 나머지 선생은 1924년 4월 임정의 법무총장직(1922년 9월 선임)을 사임하고, 한동안 광소성 진강(鎭江)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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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이 되어 강령 발표. “비타협적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이 시기 그 동안의 정국 혼란이 지속되자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30일에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인 국무령제 개헌안을 의결하여 임정의 재건을 모색하여 갔으나 임시정부는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임시의정원은 1926년 7월 선생을 국무령에 추대하여 정국 수습과 정부 정상화의 책임을 맡겼다. 이에 따라 제4대 국무령에 취임한 선생은, 최창식(崔昌植)․조소앙․김응섭(金應燮)․조상섭(趙商燮) 등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하여 정부 조각을 마치는 한편 9월 27일 정국의 정상화와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정 방침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시정 방침 3대 강령 1. 비타협적(非妥協的)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2. 전민족(全民族) 대당체(大黨體)를 건립한다. 3. 각 피압박 민족과 대연맹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友誼)의 국교(國交)를 증진한다. 임정 수반으로 선생이 천명한 이와 같은 시정 방침은 이후 독립운동 선상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졌음은 물론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을 촉발시켰다. 특히 자치파 등 기회주의를 배격한 전민족 대당체 건립의 천명은, 국내에서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 전선체로 신간회(新幹會)를 탄생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단체 사이의 분규가 계속되자 1926년 12월 국무위원들과 함께 국무령을 사퇴한 선생은 이후 각지에 산재한 민족의 혁명적 총역량을 하나로 뭉쳐 국내외에 유일한 대독당을 조직하자는 분위기와 여론을 조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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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 주도
우선 1927년 4월 좌익을 대표한 홍남표(洪南杓)와 더불어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제창한 뒤, 이동녕(李東寧)․조상섭․조완구(趙琬九)․조봉암(曺奉岩) 등 40여 명과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하였고 같은 해 9월 북경(北京)․광동(廣東)․무한(武漢)․남경(南京) 등지의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와 연합하여 한국유일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성립시켰다. 이 때 선생은 진덕삼(陳德三)․김두봉(金枓奉)․배천택(裵天澤)․장건상(張建相) 등과 더불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유일독립당 촉성을 종용하기 위한 대표로 선발되어 1928년 1월 만주로 갔다. 당시 선생은 중국 본토 각지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어느 지역보다도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절대다수인 중국 동북 지역에서의 유일당 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만주 지역은 우선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으로 독립투쟁의 기지화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과 그 동원 가능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이점이 있고, 또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한 군자금 모금이 유리하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도 이 지역에서의 통합운동은 독립운동 선상에서 전력의 극대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선생은 신민부․정의부․참의부 및 교민당 등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를 순방, 설득하여 각 단체의 통일을 종용하면서 유일독립당 건설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도 이념상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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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에서 한국독립당 창당. 일제 만주 침략에 한중 연합작전으로 대응
이렇게 되자 선생은 우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독립운동 정당을 창당한 뒤 이를 확대하여 민족대당을 결성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7월 길림성에서 이청천(李靑天)․황학수(黃學秀) 등과 더불어 생육사(生育社)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함으로써 완벽하지는 못하나마 평소 염원하였던 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같은 한국독립당은 이당치국을 목표로 하면서, ①민본(民本) 정치의 실현, ②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③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 등을 강령으로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러한 한국독립당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만주 유일의 독립운동 정당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당군으로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총사령으로 이청천을 선임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설치는 선생에게 있어 그가 1926년 9월에 임정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여 발표한 시정 방침 3대 강령 중 하나인 전민족대당체 건립의 숙원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지도부 구성은 아래와 같다. 중앙위원장(당수) 홍 진(洪 震) 총무위원장 신 숙(申 肅) 조직위원장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 안 훈(安 勳)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경리위원장 최 호(崔 灝) 감찰위원장 이장녕(李章寧)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적으로 감행되자 선생이 이끈 한국독립당은 군사 조직을 강화하여 군구(軍區) 제도를 실시하면서 이청천으로 하여금 한국독립군을 지휘하여 중국 항일구국군과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1932년 9월 쌍성보(雙城堡) 전투, 1933년 7월 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 동경성(東京省) 전투, 9월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 등에서 한중 연합 작전으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전자령 전투는 1920년대의 청산리 대첩에 못지 않은 독립전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2년 만주국을 세워 만주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면서 이 지역의 한국독립군과 중국 항일구국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1932년 12월 김상덕(金尙德)과 신숙(申肅) 등을 임시정부와 남경(南京)의 국민당(國民黨) 정부에 보내 한중 연합 항일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투쟁역량을 제고시켜 갔으나 일제의 대대적인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국독립당은 1933년 11월 본부를 남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독립당을 이끌고 남경으로 온 선생은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항전에 결집할 것을 역설하면서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의 통합을 이루어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도록 하는데 진력하였다. 우선 선생은 1934년 2월 남경에서 윤기섭(尹琦燮)․신익희 등이 주도하던 한국혁명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이 같은 양당의 통합은 본질적으로 두 정당 모두가 무장투쟁 노선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는데, 이 때 선생은 새로 창당한 신한독립당의 대표인 중앙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나아가 신한독립당을 이끌면서 선생은 1935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 최동오(崔東旿)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조소앙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김규식(金奎植)의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5당 통합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확대하여 갔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 참여한 선생은 당 내에서의 의열단계와 비의열단계 간의 주도권 쟁탈전과 파벌 싸움에 실망하였고, 이로 인하여 1935년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말았다. 그 후 선생은 항주(杭州)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뜻을 함께 한 조소앙 등과 함께 정당을 주도하며 대일항전을 계속하여 갔다. 신한독립당, 민족혁명당에 이어 한국독립당 새로 세우고 광복군 편성을 실행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 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光復陣線·광복진선) 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民族戰線·민족진선) 결성이었다. 선생은 이 시기에 한국독립당을 대표하여 남경에서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 등과 범민족주의 세력의 민족단일전선 결성을 합의하고, 8월 17일에는 미주의 국민회․동지회․단합회․애국단․부인애국단 등 6개 단체와 합류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대표가 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침략으로 남경이 위기에 직면하자 임시정부를 따라 1937년 11월 남경을 떠나 한구(漢口)․장사(長沙)․광동(廣東)․유주(柳州) 등을 거쳐 1939년 5월 사천성(四川省) 기강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에 재선되었다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내무장)으로 선임되자 의정원 의장직을 사임하고, 국무위원으로서 임정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40년 5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광복진선의 9개 단체가 합동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할 때,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교섭하여 이청천을 중심으로 하는 광복군의 편성을 추진하다가 이를 임시정부로 이양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이동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사령부를 창설하고 광복군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또한 선생의 노력이 깃들여 있었다. 이후 김구(金九)와 김원봉의 협상으로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유림(柳林)의 무정부주의자연맹 또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른바 통합의회를 형성한 임시의정원에서 선생은 1942년 10월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선생이 좌우 독립운동 세력 모두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임정의 확대 강화, 광복군의 전력 강화, 임정의 국제적 승인 획득, 재중한인의 권익 옹호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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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선생 서거 기사(《동아일보》1946년 9월 10일자). 1946년 비상국민회 의장으로 활동하던 선생이 9월 9일 오전에 병으로 서거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
반탁운동 참여 건국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광복 후 선생은 1945년 12월 2일 임정 요인의 제2차 환국 때에 광복의 환희와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였다. 하지만 귀국 직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선생은 민족 자주성의 수호를 위하여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전국적 반탁운동 단체인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반탁운동과 건국 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던 중 9월 9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선생은 구한말부터 광복 이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꾸준히 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1920년대 이후 항일 독립운동 세력들이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인 이념대립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전개하여 독립운동계의 통합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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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했던 선생은 일제강점 이후 궁궐에서 나와 근대교육을 받고 총독부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이후 3.1 운동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을 때 이들을 간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는 어려운 생계와 양육 문제를 홀로 해결하면서 신채호 선생의 독립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
