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현황

2013. 6. 23. 00:06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한국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현황

장종익(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


1. 한국협동조합운동의 뿌리와 역사

우리나라의 협동조합이 그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말할 때 흔히 전통적 협동조직 즉 두레.품앗이.계.향약 또는 사창에 생각이 먼저 미치게 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협동조합의 기초가 협동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두레.품앗이.계는 예전처럼 다양하고 활발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우리생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협동조합이란 資本主義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역사적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서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시킨 '協同組織'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자본주의에 편입된 일제시대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다만, 전통적 협동조직과 근대적 협동조합 사이에 정서상의 연관은 매우 깊었으며 그 경험이 우리나라의 協同組合運動에 촉진제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일제하의 협동조합이 관변과 민간을 막론하고 사창.향약.계와 같은 협동의 유풍과 연관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더욱 적극적으로는, 우리생활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계의 행태로부터 우리 정서에 알맞는 韓國協同組合의 모형을 정립해 나가는 데에 원초적인 요소를 찾아 보는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제시대는 우리나라가 후발자본주의국가의 植民統治를 받으면서 이에 대한 民族的 抵抗을 한 시기인바, 이 시기의 協同組合運動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파악되기 마련이다. 이 시기의 협동조합은 통상 관제조합과 민간협동조합으로 구분한다. 이들이 모두 협동조합의 실질에 맞는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 수 있지만, 명백히 자본주의사회의 協同組合에 관한 제도와 이론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조직된 단체이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이전 시기의 협동조직과는 다르며, 협동조합에 관한 논의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다.
먼저 일제시대의 官制組合으로는 金融組合과 産業組合을 들게 되며, 흔히 이에 곁들여서 그 하부조직이었던 殖産契 및 비록 조합은 아니었지만 상호보완기능을 수행한 農會를 함께 논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 협동조합의 역사를 일제의 관제조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일제의 관제조합은 기본적으로 식민통치기구의 일부이며 우리의 자생적.자율적 협동조합을 봉쇄하는 의도를 가지고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터이므로, 일제의 입장에서는 능동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피동적일 수 밖에 없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관제조합에서 우리나라 협동조합운동의 정통성을 찾을 수는 없다. 일제하의 우리 역사를 일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파악한다면 우리민족의 능동적인 민간협동조합에서 이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협동조합의 역사를 시대적 순서에 따라 금융조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굳이 부당하다고 할 일은 아니지만, 민간협동조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시각을 강조하는 뜻에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일제하 자주적 민간협동조합운동

현재까지 문헌상으로 확인된 최초의 協同組合은 삼일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설립된 京城消費組合과 木浦消費組合이며, 그 1년 후인 1921년에 朝鮮勞動共濟會의 부속기관으로 消費組合이 조직되었다. 일찌기 "朝鮮協同組合運動小史" (1933)에서 咸尙勳은 "조선에 協同組合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919년 이후"로서 "경제적인 자립없이 정치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선민중이 1개군 또는 2개군에 하나 정도로 消費組合을 만들었지만, "당시의 지사들에 의하여 발기되었기 때문에 경영의 방법이 서툴고" 게다가 "대공황이 내습하여 대부분은 파산되든가 개인적 경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조선의 協同組合運動의 맨처음은 한두해에 비참한 패배를 보았든 것이나, 그것도 하나의 시련기로서" "이를 朝鮮協同組合運動의 黎明期"로 평가한 바 있다. 이처럼 이들은 대체로 지식분자의 운동에 머물러 성공적 확산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시련 끝에 民間協同組合運動의 본격적 확산은 동경유학생 중심의 協同組合運動社, 천도교의 朝鮮農民社, 기독교 (YMCA)계의 農村協同組合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이들을 통상 일제하의 民間協同組合運動으로 일컫고 있다.
1919년 3 1운동이후 급격히 고양된 민족주의사상은 민간차원의 협동조합운동의 태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한국농촌의 파탄과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목격한 일본 동경유학생들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몰락한 우리 경제를 구제하고 민족운동의 기틀을 확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26년 봄, 일본 동경에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조선경제}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 해 여름에는 간부 몇사람이 귀국하여 경북지역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계몽활동을 하였고, 1927년에는 경북의 상주 함창 등에서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그후 국내에서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1928년에는 동경에 있던 '협동조합운동사'의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본격적인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학생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그 해 가을에는 충남 경남 경북에 22개의 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조합원수는 약 5천명에 달하였다. 농촌의 피폐와 대중생활의 궁핍화, 빈부격차의 확대는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불러 일으켜 1932년말에는 80개 조합에 2만명의 조합원을 확보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간차원의 자발적인 협동조합운동이 활발해지자 이것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운동의 중심인물들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몰아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운동에 관여한 많은 지도자가 투옥되고 일제의 해산명령과 집요한 탄압으로 인해 자생적 협동조합운동은 1933년에 이르러 강제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천도교와 기독교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천도교계에서는 1925년에 '조선농민사'를 조직하면서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였다. '조선농민사'는 농민의 지위향상과 복리증진을 표방하였으며, 교세확장과 교도(敎徒)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교도 중심으로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함경남도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농민에게 생활물자의 구매알선, 생산물의 판매알선 등 농민생활과 직결된 각종 사업을 전개하여 농민의 신뢰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1928년에는 조직체계를 정비하여 중앙에 '조선농민사', 각 군에 '군농민사', 이동(里洞)에는 '이동농민사'를 두었다.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순회강좌를 개최하였으며, 활동내용도 매우 다양하여 {농민공생조합중앙회}산하에 소비조합, 생산자조합, 이용조합, 신용조합을 두었으며, 최성기에는 조합원수가 15만명에 달했고 주로 평안도와 함경남도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조합원을 교도(敎徒)로 제한하고 운영이 미숙하여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기독교계의 협동조합운동은 1926년을 전후하여 경성중앙기독청년회가 서울 부근에 8개의 농촌협동조합을 조직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의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활용하여 부락단위 협동조합을 조직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전국의 조합수가 7백20개에 달하였다. 1930년에는 '농촌협동조합과 조직법'을 발간하여 협동조합운동의 선전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농촌협동조합운동은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자 기독교청년회계 지방협동조합은 '부락진흥회'에 흡수되었으며, 중앙기독청년회가 경영하는 협동조합 역시 1937년 총독부의 해산명령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일제하의 자발적 협동조합운동은 애국계몽운동 차원에서 시작하여 민족역량 축적을 도모하였으므로, 일제의 직접적인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일제는 일본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협동조합운동사'의 활동이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과 독립운동의 성장으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들의 활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몰아부쳐 해산명령을 내리고 지도자들을 검거, 투옥하였다.
민간의 자발적 협동조합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해 일제는 강력한 탄압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구사하였다. 그 당시 금융조합은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조합원을 위한 구 판매, 이용사업을 기피함에 따라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왔다. 따라서 일제는 1926년 구 판매, 이용사업을 실시하는 산업조합을 설립하여 일반 농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한편 협동조합운동을 산업조합 쪽으로 유도하여 소멸시키는 이중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 전략에 따라 일제는 민간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던 임직원들을 산업조합 임직원으로 참여시켰으며, 이로 인해 자발적 협동조합운동은 급격히 쇠퇴하여 소멸하게 된다.
일제하의 民間協同組合運動에는 우리나라 協同組合運動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보인다.
첫째, 일제의 지배에 대한 저항 즉 경제자립을 통한 정치자립의 지향이라고 하는 정치적 목적과 서민의 경제적 자구수단이라고 하는 경제적 목적이 결합된 운동이었다.
둘째, 자본력이 취약하다보니 당장의 어려운 생계에 도움을 주는 만주좁쌀의 공동구매 등 중간이윤의 배제를 당면과제로 하는 消費組合 위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信用組合.販賣組合.利用組合 및 兼營組合의 다양한 형태가 있었고, 사회경제제도의 결함을 시정한다는 이념적 지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셋째, 광범위한 계층의 참여가 가능하였다. 즉 協同組合운동이 좌익에서도 우익에서도 운동의 주류는 못되는 반면에 어느 쪽으로부터도 적극적으로 배척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체적으로는 民族主義 陣營이 주도했다고 보이는데, 일제로부터는 協同組合 지도부가 社會主義思想으로 탄압을 받은 사례가 많았다.
넷째, 한편 鄕約.社倉.契와 같은 전통적 협동조직의 이념을 서양의 協同組合制度로 담아 내려는 노력과 함께 鮮洋折衷式 帳簿와 같이 실무상으로도 전통과 근대를 연결하려고 애썼다.
다섯째, 특히 農民共生組合의 경우에는 다른 협동조합처럼 소비조합의 기능이 우위를 차지하면서도 구매사업.판매사업.이용사업.신용사업을 겸영하는 綜合農協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平壤農民고무工場을 설립하여 고무신시장을 독점해온 미스이 재벌을 긴장시켰다. 이처럼 생산공장을 직영하여 獨占資本과 맞서는 消費組合의 수준을 오히려 해방후로는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農民共生生産組合에서 共同農場을 경영하기도 하였는 바 해방후로는 최근에 와서야 '營農組合法人'의 제도가 생겨서 농업부문에 生産組合이 도입되었다.
여섯째, 무엇보다도 協同組合에 관한 별도의 입법이 선행되지 않은 자발적 조직이었다. 이러한 자율적 협동조합운동에 자극된 일제는 10년 넘게 논의만 해오던 産業組合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곱째, 한편 민간협동조합은 그 운영에 있어서 자본지배를 철저히 배격하지 못한 점도 있었고, 특히 외상거래가 조합의 존립을 위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제는 대항조직으로 산업조합을 설립함과 동시에 민간협동조합의 지도부를 구금하거나 協同組合을 위험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음으로 양으로 이를 탄압하였다. 결국은 軍國 日帝와의 타협 속에 왜곡되기도 하고 탄압에 맞서기도 하다가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루어낸 귀중한 성과이었음은 민족해방운동의 관점에서나 협동조합운동의 관점에서나 과소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日本帝國主義의 侵奪期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과 독립운동 간의 상호 작용의 역사일 수 밖에 없다. 즉 식민통치는 저들의 역사이며 被支配와 抵抗이 우리 歷史의 本流이므로, 남의 역사를 가져다가 자기 역사의 본류처럼 착각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저들은 지배의 역사이기 때문에 모든 시책과 제도와 성과가 항상 역사의 표면에 나와있지만, 우리는 저항의 역사이기 때문에, 일부는 저들이 정해준 제도의 틀안에서 그리고 주로는 그 제도의 바깥에서 일제통치에 대항하여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기도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역사의 저변으로 잠복하여 훗날을 기약하기도 하면서, 우리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외형상으로는 단절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自主的 協同組合運動도 일제의 탄압으로 역사의 표면에서는 사라졌었지만 그 정신과 맥은 잠복해서 살아 있었기 때문에 解放이 되자마자 곧바로 다시 協同組合運動이 불타 올랐던 것이다. 해방후 이러한 協同組合運動이 없었더라면 당시 통치세력의 反協同組合的 情緖에 비추어 農業協同組合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이 어떤 형태로도 탄생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일제로 하여금 산업조합을 허용하게 만들었던 자주적 협동조합운동의 맥이 해방 후로 이어져서 오늘의 협동조합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제하의 자주적 민간협동조합은 한국협동조합의 정통성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랑스런 협동조합운동의 역사가 단절되고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독재정권에 의해 농협이 지배당하면서 협동조합의 원칙과 이념에 충실하지 못한 비협동조합적 모습으로 변질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 협동조합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소중히 되새기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고 올바른 좌표를 설정해나가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이다.

