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운동의 반성과 전망
김호기(연세대, 사회학) 경제와사회 2000년 겨울호에 발표
1. 문제제기
한국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이 새로운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하
더라도 '제5의 정부' 내지 '성장산업'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각광을 받아 왔지만, 최근 시
민운동과 시민단체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곱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물론 원
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올 봄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이후, 장원 녹색연합 총장 사건에서 최열 환경운동연합 총장의 사외이사 겸직문제에 이르기
까지 여러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시민단체 활동에 대한 의혹과 비판이 전개되어 왔
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편에서 시민단체로 대표되는 시민권력의 과잉화를 우려하는 견해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
서는 시민단체의 조직과 전략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운동에 내재된 탈계급적 경향을 비판하는 견해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라 할 수 있는데, 각기 '시민 없는 시민운동론' 비판과
시민운동의 자유주의적 경향 비판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 비판들은 한국 시민운동의 현주소
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비판들을 주목해 지난 10여 년 간 한국 시민운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그
전망을 모색해 보려는 데 있다. 우리의 시민운동은 흔히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
련)의 창립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지나간 10년이면 이제 그 공과를 평가할 시
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2절에서는 지
난 10여간 시민운동의 부상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살펴본다. 이어 3절에서는 시민운동을 둘
러싼 논쟁을 검토하고, 4절에서는 시민운동의 새로운 과제들을 탐색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
론에서는 시민운동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숙고한다.
2. 시민운동의 부상과 시민단체의 활동
1) 시민단체의 현황
한국 시민운동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단체의 현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 발행된 {민간단체총람 2000}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NGO는 4,023개가,
그 지부까지 합하여 2만 개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시민의 신문, 1999). <표 1>은
NGO의 분포를 보여주고 있는데, 단체의 양적 규모는 시민사회, 사회서비스, 문화, 경제, 환
경, 교육·학술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아울러 이 {민간단체총람 2000}은 NGO에 관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사실을 제공하
고 있다(김용민, 2000: 39). 첫째 NGO는 1980년대에 21.0%, 1990년대에 56.5%가 설립되었
고, 둘째 전체 NGO의 54.6%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며, 셋째 평균 회원 수는 6,284명, 평균
상근자 수는 7.76명, 평균 예산규모는 3억 7천만원이고, 넷째 54.4%가 미등록단체이며 그 다
음 사단법인 40.9%, 재단법인 7.7%, 특수법인 0.9% 순으로 되어 있다.
<표 1> NGO의 분야별 분포
출처: 조희연, 2000a.
이러한 시민단체 가운데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영향력이 큰 단체로 흔히 YMCA, 한국여
성단체연합(여연), 경실련, 환경운동연합(환경련), 녹색연합, 참여연대 등이 지목된다. 이 가
운데 YMCA, 경실련, 참여연대는 특정 이슈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슈들을 포괄적
으로 다루는 '종합적 시민단체'라 부를 수 있으며, 특히 1989년에 합리적인 대안을 표방하고
창립된 경실련과 1994년 진보적 시민운동을 표방하고 창립된 참여연대는 1990년대 시민단체
의 대표주자로 손꼽혀 왔다. 한편 여연, 환경련, 녹색연합은 특정 이슈에 주목하는 '전문적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환경, 여성 등 개별 문제들에 주력함으로써 이에 대한 기
존의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주력해 왔다. 이러한 유형에서 주목할 것은 종합적
시민단체가 소수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대다수 시민단체들은 회원 및 조직의 규모가 크지
않은 전문적 시민단체라는 점이다.
