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부어스틴과 제임스 하킨의 '대중'

2013. 6. 8. 23:19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다니엘 부어스틴과 제임스 하킨의 '대중'

 

대중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대중(mass)'이라는 말처럼 규정하기 힘든 개념도 없을 것이다. 대중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현상 속에서 규정되는가. 어떤 맥락에서는 소비자와도 동일시되기도 하고, 어떤 맥락에서는 수용자로 불리기도 하며, 어떤 맥락에서는 정치 캠페인의 광범위한 대상을 일컫기도 한다.

 

대중이란, <군중심리>의 귀스타브 르봉이 통찰한 군중적 속성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집합적 의견을 표출하는, 즉 여론의 주체로서의 공중 사이의 어떤 개념, 혹은 그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 개념일 것이다. 사실 매우 두루뭉술한 개념이다. 어쩌면 그만큼 대중을 명확하게 개념화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개념화해본다면, 대중이란 19세기의 그래픽 혁명 이후 나타난, ‘반응하는 군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민 혁명기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의 군중이 정치 사회적 선동에 이끌려 맹목적 추종을 위해 ‘동원’되는 사람의 총합이었다면, 대중은 20세기 중반 이후 창궐한 ‘매스미디어’ 현상에 대해, 비록 그것이 획일적이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반응을 드러내는 집단적 현상의 하나로 개념화되기 시작했다.

 

오손 웰스의 ‘화성 침공’ 라디오 드라마가 수많은 시민들의 탈출 행렬을 이끌었던 웃지 못할 일화를 떠올리면, 대중과 매스미디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즉, 대중은 매스 미디어가 이룩한 거대한 수용자 집단이며, 많든 적든,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매스 미디어의 메시지에 반응하는 집단이라는 얘기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정치적 진화 과정은, 대중에 대한 더욱 치밀한 접근을 요구한다. 대중이 매스미디어에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는 집단이라면, 매스 미디어를 장악한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며, 그것은 군중의 속성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여러 현상을 통해 목격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SNS를 통해 주류 미디어와 차별화된 담론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대중의 개념도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정치사회적 변화 과정과 궤를 함께 하며 진화하고 있다. SNS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혁명전 전환이 대중의 개념을 바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시대 변화에 적응하는 대중이 스스로 환골탈태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의미도 크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내게 중요한 것은, 대중이 가진 가변적 속성과 역사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내재된 불변의 속성에, 막연하게나마 최대한 접근해 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은 다니엘 부어스틴의 <이미지와 환상>(Image, 1962)과 제임스 하킨의 <니치>(Niche, 2011)를 중심으로 대중의 단면과, 현대 대중의 정체에 대한 거친 접근을 시도해볼 것이다. 두 저서가 사실상 반 세기라는 시간 차를 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나로선 대중의 실체에 대해 역사적 입체감을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C. 라이트 밀즈의 <파워엘리트>(1957)에서 언급된 대중의 개념도 부분적으로 인용될 것이다.

 

 

다니엘 부어스틴의 <이미지와 환상>, 그리고 수동태로서의 대중

 

관점과 방법론은 확연히 다르지만, C. 라이트 밀즈와 다니엘 부어스틴이 미국 사회의 대중에 대한 각각의 통찰을 내놓은 시기가 1957년과 1962년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차 세계 대전의 승전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고, 할리우드 영화의 전성기와 라디오의 시대를 거쳐 때는 바야흐로 전국적 네트워크 TV의 시대로 접어든 무렵이었다. 경찰 국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정치외교적 상황과 매스미디어의 최전성기라는 환경 앞에서 두 사람은 미국 사회 이면의 부조리에 주목하였으며, 그것은 대중 사회를 관통하는 일련의 불길한 증후에 대한 설득력 있는 경고로 다가왔다.

