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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제학의 철학적 기초-- (전철환, 1989, 한살림모임)

경제/경제와 경영, 관리

by 소나무맨 2013. 7. 1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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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경제학의 철학적 기초 (전철환, 1989, 한살림모임)

문서 자료실 | 2012/03/20 15:56 | 모심과살림

새로운 경제학의 철학적 기초

 

전철환 교수

(1989.9.1 제 9회 한살림 공부모임에서의 발표내용 요약 및 토론기록)

일반적으로 교과서를 보면, 인간이 자연에 노동을 가해서 얻은 재화를 교환하고 생산하고 분배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같이 극단적으로 경제란 먹고 사는 것이라고 평범하게 정의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을 경제라고 한다면 먹고 사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경제학이라고 할 것입니다. 경제학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과서에 보면, 생산, 교환, 분배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은 경제학을 희소자원의 합리적인 배분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것이 경제학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입니다. 흔히들 경제학을 설명하기가 어려우니까, 어떤 책에 쓰여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경제학이란 경제학자가 밥 벌어 먹으려고 공부하는 분야라고 우스개 소리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경제학에 대한 정의 가운데서 저는 여러분들께 먹고 사는 것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경제학이라고 감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일반적으로 경제학에 관한 책이 매우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평범하게 쓰여 있었는데 요즈음 들어 그처럼 어렵게 쓰여지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욕구와 재화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현상이 복잡하니까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경제학에도 자연히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좀 역설적으로 말해서 글을 쉽게 쓰면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으니까 그처럼 부러 어렵게 쓰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요즈음 젊은 경제학자들이 쓴 글을 보면 그런 경향이 전혀 없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과서를 보아도 아주 복잡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아주 평범한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경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경제원리

경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설명을 드리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인데 바로 그 점을 생각해야 비로소 경제문제를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동물도 먹고 살고 사람 역시 먹고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만 경제나 물질적인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는 다른 동물들과 전혀 다릅니다. 먹고 사는 것은 모든 동물이나 생물이 똑같습니다만 다른 동물들이 본능대로 사는데 반해서 사람은 생각하면서 산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물속을 헤엄쳐 다니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땅을 기어 다니는데 유독 사람만이 서서 다닌다는 점이 또한 다릅니다.

인간이 사고력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개발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욕구>와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경제원리가 출발하게 됩니다. 만일 사람이 다른 동물들처럼 본능대로 산다면 먹고 사는 것을 비롯해서 사회적 욕구도 생존수준에 머무를 것이고 마침내 인간의 발전은 정지해 버릴 것입니다. 본래 모든 동물은 먹고 사는 것이 자동적으로 조절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가 배가 고프면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지만 배가 부르면 먹이가 지나가도 잡아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고력이 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해 대비할 줄 압니다. 또 많이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욕구가 다른 동물에 비해서 무한하며 바로 이점이 경제원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사고력 때문에 발생하는 또 다른 측면으로 <성욕>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 이외에는 교미를 안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배란기가 아니면 교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란기가 아니더라도 재미로 성욕을 발동할 수 있습니다. 이점 역시 인간의 욕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의 첫 번째 원리는 바로 인간의 욕구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욕구가 없으면 문화나 경제적 성장이 불가능 합니다. 경제적 욕구 없이 단순히 먹고 사는 수준에 머문다면 더 벌거나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을 개선하려는 활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욕구가 없다면 다툼도 안 일어날 것이고 경제학이란 학문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사실 동물들은 자기들의 욕구와 비례해서 먹고사는 문제가 거의 자동적으로 조절이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욕구에 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재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같이 하게 됩니다. 따라서 저는 인간의 욕구야말로 인간의 문화를 창조하는 추동력인 동시에 경제적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각 민족의 사회 경제체제, 문화, 관습, 전통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그때그때의 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서 그 욕구의 수준도 결정된다고 봅니다.