2) 시민단체의 성장원인
그렇다면 1990년대에 들어와 왜 이렇게 시민단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일까. 우리의
시민운동이 크게 성장한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우리사회의 거시적·단중기적 구조
변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변화는 경제적 요인, 정치적 요인, 그리고 시민사
회 내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경제적 요인이 하나의 배경요인이라면, 정치적 요
인과 시민사회 내부적 요인은 보다 직접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첫째,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변화는 시민사회의 변동과 시민운동의 부
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곧,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유기적으로 결
합된 주변부 포드주의(peripheral Fordism)의 확립은 경제적으로 실질임금의 상승에 따라 중
간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의 물질적 기반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기반의 향
상은 이제까지 사회운동에서 간과되어 온 환경, 여성, 교육, 지방자치, 의료, 교통, 인권 등
새로운 이슈들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심을 제고시켰으며, 이러한 이슈들을 담당하는 시민단
체들이 대거 결성되는 배경을 이루었다. 구체적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주요 시민단체들의
상당수는 앞서 지적했듯이 1990년대에 들어와 창립되었으며, 특히 지방에 소재한 NGO는 경
북, 전북, 제주, 충북 지역을 제외하고 60% 이상이 1990년대에 창립되었다(조희연, 2000a).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함축하는 바는 뤼시마이어·스티븐스·스티븐스(Ruschemeyer, Stephens
and Stephens, 1992)가 주장한 바 있는 자본주의의 거시적 발전이 가져오는 '시민사회 성장
의 효과'로 볼 수 있다.
축적체제의 구조변동과 관련하여 1990년대 후반 한국경제의 위기 또한 시민사회와 시민
운동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즉, 1990년대 중반 고도성장이 막을 내린 시점에서 나타난
경기 양극화와 유연화 전략은 중간계급의 점진적인 쇠퇴를 낳았으며, 1997년 IMF 관리경제
의 등장은 이러한 쇠퇴를 가속화시켰다(김호기, 1999: 246-258). 비교사회학적으로 볼 때 중
간계급의 경제적 위기는 중간계급을 보수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우리사회의
경우 그것은 오히려 중간계급의 정치적 관심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의 위
기를 낳은 주요 원인으로 정경유착, 관치금융, 부실경영 등이 활발히 공론화됨으로써 정부정
책과 기업활동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증가했으며, 이것이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크게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홍일표, 2000: 123-124). 이러한 반응을 잘 보여주는
것의 하나가 참여연대가 주도한 소액주주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은 몇몇 비판이
없던 바는 아니나 재벌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증가되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올해 초 낙선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시민운동의 부상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의 한국적 특수성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
계는 이른바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 왔다
(최장집, 1996; 박명림, 1998).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란 상이한 계층적, 기능적, 직업적 이해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직접 연결하려는 정치체제를 말하며, 무엇보다도 국가
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정치사회, 곧 정당정치의 빈곤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국민투표
제적 민주주의 하에서 국가권력은 자연 거대해지고 권위주의적 통치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
었으며, 그 귀결점이 1972년 10월 유신이자 1987년까지 이어진 군사독재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이러한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민주화할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
었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 이후 정치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민주화는 지체되어 왔는데, 우리사회의 특수한 역사·사회적 조건, 지역주의적 정치
행태, 그리고 민주화 세력의 점진적 약화 등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따라서 위로부터 추진된
정치적 민주화란 1980년대와 1990년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위임민주주의'
혹은 '초대통령주의'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에 머물러 있었다(O'Donneell,