궁녀에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선생은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중인 출신인 부친이 딸을 궁궐로 보낸 것은 가정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1900년대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10년 간을 궁궐에서 보낸 선생은 여전히 궁녀의 신분에 적합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았다. 선생이 이러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1910년 일제강점에 의해서였다. 1910년 12월 30일 일제는 ‘황실령 제34호’로 ‘이왕직관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과 원역(員役) 326명을 해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궁녀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고, 함께 나인 견습생 생활을 한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선생은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다녔다. 그가 이곳에 입학한 것은 아마도 경제적인 자립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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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교사와 의료인을 제외하고 직조업, 바느질 품, 마전장사, 유모, 양잠, 홍삼직공, 수놓는 직공, 굴 따는 여자, 기생, 쌀 고르기, 여고원, 연초직공, 광주리장사, 음식장사, 아이돌보기, 길삼, 수모 등이었다. 이러한 직업은 대우가 좋지 못했다. 궁녀라는 것은 전통시대 여성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선생도 궁녀라는 직업을 가졌다가 해고당한 뒤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시 산파는 전문 의료인으로서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여성에게 괜찮은 편에 속했다. 나중에 조산원을 개원할 수도 있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간이 생리학, 간이 산파학, 해부학, 태상학, 간호, 육아, 소독법 등을 배운 후 조산부 자격증을 얻어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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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우회 조직과 3.1만세운동의 참여
선생이 3년여 이상을 간호부로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라 안에서는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세운동은 3개월 이상 전개되었고.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부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생을 비롯한 한국인 간호원들은 18명이었으며 한국인 남자 의사로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익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구과에는 김영오가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과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느꼈다. 선생도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결되어 ‘간우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의사 김형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선생과 뜻을 같이한 간호사들과 함께 3월 10일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경에게 체포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지고 유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간호사들의 신병을 인수하였다. 덕분에 선생은 일경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원을 그만두기로 한다. 선생은 만주에 있는 지인을 찾아갈 요량으로 병원에는 2주간의 휴가를 내놓고 서울역으로 가서 봉천행열차를 탔다. 그는 봉천에서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던 석운 우응규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그에게 국내 정세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다. 우응규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십여 일이 지난 후 북경의 명망 있는 인사에게 연경대학 편입학을 부탁한다는 편지 한 통과 노자를 마련해주었다. 선생은 즉시 봉천을 떠나 북경으로 갔다. 그리고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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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와의 만남과 의열단 활동
남편 신채호 선생.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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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이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난 것은 북경에서 생활한지 약 1년이 지난 1920년 봄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당시 우당 이회영의 부름으로 북경에 막 도착하였는데,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둘을 중매해 준 것이다. 첫 번째 부인과 별거한 뒤 10년간을 독신으로 지냈던 신채호 선생과 당시 24살이었던 박자혜 선생은 이렇게 해서 함께 북경 금시방가(錦什坊街)의 한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1921년 음력 1월 선생은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였다. 신채호 선생으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는 약간의 원고료와 후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항상 하는 일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1922년 선생이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신채호 선생은 더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 때 선생은 5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아마 이 두 번 째 아들은 국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둘째 아들 두범은 1927년에 출생하였다.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연경대학에 다닐 때는 여학생 축구부까지 만들 정도로 활달했지만 경제적 궁핍함으로 남편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가족들이 국내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지내는 동안 신채호 선생은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능한 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탄사건 때에도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석주를 선생이 돌보고 안내하는 등 의열단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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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힘겨운 삶
선생은 당시에 많은 독립운동가 아내들처럼 남편의 독립활동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보급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가정경제, 자녀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이 전부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경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의 산파업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당시에는 난산일 경우에만 산파를 찾아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달이 가도 손님 한 사람 찾아오지 않아 선생 집의 아궁이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 중 4, 5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끼니를 못 때우는 날이 많아 대련의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신채호 선생이 "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 중에도 선생은 아들 수범의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겨우 구입해서 교동 보통학교에 보냈다. 아들도 거의 굶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 같은 환경에서 선생은 아들 수범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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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신채호 선생이 너무 추워 선생에게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서 해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선생이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경제적인 이유로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솜옷 하나 해줄 수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매달 육원 오십전 하는 방 한 칸의 월세마저도 제때 못 내어 주인의 독촉을 받으면서 살았다. 산파업이 제대로 안 되어 선생은 아들과 함께 풀장사, 종로네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동아일보>에서는 선생의 생활을 공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전국에서 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왔다. 무명씨 1원, 10원, 강계 동인의원 김지영 10원, 이천군 박길환 5원, 정주군 이승훈 5원 등이었다. 그리고 1929년에도 천도교부녀회에서 7원을 동정금으로 보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일경들의 감시와 폭력이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어린 수범을 시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선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신문사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큰 아들 수범의 학비를 위해 신채호의 동지, 친지, 친척 등을 찾아 가기도 했다. 선생은 일경에게 갖은 욕과 폭력을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큰 아들 수범은 일경의 간섭으로 선린상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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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자혜 선생의 근황을 소개하는 신문기사.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이 보인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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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홀로 셋방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다
선생이 신채호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었다. 선생과 아들은 3, 4일에 걸쳐 북경으로 가는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납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채호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세 가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하지만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어 다시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28년 4월경 신채호 선생은 다른 곳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편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외국위체위조사건으로 대만 기륭항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였지만 1931년부터는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석방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아들 신수범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선생은 아들,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남편 신채호 선생을 만났으나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선생은 24일 ‘노조마열차’로 남편의 유해를 싣고 귀국하였다. 경성역에는 많은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서춘, 안재홍, 김형원, 박돈서, 신상우, 이관구, 정인보, 원세훈, 이대위, 김약수, 현동완, 주익, 유진태, 서정희, 김동완 등이었다. 이중에 원세훈은 청주군 남성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장례식은 신석우 250원, 송진우 50원, 여운형 50원, 조선일보 방응보 20원, 삼천리사 김동완 1,000 등의 부조금으로 지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박자혜 선생은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독립과 남편의 석방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선생에게 남편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큰 상실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 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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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심(吳光心 1910~1976) 선생은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용건동(龍建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은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남다른 민족의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
만주에서 교편 잡고 민족교육에 전념
선생은 조선혁명당과 군이 창설되던 1929년 화흥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교사가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 20세 때였다. 1930년 통화현(通化縣) 반납배(半拉背)에 있는 초등학교인 배달학교(倍達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 학교는 남만주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던 한족회(韓族會)에서 설립한 민족주의 학교였다. 1931년에는 재만 항일근거지인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동명중학(東明中學) 부설 여자국민학교로 옮겨 2세 여학생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동명중학도 화흥학교와 마찬가지로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행하는 정의부 소속 학교였다. 선생은 배달학교 교사 시절인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정세가 매우 급하게 돌아가자 교직을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에 가담, 처음에는 사령부 군수처(軍需處)에서 복무했고 나아가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하여 주로 지하연락 활동을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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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을 접고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일생의 배필 만나