(2) 일제하 관제조합 : 농수축협의 물적 기반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일제시대의 민간협동조합과 함께 알아 보아야 할 것이 일제에 의하여 권장된 관제조합이다. 통상 농업분야에서는 금융조합과 산업조합을 들게 되며, 흔히 이에 곁들여서 그 하부조직이었던 식산계 및 비록 조합은 아니었지만 상호보완기능을 수행한 농회를 함께 논하게 되며, 어업분야에서는 어업조합과 수산조합이 있다.
금융조합은 1907년에 지방금융조합(농촌)으로 출발하여 1918년에는 금융조합(도시, 농촌)과 도금융조합연합회로 확대 개편되고 1933년에는 도연합회를 대체하여 조선금융조합연합회를 발족시키는 발전을 하였다. 1906년 설립된 농공은행의 보조기관으로 설립되어 처음부터 관제조합으로 출발하였지만, 독일의 라이파이젠 협동조합을 표방하여, 1914년에는 일시 조합원의 총회구성 및 의결권을 부여하기도 하였으나, 1918년 이후 금융조합령이 개정될 때마다 후퇴를 거듭해서, 시종 관제조합을 유지하였다. 또 사업도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겸영으로 출발했지만 신용사업 위주로 운영해 오다가, 산업조합이 허용되면서 1929년에 일시 경제사업을 폐지했으나, 1935년에 산하에 식산계를 조직하면서 다시 구판사업을 담당하였다.
금융조합에 대해서 하향식으로 설립된 것이긴 하지만 그 조직이나 운영은 대체로 독일의 라이파이젠 협동조합의 조직원리에 따른 신용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등의 긍정적 평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우위성과 특권을 부여받은 한국농촌의 수탈기관으로서 근대적 금융기관일지언정 결코 협동조합은 아니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산업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협동조합" 또는 "우리나라의 근대적 협동조합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만만치 않을 만큼 관제조합으로서는 가장 협동조합다운 것이었다. 따라서 농민들의 호응도 좋아서, 1926년에 기존의 임의조합 중 우량조합을 개편한 특산품조합으로 출발한 이래 1930년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에 발맞추어 일반농산품 취급조합으로 개편하거나 신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40년에는 115개소에 221천명의 조합원을 가졌다.
그러나 산업조합이 비록 한국인만으로 구성되었고 협동조합의 조직원리를 내세웠지만, 도연합회만 허용될 뿐 전국연합체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임원의 선임은 도지사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사업은 신용사업이 제외된 구매.판매.이용의 3종겸영으로 하는 등 조직.운영.사업에 대한 제약이 심했다. 따라서 산업조합에 대해서도 일본의 산업조합과는 달리 "비민주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한 말하자면 온전히 관의 시설기관"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더욱이, 산업조합의 설립은 일찍이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 식산국에 의하여 거론된 바 있었는데, 신용사업의 겸영문제를 두고 재무국과의 사이에 논란만 벌려 오다가, 1926년에 와서야 허용해 준 것이다. 즉, 삼일운동과 그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대두 및 민간협동조합운동에 자극된 일제가 그 유화책으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민간협동조합운동의 능동성과 산업조합의 피동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산업조합에 대해서는 총독부가 경계적 내지는 소극적 태도를 취했고 결국 정책적 지원을 제대로 못받은 산업조합은 일제말기에 총독부가 부채를 청산해 주는 조건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식산계는 1935년부터 산업조합과 금융조합 산하에 부락단위의 조직으로 육성된 것이다. 그러나 산업조합이 해산되므로서 모두 금융조합의 산하로 통합되었고, 1944년까지 전국에 약 5만개가 설립되었다.
농회는 1920년 경북에서 최초로 조직되어 행정보조기관으로서 임의 단체의 형식으로 출발하였으나, 1926년의 조선농회령에 의하여 1927년에 212개 단위농회와 13개 도농회 및 조선농회의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계통농회로 발전하였다. 그 업무로는 면화와 누에고치의 공출, 비료 등의 구매사업, 일본으로의 미곡수출을 계절별로 균등화하기 위한 미곡창고 운영 등을 담당하였다. 나중에는 1915년의 [조선중요물산동업조합령]에 따라 설립된 축산동업조합 및 도연합회와 산림조합까지도 통합하였다. 농회가 농민을 구성원으로 하여 회원을 위한 구판사업을 취급하기도 했지만, 그 전체적 성격은 기존의 각종 농업단체를 정리 흡수한 일종의 동업자단체로서 의결권이나 임원 임면권을 관에서 장악한 행정보조기관이었다.
일제말의 전쟁기에는 산업조합마저 해산해 버리고 조직상 금융조합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1944년에는 613개 조합에 조합원이 320만명에 달했다. 이는 전시통제를 위한 조합원 확충에 힘입은 것으로, 이 때의 금융조합은 천인저축에 의한 전비조달기관으로, 식산계와 농회는 전쟁수행을 위한 공출 및 배급기구로 전락한채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경과는 어업분야에서도 비슷하였다. 한일합방후 일제는 수산부문의 식민지 수탈을 위해 1911년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정한 지역내에 거주하는 어업자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어업조합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고, 어업자 또는 수산물의 제조 및 판매업자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수산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어업조합은 우리나라 어민들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수탈하려는 일제의 지원을 받아 1912년 어업조합이 최초로 설립되기 시작하여 1930년 어업조합의 도연합회가 경북에서 조직되고, 1937년 연합회를 회원으로 하는 조선어업중앙회가 발족되었다.1941년 말에는 2백6개 조합에 15만6천명의 조합원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하였다.
수산조합은 전 도(道)를 구역으로 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어업자를 조합원으로 하여 조직되었는데, 주로 일본인 어업자를 보호육성하여 그들의 어업자본화와 기업화를 도모하였으며 어장독점화를 추진해 주던 수산단체였다. 또한 일제는 1923년에 조선수산회령을 공포하여 수산행정보조기관의 성격을 지닌 수산회를 설립하고, 이들을 회원으로 하는 도수산회, 조선수산회를 조직하였다.
일제는 다시 1944년 2월에 수산단체 통합요강을 발표하고 수산관련 단체를 흡수 통합하여 계통조직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수산관련단체는 모두 해산되고 임해 12개도의 어업조합연합회와 18개의 각종 수산조합을 회원으로 하여 동년 4월에 사단법인 조선수산업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일제하의 수산단체는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조선수산업회를 단일한 중앙기관으로 하는 수직적 계통조직을 형성하였으며, 각종 수산단체들은 식민지 수산정책을 수행하는 행정보조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같은 일제의 관제조합들은 모두 농어민을 구성원으로 하여 購販事業 등 협동조합적 사업을 수행하면서, 마치 일제가 농민을 위하여 협동조합제도를 베풀기나 한 것처럼 행세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제는 이들이 구미 협동조합운동의 이념에 바탕을 둔 것처럼 꾸미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제조합을 한국의 전통적 협동조직과 관련시키려고 애썼다. 특히 산업조합령을 공포하면서는 계와 향약의 유풍이 산업조합제도를 통하여 그 고유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모두가 운영관리의 관치성 뿐만 아니라 사업도 조합원을 위해서 보다는 일본자본이 한국경제에 침투하여 지배하도록 돕는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제의 통치기구를 구성한 경제정책 집행기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국협동조합의 역사에서 언급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첫째, 협동조합을 자본주의의 산물로 볼 때, 일제시대의 한국을 자본주의사회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이 시대의 관제조합이나 민간협동조합이 모두 자본주의사회의 협동조합에 관한 제도와 이론을 운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조직된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시대가 자본주의국가의 식민통치와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으로 규정되는 시대인 만큼 관제조합은 식민통치의 수단이 되는데 반하여 민간협동조합은 민족적 저항의 수단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에 따라 관제조합에는 식민성과 함께 근대성이, 억압 및 통제의 기능과 함께 시혜 및 회유의 기능이 교착되어 있었다.
둘째, 따라서 협동조합에 대하여 일제는 수동적이요 우리 민족은 능동적인 입장에 있었던 셈인데, 특히 산업조합의 경우는 삼일운동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협동조합운동에 대응하여 일제가 통치 목적상 협동조합을 용인한 것이므로, 피지배의 입장에서는 비록 제약이 심한 형태로나마 협동조합을 쟁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로서는 마지 못한 조치이었으므로, 군국화와 함께 회유로부터 강압으로 정책이 바뀌면서, 결국은 해산되고 만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무엇보다도 해방후에 과거 일제의 통치기구를 구성하였다고 할 금융조합과 농회 및 어업조합의 계통조직이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그 재산과 인력을 오늘의 한국농협과 수협에 물려 줌으로써, 현실의 농수축협이 발족함에 있어서 물적기반이 되었다.