1994; Oxhorn and Ducatenzeiler, 1998). 그리고 이러한 상황하에서 민주적 정당정치는 제도
화 및 공고화되지 못한 채 구래의 정당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면서 전근대적 붕당정치를
되풀이해 왔다.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곧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할 수 있는 정당정치가 낙후되어 시민단체가 오
히려 기존 정당을 대신하는, 이른바 '준정당'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단중기적으로 6월 민주항쟁 이후 진행된 시민사회의 분화 또한 시민운동의
부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87년 이전의 사회운동은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
이라는 큰 목표 때문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또는 급진노선과 온건노선 간의 차이가 명확하
게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폭발 이후 민주주의 절차들이 제한적으로 도입되면
서 기존의 사회운동 세력 사이에 운동의 목표, 주체, 방식, 정세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나
타났으며, 이에 따라 민중운동과 시민운동간의 노선분화가 진행되었다(정태석·김호기·유
팔무, 1995: 280-284). 민주주의 이행을 경험하는 제3세계 국가들에서 빈번히 관찰되는 이러
한 경향은 일반적으로 시민사회 내의 온건파와 급진파의 분화로 나타나며, 우리사회의 경우
급진파는 기존의 민중운동을 고수한 반면에 온건파는 시민운동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분화는 시민사회의 지형이 1987년 이전의 '국가 대 시민사회'의 '단일
한' 대결구도에서 1987년 이후 '국가와 시민사회'의 '다층적인' 대결구도로 이행했음을 의미
한다(김호기, 1995: 328).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러한 새로운 다층적인 구도 형성은 우리의
정치 및 사회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시민사회의 분화와 이와 연관된 시
민운동의 성장은 민주주의 이슈를 시민사회 내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제공하
고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해 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변화, 정당정치의 빈곤, 그리고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분화 속에서 성
장했으며, 특히 첫 번째 요인은 전문적 시민운동의 성장에, 두 번째 요인은 종합적 시민운동
의 부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3) 시민단체의 이념, 주체, 조직적 특성
시민운동이 시민단체가 전개하는 운동이라면, 한국 시민단체의 이념, 주체, 조직적 특성
은 어떠한가. 우선 시민단체의 이념은 온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활동분야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이념이 공존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종합적 시민단체와 전문적 시민단체의
구별이 유용한데, 종합적 시민단체는 금융실명제 실시 요구나 소액주주운동에서 볼 수 있듯
이 민주적인 정치개혁과 합리적 시장개혁을 포함한 포괄적인 사회개혁을 지향하고 있다면,
환경, 여성, 인권 등으로 대표되는 전문적 시민단체의 경우는 해당 이슈에 대한 급진적 주장
에서 온건한 목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들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환경단체의 경
우 생태주의를 포괄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환경련부터 근본생태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살
림공동체에 이르기까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김호기, 1998: 114-117).
한편, 시민단체 주체의 경우 화이트칼라 전문사무직이 주요 회원을 이루고 있지만, 활동
영역에 따라 회원 구성의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 <표 2>를 보면, 여성단체의 경우 전문사
무직과 주부가, 환경단체의 경우 전문사무직과 학생, 인권단체의 경우 특히 전문사무직, 그
리고 사회복지운동단체의 경우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주요 회원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노
동조합으로 대표되는 민중단체(구사회운동단체)의 주요 회원구성(전문사무직과 판매생산직)
과 비교해 볼 때 시민단체의 회원 구성이 민중단체와 어느 정도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표 2> 회원의 직업구성
(단위: %)
출처: 김호기, 1998: 119.
이 조사는 시민단체의 전략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표 3>을
보면, 시민단체들은 교육 프로그램, 신문 및 잡지 발행, 토론회 등을 주요 행동수단으로 활
용하고 있으며, 집회, 시위, 성명서, 서명 또한 중요한 수단이지만 민중운동과 비교해 볼 때
그 양적 비중은 다소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규모가 비교적 큰 시민단체의 경우 성명서 발
표나 서명을 포함하여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전략을 중시해 왔는데, 상층 핵심부를 중
심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여론화하는 것이 경실련 창립 이후 핵심 전
략의 하나로 자리잡아 왔다.
<표 3> 운동방식의 비교
(단위: 회 수)
출처: 김호기, 1999: 123.