조선혁명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도중, 남편인 김학규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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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연락 활동 중 조선혁명군 참모장인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선생은 김학규의 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참모이자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1900년 평남 평원군(平原郡)에서 태어난 김학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속성과를 졸업하고, 1929년 동명중학교 교원 및 교장을 역임하다가 선생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교직을 접었다. 선생이 김학규와 결혼할 무렵은 김학규가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의 참모장이자 맹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가운데 1932년 4월 29일 상해(上海)에서 경천동지할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가 발발하였다. 홍구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과 중국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위원장의 합작으로 하남성 낙양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이 결정됐다. 김구 주석은 만주에서 악전고투하는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등 독립군의 관내지역 이동을 요청했고. 이에 호응하여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의 일부 장령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1933년 말 관내지역으로 이동했다. 애초 조선혁명군은 관내지역으로의 완전한 이동보다는 이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도움을 받아 만주에서 항전을 계속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는 부족한 인력∙물자를 보충받기 위해 대표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원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대표로 김학규가 선발되어 남경(南京)에 파견됐고, 선생도 동행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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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를 찾아 남경으로 가는 험난한 과정을 노래로 표현
선생은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님 찾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어 비장한 심경의 일단을 토로하였다. 님 찾아가는 길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이 노랫말 속의 ‘님’은 임시정부이자 나아가 조국광복을 의미하였다. 어떤 고난도 극복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한다는 선생의 굳건한 결의가 엿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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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에서 만주까지, 위험한 전령의 소임을 다해
선생과 김학규가 남경에 도착할 무렵 남경에는 이미 남경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 등이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위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라는 전선통일을 위한 기구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김학규로서는 관내지역 독립운동단체 간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보다 효과적으로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 만큼 남경 등 관내지역의 제반 상황을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에 신속하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김학규는 본부에 제출할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를 가지고 만주의 당 본부에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 임무는 선생이 수행하기로 하였다. 김학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보고서를 휴대한 채 다시 만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선생은 아예 이 보고서를 통째로 외운 다음 1934년 7월 15일 남경에서 출발하여 만주로 향했다.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는 선생의 구술 보고에 대단히 만족하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 본부에서는 당 간부 몇 명이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二道溝)의 한 한인의 집에서 남경에 보낼 비밀 지령문을 작성하였다. 그때 변절자의 방화로 가옥이 불타면서 겨우 3명만이 살아나왔는데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천행으로 살아남았지만 심한 화상으로 3개월 동안 만주 산간의 바위굴에서 치료했다. 1935년 1월 선생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남경으로 가 조선혁명당과 군이 남경에서 추진하는 단일당 조직운동에 대한 당과 군의 비준서를 전달하였다. 이로써 조선혁명당 대표 김학규와 최동오(崔東吾)는 한국독립당(대표 金枓奉, 趙素昻)∙의열단(대표 石正, 陳義櫓)∙한국독립당(대표 尹琦燮, 이청천) 및 미주 대한인독립단(대표 金奎植, 申翼熙)의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로 1935년 7월 4일 단일대당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설됐다. 김학규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고 그의 참모이자 동지로서 적지 않은 구실을 한 선생은 민족혁명당에서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한국독립당 계열과 이청천, 최동오 등 만주세력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계열의 ‘전횡’에 반발, 탈당하면서 좌파적 성격을 띠게 되자 선생은 부녀부에서의 활동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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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를 따라 광서성 유주로 가, 청년공작대로 활동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은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중일전쟁의 개전과 더불어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대일전을 수행하였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패색이 짙어졌고, 남경이 일본군에 점령되기 직전인 1937년 11월에 중국 정부의 이동과 함께 임시정부도 호북성(湖北省) 한구(漢口)를 거쳐, 그 이듬해 2월에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로 옮겨갔다. 그리고 장사 지역 역시 일본군의 침공 위협을 받게 되자 임시정부는 7월에 다시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일본군이 광동 지역에 상륙하여 광주를 위협하게 됨에 따라 10월에 서쪽으로 철수하여 남해(南海)를 거쳐 11월에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는 1939년 2월 광서성 유주에 머무는 동안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였다. 청년공작대의 대장은 고운기(高雲起)였다. 대원 총수는 34명이고 남자 대원들은 대개 낙양군관학교 출신의 청년 군사간부들 위주였다. 그리고 대원의 1/3에 해당하는 11명이 여자였는데 대개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구성한 3당의 부인들과 여식들이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다른 여자 대원들과는 달리 조선혁명당 당원으로서 이미 만주에서 5년간의 항일전투 경험이 있었고, 남경에서 추진되었던 전선통일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전의 투사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
|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의 대원으로 활동한 오광심 선생과 남편인 김학규 선생, 그리고 서파. |
그러나 유주도 임시정부가 안주할만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1939년 5월에 사천성(四川省) 남부의 기강(綦江), 이어 1940년에는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重慶)에 최종적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의 체포 위협을 피해 중국 내지를 전전하면서 자체 무력단체 창설을 준비해왔던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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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의 임무 수행
1940년 9월 17일 이른 새벽 중경의 가릉빈관(嘉陵濱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가릉빈관은 중경시를 끼고 흐르는 가릉강(嘉陵江) 기슭에 있는 호텔로 연합국의 중경주재 서방 기자들이 활동하던 일종의 프레스센터였다. 이날 행사에는 내외에서 2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총사령부 직원들을 비롯하여 김구∙홍진(洪震)∙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등 임시정부∙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 요인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선생도 이날 광복군 창립식에 김정숙(金貞淑)∙지복영(池復榮)∙조순옥(越順玉) 등의 여군과 사복을 입은 신순호(申順浩)∙민영주(閔泳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직후 선생은 주로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광복군 총사령부는 실제적인 항일운동을 펼치기 위해 전방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여자 광복군 대원인 선생을 비롯하여 지복영∙조순옥도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부관처장(副官處長) 황학수(黃學秀)를 비롯한 중경의 총사령부 인원은 1940년 11월 17일 중경을 출발하여 동월 29일 서안에 도착하여 시내 이부가(二府街) 4호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선생이 소속된 서안 총사령부의 선전조는 광복군에 대한 홍보와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우선 광복군의 기관지 간행을 준비하였다. 총사령부에는 광복군 기관지 간행을 위하여 정훈처(政訓處)를 두고 조경한을 정훈처장에 임명하고 편집은 김광이 담당하였다. 또한 원고작성과 편집은 선생을 비롯하여 지복영∙조순옥 등 여자 대원이 주로 담당하였다. 준비작업을 거쳐 광복군 기관지는 1941년 2월 1일 자로 [광복(光復)]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광복]은 한국어본과 중국어본의 두 종류로 간행되었다. 중국어본은 현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한국어본은 국내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는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의 이청천∙황학수∙김학규∙이복원∙김광 등이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을 실었다. 선생은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 ‘한국(韓國) 여성동지(女性同志)들에게 일언(一言)을 들림’이라는 문장을 게재하였다. 이 문장에는 선생의 항일독립사상과 평등 여권의 실현 방략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선생은 한국여성의 존재를 20억 세계인 가운데 절반이 되는 10억 세계 여성 인구의 구성으로 보고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국여성의 존귀한 존재성을 강조하였다. 이어 세계 흥망과 민족 존망의 책임 남녀 모두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서반아(스페인) 여성들은 자국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가 남자 못지않게 싸웠으며, 중국여성들도 맹렬하게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실제적인 사례를 밝혔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볼 때에 국망 30년 동안 조국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국내와 만주 및 관내에서 맹렬한 활동을 한 것은 주로 남자 동지들이고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녀평등과 여권을 찾으려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져야만 하며, 바로 지금 여자들에게 그 기회가 왔음을 강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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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성 부양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의 모병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이처럼 선생은 서안에서 1년 반 동안 [광복] 기관지 간행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선생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는 초모공작(招募工作), 즉 모병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서안에서 제3지대를 편성하였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군무부는 선생으로 하여금 김학규 등과 함께 서안보다 더 전선과 가까운 산동반도로 가서 초모공작을 할 것을 명하였다. 1942년 2월 제3지대는 처음 징모처(徵募處) 제6분처(第6分處)라는 이름으로 서안에서 머나먼 그렇지만 조국과 가까운 산동반도를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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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부군인 김학규 선생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어, 초모공작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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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지대의 공작지점으로 예정된 산동반도는 화북의 요충지이자 국내와 만주지역의 교포들과 상호연락이 용이한 지점이었다. 산동반도를 향해 서안을 출발한 김학규 일행은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중간지점인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정착하고 말았다. 