(3) 해방후 협동조합 설립운동의 좌절과 협동조합의 관제화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협동조합운동의 부활이기도 했다. 일제의 군국통치 아래 소멸된 듯 싶었던 협동조합운동이 죽은 것이 아니고 잠복해 있었다고 볼만하였다. 당시 농민들이 소원하였던 바는 농지소유의 실현이었으며 다음으로는 스스로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운영하는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부터 여러갈래로 협동조합조직운동이 전개된 데에서 추단해 볼 수 있다.
해방되던 당년에 결성된 좌익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이 협동조합전국연합회 발기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이듬해 2월에는 금융조합연합회(금련)가 금융조합을 협동조합으로 개편하자는 주장을 내걸고 협동조합추진위원회를 전국에 설치하였고 이어서 전국대회까지 개최하였다. 한편 우익의 농민단체인 대한독립농민총연맹(농총)에서는 1950년의 6.25 동란 이전까지는 지역단위에서 농민후생조합을 조직해 오다가 전시인 1951년에 이르러 농업협동조합조직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읍면단위 농업협동조합 발기대회와 동시에 각 시도연합회 및 농업협동조합중앙연합회의 결성에까지 이르렀다. 같은 해에 금련도 다시 농협추진위원회를 두고 1천여 개의 읍면조합과 도연합회 및 농업협동조합중앙회까지 결성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조직과 사업이 활성화되지 못하였고, 1952년 당시의 농림부장관이 주도하여 조직한 사단법인 농촌실행협동조합에 이르러 비교적 뚜렷한 실체가 이루어졌다. 이 조직은 각 시군에서 선발한 농촌 청장년을 1주일 교육하여 이들을 핵심요원으로 활용하였다. 이동단위의 실행협동조합과 이들의 연합체인 시군협동조합 및 전국단위의 협동조합중앙회라는 3단계로 구성되었는 바, 이동조합은 전국의 72%인 약 1만4천개 및 시군조합은 52%인 1백46개까지 조직되었고, 구판장의 운영과 제한적이나마 농산물판매사업도 실시하였다.
협동조합 설립운동은 협동조합법을 제정하려는 노력과 병행되었다. 정부 수립 당년인 1948년의 11월에 농림부가 농업협동조합법의 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한 바 있고, 이듬해 기획처가 일반 협동조합법안을 국회에 올렸으며, 다시 1950년 제2대 국회가 열리면서 농림부가 초안을 기초하였다. 이 무렵 1951년에는 정부 밖에서 금련과 농총이 각각 협동조합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휴전성립 후인 1954년에는 당시의 집권당인 자유당이 전당대회에서 건의하여 협동조합법안이 국회 농림위원회를 통과하였지만 재경위원회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는 1955년의 3대 국회에 연장되어 농림위와 재경위의 양안이 대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협동조합을 두고 크게 논란된 쟁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위하여 협동조합법의 제정을 선행시킬 것인가, 아니면 자연발생적이어야 하는가? 둘째 농업협동조합(농협)의 설립에 있어서 금융조합 등의 기존단체를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가? 셋째 농협에 신용사업을 겸영시킬 것인가, 아니면 구매·판매·이용·가공과 같은 경제사업만 하게 할 것인가? 둘째의 논점은 농협운동의 주도권에 연결되었던 바, 새로 만들자는 주장의 내부에도 협동조합운동의 지도자들 간에 반목이 심해져 실제의 조직정착을 더디게 한 점도 있었다. 셋째의 논점은 정부안에서 농림부와 재무부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이는 다시 국회의 농림위와 재경위의 대립으로 연장되어 협동조합법 제정에 가장 큰 현실적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경과로부터, 일제치하에서 겪었던 금융조합, 산업조합, 민간협동조합의 상호관계가 금융조합, 실행협동조합, 농총 등 민간협동조합 사이의 관계로 유사하게 반복되고, 또 산업조합을 둘러싼 총독부 식산국과 재무국의 갈등이 농림부와 재무부의 다툼으로 재현된 듯한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또한 일제하 농업단체의 재산은 한국농민이 피와 땀으로 조성된 것인데 이를 농민조직이 접수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모체로 하여 발족되는 모양새가 된 것도 씁쓸한 일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해방 후 일제의 잔재청산과정이 매우 파행적이었고 남북의 분단과 좌우익의 대립 및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꽁꽁 얼어붙었던 50년대 역사의 일반적 흐름과 깊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우호적인 상황 속에서도 협동조합의 설립은 시대적인 요구로서 끈질기게 추진되었으므로 비록 절름발이라도 설립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농민의 요구가 농업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하는 데까지는 미쳤으나 그 단체를 제대로 키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통치세력이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농민도 스스로 그 필요성을 관철시킬 만큼의 역량은 못되었던 상황에서 빚어진 한국협동조합의 모습이었다고 하겠다.
농업협동조합법의 제정을 둘러싸고 금융조합연합회와 농민회, 농림부, 국회가 논의를 거듭하였으나 합의에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협동조합의 금융조합으로 부터의 탈피와 자주적인 협동조합의 건설론과 일제 금융조합의 유지론의 현실적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1954년 8월부터 주한미경제사절단이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한미경제조정관실에서는 이미 [존슨]과 [쿠퍼]에게 "한국의 농업협동조합 금융입법에 관한 건의서" 작성을 의뢰하였는데 1955년 가을에 [존슨]안이 제출되었다. '존슨'안에 따르면, 금융조합연합회는 농업은행(農業銀行)으로, 금융조합 및 동 지소는 협동조합체의 농업조합(農業組合)으로 조직.개편하여 농업은행이 농업조합에 대한 자금의 단일 공급체가 되고 농업조합은 신용, 구매, 판매, 이용 등 4종 겸영체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존슨'안은 농업은행, 농업조합 양 기관이 구성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그 당시 한국농협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금융조합의 잔재세력과 농민의 결속을 원하지 않은 이승만정권은 '존슨'안에 반대하였다. 이승만정권이 '존슨'안에 반대한 이유는 '존슨'안대로 시행되면 농업조합이 정부가 방출한 자금을 농업은행을 통해 공급받아 독자적으로 신용, 구 판매, 이용사업을 하게 되므로 정부가 농업조합을 직접 통제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한미경제조정관실도 이를 미리 예측하고 사태가 예상대로 진행되자 1956년 2월에 '쿠퍼'안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농업은행과 농업협동조합을 갈라놓으면서 일제하에서 내려오던 금융조합과 산업조합을 재현시킨 '쿠퍼'안인 것이다. '쿠퍼'안은 농업은행과 농업조합을 시군단위로 조직하여 농업조합과 농업은행을 병립토록 하고 농업조합이 신용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일제시대에 총독부가 신용사업을 할 수 없는 산업조합을 설립하여 민간의 자발적인 협동조합운동을 압살(壓殺)하고 산업조합의 자멸을 통해 금융조합이 완전히 농촌을 장악하도록 한 것과 똑같은 의도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쿠퍼'안에 기초하여 농업은행법과 농업협동조합법이 1957년 2월에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의 반대로 농업은행이 농민에게 직접 여신을 하도록 법을 개정하여, 1958년 3월에 공포하고 농업은행과 농업협동조합이 발족하게 된다.
법제에 의하여 기존의 협동조합조직을 모두 부인해 버린 채 내용상으로는 식산계 및 농회와 금융조합의 일반업무와 재산을 인수하여 출범한 1958년의 이른바 구농협은 조직면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도와 후원 아래 급속히 확산되었다. 1958년 말에 이미 약 8천개의 이동조합과 100여개의 시군구조합, 56개의 원예조합과 99개의 축산조합 및 11개의 특수조합이 설립되었고, 1960년 말에는 각각 약 19천개와 약 170개, 80개와 152개 및 27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사업의 신장은 조직과 달리 부진하였고 경영은 어려웠다. 비료, 농기구 등의 구매사업과 계란, 고공품 등을 주로 하는 판매사업 및 창고사업을 추진하였지만, 사업체계의 미비와 자금부족 및 과도적인 혼란이 겹쳐서 몇몇 사업을 제외하고는 실적이 미미하였다. 더욱이 농업은행(농은)을 통한 사업자금의 차입도 농협과 농은 사이의 유기적 협조체계가 결여되고 사업체계도 정비되지 못해서 원활할 수 없었다.구농협이 경제단체로서의 본래의 업무에는 관심이 없고 집권당의 정치도구로 전락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반면 농업은행은 그 전신인 1956년의 주식회사 농업은행에서부터 농업금융의 일원화와 정부재정융자의 강화로 탄탄한 발전을 해 왔다. 그 때까지 시중은행이 취급해 온 각종농산물 수집자금, 양묘자금, 상묘잠종자금, 단기수리자금, 전분자금, 고공품자금, 면화자금, 인삼자금, 엽연초자금, 구견(누에고치구매)자금이 착착 농업은행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농업은행의 발족과 함께 농업자금의 차입은 농은만이 할 수 있다는 농은법의 규정에 따라 한국산업은행이 취급해 온 수리자금업무도 이양받았다. 