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지역주의의 역사적 맥락

2013. 7. 12. 17:18시민, 그리고 마을/지방 시대, 지방 자치, 주민자치

 

 

 

             한국에서 지역주의의 역사적 맥락

 

고영진

 

 

 

1. 머리말

 

요즘 한창 인기있는 TV사극 중에 ‘태조 왕건’이 있다.  이 대하드라마는 첫 회부터 장대한 스펙터클을 연출하며 후삼국시대의 세 영웅인 왕건과 궁예․견훤의 이야기를 박진감있게 그려내고 있어 시청자들에게, ‘용의 눈물’과 ‘왕과 비’ 등 조선시대 사극과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이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수십 억 원을 들여 문경새재와 제천 청풍호반에 세운 오픈세트장은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출판계에서는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앞으로 게임과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질 예정이어서 그 인기를 실감하게 한다.

이제 드라마는 상주호족의 아들로 신라의 변방 비장이었던 견훤이 900년(효공왕 4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옛 백제를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백제’로 선포한데 이어, 이듬해인 901년 신라 왕족 출신 승려였던 궁예가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옛 고구려를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로 선포하고1) 서로 각축을 벌이는 데까지 나아갔다.  바야흐로 쓰러져 가는 천년 왕국 신라를 앞에 두고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자웅을 가리는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이때 궁예와 견훤은 각각 왕을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했기 때문에 평양 옛 도읍은 묵어서 풀만 무성하게 되었다.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2)

 


내가 삼국의 시작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가 일어났으므로 진한과 변한이 따라서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에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은 군사를 다시 정비하여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어찌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씻어내지 않겠는가.3)

 


두 사람이 자신의 출신지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큰 연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 가서 짧은 기간 안에 국가까지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 곳 호족들과 일반민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정서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딛고 있는 땅이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이며 자신들은 그 고구려와 백제의 후손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그렇다면 옛 고구려와 백제지역 주민들이 가졌던 의식, 궁예와 견훤을 한 국가의 왕으로까지 만들어준 이들의 행동을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지역주의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옛 고구려와 백제의 부활을 외치며 창과 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이들의 행동을, 선거 때만 되면 특정 정당에 몰표를 던지는 오늘날 우리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2. ‘전체’의 형성

 

지역주의는 ‘전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성립하는 것이다.  그 ‘전체’ 속에는 지리적인 측면과 의식적인 측면이 모두 포함된다.  이 ‘지리적 전체’와 ‘의식적 전체’가 없으면, 지역은 존재할 지 모르지만 ‘지역주의’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한국의 지역주의를 다룰 때는 지리적 전체와 의식적 전체, 그리고 그 전체 속의 지역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령 그것이 현재의 지역주의와 직접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압록강 연안의 국내성, 한강 유역의 위례성, 경주 분지의 서라벌에서 각각 성읍국가로 출발해 연맹왕국을 거쳐 고대국가로 성장한 삼국은 처음에는 중심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았지만 점차 영토가 확대되어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삼국은 4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멸망하는 7세기까지 300년간에 걸쳐 사활을 건 정복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 사이에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고 고구려에게 위례성을 함락당한 백제는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이어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겼다. 

 

마치 한 변이 다른 두 변의 합보다 클 수 없는 삼각형의 세 변처럼 삼국은 한 나라가 강해지면 다른 두 나라가 손을 잡는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단번에 승부를 내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삼국은 서로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백제가 고구려를 ‘이리’와 ‘승냥이’로 표현하고 신라가 백제를 ‘뱀’과 ‘돼지’로 비유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삼국에게 서로는 오로지 멸망시켜야할 적국이었다.  그리고 결국 신라는 외세인 당을 끌어 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런 신라의 행동을 한말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반민족적’인 것으로 비난하고, 나아가 조선 전기의 사관들은 삼국의 치열한 각축 자체를 동족간의 상쟁으로 탓하였다.  혹자는 오늘날의 지역주의의 기원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조명래, 1994).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삼국은 성읍국가로 시작하여 끊임없는 정복과 병합을 거듭하며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별개의 국가였지 한 국가가 셋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주몽설화, 백제의 온조설화, 신라의 혁거세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은 독자적인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시조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숭배하며 국가의식을 고취시켜 갔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같은 종족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삼국간의 대립과 전쟁을 동족간의 상쟁으로, 당의 힘을 빌어 통일한 신라의 행동을 반민족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 할 수 있다.  지역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리적 전체와 의식적 전체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는데 지역의식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다시 당과 10년에 가까운 전쟁을 벌여 승리한 신라가 차지한 지역은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 이남의 땅에 불과했다.   더욱이 만주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를 세워 옛 고구려 땅을 거의 회복하였다.  이제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정립하던 상태에서 신라와 발해 두 나라가 정립하던 상태로 바뀐 것이다.  그만큼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한 통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통일은 한국사에서 지리적 전체와 의식적 전체가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비록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을 일부 편입하는 것에 그쳤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와 주민을 병합하였다.  반면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의 일부를(실제로는 대부분) 계승한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하고 그 이후 만주에는 더 이상 한민족의 국가가 세워지지 못했다.  그 결과 신라가 차지한 영토와 주민이 이후 고려․조선의 영토와 주민의 근간이 되었다.  불완전하나마 지리적 전체의 경계가 처음으로 그어진 것이다. 

