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사건으로서 치옴피 폭동… 빈민 봉기와 반혁명치옴피 폭동은 피렌체의 오랜 파당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당시 피렌체는 한편으로는 3년을 끌어온 교황령 국가들과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교황파(Guelfa)와 이 전쟁을 이끌어온 교황 반대파(Ghibellina) 사이의 갈등,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파의 주축을 이루는 부유층(popolo grasso)과 반교황파를 지지하던 도시 빈민층(popolo minuto) 사이의 갈등이 심각한 긴장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은 피렌체의 곪았던 상처들을 드러냈고, 곧 도시 빈민과 하층 노동자들이 가담하는 폭동으로 발전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378년 6월, 교황파가 지지부진한 전쟁에 공을 들이고 있던 반교황파를 몰아내려 하자, 유력 가문들에 반감을 갖고 있던 상인들이 이를 저지하려고 들고 일어난 것이 발단이었다. 최초에 이 소동은 유력 가문들이 권좌로부터 축출되는 것으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런 권력 다툼을 시작으로 도시 빈민과 하층 노동자들의 요구가 터져나왔다. 7월 중순, 양모 가격
불안이 가져온 임금하락과 전쟁으로 인한 세금 폭증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도시 빈민과 조합에 소속되지 못한 하층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바로 이 폭동을 주도한 집단이 ‘치옴피’, 자기들의 조합이 없어 정치공간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었던 ‘양의 털을 깎는 사람들’이었다. 이 폭동의 결과로 민중정부가 들어섰는데, 이 정부를 주도한 사람이 마키아벨리가 ‘맨발의 반(半) 벌거숭이’라고 묘사했던 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교황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민과 하층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새로운 조합을 결성해 그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개혁은 곧이어 발생한 상인과 기존 조합들의 반혁명으로 물거품이 된다. 새로 민중정부가 들어선 지 6주 후, 부유한 상인과 거대 조합들이 주도한 반혁명 폭도들이 새로 결성된 조합들을 공격했고, 그 결과 미켈레와 그의 개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다른 형태의 대중적 지도자… 미켈레 디 란도의 집권·몰락당시 역사가들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미켈레의 집권과 몰락을 ‘신중한 한 사람’의 영웅적 행동으로 묘사한다. 미켈레는 그에게 폭도들 중 한 명이 결코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의 해설을 따르면, 7월 중순에 일어난 폭동이 약탈로 변할 때, 미켈레는 유력가문의 자제들조차 흉내를 낼 수 없는 정치가로서 탁월한 기질을 선보인 ‘타고난 지도자’다. 특히 적개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빈민들이 잔인한 보복을 자행하려 할 때, 빈민들의 의사를 추종하기보다 그들의
무모한 행동을 설득으로 자제시킨 현명한 지도자로 기술된다. 한편으로는 인민들의 사사로운 복수를 공적 처벌로 대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들의 오만을 제도적으로 견제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공존을 기획한 혁명적 지도자로 본 것이다.
이런 묘사들은 당시 역사가들의 일반적 기술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미켈레가 맨발에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았다는 점은 다른 역사가들의 기술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당시 역사가들은 미켈레를 ‘인민의 지도자’로 설명할 이유도 의도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기술에서는 인민들을 설득하는 정치가로서의 미켈레를 발견할 수 없다. 등장부터 몰락까지 미켈레는 한 명의 폭도일 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혁명적 정치가로 평가되지는 않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기술들이 옳다면, <피렌체사>에 등장하는 미켈레의
리더십은 마키아벨리가 발굴한 새로운 사실이거나 순전히 그의 창작물이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든, 마키아벨리의 미켈레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적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였던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 ‘다수’와 ‘소수’의 정치심리학…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구미켈레를 통해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의 절망을 토로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그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자신의 정치심리학, 그리고 이런 정치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개혁의 청사진을 담았다. 바로 이것이 <강론>에서 만나는 ‘자유’와 ‘갈등’에 대한 그만의 미학적 성찰,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제도화하려 했던 ‘시민적 자유’와 ‘전투적 견제’가 공존하는 그만의 제도적 구상이다. 여기에는 ‘
조화’(concordia)를 강조했던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철학이 추구했던 도덕적 훈계는 없다. 그리고 어떤 정치체제도 당파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관적 현실주의도 없다. 대신 잘 관리되기만 한다면, 갈등은 안으로는 귀족의 야망과 인민의 무분별한 욕구를 억제해 시민의 자유를 확고히 하고, 밖으로는 시민적 자유를 통해 배양된 주인의식을 바탕으로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낸다는 희망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갈등’이 자동적으로 ‘시민적 자유’를 확대시키고 ‘시민적 역량’을 강화시킨다고 마키아벨리가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그러했지만, 피렌체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가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리고 <강론> 1권 37장이 보여주듯, 그렇게 건강했던 로마 공화정도 ‘갈등’으로 무너졌다는 점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여기가 바로 ‘다수’와 ‘소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면밀한 관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바로 여기가 <군주> 9장에서 제시되는 ‘지배하려는 집단’과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집단’의 기질(umore)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지점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지배받지 않으려는 기질’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신(新)공화주의’의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의 자유’, 즉 ‘비지배(非支配) 자유’라는 정치이론에 영감을 제공했다. ‘신공화주의’에서 ‘자유’(liberta)란 노예와는 달리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조건을 의미하고, 자유로운 시민은 불간섭의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비지배의 조건을 획득하고 지킬 수 있는 견제력까지 반드시 보장받아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다수’(lo universale)와 ‘인민’(il populo)에게서 찾은 ‘지배받지 않으려는’ 기질을 자유의 정치사회적 조건으로 이해하고, ‘소수’(pochi) 또는 ‘귀족’(i grandi)의 기질로 분류한 ‘지배하려는 속성’을 ‘야망’(ambizione)에 이끌린 잘못된 지배욕으로 파악한 것이다.
■ 시민적 자유와 다수의 정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
마키아벨리의 ‘자유’에 대한 견해를 이렇게 해석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심리학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두 가지 측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그가 말하는 기질은 계급 또는 계층적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론> 1권 46장에서 보듯, ‘지배받지 않으려는 속성’도 때로는 ‘상대방을 짓누르려는 욕구’로 이전되기도 한다. 인민들 또는 그들 중 일부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갖게 될 수도 있고, 귀족도 궁지에 몰리면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구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측면을 보지 못하면,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구’도 ‘지배하려는 욕구’처럼 ‘자유’가 아니라 ‘방종’(licenzia)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를 읽을 수 없다.
둘째, 집단적 기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지배하고자 하는 기질’은 언제나 어느 누구에게서나 돌출할 수 있다. 지배하려는 집단의 오만함이 인민에게 지배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피렌체의 ‘대중 지도자들’(popolari)과 같이 대중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잠재적 참주도 있다. 특히 그가 말하는 ‘귀족’과 ‘대중 지도자들’의 갈등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망에 의해 주도되는 갈등은 ‘시민적 자유’로 종결되지 않았다는 한탄, 공화정에서도 자기기만적 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는 충언, 그리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잠재적 참주에게 ‘시민적 자유’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새로운 목표를 일러주려는 노력, 바로 여기에 우리의 진지한 고민이 요구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