이념, 주체, 운동방식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은 시민운동의 주요 이슈들과 밀접히 관
련되어 있다. 즉, 현재 시민단체들이 다루는 주요 과제들은 환경, 여성, 정치·경제개혁, 주
민자치, 인권, 교육, 문화, 언론, 복지, 소비자, 의식개혁, 정보화 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
한 이슈의 목록이 갖는 특징은 이른바 '해방의 정치'와 '삶의 정치'의 의제들이 공존하고 있
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시민운동이 전통적인 민중운동
과 서구적인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의 점이지대(漸移地帶)에 놓여 있으며, 점
차 신사회운동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시민단체들은
'제5의 정부'로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제시되어 왔다. 지
난 10여 년 간 금융실명제 실시, 동강살리기 운동,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낙천낙선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시민운동이 이른바 '영향의 정치'를 강화하고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계몽하는 데 상당한 성공
을 거두어 왔다는 점에 이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시각과 함께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 또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는 앞서 지적했듯이 크게 세
흐름, 즉 시민권력 과잉론, 시민없는 시민운동론, 그리고 자유주의적 시민운동론 비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민운동을 둘러싼 주요 쟁점에 대해서는 다음 3절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3. 시민운동을 둘러싼 논쟁
1) 시민없는 시민운동론
'시민없는 시민운동론'은 현재 한국 시민운동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담론이다(김호기,
1999: 281-284; 하승창, 2000). '시민없는 시민운동론'이란 시민단체가 참여민주주의를 표방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주의적 운동방식에 기울어져 있다는 점을 겨냥하고 있다. 이
'시민없는 시민운동론'은 우선 시민단체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저조한 것을 우리
시민운동의 약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 소재 몇몇 주요 시민단체들의 회원을
모두 합한다 해도 대형교회 한 곳의 신도 수보다도 적은 것으로 알려질 만큼, 우리나라 시
민들의 시민단체 참여율은 낮은 편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참여가 이렇게 저조한 것을 시민단체가 일방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시민들의 낮은 참여율은 오히려 우리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역사적 특수성, 무엇보
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형성된 시민사회의 반정치주의와 가족주의의 경향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주의는 시민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고 할 수 있는
데, 혈연·지연·학연을 포함한 유사가족주의는 공익을 위한 자발적 결사체보다는 정서적,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는 1차 집단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시민사회의 팽창에 대한 경험적 비
교조사에 따르면, 1990∼91년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의 경우 자원조직 참여율이 미국 60%,
서독 68%, 영국 53%, 프랑스 39%인 반면에 가족주의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36%에 불과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Therborn, 1995: 307). 우리사회의 경우
도 이러한 일본의 사례와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의 정착
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단체가 언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이른바 '언론플레이'는 '시민없는 시민운동
론'의 또 다른 증거로 제시된다. 언론플레이란 시민단체들이 언론을 통해 여론화하는 것을
운동의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것을 말한다. 경험적인 조사에 따르면, 시민단체에 대한 언
론보도는 지난 몇 년간 크게 늘어 왔으며, 최근 각 언론사는 정기적으로 NGO 지면을 제공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언론전략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 한편에서 언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운동방식이 '시민없는 시민운동'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는 평가가 제시되고 있
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회원확보와 재정자립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을 통한 홍보를
시민단체가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견해 또한 제기되고 있다
(박원순, 2000). 언론으로 대표되는 공공영역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견해를 결집, 정부와 기업
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시민운동의 핵심공간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시민단체의 양대 행동수단은 언론을 통한 '여론의 정치'와 참여를 통한 '행동
의 정치'다. 여론의 정치가 시민사회에서 공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정부정책이나 기업활동
에 압박을 가하는 이른바 '영향의 정치'를 뜻한다면, 행동의 정치는 의사결정과정에 직접 참
여함으로써 시민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집단행동을 지칭한다. 우리사회의 경우 금융실명제
실시나 동강 살리기 운동이 전자의 대표적인 성과라면, 소액주주운동과 국감 모니터 활동은
후자의 모범적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작년 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은 여론의
정치와 행동의 정치를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호기, 2000a).
시민단체가 언론에 의존하는 것은 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
와 동시에 그 조직적 지반이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에 언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민없는 시민운동론'에서 검토해 보아야 할 쟁점은 '풀뿌리 민주주의'와 시민단체의 문
제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기층 시민들이 정치적, 경제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의미하며, 시민단체의 역할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시
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본래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시
민단체가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그 조직 또한 소규모를 지향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 있다. 우리사회에서 여전히 커다란 문제는 국가와 시장이 시민사회에 비해 과도한 권
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며, 국가와 시장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개별 이슈에
따라서 시민단체의 규모가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연관하여 중요한 것
은 시민단체의 규모가 아니라 개별 단체들이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에 얼마나 주력하고 있는
가, 지역단체가 얼마나 활성화되고 있는가, 그리고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이 상호자율성을 갖
고 유기적인 연대와 협력을 얼마나 활성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놓여 있다.