 

또한 의식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는 종족적으로 중국․일본과는 구분되는 동질성이 있고 언어적으로 의사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유사성이 있었으나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삼국민들은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영역 변동과 상호 교류를 통해 동질화가 진전되고 특히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삼국민들 사이에는 점차 동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이 바로 그것이다. 

 

삼한일통의식은 삼국을 동일한 한의 세 집단으로 인식하고 그 삼한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삼국을 중국이나 일본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문화적․종족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국가로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삼국민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인들도 삼국을 ‘해동삼국’이라 부르고 삼국인을 ‘삼한인’으로 표현하며 삼국을 흉노나 일본과는 다른, 동일한 종족으로 인식하였다(노태돈, 1998: 73~90).

 

신라는 삼국통일을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 강조하며 옛 고구려와 옛 백제인을 중앙집권체제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펴나갔다.  즉 전국을 천하를 뜻하는 9주로 나누어 옛 신라와 고구려․백제 땅에 3주씩 설치했으며 충주․원주․김해․청주․남원 등 지방 요지에 5소경을 설치하였다.  충주․원주는 옛 고구려 땅에, 청주․남원은 옛 백제 땅에 있으므로 왕경(王京)인 경주까지 합한다면 역시 옛 신라와 고구려․백제 땅에 2개씩 설치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앙군인 9서당은 신라인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인과 백제인, 심지어는 말갈인까지 포함하여 편성하였다(변태섭, 1989).

 

그러나 신라는 한편으로는 엄격한 차별정책을 행하였다.  전국적인 사전(祀典)체제를 새로 확립하면서 가장 중요한 대사(大祀)는 신라 경주 주변으로 국한하고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는 중사(中祀)와 소사(小祀)만을 설정하였다.  또한 옛 고구려인에게는 7관등인 일길찬까지, 옛 백제인에게는 10관등인 대내마까지만 관등을 수여하였다.  6두품이 6관등인 아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니 이들은 신라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4)

 

이 때문에 지역주의의 기원을 신라 통일기부터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아가 신라의 차별정책 자체를 지역패권주의로 규정하고 특히 신라가 옛 고구려인보다는 백제인을 더 차별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오늘날 영․호남의 대립․갈등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남영신, 1992: 65~138).  그러나 신라의 차별정책을 오늘날의 지역주의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신라는 통일 이전에도 왕경인과 지방민들을 구별하고 차별하였다.  애당초 정복국가에서 출발했기에 왕경 이외의 지역은 정복지․복속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왕실과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한 골품제도 이를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다.  비록 통일전쟁 과정에서 지방민을 자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으나 왕경인과의 차별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골품제가 존속하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하일식, 1998).

 

신라의 통일은 이러한 골품제에 기반한 차별 구조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피정복민이라 할 수 있는 옛 고구려인과 백제인은 왕경(왕경인)-옛 신라 땅(지방인)-옛 고구려․백제 땅(옛 고구려․백제인)으로 이루어진 차별구조의 제일 말단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리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매우 불안한 편입이었다.

 

삼한일통의식에서의 삼한은 동질성을 지니지만 뿌리는 각각인 세 집단을 의미한다.  때문에 항상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더욱이 신라의 사회통합력이 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실제로 옛 고구려․백제인에게 삼한일통의식은 피동적인 귀속의식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신을 신라인보다는 고구려․백제인의 후손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도 신라의 땅이라기보다는 옛 고구려와 백제 땅으로 더 생각했다(최근영, 1988).5)

 

이러한 고구려․백제 유민의식은 궁예와 견훤의 등장을 계기로 폭발하여 후고구려와 후백제 건국의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의 차별정책과 마찬가지로 지역주의로 보기 어렵다.  그들의 의식 속에 아직 완전한 전체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들을 그 불완전한 전체 속의 일부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지역의식이나 행동과는 달랐던 것이다.6)