이러한 농업은행은 당시 경영위기에 허덕인 농협과는 달리 한국은행에 필적하는 최고의 직장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4 19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1961년 1월에 농업은행을 개편하여 농업협동조합중앙금고를 설치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여기에 입각하여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농업은행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하 금융조합 세력은 농업은행이 농업협동조합 중앙금고로 개편되면 자신들의 영역을 잃는다고 판단하고 이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다시 5 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다. 1961년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구농협법과 농은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농협법을 제정함으로써 1961년 8월 15일에 농은과 구농협을 통합한 종합농협을 발족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현존 농협의 시작이다. 종합농협이란 다목적협동조합이라는 뜻이지만 특별히 구매, 판매, 이용, 가공과 같은 경제사업 뿐만 아니라 신용사업을 겸영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는 당시 미맥위주의 소농구조에 적합한 협동조합형태로 평가받고 있다.현재의 농협은 조직의 체계와 사업의 내용에서 출발당시와는 많이 다르지만, 법적으로는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종합농협은 농은과 구농협의 통합이라는 형태를 띄면서 구농은의 사업과 재산이 시군농협과 중앙회에 승계되었으므로 이를 묶어서 은행법상 하나의 금융기관으로 보기로 하였다. 군조합이 중앙회에 흡수되어 그 지부가 된 이후로는 농협중앙회의 신용부문이 은행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는 신용사업을 겸영하는 종합농협이라는 개념과는 또 다른 측면이다. 조합의 신용사업이란 조합원 상호간에 자금을 유무상통하는 데에 기본을 두는 상호금융이다. 그런데 농은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은 조합간의 자금을 중개하고 여유자금을 운용해 주는 상호금융연합회의 기능보다도 개발금융 및 일반상업금융의 기능, 즉 은행업무가 주된 것이다. 실질적인 상호금융연합회의 기능은 종합농협 발족 후에 1970년대부터 비로소 주목할 만한 일이 되었다. 아무튼 한국농협의 은행기능은 한국농협에 고유한, 그리고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한국농협의 특징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61년 8월에 탄생한 종합농협의 겉모습은 농업은행이 농협에 흡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농업은행에 농협이 흡수되어 일제하의 금융조합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농협중앙회 내에는 일제하 금융조합의 인맥이 주요하게 자리잡았으며, 협동조합으로서의 기능에 전면적인 마비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로서 8.15이래 금융조합의 재생이나 농협의 금융조합에로의 복귀를 반대해온 모든 몸부림은 허사로 되고 말았다.
종합농협체제가 구농협과 다른 또 하나의 중대한 특징은 중앙회장을 선거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꾼 것이다. 즉 농업은행에 두었던 운영위원회제도와 함께 회장을 운영위원회 제청으로 대통령(내각수반)이 임명하는 방식을 새로운 농협에 연장시켰다. 정부는 이처럼 농협법에 의하여 중앙회를 장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조합장을 이사회에서 호선하기로 되어있는 농협법의 규정을 정지시키는 별도의 임시조치법을 만들어서 중앙회장이 농림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조합장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는 중앙회장의 위임을 받은 도지부장 또는 군조합장이 농림부장관의 위임을 받은 도지사 또는 군수의 승인을 받아 임명했다.
이처럼 정부에 의하여 운영이 장악된 농협은 그 조직과 사업의 양면에서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1961년 말에 중앙회와 140개 군조합으로 상층조직을 완료했을 뿐만 아니라 특수농협 101개, 이동조합 약 20천개에 달했으며, 남은 미조직지구에도 급속히 확산되어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었다. 이와 함께 정책금융, 정부양곡 및 정부비료의 조작, 가공농산물의 정부대행구매업무 등 정책사업을 농협에 담당시켰다.
군사정권은 4월혁명으로 표출된 정치민주화와 경제발전 중에서 후자만을 그들의 정치적 비합법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궁극적 목표로 선택했다. 즉 조국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그 실천수단으로 경제개발을 들고 나옴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국민소득수준과 고용상황 및 물가불안 등에 비추어 경제개발은 군사정권이 국민에게 수용될 수 있는 유일하고 가능한 길이었다. 이로부터 이른바 개발독재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경제위기의 타개에서 정권탈취의 근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군사정권이 당시의 고질병이었던 농어촌고리채정리와 함께 농업협동조합의 정상화를 서두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새로운 농업협동조합법을 제정하여 구농협과 농업은행을 통합함으로써 사업과 살림이 가능한 농협의 틀을 짜주는 한편으로 정부가 주도적으로 농협의 조직과 육성에 나선 것이다. 취업자의 6할 이상이 농림어업에 종사하며, 그나마 사실상 잠재실업의 상태에 있었던 당시의 한국은 농업사회였다. 비록 외자를 과감히 도입하여 공업화를 추진한다 하더라도 국내자본과 인력(교육)의 조달은 농업에 의존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식량조달을 비롯한 민생의 안정에 농업생산의 안정과 발전은 절대적 요청이었다. 즉 농업경영의 담당자는 농민이지만, 농민이 농사를 잘 지으려는 소망에 못지않게 농민으로 하여금 농사를 잘 지어내게 해야 할 절실한 요구가 통치세력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농업생산의 합리화에 기여하되 정치적으로는 자율성을 박탈당한 협동조합, 즉 개발독재기구를 구성하는 협동조합이 탄생된 것이다. 즉 경제의 안정과 개발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던 정부의 농업지원기능 가운데 특히 자금융자, 자재공급, 생산물판매와 같은 상업적 지원기능을 농협에 맡기면서 경영관리층의 임명제를 관철시킨 것이다. 외형상 같아 보이는 기능이라도 농민이 스스로 힘을 모아 행하는 기능과 정부의 서비스를 대행해 주는 기능은 그 의미가 다르다. 정부서비스는 굳이 협동조합이 아니라도 행정기구를 통하거나 아니면 정부출자의 회사 즉 공사를 만들어서 전달할 수 있다. 공사의 경영층을 정부가 임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경우에는 정부의 상업적인 농업지원 서비스를 농협조직에 맡김과 동시에 이름은 협동조합으로 내건 채 사실상 공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협동조합에 이런 일을 맡긴, 다시 말하면 굳이 협동조합이라는 이름과 형식을 내건 정치적 이유는 농민의 자발적 협동조합을 막는 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구역에 같은 목적의 협동조합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농협법의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못 쓰게 한 법제가 실제에 있어서 그러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결국 정부통제협동조합인 농협만이 존립한 것이다.
종합농협의 발족 이후에 수산업협동조합이 출범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어민들을 포용하고 있던 각종 수산단체는 여전히 감투싸움에만 몰두하여 조합원을 위한 조합이 아니라 조합원을 착취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일반 어민들로부터 팽배하여 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5년 '어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공포되어 기존의 조선수산회가 한국수산회로 개칭되고, 1952년에 또 다시 대한수산중앙회로 개칭되었다.
62년 1월 수산업협동조합법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의결하였는데, 이로써 수산업협동조합이 탄생하게 된다. 1962년 3월 24일에는 농림부장관 명의로 '수산업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운영지침'을 전국 수산단체에 시달하여 구(舊) 수산단체를 수산업협동조합 체제로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적용한 수산업협동조합법의 부칙 제3조는 "기존의 어업조합, 수산조합 및 대한수산중앙회는 본법에 의한 어업협동조합, 수산제조업협동조합,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로 본다"고 규정하여 기존의 수산단체를 그대로 인정한 채 수협을 설립하게 되었다.
1962년 4월 1일에 설립된 수산업협동조합은 지구별 어업협동조합 86개, 업종별 어업협동조합 11개, 수산물제조업협동조합 2개 등 99개의 회원조합을 거느리고 출범하였다. 수협의 설립과 함께 6개 도에 존재하던 도단위 어업조합연합회는 일제히 해산되고 그 권리와 의무를 수협중앙회가 인수하였으며, 지구별 조합의 하부조직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부락 단위의 어촌계를 조직하였다.
수협은 조직과정에서부터 관 주도가 중심이 되면서 중앙집권적이고 하향적으로 출발하였으며, 일제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출범한 것이다. 결국 수협이 발족 당시부터 안고 있던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수협의 조합원은 조합에 대해, 조합은 계통조직에 대해 애착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수협의 자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어 왔다.