?슬픈 열대?라는 책에 남태평양 유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소개되어 있는데 거기에 나타난 그들의 삶을 보면 대단히 욕구가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고무가 주산물인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을 보면 고무 값이 떨어졌는데도 오히려 재배면적을 늘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무의 값이 떨어졌으니까 소득을 늘리려면 양을 늘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 미국이나 구라파 등 외지의 사람들이 들어가 원주민을 고용해서 기업적으로 고무를 재배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적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약 60,70년대에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경우입니다만,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은 노동자로 고용하기 위해 아파트를 지어 놓았다고 해서 가봤더니 텅텅 비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밀림지대에서 살던 생활관습을 버리지 못한데다 도시 생활에 적응을 못해 모두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이런 형편이니 개발계획을 세워도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하고 개발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욕구는 민족적으로 시대적으로 관습, 전통, 문화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정치성향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국가는 열심히 일을 해도 항상 일정한 양만을 분배함으로서 축적을 제한시키니까 자연히 욕구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만일 열심히 일해도 임금이 안 오르거나 승진이 안 된다면 필시 욕구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한편 욕구가 영향을 받는 정치, 경제, 문화 말고도 이를테면 너무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욕구가 줄어들고 발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볼 때, 경제가 비록 물질적인 측면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기본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경제원리는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경제학이라고 한다면 욕구를 충족하는데 있어서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은 첫째로 생산의 기초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을 생산의 기초라고 봅니다. 그러나 단순히 노동의 양만으로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고전경제학 쪽, 마르크스경제학 쪽, 서구 주류경제학 쪽의 견해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을 안 하고는 생산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이 생산의 기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은 두 번째로 분배의 정당성의 기초가 됩니다. 일해서 생산해내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적당한 몫을 받는 것은 정당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배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그것은 지난 30년 동안 경제가 발전해오면서 경제외적으로 일을 안 하고 잘 먹고 잘 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투기소득입니다. 부동산투기는 생산이 아니며 그것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부정부패를 통해 돈을 버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진 자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반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세 번째 경제원리는 노동의 “효율”을 높이는 것입니다. 노동이란 고통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주지 않으면 노동의 욕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의 효율을 높이는 것은 경제가 발전. 성장하고 분배를 정당하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노동 효율을 높여야 노동투입시간을 줄일 수 있고 편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효율을 높이려면 첫 번째로 자본재가 많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를 많이 해야 하고 저축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저축과 투자의 주체가 같은가 다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저축을 하고 돈이 많은 사람은 투자를 합니다. 즉, 저축의 주체와 투자의 주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도 투자할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손쉽게 대출해주는 금융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축은 노동 효율을 높이는 투자의 원천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려면 국민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고 저축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문화가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동효율을 높일 수 있는 두 번째 계기는 과학기술입니다.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은 고급학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기술부문은 ‘하다보니까 배우는’ (learning by doing) 경우가 많습니다. 하다 보니까 배우는 경우에는 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방법을 깨우치기도 하지만 또 그 일에 재미를 붙여 일을 하는 동안 숙련도나 기술이 발전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기술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넘어가면서 직업의식이 강하게 작동한 대표적 민족이 일본과 서양 사람들입니다.

구라파와 일본에는 아직도 이러한 전통이 살아 있습니다. 영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회보장제도가 잘 실천되어 있고 또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65~75세 사이에 은퇴를 하게 되어 있는데 은퇴를 안 하면 사회보장금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은퇴하는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대부분 자식에게 물려주고 물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농사짓는 것조차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술은 오직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만 향상될 수 있을 뿐, 하다 보니까 배운다는 경우는 매우 약합니다. 또 직업 이동성이 높아서 그 일을 반복함으로써 얻는 기술습득 수준이 낮은 것이 현실입니다. 반면 일본은 평생 고용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매우 강합니다. 노동효율을 높이는 세 번째 계기는 잘 알다시피 자원입니다.

이제까지 경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 경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

어느 나라의 경우이든 경제학자들이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구와 관련된 <성장>입니다. 인간의 욕구가 무한하기 때문에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모두 성장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이 무한한 욕구 때문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고용의 문제가 있습니다. 경제정책에만 극한해서 말씀드린다면,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마다 무엇인가를 해주겠다고 공약을 하는데 그보다는 실질적으로 실업률을 낮출 수 있는 정책을 정당정책으로 내걸어야 합니다.