 

외세를 이용해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는 달리 독자의 힘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펴 국경을 청천강과 함흥을 잇는 선까지 넓혔다.  또한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유민들이 망명해 오자 동족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옛 고구려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남․북국을 통일한 것이 되었다.  이로 인해 지리적 전체의 경계가 한 단계 넓혀지고 의식적 전체의 형성에도 한 걸음 다가갔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 통일에 공이 있었던 인물들에게 ‘삼한공신’의 호를 주었다.  이때 삼한은 이전처럼 삼국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삼한은 삼국이 합쳐 이루어진 아방(我邦), 즉 고려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도 고려를 삼한, 고려인을 삼한인이라 부르기도 했다(노태돈, 1998: 96~100).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국계승의식과 유민의식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는 고려를 건국한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 국호를 그대로 썼듯이 고려도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국호를 그대로 썼다.  그들 스스로가 옛 고구려 땅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고구려계승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옛 백제 땅에서는 신라 통일 이후 사라졌던 백제 양식의 석탑들이 고려가 건국된 이후 400년간 다시 조성되는데 이는 석탑 건립세력들이 자신을 백제인의 후손, 백제문화의 계승자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노중국, 1988).

 

고려는 과거제․노비안검법 등 중앙집권정책을 취해 나가면서 신라처럼 구조적으로 신분․지역에 따른 차별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훈요십조를 지역차별의 대표적인 예로 들기도 하지만 제도화된 것도 아니었고 실제 제대로 적용되지도 않았다.7)  그럼에도 삼국계승의식은 현실적으로 차별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고려 전기 집권세력의 분포를 보면 옛 후고구려 땅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고급관료를 배출한 토성(土姓) 수도 옛 후고구려 땅이 62%, 옛 후백제 땅이 20%, 옛 신라 땅이 18%를 차지하고 있다(이수건, 1984: 220~233).

 

삼국계승의식은 집권세력 내부에서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묘청의 난은 집권세력 안에서 고구려계승의식을 견지한 서경 출신과 신라계승의식에 경도한 개경․경주 출신의 대립이 무력대결로 표출된 것이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를 추진하고 그 일이 제대로 되지 않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경주세력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묘청의 난은 지역간의 대립 양상을 띠었지만 그 대립이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본관제(本貫制)를 통해 지방사회를 지배하였다.  즉 지방민들에게 본관을 부여하고 그들이 본관지역을 벗어날 수 없도록 했으며 유력세력에게는 토성(土姓)과 직역을 주어 지방지배의 실무를 맡겼다.  또한 본관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신분상승이나 공적인 이유일 때만 가능하게 했다.  조선처럼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지방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데서 나온 국가와 지방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던 것이다(채웅석, 2000).

 

그런데 지방세력가가 과거제 등을 통해 일단 중앙관료, 문벌귀족화되면 자신의 본관지에 복귀하지 않고 개경지역에 자리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결과 고려의 문벌귀족은 지방에 지역적 기반이 거의 없었으며 이는 묘청․김부식세력도 마찬가지였다.8)  그러므로 묘청의 난에서 보이는 지역 대립이 오늘날의 지역 대립과 같을 수가 없다.

 

고려 건국 이후 잠복해 있던 삼국유민의식이 집단적으로 표출된 것은 무인집권기 농민항쟁과정에서였다.  무인집권으로 문벌귀족 중심의 지배질서가 무너지고 관리와 귀족들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했는데 그 속에서 삼국의 부흥을 내세웠던 것이다.  옛 신라 땅에서는 1202년(신종 5)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 2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1217년(고종 4) 군졸인 최광수가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초반에 실패하였다.  옛 백제 땅에서는 1237년(고종 24) 이언년 형제가 담양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역시 진압당하였다(민현구, 1989).

 

삼국계승의식과 유민의식은 몽고와 40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농민들로서도 고려 정부에 대한 저항도 중요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뒤 몽고의 부마국으로의 전락은 고려인들에게 자국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역사의 뿌리로서 고조선과 단군이 부각되었다.  의식적 전체로서의 단일민족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고려인들의 역사의식을 반영한 것이 『삼국유사』와『제왕운기』이다.  책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은『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고조선으로 설정하고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서술하였다. 『제왕운기』는 단군의 혈통이 삼한을 거쳐 삼국으로 이어진다고 하며 혈통의 단일성을 강조하였다.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임을 천명한 것이다(조동걸․한영우․박찬승, 1994: 45~56).  이런 동일역사체의식 속에 삼국계승의식과 유민의식은 융해되어 들어가고 삼국부흥운동은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3. 지역정체성의 형성