'시민없는 시민운동론'에서 재고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운동의 대중성과 급진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시민운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시민사회의 공감대를 창출하는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동시에 운동으로서의 급진성을 결합시켜야 하지만, 이 대중성과 급진성은 때
대로 서로 상충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가운데 운동의 대중성이 일방적으로 강조될 경우 단
기적으로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운동의 활력이 상실될 가능성이 높다. 운동의
급진성이란 근본성, 다시 말해 당면한 문제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을 진지하
게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서구 신사회운동과 연관해 볼 때 생태주의적 사유와 실천들은 운
동의 급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들은 자본주의 문명에 내재된 근본적 한계에
주목함으로써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계몽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와 실천
을 지속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시민단체는 형식적인 제도화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시민단체, 특히 종합적 시민단체들은 그 시험대 위에 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시민운동의 자유주의 경향 비판
시민운동에 대한 또 하나의 유력한 비판은 이른바 민중운동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이
비판은 무엇보다 현재 시민운동의 이념적 내용과 계급적 기반을 주목한다(장종권, 2000a,
2000b). 이 비판에 따르면, 시민운동은 '시민'을 공적 가치의 시민의식 소유자로 보고 있는
데,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공적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여타의 운동은 모두 '피해자 운동'으
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적가치와 공정성은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고, 노동운동을 포함한 대중운동
이 갖는 의미를 과소하고 있다는 것이 이 비판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은 개량
내지 체제내적 운동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김세균, 1998), 결과적으로 정권의
동조 세력 내지 '신자유주의의 하위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비판된다.
시민운동에 대한 이러한 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참여연대가 주도한 소액
주주운동을 둘러싼 논쟁이다. 우선 이 운동을 비판하는 견해는 소액주주운동이 재벌개혁의
본질을 왜곡하고, 노동자 경영참가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억압하는 효과를 갖으며, 지분확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외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김성구, 1999a, 1999b).
이에 대해 이 운동을 지지하는 견해는 소액주주운동의 무게 중심이 소액주주의 권익옹호에
있다기보다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왔으며, 따라서 '주주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자본을 통제하려는 시민활동의 한 측면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김주용, 1999; 조희연, 1999b). 운동의 목표를 어느 수준에서 볼 것인가에 따
라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현재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거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민운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핵심은 시민운동에 내재한 자유주의적 내지 다원주의적
경향을 겨냥하고 있다. 현재 우리 시민사회에는 진보적 성향의 단체에서 보수적 성향의 단
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 단체들은 상이한 이념적 성향에
도 불구하고 대체로 '국가(정치사회)-시장(경제사회)-시민사회'라는 3분 모델의 가정을 공유
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가정하는 이 모델의 핵심은 국가와 시장에 대응하는 시민사회라는
범주의 도입에 있는데, 이는 시민운동의 존재 가능성을 허용하는 동시에 그 타당성을 부여
하고 있다. 이 모델 하에서 사회적 개인은 경제사회 속에서의 생산자(노동자)이자 시민사회
에서의 생활자(시민)로서 이중적 존재이며(백욱인, 1995), 이러한 사회적 개인의 이중적 성격
은 독립적이면서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또한 이 모델에서 하에서 국가와 시장은 민주
적으로 재편되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되고, 시민사회는 국가와 시장의 '감시자'와 '회계사'로
서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람시(Gramsci, 1971)와 하버마스(Habermas,
1981), 라클라우와 무페(Laclau and Mouffe, 1985), 그리고 코포라티즘(Streeck and
Schmitter, 1985)에 걸쳐 있는 이러한 이론적 가정의 적실성에 대한 토론은 앞으로 더욱 활
성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민운동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연관된 또 하나의 토론은 작년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둘러싸고 {진보정치}에서 조희연과 장석준 사이에 진행된 논쟁이다(조희연, 2000b; 장석준,
2000). 이 논쟁은 진보적 사회운동이 당면한 정치전략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그
전략에서 시민운동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매우 간략한 논쟁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참여에 대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견해 차이를 여과없이 보여준