산동반도의 전세가 매우 급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제3지대는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안휘성 부양에 거점을 두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부양은 지형상으로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있던,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적후에서의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데는 더 없이 유리한 지점이기도 했다. 제3지대는 부양 시내 호정원항(胡井院巷)에 ‘한국광복군 초모위원회(韓國光復軍招募委員會)’라는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선생은 제3지대에서 지대장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 담당 비서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의 대원 관리 능력은 매우 세심하고 철저하였다. 새로운 대원들이 들어올 때마다 선생은 그들을 격려하였다. 이때 광복군에 참여하였던 대원들의 회고에 의하면, 광복군에 투신하였던 대원들은 선생의 자상한 보살핌과 배려에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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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지대의 초기 활동은 지하공작을 통해 적 점령 지구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안휘성을 비롯하여 강소성(江蘇省)∙하남성∙하북성(河北省) 등이 주요 공작지역이었고, 서파(徐波)∙김광산(金光山)∙신규섭(申奎燮)이 공작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초모공작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모공작이 현저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1944년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전개된 지하활동을 통해 적점령지구에 있는 교포 청년들이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배치된 한인 학도병들이 대거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1944년 1월 20일 ‘반도인 학도육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학도병들이 2월 중순경 서주(徐州) 등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들이 연이어 일본군을 탈출한 것이다. 초모된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은 광복군 지하 공작원들을 통해, 또는 중국 국민군 유격대의 협조와 안내를 받아 부양으로 집결하였다. 1944년 9월경에 이르면 그 숫자는 기존의 기간요원들을 포함하여 7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일부는 중경 총사령부로 갈 것을 지망하였고, 남은 일부는 잔류하여 제3지대의 골간이 되었다. 이들은 본부요원과 신입대원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적 점령지역으로 나가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지하공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초모공작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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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 기념 사진(1945년 6월) 제3지대의 초모활동은 군무부에서도 극찬을 할 정도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군무부장은 임시의정원에 대한 보고에서 1945년 3월 말 현재 제3지대의 인원을 관좌(官佐) 4명, 대원 112명, 사병 3명 등 모두 119명으로 보고하였다. 1944년 11월 한군 광복군훈련반(약칭, 한광반) 출신을 비롯하여 모두 53명을 중경으로 이송한 것까지 포함한다면, 제3지대는 3년여 동안 거의 160여 명의 인원을 초모 확보한 셈이다. 군무부에서 1945년 3월 말 현재 초모공작에 의해 규합한 인원을 339명으로 보고한 것으로 보면, 160여 명을 초모한 제3지대가 광복군 전체에서 규합한 인원의 약 절반을 초모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처음 8명으로 출발한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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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상해에서 교민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다
광복 후 선생은 김학규와 함께 상해에 진출하였다. 김학규는 상해에 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滬辦事處)를 설치하고 판사처 처장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김학규를 도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상해에 모여 있던 3만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데 진력하였다. 선생은 1946년 가을 김학규와 함께 상해에서 만주 심양(沈陽)으로 진출하였다. 선생의 만주행은 1934년 김학규와 함께 농사꾼 부부로 위장하여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지 12년 만이었다. 선생은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심양이 중국공산당의 공세에 함락 위기에 처하던 1948년 4월이 되어서야 선생은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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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10년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출생 1929년 화흥중학부설 사범과 졸업, 이후 민족교육에 전념 1930년 배달학교 교사, 조선혁명당에 가입 1931년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 근무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무 및 선전사업 1942년 안휘성에서 모병 임무 수행 1946년 만주 심양, 애국부인회 위원장 1948년 4월 조국으로 귀국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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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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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시절을 보살피다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그리하여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정성이 있는 자는 정성으로” 독립운동은 전개되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현 여사는 여자의 몸으로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무찔렀고,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절규하다가 쓰러졌다. 이 밖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독립을 갈구하며 산화하였던 것이다. 정정화(鄭靖和, 1900. 8. 3~1991. 11. 2) 선생도 그런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이었다. 하지만 선생의 운동 방식은 달랐다. 직접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선생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중경),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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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선생의 주된 활동 영역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이것이 바로 선생의 본분이나 다름없었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선생은 망명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李東寧), 성재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었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생활은 선생이 있음으로써 위안이 되었고, 나아가 27년간이라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임시정부의 역사도 선생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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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김가진, 남편 김의한과 함께 떠난 망명길
선생은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鄭周永)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이었다. 부친은 충남 예산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귀여움뿐 아니라 두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부친의 완고한 반대로 어깨너머로 밖에 할 수 없었던 공부였지만, 어려서 한학을 익혀 신문 정도는 불편 없이 읽을 정도였다. 선생 자신도 “나는 원래 둔한 편은 아니어서 여섯 살 때 이미 두 살 위의 작은 오라버니를 따라 몰래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떼었고, 시집가기 약 1년 전부터는 오라버니를 가르치던 선생님으로부터 다시 글을 배울 기회를 얻어 [소학]까지는 떼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 정도를 읽는 데는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11살이 된 1910년 가을 김가진(金嘉鎭)의 3남인 동갑내기 신랑 김의한(金毅漢)과 혼인하였다. 김의한과 결혼하면서 선생은 세상 물정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화파 집안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남편 김의한의 영향이 컸다. 김의한은 1914년 매동(梅洞)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부터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우리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를 선생에게 자주 해주었다. 즉 선생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다. 특히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그 와중에서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해로 망명한 사건은 선생의 생애에서 하나의 큰 전기였다. 이를 계기로 선생 또한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 1월 초순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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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와 국내를 수차례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
서울에서 의주, 봉천, 천진, 남경, 상해까지 연이어 열차를 갈아타면서 꼬박 열흘 이상을 달려 상해에 닿은 것은 1월 중순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하여 재회의 기쁨도 맛보기 전에 선생은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다. 당시 임정 법무총장으로 있던 예관 신규식(申圭植)과 시아버님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0년 3월 초순 상해를 출발하여 국내로 향했다. 국내 잠입 경로는 1919년 7월 시행되어 국내외에 가동되고 있던 임시정부의 비밀 지방 행정 및 연락 조직인 연통제를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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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로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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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에서 만주 안동현까지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편을 이용하였다. 당시 안동에는 우강 최석순이 임정의 연락책으로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일경으로 위장해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내왕을 도왔는데, 선생은 그의 누이동생을 가장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선생은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를 찾아갔다. 서울에서 가장 유능한 젊은 산부인과 의사였던 신필호는 신규식의 장조카였기 때문에 그 집을 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선 것이다. 선생은 20일 가량 서울에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뒤, 그 돈을 전대 깊숙이 간직한 채 4월 초 상해로 귀환하였다. 첫 번째 독립운동 자금 조달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어 1921년 늦은 봄 두 번째로 국내에 밀파됐는데, 그 출발 동기 자체가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있었다. 선생은 국내에 들어와 곧바로 예산의 친정 집으로 내려가 친정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런 다음 개성을 거쳐 우사 김규식의 이질(姨姪)인 서재현을 대동하고 상해로 귀환함으로써 두 번째 임무도 완수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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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6월 중순 선생은 세 번째로 국내로 밀파되었다. 이번 국내 잠입의 목적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해에서 배편으로 산동반도의 청도를 거쳐 안동현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동행인 이욱(李昱)이 워낙 자신 있다고 장담하는 바람에 열차가 아니라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러다가 선생 일행은 압록강 철교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고, 결국 신의주 경찰서로 끌려 가 이틀 동안 심문을 받은 끝에 신분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을 받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조국 광복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망명하였던 김가진이 1922년 7월 4일 불귀의 몸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시동생 김용한을 대동하고 다시 상해로 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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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임정요원들을 위해 헌신