 

지역주의는 ‘전체’가 있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지역주의는 또 ‘지역’이 있어야 성립한다.  지역주의의 전제가 되는 ‘전체’가 단순한 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그 ‘지역’도 단순한 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지역주의의 전제가 되는 ‘지역’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지역’의 정체성이 우리 역사에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혈통의 뿌리로서의 단군조선과 문화의 뿌리로서의 기자조선을 계승한 ‘조선’이라는 국호에서 다시 한번 의식적 전체를 확인시켜준 조선은 영토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에 4군과 6진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오늘날과 같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지리적 전체의 경계가 확정됨으로써 이제 ‘전체’가 완전히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체 속의 ‘지역’은 아직 형성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역의 가장 기초 단위는 마을(촌락)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본이 되는 것은 시․군(조선시대는 군․현)이다.  오늘날 지역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학연․지연에서 가장 중요한 단위도 시․군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주의의 지리적 경계는 도보다도 더 크다.  굳이 비교하자면 조선시대의 도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경기․강원․충청․경상․전라 등.  그렇지만 오늘날도 그렇듯이 도와 군현은 동전의 양면이다.  도는 군․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주현과 속현, 향․소․부곡 등 다양하고 차별적으로 이루어진 고려의 지방사회를 군현으로 일률적으로 정리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9)  그리고 그 수령으로 하여금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하고 수령 7사(守令七事)를 수행하도록 했다.10)  또한 5도 양계로 이루어진 고려의 이원적인 도체제를 일원적인 8도 체제로 개편하고 관찰사를 파견하여 수령들을 감독케 하였다.

 

이 같은 지방제도의 개편은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군현이 행정과 생활의 중심지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말부터 나타나는 군현 공관의 건립에 관한 기문(記文)과 선생안(先生案)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기문들은 대개 군현의 내력과 자랑을 이야기하면서 공사의 주체인 수령을 칭찬하는 내용이었으며, 나주의 『금성일기』, 안동의 『안동선생안』, 경주의 『도선생안』등 선생안은 관아에서 지방관이나 향리를 역임한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다.  이는 군현을 자체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민현구, 1989).

 

이러한 지역사회 변화의 주체는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었다.  이들은 고려말 주로 향리의 후예로 첨설직(添設職)과 군공(軍功) 등을 통해 품관이 되었거나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해 신흥사대부로 활약하다 낙향한 자들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재지 중소지주였다(이태진, 1986: 126~185).  따라서 한번 중앙 관료가 되면 개성지역에 자리잡고 자신의 본관지로 돌아가지 않았던 고려 문벌귀족이나, 전국에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근거지는 주로 경기지역이었던 공신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과는 달리 재지사족들은 자신의 고장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러나 재지사족들이 지역사회에 확고하게 자리잡는 것은 16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농서(農書)의 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중국의 선진농법을 받아들여 산간과 해안지역에 농지를 개발하고 천방(川防)․보(洑) 등 관개시설을 만들고 그 곳에 농장을 개설․운영하며 새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군현의 읍치뿐만 아니라 향촌지역이 획기적으로 개발되어 가고, 군현의 중심지역이 읍치에서 향촌지역으로 이동하였다(이수건, 1995: 44~82).

 

이러한 재지사족이 성리학의 소양을 강하게 지니면서 하나의 세력을 이룬 것이 사림이다.  이들은 15세기 말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훈척세력의 비리와 불법을 비판하고 동시에 유향소복립운동, 향약보급운동, 서원건립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4차례에 걸친 사화에도 불구하고 학파를 형성하여 세력을 결집해 나가다 선조대에 이르러 정권을 장악하여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한편 사림은 지역사회에서 사족의 명단인 향안(鄕案)을 만들고  향안조직의 규약인 향규(鄕規)를 작성하고 향원들로 구성된 향회(鄕會)에서 향촌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임원인 좌수․별감을 임명하여 향권을 장악했으며, 서원과 누정을 건립하여 학문을 교류하고 향약과 향음주례․향사례 등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사족지배체제’가 성립하는데 이는 사족들이 관권과의 일정한 타협 위에서 군현 단위 및 촌락사회에서 그들의 향권을 관철시킬 수 있는 지배기구를 장악하고 향리와 일반민을 통제하는 향촌지배구조였다(김인걸, 1991).