논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토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조희연은 진보정치운동의 주체 역량 부족으로 인해 기
성정당에 대한 불신이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로 곧바로 전환되지 않는 것이 현시기의 조건이
라고 진단하고, 따라서 낙선운동을 통해 조성된 정치적 관심을 이용, 시민사회를 재정치화함
으로써 급진적 정치화를 위한 토양을 확대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런 시각에서, '장내' 진입운동이라 할 수 있는 진보정당운동과 '장외' 압력운동이라 할 수 있
는 낙선운동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운동, 즉 정치개혁운동의 양 날개라는 것이
조희연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장석준은 조희연이 시민사회를 제도정치의 지배 메커니즘이
관철되는 공간이 아니라 비제도 정치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설정해 '공공선', '중립적', '국민
적' 영역으로 과도하게 특권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지배구조의 재생
산에 기여하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현재의 한국 시민사회와 진보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상이한 평가와
전망에서 비롯되고 있다. 장석준이 비판하는 논점, 즉 총선시민연대가 언론에 과도하게 의존
하고 있으며 1인 2투표제의 중요성을 결과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는 비판은 타당한 것임에
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민사회를 진보적으로 정치화하기에는 정치적 기회구조와 시민사회의
역량 및 지반 등 여러 난관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맥락에
서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대안적인 정치세력화를 지지하는 대신에 기존 정치사회 내 특정 세
력을 거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민사회의 현재적 조건과 특
징은 무엇인가. 아래의 4절에서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역사·사회적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고
자 한다.
4. '이중적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과제
1) 한국의 '이중적 시민사회'
시민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학 내에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견해의 하나로, 코헨과 아라토는 시민사회를 "친밀한 영역(특히 가족), 결사체
의 영역들(특히 자발적 결사체들), 사회운동들, 그리고 공공 의사소통 형태들로 구성된, 경제
와 국가의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정의하고 있다(Cohen and Arato, 1992: ix). 좀더 구체적
으로 시민사회는 "① 다원성: 생활형태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다원성과 자율성을 갖고 있는
가족, 비공식집단, 자발적 결사체, ② 공공성: 문화와 의사소통의 제도, ③ 사생활: 사적 자아
발전과 도덕적 선택의 영역, ④ 법률성: 적어도 국가와 경향적으로 경제로부터 다원성, 사생
활, 공공성을 경계짓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법률과 기본권의 구조"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
된다(Cohen and Arato, 1992: 346). 간단히 말해, 시민사회는 국가(정치사회)와 경제사회를
매개하는, 그러나 독립된 생활세계의 제도적 차원을 지칭한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격을 간단히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 구성요소들인 가족, 비공식
집단, 자발적 결사체, 공공영역, 문화 등이 서로 다른 성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
다. 예를 들어, 우리사회의 경우 가족주의와 그 확대 형태인 연고주의가 시민사회의 이기적
이고 무규범적인 성격을 강화해 왔다면, 시민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은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비판적 성향을 표출해 왔다. 한편 공공영역은 보수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시민사회를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인 공간, 그 어느 하나만으로 해석하는 것
은 타당하지 않다. 시민사회의 이중성, 즉 실증적 수준에서의 보수적 성격과 규범적 수준에
서의 유토피아적 성격이 공존·결합되어 있는 이중적 시민사회(dual civil society)는 한국
시민사회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이중적 시민사회의 특징은 분단에서 권위주의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경험이 각인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기간 내에 변화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적으로
'문화'를 전수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며 개인을 '사회화'시키는 생활세계(Habermas, 1981)의
변형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이중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시민문화 영역이다. 1990년대 우리의 시민문화는 전통문화와 서구문화가 혼
재되어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편에서 가족주의와 권위주의가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산업화와 함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확
산되어 왔다. 더욱이 1980년대 후반 민주적 개방 이후 환경, 평화, 여성 등 '삶의 정치'의 의
제들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시민문화의 양상은 더욱 복합화되고 있다.