선생은 그 해 10월 다시 한번 네 번째로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7월 상해로 귀환하였다. 1924년 12월에도 선생은 다섯 번째로 국내로 잠입한 뒤, 이듬해 6월까지 약 6개월간 주로 예산의 친정 집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이 시기 임정은 그야말로 간판만 있는 형세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정의 위상은 크게 손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 동포들의 임정에 대한 재정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임정은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 사면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의 외면으로 정부 조각조차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근근이 임정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 선생은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구도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할 때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면서 찾아오곤 하였다. 가장 어렵고 배고팠던 시기를 선생은 임정 요인들과 같이 보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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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유치원 추계 개학 기념 사진(1941년 10월 10일, 중국 중경). 뒷줄 맨 오른쪽이 정정화 선생. 그리고 서른 살이 되던 해인 1929년 7월 선생은 10년 전 망명길에 오른 후 여섯 번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고, 이후 1년 6개월간 국내에서 체류하기도 하였다. 1931년 초 선생은 다시 상해로 망명하면서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직후부터 주변 정세가 변화하였고 독립운동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931년 연이어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이 주된 요인이었다. 7월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간에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이간책과 악선전으로 국내 각 도시에서 중국인들을 습격 살해하는 일이 빈발하였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중국인들이 귀국하였고, 그로 인해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증오와 적대행위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감행된 일제의 만주침략도 독립운동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부일배(附日輩)들이 일제의 힘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중국의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렵게 된 것이다. 중국 영토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나 한·중 양 민족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 사변 이후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의 길거리에서도 한·중 양민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특무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1931년 말 임정의 특무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김구가 그 단장을 맡았던 것이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윤봉길 의거는 한인애국단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이들 의거로 말미암아 한·중 양민간의 갈등과 대립은 일거에 불식되었고, 항일투쟁의 연대 고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는 여러 해 동안 상해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정치적 망명객으로 취급하여 보호해 주었던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이봉창 의거를 계기로 상해사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한 상태에서 윤봉길 의거가 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승전 축하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윤봉길 의거는 이제 더 이상 프랑스 조계 당국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보호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자들에게 즉시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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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
5월 1일 선생 가족은 상해를 떠나 기차 편으로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도 선생은 석오 이동녕 등 임정요인들을 모시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와 교섭을 맡고 있던 박찬익의 주선으로 한때 신강성 성장을 지낸 임긍(林兢)이란 사람을 소개받았다. 임긍은 선생의 남편인 김의한을 전원공서에 취직시켰는데, 그것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지방 행정 관리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가족은 1934년 봄 임지인 강서성 풍성현(豊城縣)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가족은 1년쯤 있다가 다시 무령현(武寧縣)으로 이주하여 3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1935년 11월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하였다. “내가 독립운동 단체에 적(籍)을 두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라는 말처럼 선생이 공식적으로 처음 가입한 단체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이른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대륙침략을 감행하자, 독립운동계에서는 항일투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의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담당하여 갔다. 나아가 이 동맹은 민족통일전선체로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폐지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임시정부사수를 주장하던 김구, 이동녕, 조성환, 조완구 등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한국국민당은, “적의 모든 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정당이었다. 또한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이자 독립운동 정당으로써 아래의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다. 1. 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 집결할 것.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할 것. 4.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5.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6.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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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요원들의 부상을 돌보고 임종을 지켰던 선생
1938년 2월 선생의 가족은 강서성 무령을 떠나 호남성 장사로 가서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하였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서 선생의 역할은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정세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익 민족운동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중심이 된 좌익 민족운동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결성이었다. 이 같은 좌우익의 분열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때문에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통합논의를 위해 우익 3당의 대표들이 1938년 5월 6일 남목청(楠木廳)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던 중 비극적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운환(李雲煥)이라는 청년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한 것이다. 백범이 맨 먼저 가슴에 총을 맞았고,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등이 잇따라 총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그로 인해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백범과 춘교는 상아의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게 되었다. 이때에도 이들의 뒷바라지는 선생의 몫이었다. 특히 1938년 9월 초, 광주시에 연락처만 남겨놓은 채 대부분의 임정 식구들이 그곳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불산으로 옮겨갔는데, 이때부터 임정의 안살림은 선생이 도맡게 되었다. 이후 광서성 유주와 귀주성 귀양을 거쳐 사천성 남쪽 끝에 있는 기강현에 도착한 1939년 4월말에 이르러서도 선생의 안주인 역할은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 3월 임정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이동녕이 사천성 기강현에 있는 임정 건물 2층 침소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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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애국부인회의 집행부 일원으로 활동
한편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하면서 독립운동의 활동기반을 갖추어 갔다. 1940년 5월 민족진영의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중경)을 창당하고, 9월에는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당(한국독립당), 정(임시정부), 군(한국광복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해 갔던 것이다. 이때 선생 또한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한국여성동맹이 기강에서 창립될 때, 선생은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임정의 안주인으로 1941년 1월 기강에서 중경 근처의 토교로 임정 가족들이 이사할 때, 이를 주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오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각 정파의 부인들 또한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다. 여성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선생은 훈련부 주임, 김순애는 주석,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ㆍ김운택ㆍ연미당ㆍ강영파ㆍ권기옥 등이 각 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이 집행부의 일원을 맡은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다. 그런 다음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아울러 연합군측으로부터 인계 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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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년 6월 17일).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선생. 광복 후 김구 선생과 한국독립당 신(新)국가 건설 노선 지지
그러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선생은 8․15광복을 토교에서 맞이하였다. 광복 후 임정 요인들은 11월 5일 중경을 출발하여 상해에서 20여일 지체한 후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환국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뒤에도 토교에 남아 12월 한 달 동안 뒤처리를 마치고, 이듬해 1월 하순 상해로 갔다. 그 뒤 5월 9일 선생 일행은 상해 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LST라는 수송선을 타고 사흘 만에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환국 이후 선생은 일체의 정치 활동을 피하였다. 하지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전개하던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신(新)국가 건설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부통령에 취임한 성재 이시영이 선생을 사정기관인 감찰위원회의 감찰위원으로 추천하였지만 취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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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20 중국으로 망명, 1차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 1920~1930 독립운동자금 모집 임정에 전달 1940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 1943 한국애국부인회 훈련부 주임으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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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장군의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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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