 

이렇듯 지역사회가 성장하고 지역문화가 형성되면서 그에 대한 사림의 영향력이 커져 갈수록 군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도 비례해서 증대됐는데 그 결과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과 읍지(邑誌)의 편찬이었다.  이미 15세기에도 『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의 「지리지」등이 편찬되었는데 모두 관찬으로 경제․군사․행정적 측면이 강한 지리지였다.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비록 관찬이나 사림이 참여한 최초의 종합적인 인문지리지로 문화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국토를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 아닌 역사와 문화의 결집체로 인식하고 있다(조동걸․한영우․박찬승, 1994: 165~170).

 

『신증동국여지승람』이후 국가 주도의 관찬 지리지는 사라지고 대신 16세기 후반부터 군현 단위 지리지인 읍지들이 재지사족과 사림 출신 수령을 중심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부터 편찬된 선생안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읍지들은 정구의 『창산지』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편찬되었는데 군현 통치에 참고할 자료를 얻기 위한 수령의 의도와 자기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겠다는 재지사족의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또한 서술 항목도 이전 지리지보다 대폭 늘어났는데 이는 편찬자의 개성과 편찬 목적이 읍지에 반영됨으로써 수록 내용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졌기 때문이다(이수건, 1989: 11~35).

이제 군현은 지역인식의 기본 단위가 되었으며 단순한 행정 지역에서 나아가 경제․사회․문화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생활권으로 인식되었다(양보경, 1987).  군현의 지역정체성이 확립된 것이다.11)  그리고 이러한 지역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군현에 대한 긍지와 애정으로 이어져 수많은 글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우리 안동부의 산천의 뛰어남, 인물의 훌륭함, 토산의 풍부함, 풍속의 아름다움 및 기괴한 자취가 승람(勝覽: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백 가운데 하나 둘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는 옛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사라져 침몰한 것이 몇 천만이 되는지 알 수 없다12)

 


성조 강정대왕조에 이르러 선정 제현들이 성의를 받들어 고금의 예제를 취하여 일대의 예전을 만들어 위에서 행하고 아래에서 본받아 교화가 날로 새로워지고 예악과 문물이 빛나 성주(成周)도 더할 것이 없었다.  또한 이황이 성리학을 창도하고 한강(寒岡: 정구)․동강(東岡: 김우옹) 양 선생이 뒤에서 계승하여 집집마다 가례의 학이 있고 사람마다 예의의 방법을 알아 옛 정자와 주자의 학문도 높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물며 나의 고향은 김종직의 고향이며 나의 마을은 변계량의 마을로 효제의 유속과 선조를 봉양하는 유풍이 없어지지 않았다.13)

 


바로 윗 글은 밀양의 재지사족인 안공이 『가례부췌』라는 예서를 저술하면서 쓴 서문의 내용이다.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군현의 정체성은 도에 대한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지역주의의 지리적 경계는 조선시대의 도와 거의 같다.  조선의 8도는 고려의 5도 양계를 개편한 것이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고려의 양광도가 둘로 나뉘어져 조선의 경기, 충청도로 되고 고려의 교주도와 동계가 합쳐져 강원도가 되고 함경도가 새로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지리적 경계에는 크게 변화가 없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는 명칭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지역주의의 지리적 경계는 고려 중기 12세기부터 형성된 지리적 경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의 도는 행정기구도 갖추지 못하는 등 지방행정단위로서의 기능도 제대로 못해 조선의 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말하자면 도로서의 지리적 개념조차도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역주의의 지리적 경계는 조선에 들어와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조선에서 도의 지역정체성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8도 체제가 완전히 체제를 잡은 것은 조선이 건국하고도 70여 년이 지난 세조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행정적인 것 이상은 아니었다.  도를 하나의 역사․문화적 단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도의 별칭이다. 

 

조선시대에 경기도는 기전(畿甸), 강원도는 관동․영동, 충청도는 호서, 전라도는 호남, 경상도는 영남, 평안도는 관서, 황해도는 해서, 함경도는 관북을 별칭으로 불렀다.  이 별칭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주의의 ‘지역’ 명칭으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도의 별칭들은 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대체로 15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다 16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14)  그리고 이 별칭들은 처음에는 행정 단위로서의 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 역사․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15)

 

하나의 역사․문화적 단위로서의 도가 형성되는데는 성리학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묘․을사사화 등 훈척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지역적으로도 크게 확산되었다.  또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견해의 차이도 나타났는데 이러한 학설의 차이, 지역적 차이를 바탕으로 16세기 중반부터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학파들은 각각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지역적 단위가 점점 도에 가까워졌다.  즉 서경덕학파는 경기와 전라우도, 이황학파는 경상좌도, 조식학파는 경상우도, 이이학파는 경기와 호서․전라좌도, 성혼학파는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17세기 중반 이후 사상계가 이이학파와 이황학파, 근기남인학파로 재편되면서 이이학파는 호서, 이황학파는 영남, 근기남인학파는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영진, 1999: 145~156).