시민사회의 이러한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성격이 시민운동에 미치는 영향은 두 가지이
다. 첫째, 보편성의 시각에서 보면 시민사회는 정치사회 및 경제사회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
고 있으면서도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민운동은 독자적인 목표를 추구해
야 하는 동시에 다른 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해야 하는 이중적인 과제를 갖고 있다. 이 가운
데 특히 '삶의 정치'의 의제들을 다루고 있는 환경, 여성, 평화, 인권운동은 서구사회에서는
물론 우리사회에서도 갈수록 그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둘째, 특수성의 시각에서 보면 우
리 시민사회의 이중적 특징은 시민운동의 존재적 조건을 구속하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의 시민사회는 전통사회의 가족주의와 권위주의, 일제 식민시대의 감시체제, 그리고 해
방 이후의 분단체제의 형성을 통해 탈이념적인 성향이 내면화되고 구조화되어 왔기 때문에
이 시민사회를 재정치화하는 데 여전히 커다란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시
민단체들이 '무당파적' 낙선운동에 주력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
다.
2) 시민운동의 이중적 과제
지난 10여 년 간 경험을 중간 결산해 볼 때 우리의 시민운동은 이중적 과제를 갖고 있
다. 시민운동의 독자성 확보가 하나의 과제라면, 노동운동으로 대표되는 여타의 사회운동과
의 적극적인 연대는 다른 하나의 과제이다. 우선 시민운동의 독자성 확보는, 시민사회가 계
급적, 지역적, 성적, 세대적 균열이 중첩되어 있는 중층적인 영역이라는 점이 반영되어 있다.
시민운동의 목표에는 '해방의 정치'를 위한 과제들은 물론 '삶의 정치'를 위한 과제들이 공존
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그만큼 시민운동의 독자적 과제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독자성 확보를 위해 시민운동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응하는 독자적인 공간이라면, 시민운동은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
한 대안적 사회발전을 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사회에 커다란 영
향력을 행사했고, 또 행사하고 있는 국가중심의 발전국가론과 시장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대
항할 수 있는 사회중심의 민주적 발전모델과 정책 개발은 현재 매우 중대한 과제이다. 금융
실명제에서 소액주주의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공사례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이 시민사
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지속가
능하고 실현가능한 거시적 발전모델과 미시적 정책대안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데 있다는 것
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시민단체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네트워크 조직방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
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이러한 전략은 급속히 개인주의화되어가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대응하여 사회적 연대와 평등한 의사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으며, 이기주의·가
족주의·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있는 시민들을 공적 토론과 행동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기
여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하여 주목할 것은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전자저 공공영역'의 등
장이라 할 수 있는데, 전자적 공공영역을 주요 무대로 하는 정보시민운동은 다양한 안티사
이트나 소비자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난 몇 년 간 크게 증가해 왔다. 인터넷 사용이 폭증
하는 것에 비례해서 온라인을 통해 운동전략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의 문제는 향후 시민운
동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조건의 하나이다.