백야(白冶) 김좌진(1889. 11. 24 ~ 1930. 1. 24)장군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이 장군의 11대조이며 안동 김씨 수북공파의 시조인 광현(光炫)이 장군의 10대조가 된다. 장군의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군이 3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3세 되던 해에 형 경진(景鎭)이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장군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 했는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 노릇을 하였다. 특히 병정놀이 때에는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썼다고 한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군은 삼국지, 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었으며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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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강직한 성격 이면에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장군은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거지를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을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장군은 유년시절 김광호(金光浩),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 선생과의 만남은 장군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장군이 앞으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김석범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석범은 고향인 홍성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장군이 일찍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군은 김복한으로부터도 사사를 받았다. 김복한은 1895년부터 1896년에 걸쳐 전개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항쟁과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생애를 항일운동에 바친 애국지사였다. 장군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으며 그것은 이후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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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호명학교 설립, 계몽운동에 힘쓰다
장군은 구국운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집안에는 30여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장군은 1905년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장군은 노비해방을 단행한 후 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장군이 무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준 식민지 상황이 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군은 계몽운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1907년 장군은 김항규, 김홍진 등과 함께 자진하여 상투를 잘랐다고 한다. 이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고,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기 위한 의식의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장군은 다시 홍성으로 귀향하였다. 귀향하게 된 이유는 몸소 체험한 계몽운동을 홍성에서 직접 실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귀향 후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교육운동이었고, 그 결실이 호명학교의 설립이었다. 호명학교의 교명은 “호서지역을 밝게 한다"는 것으로 호서지역을 개명(開明)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갖고 있었다. 장군은 혼자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미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켰고 전답들도 노비들에게 분배한 상태였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 장군은 안동김씨 문중에 도움을 요청했고 문중의 도움으로 호명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호명학교는 홍성지역의 젊고 유능한 학생들에게 개명과 부강을 교육하였고, 신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학생들에게 교육하였다. 학생 수는 1908년 당시 100여 명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으며 1908년부터 소학과와 중등과로 나누어 가르쳤다. 또한 법률전문과를 설치하는 등 홍성지역에서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할 정도였다. 한편 장군은 1909년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학문증진과 민중계몽을 위해 1908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홍주지회는 1909년 1월 16일에 인가를 받았는데 장군을 비롯해 회원이 50여 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장군은 경술국치 이전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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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서신. 1901년 7월 23일 스승에게 올린 안부의 편지이다. 경술국치 후 본격적인 항일투쟁운동 시작
장군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군자금 모집과 대한광복회 활동이었다. 장군은 1910년을 전후해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이창양행은 서울 관수동에 있었으며 의병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본경찰의 수색을 받기도 하였다.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는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장군은 일제강점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다. 때문에 장군은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는데, 이 사건으로 장군은 1911년 6월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은 장군에게 또 다른 인연을 제공하였다.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이후 대동단에서 활동하게 되는 전협과 최익환을 만난 것이 그것이다. 최익환은 만주 망명자금 마련 사건과 관련해 7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전협도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이었다. 전협과 최익환은 이미 의기투합에 만주에서 활동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활동하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난 상황이었고, 장군도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장군과 전협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며, 최익환과는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하였는데 그 계기가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장군은 1913년 9월 출감하였으며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홍성헌병대에서 10개월 수감되기도 하였다. 홍성헌병대에서 풀려난 후에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부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초기에는 이진룡이 부사령에 임명되었고, 이진룡이 피체된 후에는 장군이 그 책임을 맡아 파견되었다. 장군은 만주로 파견되기 이전 국내에서 광복회를 혁신 강화하는 모임에 참여하는 한편 평안도, 황해도지부원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 길림광복회를 조직하는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처럼 장군은 만주로 파견되기 전 대한광복회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주로 군자금모집이었다. 장군은 1915년 11월 최익환과 함께 경북지역에서 군자금모집을 추진하다가 피체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로 망명하면서 장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님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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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군정서에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간부 양성에 힘쓰다
장군은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에서 활동하면서 대한독립선언서에도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장군은 1919년 3월 중순 이후 길림군정사를 조직하였다. 길림군정사는 장군과 같은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나 이를 뒷받침해 줄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던 장군은 1919년 가을 대한군정서에 참여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11년 3월 대종교도들이 북간도지역에서 조직한 중광단에서 시작되었는데,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여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단체였다. 대한정의단은 이를 위하여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인물들은 군사부문에 비전문가로서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대한정의단의 서일 총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군과 조성환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이 많았던 길림군정사와 연합을 추진했던 것이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로 개편하였다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장군은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대한군정서의 군사부문을 전담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대외업무 및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문을 전담하였다. 장군은 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이장령, 나중소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의 중책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장군은 이를 위하여 1920년 2월초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이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목적이었다. 또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교재를 도움을 받았으며 서대파 십리평 산림지대에 병영을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사관연성소의 총책임은 사령관인 장군이 맡았으며 교관으로는 이범석, 김규식 등이 훈련을 담당하였다. 사관연성소는 역사, 군사학, 병기사용법, 부대지휘법 등을 교육하였으며 특히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역사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엄격한 군기와 규율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교성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때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 부대로서 이후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섬멸하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의 주축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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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판결문. 장군은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검거되었고 장군은 징역 2년 형에 처해졌다. 청산리 대첩의 승리 이끌어
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였으며 1920년 6월 7일에는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특히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의 대표적인 전투인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주력부대였다.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다. 또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이처럼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총기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000개, 박격포 2문을 갖추고 있어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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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는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장군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북만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부대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이 독립군 부대 및 한인마을을 전멸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피해 러시아 국경지역으로 이동했던 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참변을 당하고 다시 북만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 계열과 이범윤을 중심으로 한 복벽주의자 계열이 연합해 조직한 단체였다. 장군은 대한독립군단에서도 총사령관을 맡아 무력투쟁을 전개했으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모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대한독립군단은 1925년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한인동포들의 생활향상에 주력하였다. 신민부가 이러한 활동을 추진한 것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재만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신민부를 조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으로 군사부문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무장투쟁의 선구자로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장군은 신민부를 통해 무장투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의무금과 모연금을 모집해 독립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신민부는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와 마찬가지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양성을 추진하였다. 신민부는 성동사관학교 졸업생을 바탕으로 정규군을 구성해 5개의 보안대와 그 통제를 받는 별동대를 두었으며 이는 신민부 무력투쟁의 근간을 이루었다. 장군은 성동사관학교 부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총사령관으로서 보안대와 별동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민부는 1928년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열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결국 해제하게 된다. 장군은 군정파가 해체된 후 북만지역으로 이동해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만주지역에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던 공산주의 사상과 대항하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한 결과였다.