 

또한 16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이들이 중앙정계를 주도했기 때문에 각 정파는 학파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측면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정파의 지역적 기반 역시 학파의 기반과  일치했고 그 지역적 단위 역시 학파처럼 도 단위였다.  주로 이이와 성혼학파로 이루어진 서인은 경기․호서와 전라좌도, 이황학파로 이루어진 남인은 경상좌도, 서경덕과 조식학파로 이루어진 북인은 경기․전라우도와 경상우도가 주로 정치적 기반이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북인 가운데 서경덕학파가 근기남인학파로, 조식학파가 이황학파로 흡수되면서 서인은 호서, 영남남인은 영남, 근기남인은 경기지역을 주로 정치적 기반으로 하였다.

 

이렇듯 조선 중기가16) 되면 도는 학파를 형성하고 학문을 교류하는 지리적 경계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지역적 기반의 경계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현과 마찬가지로 도를 단순한 행정적 단위를 넘어서 하나의 역사․문화적 단위로 생각하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즉 도의 지역정체성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 향촌에서의 사족의 성장, 중앙에서 붕당정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며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  이는 다음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경석이 또 아뢰기를, 국가는 인재를 중하게 여깁니다.  영남에는 본래 유현(儒賢)의 교화가 있었고 호남에도 절의의 기풍이 많았으며 서북 양도는 모두 무사의 본고장입니다.  인재에 따라 등용한다면 그것이 곧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입니다.17)

 

 

 

4. 지역주의의 대립

 

지금까지 지역주의의 전제가 되는 ‘전체’와 ‘지역’이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를 보면 지역주의의 ‘지리적 전체’는 신라 통일로 첫 경계가 그어진 뒤 고려를 거쳐 조선이 건국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이루면서 완성되었다.  ‘의식적 전체’ 역시 신라 통일이 계기가 되어 고려 건국으로 한 단계 다가간 뒤 고려 후기 몽고와의 항쟁과정을 겪으면서 단일민족의식으로 형성되었다.  한편 ‘지역’의 지리적 경계는 조선 건국 이후 8도 체제 성립으로 확정되었으며 지역정체성은 조선 중기 사족의 성장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형성되었다.

 

따라서 지역주의를 ‘전체’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지역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안으로는 자신의 지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며 밖으로는 지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지역주의는 이미 조선 중기, 즉 16세기 중반 이후 17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지역주의의 정의를 따른다면 지역주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지역주의는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지역주의의 전제가 되는 ‘전체’와 ‘지역’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체’를 지배하는 권력이 한쪽으로 집중될수록, 자의적으로 행사될수록 그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의의 대립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에도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과정이 정치권력의 분산과정이었다면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과정은 권력의 집중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16세기 중반 각 지방에 경제적․학문적 기반을 둔 사림이 중앙정계를 장악함으로써 권력도 지역적 분산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림은 여러 붕당이 공존하면서 상호 견제와 비판을 하는 붕당정치를 행해 나감으로써 지역주의는 존재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18)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이이학파의 서인이 점차 권력을 장악해 나감으로써 당시 서인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호서와 경기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점차 정치권력에서 배제되어 나갔다.  특히 호남은 정여립사건으로 중앙 진출이 어렵게 되고 주요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임진왜란 중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사망하는 바람에 17세기 중반부터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으며, 영남은 인조 후반부터 서서히 세력이 약화되다가 갑술환국(1694년)으로 실각하면서 거의 배제되었다.  아래의 글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국가에서 원근을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조종조의 재상․명인들이 대부분 초야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선조대의 경우 조정에 등용된 자의 반수가 호남과 영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외방 출신의 조정 관료는 열 명 가운데 겨우 2․3인에 불과합니다.  인재의 성쇠라는 것이 안팎으로 순환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이토록 엄청나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무려 수백 명에 이르는 외방의 문사들이 늙도록 경학을 궁구하기도 하고 문필에 종사하기도 하는데 온갖 어려움을 뚫고 다행히 과거에 합격해도 뜻을 펴보지 못하고 버림받은 채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고관대작의 자제들과 한번 우열을 비교할 수도 없게 된다면 이 어찌 현인이면 누구든 임용한다는 도리에 부합된다 하겠습니까.19)

 