(4) 민간에 의한 신협설립운동과 정부 중심의 새마을금고 설립

농업의 비중이 매우 컸던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농업과 수산분야의 협동조합이 관제화되어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훼손당하고 있던 시점에서 신용협동조합의 자발적인 설립운동이 도시지역에서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의 한국은 '외국원조'와 '가난'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카톨릭계 인사들 중 일부는 한국인의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원조'가 아닌 '자조'의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방법의 하나로 신용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부산피난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메리가별 수녀와 서울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장대익 신부, 그리고 평양교구 월남민들 속에서 활동하던 '협동경제연구회' 사람들이었다. 특히 메리가별 수녀는 캐나다 코디연구소와 세계신협협의회의 협조까지 얻어 신협의 설립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메리가별수녀가 주축이 되어 1960년 5월 1일 한국최초로 부산지역에서 '성가신용협동조합'이 탄생하고, 6월 26일 장대익 신부와 협동경제연구회의 주도로 서울에서는 '카톨릭중앙신용협동조합'이 탄생되었다.
이후 한국의 신협운동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조직은 바로 '협동조합교도봉사회'라는 조직이었다. 메리가별 수녀를 주축으로 하여 만들어진 협동조합교도봉사회는 신협운동의 확산을 위한 지도자 양성교육, 조합원 교육, 홍보, 조직지도 등 종합적인 업무를 담당했는데 이들에 의해 조직된 신협은 1962년까지 17개나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만들어진 카톨릭 중앙신용협동조합의 지도에 의해 1962년까지 4개의 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이원화된 조직지도활동은 1963년 협동조합교도봉사회가 '협동교육연구원'으로 개칭하여 정식 발족하고 1964년 '신협연합회'가 만들어지면서 일원화되었다.
1963년에는 5.16 쿠데타직후 만들어진 재건국민운동본부 소속멤버들에게 신협교육을 시켰는데 이후 이들은 현재의 새마을금고의 모태가 되는 신용조합들을 만들어 나갔다. 또한 신협운동의 초기부터 현재의 시도연합회의 전신인 지구평의회들이 조직되어 1979년까지 존속하였다.
1964년 이미 50여개로 불어난 신협은 임의 단체인 신협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운동은 현재의 모습 중 거의 대부분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는데, 국제공제연합회에 가입하고 세계신협협의회에 가입하는 등의 국제활동을 벌이면서 동시에 신용협동조합법 법률제정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운동에서 적극적인 활동가들의 땀과 눈물이 힘찬 도전정신으로 꽃피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1972년 8월 1일 제82회 임시국회에서는 정부입법으로 신협법을 통과시켰는데 신협법의 통과는 한국신협운동을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 시기는 유신과 제 5공화국, 그리고 새마을운동 등으로 특징되는 시기이며 한국에서 산업화가 가장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973년에는 277개 조합대표가 모여 신협법에 의한 특별법인 신용협동조합연합회가 공식발족하였다. 연합회의 공식발족은 연합회로 하여금 지도검사사업, 농촌개발 및 신용공제사업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독일 미제레오 재단의 도움을 받아 연수원을 건립하는 등 교육사업을 본격화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 신협운동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발전하던 새마을금고와 모든 지역, 계층에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움을 본격적으로 겪기 시작했다. 또한 신협법의 제정은 한편으로 정부의 규제를 가져왔다. 기존의 자율적인 협동조합으로서 신용협동조합이 이제 정부의 감독을 받는 기관으로 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규제는 바로 신규조직인가에 대한 기준이 '행정지시'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또한 1982년부터 단위조합들에서는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발생하였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신협의 금융사고는 총 47건으로 금액은 총 79억여원에 달했다. 신용협동조합에서의 금융사고는 일반 상업금융에서의 사고와 달리 그 피해대상이 주로 다수 서민층이었기 때문에 금액은 작아도 그 사회적 여파는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계통기구인 연합회는 재무부와 은행감독원의 직접감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계통기구에서의 사고도 종종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일어났던 강도높은 감사와 규제는 신협인들에게 자율성이 상실되었을때 닥쳐오는 어려움을 느끼게 했으며 신협의 조직확장과 정상적인 업무기능의 마비 내지 위축을 가져왔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신규조직에 대한 인가는 대폭 축소되었으며 검사기능의 강화로 인해 1983년부터 85년 사이에 인가취소된 조합은 총87개에 이르렀다. 신협연합회는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1984년 안전기금을 설치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진통에도 불구하고 신협의 규모는 계속 성장하여 1986년에는 자산 1조원 돌파, 조합원 1백 20만명, 조합수가 1천2백66개로 늘어나는 등 대규모 협동조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87년부터 신협은 법률개정과 중장기 발전계획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이 당시 신협의 연평균 성장률은 최고가 되었다. 1988년 3월에는 간부직원들의 전문적인 교육을 위해 설립된 신협전문대학과정에 1백여명이 입학하는 등 교육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1988년 12월 개정된 신협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연합회-단위조합의 2단계 조직을 중앙회-시도별 연합회-단위조합의 3단계 조직으로 바꾸어 시도 연합회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단위조합에 대한 지도, 감독 기능을 강화하고 지역발전과 지역금융경제활성화를 위한 준비에 유리한 체계를 갖추었다.
둘째, 단위조합에 전무, 상무 등 간부직원을 둠으로써 비상근 임기, 명예직 임원에 의한 조합경영의 비전문성을 극복하고 전문경영의 길을 열어 놓았다.
세째, 단위조합의 업무에서 내국환 및 국가 공공단체 금유기관의 대리업무를 수행케 하는 등 업무를 확장하고, 조합원 총회시 의결권 대리제도를 폐지하고 총회개의 정족수 조항을 강화함으로써 조합원에 의한 직접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단위조합의 정관을 중앙회장의 모범정관례에 따르게 함으로써 조합간의 공통성을 높였다.
이 시기의 중앙회는 이전의 연합회보다 신협전체의 연구와 홍보에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신협의 대국민 홍보활동은 다채롭게 전개되었으며 신협중앙회 연구소에서는 신협운동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연구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5) 개발독재하 농협의 성장과 농협민주화운동