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사상에 대처하고 재만동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했던 것이다.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국내에 계속해서 밀사와 공작대를 파견했다. 1925년 3월에 신민부원을 파견해 조선총독을 암살을 계획했으며 특수공작대를 국내에 파견해 국내의 작전지도 등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군이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국내에 밀사와 군대를 파견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은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장군은 영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중동선 산시역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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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사회장 당시 모습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 단언하는 바 이천만은 그 나의 결심을 찬동하야 적극 전진하되 전자(前者) 부(仆)이어든 후자(後者) 계(繼)하고, 남(男)이 원수의 독수(毒手)에 사(死)하거든 여(女)가 진(進)하고, 노(老)가 원수의 참해(慘害)를 피(被)하거든 해자(孩子)일지라도 나아가기를 바라노라. -<혁신공보 革新公報> 1919년 12월 25일자, 이동휘 선생의 인터뷰 중에서-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활약하다이동휘(李東輝, 1873.6.20~1935.1.31) 선생은 1873년 6월 20일 함남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아들을 아전(衙前)으로 출세시키고자 했던 부친 이승교(李承橋)는 선생을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통인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본 선생은 대담하게도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다. 사건 직후 선생은 서울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다. 선생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후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선생은 승진을 거듭하며 국방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군인들은 물론 도 인민들까지도 부형(父兄)과 같이 애모할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얼마 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선생은 광무황제, 2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 법관(法官),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사절,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앞으로 보내는 8통의 유서를 작성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선생은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뒤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일제는 선생을 배후조종자로 체포하고 4개월 후인 12월 초에야 석방하였다. 석방된 후 선생은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활동도 하였다. 한일합병을 앞둔 1910년 8월 초에는 일제에 또 한 번 예비검속 되었다가 한일합병 선언 후에 석방되었다. 1911년 3월 다시 안명근, 양기탁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총감부에 체포된 선생은 인천 앞바다의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 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분열된 러시아 동포 사회의 단합에 힘쓰다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전도활동을 계속하면서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북간도 한인사회는 기독교계열 인사와 유학계열 인사들 사이에서 이른바 신구(新舊) 학파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기독교계열의 인사들이 주축이 된 간민교육회-간민회 계열의 신학파는, 일본의 간섭배제와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중국당국의 협력과 후원을 얻어야 하며 중국국적 취득과 호복(胡服)과 호발(胡髮)의 채택을 장려해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사우계(士友契)-공교회(孔敎會) 계열의 구학파는 이러한 동화정책을 민족문화말살 노선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선생은 신학파의 활동을 지도하는 한편, 구학파와의 단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1913년 10월 선생은 일제의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북간도를 떠나 훈춘(琿春)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기호파(충청, 경기도 출신), 서도파(평안, 황해도 출신), 북파(함경도 출신) 간의 지방파쟁으로, 한인사회 대표기관인 권업회(勸業會)가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선생은 파벌해소와 민족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연해주 각지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권업회의 지방 조직정비와 한인사회의 단합을 위해 활동했다. 이는 1913년 10월 12일 자신을 위해 개최된 환영식에서 행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거저 단합이라 하면 명사가 박약하니 영원단합이라고 하옵세다. … 여러분은 생각하시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나니 … 만경창파에 풍도(風濤)가 위험한데 … 같이 탄 배안에서 서로 돕고 서로 구제하지 아니하겠는가. 삼삼오오의 양의 무리가 갈 때에 호랑이의 날카로운 톱을 만나면 서로 합하야 나갈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과연 단합할지니어다. 나누면 제이차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야 서로 나누지 말자. 선생은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正都領)에 취임하여 광복전쟁계획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당국은 일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을 비롯한 20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명령을 내렸다. 선생은 북간도로 이동하여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對日) 전쟁계획을 추진하였지만, 1915년 중국이 일본과 21개조 문제를 타결하게 되면서 이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한인사회당 자료(1918).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창당된 한인사회당의 활동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독립기념관> 1917년 3월 러시아 2월혁명 소식을 접한 선생은 신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아갔으나, 러시아헌병대에 독일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0월혁명 후인 1917년 11월 하순에야 석방되었다. 10월혁명 이후 선생은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을 창립주도한 인물들은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한인사회당의 산파역은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으로서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였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2월혁명 이후 우랄지방에서 이인섭, 오성묵, 심백원 등과 최초의 한인 노동자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한 바 있고, 러시아 원동지방 한인사회 내의 친볼셰비키 세력 조직을 위해 러시아 원동지방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10월혁명 이후 선생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될 수 있도록 도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인사회당의 초기 창립자들을 보면 김알렉산드라와 이인섭 등 우랄노동자동맹 출신들, 선생과 유동열, 김립 등 국내로부터 망명해 온 신민회 간부들, 그리고 하바로브스크 한인사회 지도자였던 이한영, 김종, 유스테판, 오와실리, 오하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는 러시아적군과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가하여 백위파군(白衛派軍)과 싸웠는데, 반수 이상의 희생자를 냈지만 국권상실 후 재러 한인이 전개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1918년 8월 초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간섭군의 개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붕괴되고 백위파 정권들이 들어서자, 한인사회당은 불법화되었으며 선생 역시 북만주의 오지로 도피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다3·1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과 국내외 임시정부의 조직자들은 미국 등 서구열강과 파리강화회의에 큰 희망을 걸고 독립이 가까운 시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 결과로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조직, 발표되었다. 이들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손병희, 이승만과 함께 정부수반으로 선임되거나 국무총리총재 또는 군사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주위의 측근들에게 “한인사회당의 당수면 되었지 무슨 정부의 직책이 중요한가”며 반문할 정도로 이들 임시정부의 각원취임수락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선생과 한인사회당은 3·1운동의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조직자들을 비판하였는데, 미국 등 서구열강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열강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분할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 전망했던 까닭이었다. 이러한 전망이 가능했던 것은 선생을 비롯한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시베리아 내전시기에 미국 등 열강이 일본과 연합하여 반혁명적인 백위파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던 사실을 몸소 경험하면서 이들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의회에서 대한국민의회측은 상해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의회는 상해 임정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봉대(奉戴)에 합의하게 되었고 국민의회는 해산을 선언하였다. 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선생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선생은 한성정부의 국무총리총재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출범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맡고자 상해로 갔다. 그러나 상해임정과 국민의회 사이에 합의사항의 해석을 둘러싸고 발생한 ‘승인개조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은 결국 “상해 측과 정전(政戰)을 벌임으로써 대국을 파괴할 수 없다”며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상해임정은 선생을 비롯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되었으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사실상의 분립정부인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워싱턴에 설립하고 종래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수합하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서 상해임정은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 총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편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박진순과 한형권 등 특사들의 노력으로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차관제공을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을 건네받았는데, 이 자금은 1920년 말 그리고 선생이 상해임정을 탈퇴한 후인 1921년 3월 말경 상해로 운반되었다. 상해임정이 지도자들의 대립과 갈등으로 제대로 활동을 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일제는 3·1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했던 연해주지역과 서북간도지역의 한인민족운동세력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1920년 4월 연해주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4월참변, 그리고 1920년 10~11월 서북간도의 동포사회에 대해 대대적인 약탈, 방화, 파괴를 자행하고 수천 명의 동포를 살해한 간도사변 (또는 경신참변)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여름의 봉오동 전투와 가을의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는 한인 독립군이 일본침략군을 상대로 얻어낸 쾌거였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에 의하여 활동 근거를 파괴당한 독립군 부대들은 볼셰비키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혁명적 자유지’ 흑룡주(아무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사변은 임시정부가 일본침략군의 만행으로부터 만주의 동포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 특히 러시아와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세력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선생을 비롯하여 만주, 러시아로부터 온 인사들이 중심이 된 급진론과 안창호로 대표되는 준비론 간의 노선논쟁이 촉발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의 상해도착 역시 상해임정 내외의 명쟁암투(明爭闇鬪)를 격화시켰다. 급진론의 득세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하여 선생은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921년 1월 초에 개최된 국무원회의에서 선생은 이승만에게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대통령제의 폐지와 혁명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무위원제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와 다른 각원들의 반대로 자신의 임정개혁안이 좌절되자, 선생은 마침내 1921년 1월 24일 상해임정을 탈퇴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사진(1920.01.01). 