셋째, 시민운동은 세계화에 대응하여 좀더 다양한 국제 연대사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오
늘날 정보화와 한쌍의 이루고 있는 세계화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초국적 자본의 세계화이
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시민운동의 세계화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인권 및 환경 등과 같은 전지구적 이슈에 대한 시민운동의 적극적인 국제연대 또한 매
우 시급한 과제의 하나이다. 이 점에서 시민단체들은 국제 연대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
사회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하며, 이러한 연대사업에 일반 시민들도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한편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는 어떻게 모색할 수 있는가. 우리의 현실을 지켜 볼
때 사실판단의 수준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를 가로막는 장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시민운동은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시각에서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면
노동운동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성을 한국사회의 중핵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영역
에서 공공성을 표방하는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에 미치는 '사회적 효과' 또한 부정하기는 어려
운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와 정치적 효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는데, 현재로
서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의제들이 상당 부분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차이를 승
인하면서 연대를 활성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연관하여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이 '사회권 연대' 혹은 '사회보장 연대'이다. 사
회보장 연대라 함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공유하는 사회개혁 이슈, 곧 사회적 약자의 보
호를 공동 모색하는 연대로, 구체적으로 재벌개혁, 사회복지, 조세개혁을 연대 이슈로 생각
하고 있다. 이 사회보장 연대는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한 주요 과제들을 이슈화하고 이에 대
한 개혁을 사회운동화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기왕의 연대 사업
을 돌이켜 볼 때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는 수준의 형식적인 연대가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연대가 바람직한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전 논의 절차와 공감대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연대의 정치의 두 번째 이슈는 이른바 정치세력화의 문제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사회운
동의 정치세력화 문제는 낙선운동을 둘러싸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간의 갈등으로 표출된 바
있으며,. 현재 시민운동 내에서 정치세력화는 공론화되고 있지 않다. 시민단체들이 정치세력
화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정치세력화가 모든 시민단체에게 일차적
인 목표가 아니며, 또한 시민사회의 주체적 역량 및 객관적 조건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다만 지난 낙선운동을 계기로 하여 앞으로 사회운동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의 세력화는 두 가지 방식, 노동운동과 시민
운동의 독자적인 세력화와 연대의 세력화 방식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현실화될 것인가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의 경우에는 민주노
동당이란 단일한 구심체가 존재하고 있는 반면에, 시민운동 내에는 환경운동, 여성운동, 인
권운동, 사회복지운동 등 다양한 운동들이 공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기 독자적인 정치세
력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세력화에서 정치적 기회구조와 시
민사회의 역량 및 기반이 그 주요 조건이라 할 때, 이에 대한 개관적인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판단에 기반하여 우리 사회에 적합한 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생
각으로는 두 가지 세력화 방식 가운데 연대의 세력화 방식이 바람직한데, 중장기적으로 다
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이 연대하여 포괄적인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 있다면, 지연된 정치민주
화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경제적·사회적 민주화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5. 결론
한국 시민운동에 적지 않은 이론적, 실천적 영향을 미쳐 왔던 서구 신사회운동의 미래에
대해서는 현재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고 있다(Kriesi, 1995). 낙관론자들은, 현대사회의
다원성과 복합성 증대가 돌이킬 수 없는 경향이라면, 신사회운동은 일시적으로 정체된다 하
더라도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반면에 비관론자들은 현대 자본주의가 급속
히 '20 대 80 사회'로 재편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중간계급의 급진주의'로서의 신사
회운동 영역은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와 같은 신사회운동의 전망은 우리 시민운동에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즉
한편에서 보면 우리의 시민운동은 '삶의 정치'를 둘러싼 이슈들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보수 중심적 정당정치가 지속될
경우 정당의 대안 세력으로서 현재 시민운동의 위상은 강화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민운동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재편으로부터 자신의 거점에 대한 확인을 요구
받고 있다. 이것은 소박한 이념적 확인이 아니라 시민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경제질
서의 자유화에 대해 어떤 정책적 대안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의
시민단체들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효과적인 답변을 제시하
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은 실현가능한 거시적 발전모델과 미시적 정책대안 개발
에 더욱 주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의 시민운동은 척박한 황무지에서 민주주의라는 씨
앗을 뿌려왔다. 그리고 이 씨앗은 한편으로 국가와 시장을 감시·비판하는 것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환경, 성평등, 평화, 인권 등의 삶의 정치를 확장하는 것으로 그 싹을 키워왔던 것
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민운동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제도적, 의식적 변화를 집단적 실천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신사회운동이 추구하는 '해방적 유토피아'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실성이 없는 전략은 관념적 급진주의에 불과하지만, 해방적
유토피아를 상실한 사회운동은 변화의 열망을 화석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와 유
토피아주의 사이에서 자기정체성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적극 모색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시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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