5 16군사정권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추진을 위해 농업 농촌을 그 발판으로 삼았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농협을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5 16군사정권에 의해 탄생한 종합농협은 60년대 이후 개발독재정권이 추진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과 농민통제전략으로 인해 그 사업과 활동면에서 협동조합의 본래적 기능에서 멀어지게 되고 농협은 산업화의 중요한 파이프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개발독재정권하에서 농협은 첫째, 정부정책대행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초기 농협은 정부위촉사업(정책사업)의 비중이 높았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경영기반을 다지게 되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는 신용사업에 주로 의존하였다. 또한 정책사업인 비료. 농약의 구매사업, 정부양곡 방출대행과 정책판매를 중심으로 한 판매사업, 창고업을 중심으로 한 이용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정부의 정책대행기능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향식 업무체계가 형성되어 중앙회 업무가 단위조합들의 계획과 요구에 의해 수립되지 않고, 중앙회의 일방적인 계획에 단협의 사업을 짜맞추는 식의 파행적인 구조가 형성되었다.
둘째, 개발독재정권 하에서 농협은 농민통제기관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61년 5 16군사정권에 의해 탄생한 종합농협은 출발 당시, 중앙회장과 조합장을 임명제로 규정함에 따라 행정기관과 같은 관료조직의 속성을 띠게 되었다.
1962년 5 16군사정권은 '농업협동조합 임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단위조합장의 임명과 해임을 중앙회장에게 위임해 버렸다. 이에 따라 농협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단위조합장은 중앙회장이 임명하게 되었다. 중앙회장은 형식상으로 농수산부장관과 재무부장관이 재청하여 대통령이 임명하였지만, 실제로는 정부여당의 마음에 드는 인사가 임명되어 왔다. 중앙회 간부인 부회장과 이사는 농수산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회장이 임명하고, 감사는 농수산부장관이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초창기 농협의 중앙회장 이하 간부직들은 군출신과 관료출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단위조합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임시조치법에 따라 조합장은 총대회에서 구성한 '9인 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한 2명 중 한 명을 중앙회장이 임명해 왔으며, 84년에는 법개정으로 총대회에서 추천한 2명 중에서 도지회장이 임명하거나 제3자를 직권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개정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군수와 지역유지들이 도지회장과 사전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임시조치법'에 의한 조합장 임명은 88년 농협법이 개정될 때까지 무려 26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중앙회장의 임명권을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농협의 사업이 협동조합적으로 계획되고 운영될 수 없었다. 단협조합장 역시 중앙회장에 의해 임명되면서 조합원을 위한 사업보다는 중앙회의 지시를 따르는 데 급급하였던 것이다.
독재정권은 조합장 임명권 뿐만 아니라 정책사업을 통해서도 농협을 지배하였다. 초창기 농협은 안정적인 기반확보를 위해 정부의 정책사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권은 정책사업을 빌미로 농협에 대한 예산승인 및 각종 사업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여 농협을 통제한 것이다.
또한 이동단위조합은 73년까지 읍면단위조합으로 통합되었으며, 81년에는 시군조합이 없어지고 중앙회 직속관할체제인 시도지회-군지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로써 단위조합은 중앙회의 회원조합으로 직접 연결되었다.
1980년 우리나라 협동조합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바로 군사정부에 의해서 축협중앙회 설립을 추진한 일이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위원회는 1978년부터 쇠고기수입이익금으로 조성한 축산진흥기금조직과 농협중앙의 축산사업 및 축산조합을 합쳐 축협의 계통조직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의 축산조합은 일본총독부가 1916년에 전국의 군소재지마다 축산조합을 설치하여 한우생산농가와 매매인 및 매매중개인을 강제로 조합원에 가입시켜 한우유출을 통제하고 감시하도록 하고 이를 축산동업조합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축산동업조합연합회를 설치하였으나 1933년 제2차 산업단체 정리 때 군과 도의 농회(農會)에 각각 합병되었다.
해방 이후 협동조합 건설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1952년 12월에 일제하 협동조합운동 추진세력과 축산인에 의해 각 시군 축산동업조합이 전국의 1백53개 지역에서 일제히 설립되었고 그후 1957년에 제정된 농업협동조합법에 따라 축산동업조합의 명칭은 축산협동조합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1961년에 농업은행과 농협이 통합된 종합농협이 탄생됨에 따라 축협은 심사에 의한 회원가입제도를 적용받게 되었다. 그 결과 1960년말까지 1백52개였던 축산협동조합 가운데 단지 61개소만 농협의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나머지는 비회원조합으로 남거나 인근 시군농협에 흡수되었다.
1980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에서 농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첫째, 부정축재자 재산을 환수하여 농어민후계자 육성기금으로 사용한다. 둘째, 전문협동조합 체제를 육성하기 위해 경종농업생산자단체로서의 농협중앙회, 수산업 생산자단체로서의 수협중앙회, 축산업 생산자단체로서의 축협중앙회를 농협으로부터 각각 분리,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축산동업조합이 농협으로 통합된 지 22년만에 다시 분리된 것이다. 1980년 9월에 '축산진흥체제정비추진대책'이 마련되고 축산진흥회안에 축협중앙회 설립을 위한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축산진흥회는 축산물 수요증가에 대비하여 축산물 생산지원과 유통전담기구를 설치하고 축산진흥기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1978년 4월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축산진흥회는 실질적인 하부조직을 갖추지 못한 채 본래의 취지인 축산기반조성 등 축산진흥업무보다는 축산물 수입과 수입사료 공급에 치중하였으므로 양축농가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조직이었다.
1980년 12월 18일에 농협과 축산진흥회가 합의약정서를 교환하여 농협중앙회의 축산업무와 재산, 그리고 그 때까지 특수조합으로 농협중앙회에 속해 있던 축협이 분리되어 축협중앙회가 탄생하였다. 설립 당시 축산업협동조합은 1백개의 회원조합에 7백63명의 임원(비상임임원 포함)과 3천5백81명의 직원으로 출발하였으며, 총자산은 4백34억5천9백만원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축협중앙회는 농협중앙회에서 축협을 분리하고 축산진흥회가 이를 흡수하여 설립되었다. 그러나 축협은 그 당시 신군부의 초헌법적 권력기관이었던 국보위의 결정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한 축산인들의 의사가 무시된 채, 1961년 농협의 탄생 때와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하향식 조직화를 거치게 되었다.