요한 로빈슨이라는 여자 분이 쓴 어떤 책 서문에 보면 ‘정치나 경제를 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경제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은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렇듯 고용이란 중요한 것이며 고용이 증대되려면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통 성장이 3% 일어나면 고용이 1% 증가합니다(다시 말해서 실업률이 1% 줄어듭니다). 경제가 1% 성장하면 6만 명 정도의 고용이 해결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년 40만 명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므로 최저 7.8%이상 성장을 해야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장이 지나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두 번째 역시 욕구와 관련된 <안정>입니다. 안정은 흔히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됩니다. 하나는 물가이고 또 하나는 경기변동입니다. 물가는 움직여야 됩니다. 물가가 안 움직인다는 것은 인체로 따지면 운동을 했는데 체온이 안 올라가고 맥박이 빨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움직이면 안 됩니다. 물가변동은 대개 어느 나라든지 5%선을 넘어서면 위험하다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과학적 증거라기보다 경험에 의거한 법칙입니다. 물가가 많이 오르면 화폐자산가는 손해를 보고 실물자산가는 이익을 봅니다. 화폐 자산가는 은행에 돈을 저축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계층별로 보면 실물자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업, 자산가입니다. 그리고 화폐자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중입니다. 월급이라는 화폐자산만을 가지고 있는 대중이야말로 물가가 오르면 정말 오도 가도 못하게 됩니다. 물가야 말로 대중 빈곤화의 주범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이 현금 100원을 달라고 하면 안주면서도 물가가 인상되어 그 몇 배 몇 십 배의 손해나는 것은 잘 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람이 영리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멍청한 동물인 것입니다. 물가가 올라가면 결단코 싸워야 되는데 안 싸웁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못 보는 우둔함이 있습니다.

세 번째 역시 욕구와 관련된 <형평>입니다. 즉 분배문제입니다. 형평에 불균형이 일어나면 욕구가 감소합니다.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인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가보면 Latifundium, Minifundium이 있습니다. Latifundium은 대토지 소유농장이고 Minifundium은 소토지 소유농장입니다. 그런데 Latifundium은 전체 인구의 0.5%도 안 되는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일을 해도 축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맙니다. 실제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초기 공산주의혁명 때는 매우 욕구가 강하게 작동합니다. 왜냐면 반부격차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날수록 욕구가 감소합니다. 왜냐하면 일의 성과에 대한 급여의 차이가 얼마 안 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초기사회주의국가에서 2,30년 동안은 경제성장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소련을 보면 1917년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고 1924년 신경제정책이 발표됐는데 그때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평균 15%~18% 정도로 일본의 경제성장속도와 맞먹는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소련의 경제성장속도가 크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돌아오는 해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욕구는 격차가 심해도 감소하고 또 완전히 산술적 평균이 일어나도 감소합니다. 그러고 보면 철학에서는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 왠지 의문이 갑니다. 산술적 분배가 일어난 나라는 대개 사회주의가 오래된 나라들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일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여줍니다. 그러나 경제란 경제적 동기를 부여해야지 부경제적 동기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중국도 마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때부터 70년대까지는 평균 12%로 경제가 성장했으나 1965년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쭉 떨어졌습니다. 대체로 각 나라의 경제를 평가할 때 이 세 가지 기준은 어느 나라든지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몇몇 나라에만 적용이 되는 아래와 같은 기준이 있습니다. 곧, 네 번째로 선진국과의 교섭수준이 독립적인 것인가, 종속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외견상 경제성장을 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따지고 보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 나라 국민의 경제철학이 얼마나 진보적이냐는 것입니다. 형편의 문제만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경제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선진국보다는 못하지만 후진국 중에서는 가장 평등하게 분배가 이루어졌다고들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평등하게 분배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통이 안정된 사회일수록 형평이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안정되게 유지됩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인들은 사장과 말단 사원과의 봉급의 차가 많이 나도 아무 소리도 안합니다. 그러므로 종속이나 사상 등은 사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나마 사람들이 경제사상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가장 많이 채용 하고 있는 원리가 욕구입니다. 즉 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성취동기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구란 결국 인간의 심성이기 때문에 양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집합적인 사조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이 직업관입니다. 생산적인 직업에 대해서 얼마나 긍지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부의 형평을 수용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대체로 이 세 가지가 진보성을 가져야 경제가 발전합니다. 그밖에 경제발전에 간접적이긴 합니다만 그 나라의 정치문화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대개 이런 것이 경제를 보는 시각입니다.