18세기 들어와 조선사회는 큰 변동을 겪었다.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힘입어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했으며 양반신분제가 동요하였다.  그 속에서 도시가 발달했는데 특히 서울이 상업도시로 크게 성장하였다.  서울이 정치․행정 중심지 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다(고동환, 1998).  한편 향촌사회는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해 사족들의 힘이 약화된 반면 수령의 힘이 강해져 사족지배체제에서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수령-이․향(吏鄕)체제로 변화해 갔다.  조선 후기 사회변화의 대표적인 특징이 경(京)․향(鄕) 분기가 이루어진 것이다(유봉학, 1995: 24~35). 이는 서울이 하나의 ‘지역’으로서의 정체성, 즉 지역정체성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20)

 

그리고 이러한 경․향 분기를 바탕으로 서울(실제로는 근교 포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경화벌열(京華閥閱)이 형성되었다.  당색은 주로 노론이었으며 여기에 근기남인과 소론이 일부 참여했는데 이들이 중앙 관직을 독점하였다.  학계도 노론계 학인들이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을 거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낙론(洛論)과 호서를 중심으로 한 호론(湖論)으로 나눠지면서 낙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여기에 서울에 자리잡은 일부 근기남인과 소론계 학인들이 참여하여 경화학계를 이루었다(김문식, 1996: 1~26).

 

이러한 상황에서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시행하여 경화벌열을 견제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국왕 역시 혼자 정치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와 밀착된 소수 인물과 그 출신 가문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으며 그들 역시 경화벌열과 다름이 없었다.  그 결과 서울을 제외한 지역은 정치권력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배제되었다(차장섭, 1997).  당시 실록에서는 이를 지적하는 글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조판서 정휘량과 참판 남태제를 불러 하교하기를, 비와 이슬은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린다.  임금은 하늘의 도를 본받아 정사를 하는데 어찌 경화문벌만을 관직에 등용하겠는가.  이제부터는 재주가 있으면 등용할 것이니 먼 지방인이라 하여 구애받지 말라고 하였다.  남태제가, 신 등이 만약 경화자제를 먼저 등용하지 않으면 온 세상이 놀랄 것이니 어떻게 이 자리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아뢰고, 정휘량이, 향인(鄕人)이 관직에 있을 경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뿐더러 경화자제에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아뢰니, 임금이 따로 관안(官案)을 작성해 먼 지방인으로 침체된 자를 기록해 들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21)

 


권력의 집중화는 19세기에 들어오면 더욱 가속화하여 이제는 노론계 경화벌열 가운데서도 소수의 외척가문이 정치권력을 완전히 독점하였다.  이 세도가문들은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별시(別試)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중요한 정치적 직책을 독점하고 비변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한국역사연구회, 1990: 747~761).  이에 따라 정치권력의 지역적 기반이 더욱 좁아지고 지역차별로 인한 지역주의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 후기 지역주의의 대립 양상이 서울과 그 이외의 지역으로 지리적 경계를 이루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역간의 대립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종적(수직적)인 대립으로 보기도 하지만(이병휴, 1991) 이는 문제가 없지 않다.  오히려 ‘지역’으로서의 서울과 지방의 여러 ‘지역’의 횡적(수평적)인 대립, 즉 한 ‘지역’과 여러 ‘지역’의 복합적인 대립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영남에서 노론의 김상헌서원 건립 시도를 무산시키고, 정조대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리는 것은 서울․영남간의 지역주의, 1811-12년 평안도 농민전쟁은 서울․서북간 지역주의 대립의 한 예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상대 지역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와 삼국계승의식이나 유민의식은 사라졌지만 지역정체성이 형성되면서 자신의 지역을 삼국과 연결시켜 보려는 생각은 있었다. 영남이 신라를, 호남이 백제를, 서북이 고구려를  역사․문화적으로 계승한 곳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신라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인식이 많았으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 영남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호남과 서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송정현, 1971).22)

 

이러한 시각은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역적 확산이 이루어지고 양란 때 사림의병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변화하였다. 즉 영남은 학문이 뛰어나고 인심이 순후하며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계속된 반면, 호남은 인심이 사납고 가볍다는 부정적인 인식과 함께 충성과 절의로 가득 차고 제일 부유하다는 긍정적인 인식이 더해졌다.23) 호서도 인심이 영악하고 불순하다는 부정적인 인식과 함께 사대부의 본거지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더해지고24) 서북은 무사의 본고장이란 점이 긍적적으로 강조되었다.25) 

 