축협분리는 특수조합의 육성과 지원에 대한 종합농협의 소극성과 경직성을 한 이유로 꼽을 수 있지만, 신중한 연구와 폭넓은 공론화과정을 거치지 않고 강제적으로 진행되어 최근 또다시 농축협 통합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등 부작용을 낳았다. 농협과 축협간의 경쟁과 기능의 중복에서 오는 협동조합원칙의 무시와 비효율성에 대해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어 왔으며, 중앙단위에서 축협이 농협에서 분리된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는 비판의 소리도 높다. 뿐만 아니라 지역단위 축협의 경우, 축협의 설립 당시 조합원자격을 대폭 완화함으로써 양축농가가 아닌 농민이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등 조합원 부실화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한편 농협은 1961년 탄생 이후 조직과 사업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회원농협의 경우 자산은 1961년에 1백33억원에서 1995년에 47조5천74억원으로 늘어났고, 직원은 4,126명에서 52,269명으로 늘어났다. 농협중앙회의 자산은 1961년 1백93억원에서 1995년에 48조9천6백64억원으로 증가하였으며, 직원은 926명에서 17,91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60년대 출범한 관제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이루말할 수 없었으나 1960년대에는 아무런 농민조직이 없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1970년대 초에 카톨릭 농민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여 농협의 부조리에 대해서 싸우며 자료집과 농협실태조사연구보고서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농협을 자신들의 조직으로 생각치 않고 관청으로 생각하여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으나 가톨릭농민회의 조직, 수원아카데미하우스에서 실시된 농촌지도자교육을 통해서 의식화된 농민운동의 선각자들에 의해서 농협의 부조리를 시정하는 싸움들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농협민주화운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83년 8월 1일부터 12월말까지 조합장직선제실시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가톨릭농민회가 전개하면서 선이자납부거부, 출자배당의 현금화, 이용고배당요구 등 일상적 과제와 함께 조합장 직선제 쟁취라는 근본적인 개혁을 목표로 하여 싸움이 전개되었다. 특히 87년 4.13호헌조치가 내려지자 농협중앙회가 가장 먼저 지지성명을 내는데 격분하여 농협민주화요구는 더욱 불을 붙기 시작하였다. 1987년 9월에 전국농민단체 농협민주화추진협의회가 주최가 되어 농협민주화 공청회가 열렸고 1988년 12월 31일에 여소야대국면하에서 농협법이 개정되었다. 아울러 축협법과 수협법 및 산림조합법도 개정되었다. 조합장과 중앙회장의 직선제, 사업계획과 수지예산의 사전승인을 사후보고로 전환한 것이 개정의 주요 내용이다.
어찌보면 1980년대의 민주화열기가 제도적으로 농협조직에 가장 먼저 수용되어 1989년부터 임기 4년의 조합장을 조합원투표로 선출하고, 1990년 4월에 직선조합장으로 구성된 중앙회 총회에서 중앙회장과 상임감사를 선출하였다. 조합장과 중앙회장의 직선제는 농협민주화의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직선조합장은 조합원이 필요로 하는 농산물의 판매사업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조합에 따라서는 조합원을 위한 자체사업의 확대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중앙회 내에서도 조합장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져갔다. 특히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과정에서 농협의 쌀수입개방반대서명운동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었다. 당연히 정부의 입장에서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농협은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 농협의 민주적 관리 즉, 조합원에 의한 운영을 뜻한 것은 아니다. 일제하부터 오랜 기간동안 관에 의해 상명하달식으로 운영된 농협이 하루 아침에 조합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농협중앙회의 각종 사업은 정부의 정책과의 관련성을 단절될 수 없었고 단위농협은 여전히 중앙회의 감독과 통제를 그대로 받게 되었다.
즉 형식적인 민주화는 이루어졌으나 실질적인 면 즉, 조직의 운영과 사업내용면에서의 농민조합원의 농협으로의 탈바꿈이 커다란 과제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합원과 임직원에 대한 협동조합교육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즉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협동조합의본질 및 원칙에 합의를 바탕으로 조합원과 임직원이 다시 하나로 결합해가려는 노력이 절실하였으나 현실은 그렇치못하였다.
1993년 소위 문민정부의 등장은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이는 농업과 농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농업의 경우에는 개방화의 파고가 더욱 높았으며, 농업도 과거와 같은 고립분산적인 소농체제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고 농정도 과거의 중앙집권식식량증산농정은 종말을 고해야 했다. 이제 농업의 활로 개척을 위해 농협의 협동조합적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요구되었고 이는 농민조합원의 참여와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4년말 농협법, 축협법, 수협법, 임협법의 개정으로 위로부터의 또한차례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단위농협의 자율성의 강화와 중앙회 운영에 있어서 회원농협의 의사반영구조의 강화, 그리고 농협의 경제사업적 성격의 강화였다.
그러므로 현재의 농협은 아직도 운영의 민주화(조합원에 의한 조직운영), 사업의 농민화 및 효율화과제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1990년대 들어와 농림어업분야에 협동조합이라는 형식을 띤 또하나의 조직이 탄생하였다. 바로 임업협동조합이다. 1993년 12월 12일부로 산림조합이 임업협동조합으로 전환된 것이다. 현재의 임업협동조합은 1949년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산림조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53년 "산림보호임시조치법"에 의해서 전국 이동단위로 산림계를 조직하여 이를 산림조합의 구성원으로 하였고, 1962년에 제정된 산림법에 의해서 산림조합은 특수법인으로 자리잡았다. 특수법인 산림조합은 산림계를 1차단계로 하여 중간단계로는 시.군산림조합을 두도록 하였으며, 중앙에 산림조합중앙회를 두는 3단계의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더나아가 1980년에는 산림법에서 분리되어 산림조합법을 제정하였다. 1988년까지 산림조합장과 중앙회장이 관에 의해 임명되었고 1989년에 법 개정으로 직선으로 바뀌었다. 1990년 현재 산림조합은 산림조합중앙회, 9개 산림조합중앙회 도지부, 140개 산림조합, 17,063 산림계, 1,455천명 산림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앙회와 산림조합에 근무하는 임원은 284명, 직원은 1,383명었다.
산림조합의 주요사업은 임업기술지도사업, 산림경영 및 특수개발지역사업, 양묘.조림.사방.보호사업, 임도.조경.사방.산림토목사업, 산림개발사업단 운영, 임산물의 생산.수집.판매사업, 산림개발자금의 취급 및 임업자금의 조성.운영, 정부지시사업과 차관사업 등이었다.
그동안 산림조합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6.25동란 전후에 극도로 황폐화된 산림의 녹화 및 산림의 보호를 목적으로 산주와 현지주민에 의한 산림계를 구성원으로 한 정부의 행정관리적 동원체제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산림조합은 정부의 산림 조성사업의 보조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산림의 경제적 운용 및 임산물의 생산.판매사업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고 산림주의 자주적 운영을 목표로 하여 1993년 12월 12일부로 산림조합은 임업협동조합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1993년 말에 제정된 임업협동조합법에 따라 단위임협은 상호금융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6) 민주화의 물결과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의 움직임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란 영국의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에서 시작된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동시에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 즉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소비자들이 주체가 되어 보다 싼 값으로 공동구매, 이용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활의 전 측면에서 협동적인 방식을 원용 생산, 구매, 이용을 조직하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형태이다.
특히 최근 대두되는 환경파괴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전통적인 소비자협동조합의 이념에 '환경보호'라는 현대적 이념이 결합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