 

밀즈에게 대중은 한마디로 폐쇄적인 파워엘리트들에게 지배되는 대상이었다면 부어스틴에게 대중은 이미지에 포획된 대상으로 비쳐졌다. 밀즈가 미국 사회의 지배 구조를 꿰뚫어 보는 가운데, 이른바 군산 복합체로 대변되는 파워엘리트의 이해를 수동적으로 받아 안는 존재로 대중을 보았다면, 부어스틴은 일련의 매스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짜 사건을 통해 이미지와 환상을 소비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밀즈의 매우 논쟁적인 접근은, 당대의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현대의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만큼 설득력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은, 대중의 시선이 오락적 매스미디어에 단단히 붙잡혀 있는 가운데 광범위한 정치적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밀즈의 <파워엘리트>가 정치 사회적 실체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면, 다니엘 부어스틴의 <이미지와 환상>은, 그 실체를 가리는 또 다른 실체(또는 이미지 또는 그림자)를 통찰하는 시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어스틴에 따르면, 실체를 가리는 이미지에 의해 사람들은 더 이상 실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미지를 실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건강한 여론이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한 상태에서 공중의 합리적 판단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부어스틴의 관점에 따르면, 대중은 실체에 아예 접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부어스틴은 여기서 ‘가짜 사건(pseudo-events)’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끄집어 낸다. 부어스틴은 뉴스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시대로 바뀌었으며, 이것이 가짜 사건의 요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민주시민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늘어나고, 알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는 또 “언론 자유는 이제 인위적으로 만든 뉴스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 기자들이 갖는 특권을 점잖게 표현한 말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가짜 사건을 발전시킨 미국 문명과 기술 진보가 이미지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더 매력적이고, 더 인상적이고, 더 설득력 있는 것이 되도록 계획하고, 조작하고, 왜곡하였다”는 부어스틴의 통찰은, 전통적인 영웅이 유명인(celebrity)의 개념으로 대치됐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유명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낸 ‘인간 가짜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대두되는 중요한 개념이 이른바 ‘거울 효과’다. 그에 따르면 유명인은 거울에 투영된 대중의 욕망일 뿐이다. “목적 없는 공허한 삶을 모아놓은 결과가 새로운 형태의 영웅 모델인 유명인이다. 유명인들은 확대경을 통해서 크게 비추는 우리 자신일 뿐이다.”

 

이러한 통찰은, 비록 반 세기 전의 것이라 할지라도 현대 매스미디어 환경에 그대로 적용될만큼 강력하다. 실제로 우리는 유명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드러낸다. 심지어 그들의 사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곧 우리의 삶의 방식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명인을 보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유명인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모델을 찾고 있지만, 그 모델은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유명인을 보는 현상은, 관광(sight-seeing)이 돼 버린 여행(travel)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어스틴은 “우리는 여행이란 창문을 통해서 바깥 세상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실내에 있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안방의 안락함을 여행지로 가져가 관광객의 구미에 맞도록 설계된 현지인의 박제화된 삶을 구경하도록 돼 있는 현대의 패키지 관광을 떠올린다면, 무릎을 칠만큼 통찰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실체보다 더 강력한 이미지의 전복 효과를, 부어스틴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성공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독자들이 더 원하는 것은 이제 원본이 아니라 다이제스트 자체가 되었다. 형체가 아니라 형체의 그림자가 본질이 되고 있다.” 부어스틴은 문학 작품의 영화화와 스타 시스템, 그리고 베스트 셀러 등의 사례적 현상을 들어 이같은 관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증빙한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현상이 여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부어스틴의 문제 의식이다. 그는 “여론은 뉴스를 만들려고 애쓰는 기자들에 의해서 억지로 세상에 등장했다”고 비판하고, “여론이란 피치 못하게 보도될 것을 기본 목적으로 탄생된 가짜 사건의 일종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그리하여 그에겐 여론조사조차 가짜 사건의 일종이다. “여론과 여론 조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현상은 이미지가 증가하고 이미지가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현상과 같다...여론은 사람들이 자기의 견해를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제임스 하킨의 <니치>, 그리고 잡식성 정보 포식자로서의 대중

 

부어스틴의 대중이 이미지에 완전하게 포획된 무기력한 존재라고 한다면, <니치>를 쓴 제임스 하킨의 대중은 반세기라는 시간차만큼이나 그 개념의 간극이 크다. 한마디로 하킨에게 현대의 대중은 획일성이 아니라 잡식성을 특성으로 하는 존재다. 즉, 주류 문화에 수동적이며 획일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개성과 특질에 따라 정보와 소비 행태를 능동적으로 조절하고 찾아나가는 ‘포식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잡식성 대중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중간층의 실종이라는 전제를 단다. 즉 지금까지의 기업들이 타깃으로 뒀던 중간층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잡식성 대중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가운데 인터넷이 있다. “대중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인해 대중은 자신이 얻으려는 것을 매처럼 날카롭게 정확히 찾을 수 있게 됐다. 선택의 여지도 무수히 많아졌다.”