그러나 18세기 들어와 서울과 그 외 지역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서울 이외의 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점점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지역과는 달리 그때까지 계속 긍정적으로 평가받던 영남도 풍속이 타락하고 게으름에 빠져 학문에 힘쓰지 않고 서로 비방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더해지고26) 심지어 견문이 좁다는 뜻의 ‘요동돼지’ 취급을 받기까지 하였다.27) 지역주의 대립의 심화가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오고 그렇게 형성된 부정적인 인식은 다시 지역편견으로 굳어져서 지역차별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5. 맺음말

 

한국에서 지역주의의 기원을 전근대 사회에서 찾는 것에 반대하는 연구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는 지역주의의 특징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지역차별인데 이것은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나 문제가 되지 전근대 사회에서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황태연, 1997: 32~41).  지극히 근대주의적인 발상으로 이미 지역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역차별은 조선시대라 해서 정당한 것은 아니다. 

 

둘째는 오늘날 지역주의의 가장 큰 형태는 영․호남 사이의 대립․갈등인데 이와 같은 것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지역주의가 없었다는 주장이다(이병휴, 1991).  그러나 대립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영남과 호남 모두 지역주의가 각자 형성되어 있었고 오히려 정치권력이 서울로 집중되면서 서울과 다른 지역의 지역주의 대립은 심각했기 때문에 지역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셋째는 지금의 지역주의는 뿌리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 때 생긴 문제점만 고치면 깨끗이 해결될 수 있으며, 오히려 지역주의가 전근대시대에 존재해왔다는 식의 설명은 지역주의의 존재 자체를 합리화시켜 주는 위험이 있고 나아가서는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무가치하다는 결정론적 입장에 서게 될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다(최협, 1996).  그러나 전근대시대에 지역주의가 존재했다고 해서 지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에 반해 지역주의가 전근대 시기부터 있었다는 연구들은 대부분 지역주의의 전제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데 그치고 있다.  즉 박정희 시대의 영남지역패권주의는 신라 통일 이후 형성된 신라지역패권주의가 고려․조선을 거쳐 재현됐다든지(남영신, 1992: 65~124), 한국사에서의 지방대립은 부족연맹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부족국가들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든지(이기백, 1969) 하는 식이다.  그러나 전체에 대한 의식이 없는데 지역주의가 성립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역주의 연구 가운데 또 하나의 특징은 지역패권의 시각에서 접근한 것이다.  여기서의 지역패권주의는 특정 지방의 특권과 차별, 즉 거주지가 아닌 출신지 지연을 매개로 중앙의 국가권력과 경제를 관통하는 거대지방적 갈등으로서의 수직적인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의미하거나(황태연, 1997), 또는 한 국가의 일부 영토로 존재하는 특정지역 출신 집단이 국가의 경영에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정치권을 획득․유지․강화하려는 정치적 이념을 의미한다(남영신, 1992).  이는 지역주의를 권력과의 연관 속에서 설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너무 도식적인 감이 없지 않다.

 

해방 이후 50년만에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어도 지역주의는 해결되기는커녕 더 문제가 되고 있다.  아예 ‘신지역주의’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28)  왜 그럴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역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의 지역주의를 논하면서 호남에 대한 영남, 영남에 대한 호남의 차별은 이야기하지만 왜 지역주의의 지리적 경계가 수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역주의의 원인 제공자인 영남패권이 무너졌어도 왜 지역패권주의는 계속되는지에 대해 그 본질적인 측면은 외면하고 죽은 소 불알 만지듯 계속 변죽만 울리고 있다.  200억원의 국고와 500억원의 기부금을 들여 박정희 기념관을, 그것도 새 천년 새 도시지역의 중심이 될 곳에 짓겠다는 것도 그 한 예다.

 

지역들이 서로 수 백년 동안 같은 경계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지역정체성이 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지역정체성을 바탕으로 지역주의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지역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전체’의 요인으로 인해 지역주의가 대립하고 갈등을 벌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역주의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은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지역주의를 악용하고 대립하게 하는 ‘전체’의 요인을 고치는 일이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책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지역주의를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소중하다면 남의 지역의 역사와 문화도 존중해 주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진정한 민족주의가 다른 민족의 역사와 문화도 인정하고 존중해 줄 때 성립되는 것처럼.  ‘전체’의 요인을 고친다는 것은 정치권력의 집중을 해결하는 것으로 중앙이든 지방이든 모든 지역단위의 권력을 분산하고 서로 견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200여 년에 걸친 권력의 집중과정과 박정희 정권 이후 40년에 걸친 권력의 집중 과정은 놀랍도록 비슷하지 않은가.  지역주의 대립이 심화된 것까지.  지역주의는 그 자체는 물론 대립까지도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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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 
블로그 >목련꽃이 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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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