① 제1기(1982∼1992)

신협활동가들을 중심으로 1980년대 초반부터 소비자협동조합운동과 중앙회 설립 논의가 진행되고 1983년 중앙회가 창립되었다. 이 시기에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은 구판장 형태의 매장과 본격적인 조합설립을 위한 준비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독일을 비롯한 해외단체들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아직 본격적인 조합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시기였다.
본격적인 운동은 1988년 한살림 공동체 소비자협동조합이 창립되고 여성민우회 생협, 그리고 몇몇 신협에서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가 사단법인 형태로 인가되고 소비자협동조합법 시안이 작성되어 입법추진 일저이 확정되었다. 1990년도에는 소비자협동조합법안이 확정되어 정부에 제정건의가 시작되었다.

② 제2기(1993∼현재)

1993년에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확정되었다. 중앙회와 단위조합이 모두 이러한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때부터 한국에서 새로운 협동조합운동부문이 시작되었다.
1994년에는 그간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대학생활협동조합이 소비자생활협동조합중앙회 대학생협부문으로 통합되고, 안성의료생협과 신촌공동육아생협이 만들어지는 등 생활협동조합의 영역이 기존의 유기농산물직거래 운동에서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생활협동조합연구소가 설립되고 1995년도에는 생활협동문화서비스센터가 설치되어 조합원들에 대한 부대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또한 1999년도에는 생협법이 제정되었다.


2)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태동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출자하여 소유권과 운영권을 갖는 모든 형태의 생산기업과 서비스기업을 말한다. 노동과 소유가 일치한다면 업종에는 제한이 없으며 다른 ㄹ형태의 협동조합 중에서도 실무자, 노동자들이 소유와 경영에 참여할 경우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가. 노조내지 노동자들에 의한 회사인수
마산의 광동택시와 충무의 신아조선의 경우로 전자는회사지분 전체를 후자는 회자시분 중 53%를 노동조합이 인수한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회사경영의 특수한 변화가 있을때(도산직전이거나 사주와의 협상이 특별한 국면에 있을때) 인수기회가 생긴다.

나. 노조활동가들에 의한 회사 창립
서울의 공동체 한백과 첨단기공, 인천의 옷누리를 비롯한 2개 봉재공장, 고양시의 협성생산공동체 등이 그것이다. 퇴사한 노조활동가들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의 기술을 바탕으로 노동집약적인 공장을 만들어 낸다.

다. 도시빈민지역에서의 생산공동체 설립
다섯개 자활센터내의 생산공동체들과 우리건설의 사례가 그것이다. 도시빈민지역에서 실업자, 일용직 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라. 진보적인 청년들의 의한 소규모 동업조직
인텔리서치, 에이엔비템크, 동심기획이 이 사례에 속한다.

경로와 업종과 규모가 너무 달라 하나로 통계를 잡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어쨋든 총수는 자활지원센터를 제외하고 11개에 총 종사 조합원 수는 470명가량이다.
광동택시와 신아조선을 제외한 나머지 회사들 대부분이 사업초기의 자금, 기술, 경영노하우 등의 문제에 부딪쳐 있으며 1995년 '협의회' 시도가 한차례 있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된다.

 


 

가져온 곳 : 
블로그 >목련꽃이 질 때
|
글쓴이 : 거지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