 

중간층을 겨냥한 기업 전략의 실패 사례들을 통해 하킨은 대중의 변화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오랫동안 대중은 거대 기업이 제공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결국에는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모든 대중을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과정에서, 많은 거대 기업들은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일을 벌이는 바람에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자신들의 제품이 가진 권위를 상실하면서 어중간해지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 변화의 핵심에는 정보 소비자로 변신한 대중의 변화가 자리한다. 하킨은, “단순한 정보 소비자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가차 없는 정보 포식자로 진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이 정보 포식자로 변모함에 따라 뉴스 소비 행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문이나 TV 뉴스 등의 전통 매체를 떠나 인터넷에서 뉴스를 소비하고 있다. “우리는 뉴스에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콕 집어내기 위해 온라인 신문들을 휩쓸고 다니면서 뉴스를 다르게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하킨은 이같은 상황 진단 속에서 자연스럽게 ‘니치(Niche)'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중간층을 겨냥하지 않고, 틈새를 겨냥하는 전략이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으며, 이것이 잡식성 대중의 기호와 맞아 떨어지는 현상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음을, 그는 HBO와 폭스 뉴스, MSNBC 등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블록버스터‘ 개념이 아닌, 이른바 ’니치버스터‘가 성공에 가까운 전략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공중파 TV의 전통적인 아성이 최근 몇몇 케이블 TV 프로그램들에 의해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CJ E&M이 미국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의 포맷을 들여와 론칭한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다. 이 프로그램은 케이블에선 불가능하다고 여겨져왔던 20% 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공중파의 오만에 제동을 걸었고, 오히려 공중파 방송국들이 <슈퍼스타 K>의 성공에 자극받아 <위대한 탄생><나는 가수다> 등의 아류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이밖에도 2~3%대의 시청률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들이 잇따르고 있다. 케이블에서만 방영된 <별순검><막돼 먹은 영애씨><롤러코스터> 등의 프로그램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하킨은 대중이 주류 문화를 소비하면서도 하위 문화를 동시에 영위하는 “철새의 행동 습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간파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취향이나 관심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무리를 만드는 현상에 주목한다. 이같은 현상을 하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위 문화의 범주로 결속하면 자신이 특별하다는 느낌이 강화된다. 이를 통해 서로 공유되는 정체성을 표현하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든든한 환경이 팬들에게 마련된다. 그러니까 서식할 수 있는 둥지와 같이 날아갈 둥지들을 제공하는 셈이다.”

 

무리를 짓는 하위 문화의 강력함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이른바 ‘나꼼수’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막말과 욕설을 동반한, 전형적인 하위 문화적 접근 방식으로 시사 문제에 오락적 차원의 접근을 시도한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는 주류 언론의 근엄하고 딱딱한 접근에 식상한 ‘잡식성 대중’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고 대성공을 거둔 사례다. <나는 꼼수다>는 일종의 팬덤 현상을 만들어내면서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김어준과 주진우가 낸 책은 잇따라 대형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했다. 진행자 가운데 한 명인 정봉주 전 의원이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자 많은 이들이 ‘미권스’(미래 권력)를 자처하며 무리 짓기에 나선 것 역시 종전에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제임스 하킨은 대중이 잡식성 정보 포식자로 변모한 상황에서 틈새를 겨냥한 성공 사례들을 나열하는 한편, 이 현상의 부작용을 거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스스로를 남다른 존재로 정의하겠노라는 우리의 결의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아이러니한 점은, 매우 정밀한 선택 박스들로 스스로를 분류한 나머지 갑갑하고 비좁은 닭장 속에 갇힌 신세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다양한 의견에 노출되는 것을 전제로 한 건강한 여론 형성에 장애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우리는 각기 다른 캠프장들에 주저 앉게 된다. 남의 말 따위는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의 위치만을 강화하는 캠프장 말이다.”