중간에 이동휘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출처: 독립기념관> 이는 1919년 11월 3일 이후 선생과 김립 등 사회주의 세력이 참여함으로써 좌우연합의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띠었던 상해임시정부의 각원구성이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우파, 특히 기호출신 일색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선생에 이어 남형우, 김규식, 유동렬, 안창호 등 각료들이 연속 사퇴하게 되면서 ‘통합’ 상해임정은 이제 이승만 등 기호출신 각료들이 중심이 된 하나의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다. 공산당 지도자로 민족운동을 이끌다선생이 상해임정에 참여한 1919년 말에서 1921년 초까지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국내외 각지, 특히 러시아 시베리아 원동지역과 일부 만주지역에서 한인공산당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것이다. 이는 1919년 말 이후 시베리아 내전에서 백위파를 몰락시킨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아울러 3·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등 서구열강에 걸었던 지나친 기대가 실망과 배신감으로 바뀐 결과이기도 했다. 이들 공산단체를 지도할 중앙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선생의 한인사회당과 이르쿠츠크에서 새로이 부상한 신흥한인공산세력이 바로 그들로, 후일 각각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된다. 1921년 상반기 이들 두 세력은 전한공산당(全韓共産黨)의 지위와 만주, 연해주로부터 흑룡주의 자유시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부대들에 대한 지휘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러시아군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에 집결하고 있던 상해파계열의 사할린 의용대 등 독립군부대에 대한 무장해제를 감행하여 수백 명의 독립군을 살상함으로써, 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참변을 일으켰다. 흑룡주(아무르주)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은 사건이 발생한 아무르주의 자유시(러시아어로 스바보드니)에서 따온 말로, 자유시가 위치한 아무르강(흑하)을 따서 아무르사변, 흑하사변 등으로도 불린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일본군대가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서북간도의 한인마을들을 공격하고 독립군부대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비롯되었다. 1920년 말에서 1921년 봄에 걸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여 러시아 혁명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흑룡주로 이동하였다. 이에 더하여 연해주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던 한인부대들 역시 흑룡주의 자유시로 집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가을 이후 각축하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당권과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상해파는 원동공화국 대통령 크라스노체코프의 지원을 받아 이르쿠츠크파보다 한층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3월 자유시에서 한인빨치산대회를 개최하고 전체 한인부대들을 망라하여 대한의용군사위원회(이후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르쿠츠크파의 후원자인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가 크라스노체코프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사태가 역전되어, 이르쿠츠크파는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함으로써 전체 한인무장세력에 대한 지휘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합동민족군대와 대한국민의회 계열의 자유대대가 연합한 러시아인민혁명군이 1921년 6월 28일 상해파 계열의 사할린의용대, 이만부대, 청룡부대 등 연해주와 흑룡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부대들을 무력진압하게 된 것이다. 이동휘 선생 별세 보도기사,<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선생이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3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운동성향과 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다. 상해파는 한인민족운동의 전통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민족혁명을 제1차적 과제로 한 연속적인 2단계 혁명노선을 취하였으며, 독자적인 한인공산당조직의 건설을 지향하였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한 1단계혁명론의 노선을 채택하였고, 러시아공산당에 가입한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의 지휘와 감독을 당연시하였다. 민족운동 기반이 취약한 이르쿠츠크파는 상해임정과 대립관계에 있던 국민의회세력과 연합하였다. 상해의 고려공산당대회는 박진순, 홍도와 함께 선생을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선정하였다. 1921년 6월 19일 상해를 떠난 선생은 인도양, 수에즈운하, 지중해, 알프스 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 만인 10월 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대표단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자유시참변을 비롯하여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불법적 활동과 전횡을 설명하였다. 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 검사위원회는 상해, 이르쿠츠크 양파의 주장을 검토하고 11월 15일자로 결정서를 발표하였는데, 선생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다. 이 결정서에 따라 이르쿠츠크 군감옥에 갇혀 있던 상해파 당간부들과 자유시참변 당시 체포된 장교와 병사 80여 명이 석방되었다. 1921년 12월 선생은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자격으로 홍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당국자들과 파쟁의 중단과 연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합의하였다. 또한 당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극동노력자대회)에 참여할 조선대표단의 집행위원회 간부들과도 회합을 갖고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 구성안에 합의하였다. 합의된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는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5개 민족그룹인 조선대표단, 고려공산당중앙위원회, 상해의 국민대표회준비회, 상해임시정부, 국민의회의 대표 20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1922.1.21~2.1)에서 슈미야츠키와 김규식과 한명세가 이끌던 조선대표단 집행위원회가 선생의 대리인으로서 모스크바에 남아있던 박진순의 대회참여를 저지하고 숙소인 룩스호텔에서 축출하는 등 상해파를 철저히 배제하고 대회를 자파 위주로 진행하였다. 모스크바로 귀환한 선생은 슈미야츠키와 조선대표단의 파당적 행위에 분노하여 대회의 선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으며, 이르쿠츠크에서의 모든 합의사항을 백지화하였다. 결국 상해와 이르쿠츠크 양파의 연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의 고려공산당연합대회(1922.10.19~10.28)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어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1923.1~6) 역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창조파, 개조파로 분열되었다. 결국 윤해, 원세훈 등 국민의회계열 인사가 중심이 된 창조파가 한형권이 가져온 모스크바자금의 잔금 20만 루블을 활용하여 대회를 주도하였다.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국제공산당의 승인과 자금을 얻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선생은 국제공산당이 고려공산당 해산 후 1923년 초 조직한 꼬르뷰로(Korbureau)내에서 창조파의 국민위원회를 지지한 국민의회파의 한명세와 대립하였다. 차가운 러시아 벌판의 혁명가로 숨을 거두다선생은 1923년 말 한명세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꼬르뷰로 위원을 사퇴하였고, 이어 국제공산당은 1924년 초 꼬르뷰로를 해산하고 고려공산당 창립을 목표로 한 오르그뷰로(Orgbureau)를 조직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선생은 ‘원동해방전쟁’에 참여했던 추종자들이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25년 4월 이르쿠츠크계열의 화요파가 단독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신청하자, 국제공산당은 선생에게 승인여부를 물었다. 선생은 국내에 있던 동지 김철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승인의사를 보냈다. 그리하여 1926년 초 재건된 2차 조선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연합한 것이었다. 1926년 가을 새로운 파벌로 등장한 ML파의 3차 조선공산당에 대항하여 1926년 말 서울‧상해파 연합의 조선공산당(춘경원당)이 성립되자, 선생은 서울·상해파의 대표로서 6차 코민테른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다. 선생은 말년에는 원동변강(遠東邊疆, 연해주지역)의 모플(MOPR ; 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모플의 목적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활동에 있었다. 원동변강 모플위원회는 선생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원동변강 모플 열성자대회에서 훈장을 수여하는 등 여러 차례 표창하였다. 선생은 모플 활동을 위해 스찬 지방을 방문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던 도중, 강한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1935년 1월 31일의 일이었다. 선생은 분명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답습하여 이를 우리나라 혁명에 그대로 적용하고자 했던 이른바 정통공산주의자의 범주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이었다. 동양혁명의 책임자로서 한인공산주의운동에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제공산당의 젊은 볼셰비키들이 선생을 ‘비공산주의적이며 심지어는 반공산주의적 요소’를 지닌 인물로 평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반대파였던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해방을 제1차적인 과제로 설정하였으며, 한말 이래 민족운동의 전통과 경험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주류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젊은 볼셰비키들에게 종속되거나 휘둘리는 것을 거부했다. 선생은 또한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다. 선생은 조국광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했던 부류의 정치가는 더욱 아니었다.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는 선생의 진보적 행동성과,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전봉준[ 全琫準 ] - 조선 후기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였다.
전봉준 동상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 출생-사망
1855 ~ 1895.4.24 - 별칭
초명 명숙, 별명 녹두장군 - 활동분야
농민운동 - 출생지
전북 태인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초명은 명숙(明叔)이며,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말기인 1855년(철종 6)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었고, 은거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에 다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으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하였다. 이어 전주를 향하여 진격하여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 등지까지 장악한 뒤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한데다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하였다.
이후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하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음에 따라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는 일본의 행태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남도접주(南道接主)로서 12만의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 농민군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구국(救國)의 대일본전(對日本戰)을 시작하였다. 항쟁의 규모는 한때 중부·남부 전역을 비롯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남도까지 확대되었으나 근대적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공주(公州)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로써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淳昌)에 은신하여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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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義烈團]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
설립연도 : 1919년 구분 : 무력독립운동 단체 소재지 : 중국 만주 지린성 설립목적 : 항일독립 주요활동 : 일본고관 암살, 관공서 테러
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테러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테러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鐘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수뇌·타이완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적탐(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제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① 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 ②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④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⑤ 상하이 황포탄 의거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효제동 의거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폭탄투척 사건 ⑨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변화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