 

3. 우리나라와 관련되는 “경제사상”의 문제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벌이만 되면 자꾸 이동하려는, 그것도 자꾸 ‘최고’로만 가려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최고지향이 정치적으로 군부통치 때문에 제약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강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봅니다. 경제와 관련해서 이러한 반항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교육의 고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류대를 나와야 보장이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자연히 최고지향의 욕구가 낮아집니다. 저는 이것이 반항의 요인이 된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축적의 기초가 정경유착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도 최고지향의 자유로운 경제를 제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축적을 많이 한 자는 부정하다’는 부정의 감각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즉 형평의 요구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의 감각이라면 반대로 기득권을 지닌 계층 즉 재벌기업, 정치집권층은 대중의 축적부정의 감각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발합니다. 즉 축적부정의 감각에 대한 보수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경제사상은 암묵적으로 이 둘이 매우 강하게 충돌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러나 정치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삼십 여 년 동안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설득할 정치적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충돌과정이 최근에 특히 치열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경우에는 1810년경부터 1870년까지 이러한 충돌과정이 지속되다가 마침내 기득권 계층의 축적을 줄이고 대중들의 축적을 늘림으로써 두 사상을 조화한 새로운 진보정치 사상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는 축적의 정당성이나 부정당성에 관한 두 사상의 흐름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도 그것을 받쳐줄 정치력이 없어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이것과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만 최근에 경제가 빨리 성장하면서 과소비성향이 나타났다고들 얘기하고 저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만 일부 계층을 빼고 나면 그다지 과소비성향이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소비를 유발하는 근본요인은 소비수준이 신분의 증표가 되고 있는 경제풍토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사상입니다. 제가 보기에 과소비성은 그렇게 우려할 것이 못된다고 봅니다. 오히려 부정축재에 대한 충돌이 우리 경제에 두드러진 현상이므로 이것을 정치력으로 빨리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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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및 응답