 

이런 문제 의식은 한국에서의 지난 총선 결과가 트위터의 분위기와 사뭇 달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반증된다. 당시 트위터에 나도는 발언들로만 봤을 때 야권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이것은 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공유한 동종의 무리들끼리 선택적 주목을 주고 받는 담론 유통의 폐쇄성을 드러내 보인다. 하킨도 그 점을 경고한다. “비슷한 부류의 팔로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트위터로 보내는 사람들은 더욱 폭넓은 대중과 소통하려고 애쓴다기보다 자신의 관람객들에게만 영합하고 말 수도 있다.”

 

 

이 시대의 대중은 누구인가.

 

다니엘 부어스틴의 <이미지와 환상>과 제임스 하킨의 <니치> 사이에는 반세기의 시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대중을 읽는 데 있어서 모두 유효한 설득력을 지닌다. 부어스틴의 통찰은 여전히 강력하다. 현대의 대중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미지에 압도당한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짜 사건은 더욱 창궐하고 있으며 인간 가짜 사건인 유명인도 하루가 다르게 떴다가 진다.

 

미디어의 무게 중심이 전통 미디어에서 인터넷으로 옮겨 왔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중은 스타들을 소비하며, 발빠르게 생겨난 인터넷 언론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충실한 시종이 되어 가짜 사건들을 공모하느라 바쁘다. 그 가짜 사건들은 SNS를 통해 재유통되며 분석되고 해석되는 게 아니라 거울 효과로서의 이미지로 확대 재생산된다. 말하자면, 미디어 환경이 급변했다고 해도,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는 현상은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SNS를 통한 집단 지성의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네티즌들은 스스로 가짜 사건을 만드는데 기꺼이 동조하며 쉽게 군중적 속성을 드러낸다.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지하철 막말녀’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다. 전후 맥락을 거세한 채 네티즌에 의해 올려진 그 동영상은, 가짜 사건의 부머(Boomer)라고도 할 수 있는 인터넷 옐로우 저널리즘을 통해 일파만파 확산됐고, 네티즌들은 순식간에 정의의 사도가 되어 돌을 던졌다. 이미지, 혹은 가짜 사건에 압도된 네티즌들은 정의감을 배설하기 위해 기꺼이 익명의 군중이 된다.

 

다니엘 부어스틴의 통찰이 현대 사회의 대중을 이해하는 다소 암울하지만 중요한 실마리를 안겨준다면, 제임스 하킨은 콘텐츠 전략의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여전히 이미지에 압도당하지만, 개성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 역시 현대 대중의 아주 중요한 특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꼼수 현상에 대한 여러 찬반 양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현상에서 니치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MBC가 스마트폰 유저들을 대상으로 <손바닥 TV>를 시작한 것 역시 니치 전략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시장이 없다고 판단할 때 제작사 명필름은, <마당을 나온 암탉>을 선보여 대성공을 거뒀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의 10분의 1 예산으로 만들어진 <부러진 화살> 역시 대형 상업영화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분명 ‘니치’가 존재함을 입증했다. 한국영화계는 오랫동안 20대 여성이 성공을 보장할 중간층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 그들을 두루뭉술하게 공략하는 접근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30-40대를 겨냥한 마이크로 타깃팅이 성공한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중은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되, 매체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그 윤곽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부어스틴의 대중도, 하킨의 대중도 현대의 대중을 설명하는 유의미한 키워드다. 현대의 대중에겐 두 사람이 통찰한 상반된 속성이 공존함과 동시에, 귀스타브 르봉이 통찰했던 군중적 속성과, 여론 주체로서의 공중적 속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현대의 미디어 환경은 종사자와 연구자들에게 어떤 국면에서 대중의 어떤 속성이 더욱 도드라지느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느냐에 대한 더욱 정밀한 관찰과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