질) 후기 산업사회에 와서 인간의 경제적 성장, 생산력의 증대 같은 것들 즉, 인간의 경제적 진보, 성장, 효율의 증대 이런 경제적인 제 개념들이 결국 인간생존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면 처음에는 생산적인 것으로 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연의 파괴가 생산으로 오인되어온 경향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와 결부해서 경제적인 개념들이 재인식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경제원리상 인간의 욕구의 신장은 항상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성장만을 추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부의 형평이 깨지는 등 부작용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보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환경을 보전하려면 경제적 부의 축적 욕구를 줄여야 합니다. 성장주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성장을 줄이지 않으면, 환경보전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첫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장경제학이란 분야가 따로 있는데 거기서는 필요성장률과 현실성장률을 구별합니다. 필요성장률은 고용을 흡수할 정도만 성장하자는 것입니다. 환경 보전은 필수적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첫 번째로 성장을 제약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성장을 전혀 안할 수는 없으므로 고용흡수 수준에서 조화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미국 같은 선진국은 연 4% 정도만 경제가 성장해도 고용이 해결되지만 후진국의 경우는 그 나라의 고용을 흡수하려면 더 높은 경제성장들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환경보전의 책임이 공업화된 선진국에게 있으므로 선진국은 경제성장률을 낮춰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근본적으로 환경보전의 문제는 선진국이 성장률을 조절하면서 환경보전에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국내적으로 축적욕구를 줄이는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환경을 보전하자는 쪽과 환경을 고쳐가면서 성장해야한다는 쪽의 두 상반된 바퀴가 굴러가면서 가장 어려운 지경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환경문제 역시 인간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질) 환경문제가 성장욕구와도 관련이 있지만 과학기술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지만 악화도 시킵니다. 결국은 환경보전의 문제는 성장욕구, 과학기술발달, 정치 등과 관련이 있는데 근본적으로 저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가치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의미에서 통치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그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떠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하나 느낀 것은 체제가 발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정치체제도 관련이 있지만 정치문화가 더욱 밀접하게 관련이 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정치가 인간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면 자연히 그에 따라 성장이 일어나고 환경을 보전하려는 의욕도 생기게 되는데 정치가 이것을 제약하고 독재 이데올로기를 계속 강요한다면 인간의 성취동기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 자본주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주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상을 실현하는 일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소그룹 단위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 대단히 이기적인 동물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이기적인 면이 통합되어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새로운 이상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면서 집단을 키워 나가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강점은 공유입니다. 반면에 자본주의라 해도 영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경우에 토지는 공유입니다. 영국의 경우, 공유라는 말을 쓰진 않지만 실질적인 소유형태는 공유입니다. 구체적 예로 영국의 토지와 건물은 부동산회사가 가지고 있으며 부동산회사는 영국 전체에 2600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그룹 단위의 공유형태입니다. 부동산 회사는 개인 소유가 아니며 거의 전부 지방자치단체가 출자한 회사들입니다. 부동산회사가 영국전체의 토지와 건물은 매수할 뿐만 아니라 특정지역을 개발해서 임대까지 해주니까 사는데 전혀 불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토지 소유방식은 실질적으로 공유나 마찬가지입니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긴 합니다만 토지와 건물이 100% 국유입니다. 개인에게는 99년 동안의 조차권만이 부여됩니다. 이 두개의 경우를 보면 체제는 사회주의와 다르지만 소유의 내용은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사회주의는 국영경제이며 영국이나 싱가포르는 시장경제라는 점입니다. 즉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와 건물만 공유이며 나머지는 사적소유가 인정되는 시장경제입니다. 그런데 성장속도를 보면 기묘하게 영국과 소련이 비슷합니다. 영국은 200년 전에 자본주의화하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제1차 세계대전 때 까지만 해도 선진국이었으나 지금은 성장률이 낮아져 1인당 국민소득이 만불도 안 됩니다. 소련이 거의 8000불 정도 되니까 거의 엇비슷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나라가 정체화 내지는 성장률 둔화현상을 격고 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통치제도 때문이고 또 하나는 고성장의 욕구감소 때문입니다. 도무지 사람들이 고된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적, 주관적 평가문제로서 유물사관의 입장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심리적 요인이 유물사관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유물사관이라고 해서 심리적 요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저는 결국은 인간의 일에 대한 욕구는 나라의 전통문화, 통치수준, 성장수준에 따라서 정체되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은 가설이지만 현장을 둘러본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입니다.

 

질) 혼합경제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일반적으로 계획경제는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채용하고 있는 경제방식이고, 혼합경제는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국가가 직접 경제계획을 하는 나라의 경제방식을 말합니다. 혼합경제는 다른 말로 수렴가설이라고 합니다. 수렴가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혼합하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혼합해서 두 개가 서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는 케인즈경제학이 고전경제학체계를 발전시키면서 고전적 자유주의가 정부의 간섭주의와 결합하는 것을 혼합경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양쪽 체제에 다 장・단점이 있으므로 양자의 장점을 수렴하는 혼합경제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 있는 것이 바로 토지 공유화 문제입니다. 토지공개념이란 전통적인 자본주의체제와 달리 사회주의 경제방식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흔히 토지공개념하면 극단적인 좌경으로 몰아세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느 체제나 장단점은 다 있기 마련이므로 따라서 그런 식으로는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 그렇다면 그것과 관련해서 통일의 문제를 얘기할 때 저쪽과 이쪽이 가까워지는 길은 어떤 경제개념으로 접근할 때입니까?

답) 만약 전쟁을 통해서 어느 한 나라가 어느 한 나라를 점령한다면 두 나라는 모두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접근하려면 양쪽이 혼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쪽은 중국식의 점진적 시장기능의 활성화, 사기업의 부분적 인정, 이쪽은 토지의 공개념 도입 등이 장기적으로 경제체제의 통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2/03/20 15:56 2012/03/2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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