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세계화에 도전하는 민중들의 투쟁과 연대...|

2013. 6. 7. 22:15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자유주의 세계화에 도전하는 민중들의 투쟁과 연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국적자본의 이해만을 '배타적'으로 대변하고, 민중의 삶과 생태계를 지독히 파괴하는 만큼, 그는 세계 도처에 스스로에 대한 저항세력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브라질 '땅없는 농업노동자들의 운동'(엠에스떼, MST)

브라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극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라다. 부자들이 요새를 쌓고 무장한 사설 경호원을 고용한다. 사설 경호원들에게는 무단 침입자에 대해 총을 발사할 수 있는 권한도 합법적으로 보장된다.

브라질 사회는 20대 80의 사회가 아니다. 10대 90의 사회에 가깝다. 상파울루에는 남미 최대의 판잣집이 있고, 노동자의 임금은 월 200헤알(약12만원)에 불과하다.

이러한 브라질의 '빈곤화' 문제는 외채와 아이엠에프의 책임이 크다.

아이엠에프는 지금도 브라질에 긴축정책을 강요하며, 외채상환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브라질의 국내외 총채무는 연간 국민총생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350억달러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브라질 카톨릭계를 중심으로 외채상환거부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들은 "브라질 국민들이 계속 외채상환부담에 시달리다 빈민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의회에서 재정지출의 우선순위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이뤄지게 하는 것이 우리 운동의 1차적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엠에스떼 운동은 이러한 브라질의 불평등한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탄생했다. 1979년에 만들어졌고, 원래의 출발은 토지개혁이었다. 브라질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한 부유한 사람들이 경작 가능한 토지의 3분의 2를 소유하고 있는 극단적인 불평등에 연원을 두고 있다. 엠에스떼는 놀고 있던 땅을 점거하고 토지개혁을 요구한다. 그리고 1989년부터는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은 정착촌을 대안적인 사회경제공동체로 가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엠에스떼 운동은 단순히 토지개혁 문제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진보운동·사회주의 운동세력들이 당면해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실험하고 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문제, 권력장악 이후의 관료주의 문제, 협동과정에서의 남녀 차별주의 등에 대해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실제로, 모든 결정을 엠에스떼는 집단적으로 하며, 가사노동을 교대로 하고, 협동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과 동일한 대우를 받도록 한다. .

엠에스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브라질에,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이다. 또한 전통적인 노동조합 및 정당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투쟁하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다. 이는 단지 브라질의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을 위한 노력일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민중들에게 또 다른 혁명적 열정을 던져줄 수 있는 계기일 것이다.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사빠띠스따, Zapatista)

멕시코는 우리에게 아이엠에프 선배(?)로 널리 알려진 나라이다. 멕시코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가장 충실하게 지킨 모범국으로 칭송받았고, 하나의 모델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현실은 이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정반대다.

오늘날 멕시코 외채는 1천7백억 달러에 이른다. 채무불이행을 막기 위해 멕시코는 알짜배기 국영기업과 엄청난 자원을 팔아치워야만 했다. 1982년과 1996년 사이에 멕시코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기아와 실업에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외채를 갚는 데만 1천 4백억 달러나 지출했다.
그런데도 빚은 여전히 쌓여만 갔다.

여기에 나프타는 몇 개 되지도 않는 보호관세를 제거하여, 제국주의자들이 더 쉽게 약탈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은 멕시코 민중들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사빠띠스따는 멕시코의 이런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빠띠스따는 1994년 1월 1일을 기해, 멕시코 동남부 치아파스주의 라깐돈 정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 날은 나프타가 공식 발효되는 날이었다. 치아파스주 원주민들은 나프타가 자신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와 자신들의 빈곤과 억압 뒤에 어떠한 힘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프타를 '죽음의 보증수표'라 불렀다.

"우리를 소개하겠다. 우리는 이 산에서 전쟁준비를 하면서 십년 동안 살아온 사빠띠스따민족해방군이다. .. 우리의 삶은 기계나 동물의 그것보다도 가치없었다. 우리는 돌과 같았고, 길가의 잡초와 같았다. 우리는 침묵했다. 우리는 얼굴이 없었다. 우리는 이름이 없었다. 우리는 미래가 없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그 권력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았고, 우리는 생산하지 않았고, 우리는 물건을 사지 않았고, 우리는 팔지도 않았다. 우리는 거대 자본의 회계 장부에서는 영(零)이었다."

사빠띠스따 운동은 전세계 진보운동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한 이후, 정치적 패퇴를 거듭하던 전세계 진보 활동가들은 그들로부터 야만에 맞써 싸우는 고귀함을 배웠다. 하나의 빛으로 다가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순응'해가던 세계를 깊은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이들은 아직도 일상적인 멕시코정부의 폭력과 살인속에서 투쟁하고 있다. 이들의 투쟁과 실험정신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

1995년 겨울,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일어났다. 프랑스 쥐페 정부의 '사회복지제도 개혁안'에 대한 반발이었다. 왜냐하면, 이 계획안은 철저하게 재정 적자를 근로소득과 공공지출에 대한 삭감으로 메꾸려 했기 때문이다.

11월 24일, 철도노조가 파업을 했고, 나흘 후 파리 지하철 노동자들이 합류했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프랑스 전역에서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됐다. 시위대 에는 파업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민간부문 노동자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쩍 활발해졌다. 1993년 이후, 해마다 계속된 에어프랑스의 파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프랑스텔레콤 노동자들의 민영화 반대투쟁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투쟁은 프랑스 정부가 - 공공부문 및 사회복지 축소정책을 강행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프랑스 정부의 정책들은, 유럽연합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마스트리히트 수렴조건에 기인한 바 크다. 즉,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 대비 3%로, 부채는 60%비율로 낮춰야 했기 때문이다.

마스트리히트 협정은 유럽 각국에 긴축을 강요했고, 이는 예외없이 공공부문과 사회복지영역에 적용되었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5년의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투쟁은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칫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1995년의 파업투쟁은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파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정책이 어떻게 '잘 산다'는 국가의 노동자들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침체해 있던 프랑스 노동운도에 생기를 불어넣고, 북반구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국제연대투쟁

점점 일국을 넘어선 투쟁이 발달하고 있다. 서로간의 경험을 교류하고, 공동의 요구를 내걸며, 각국 민중들의 연대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가장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1999년 11월의 '시애틀 투쟁' 뿐만 아니라, 다자간투자협정(MAI) 및 아이엠에프/세계은행 반대 행동 등 다양한 국제연대행동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각국 민중들이 더 이상 세계화를 '불가피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반증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열망을 반영한다.



'초국적자본의 권리헌장'-다자간투자협정(MAI)

국제적으로 조정된 연대행동이 국제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계기는, 지난 1997년∼1998년 활발하게 진행된 다자간투자협정 반대투쟁이었다. 다자간투자협정은 지난 95년부터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국제투자규범인데, 현재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일·한미투자협정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각국 시민·사회단체 및 노동조합은 다자간투자협정이 1) 투자자의 권리를 정부·지역사회·시민·노동자 그리고 환경의 권리보다 훨씬 우위에 놓고 있으며, 2) 해외투자자에 대한 민중들의 민주적 통제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3) 해외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등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강력히 저항하였다.

"다자간투자협정에 대한 NGO 공동 성명서"가 1998년 2월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었고, 여기에 약 68개국 565개 단체들이 서명했을 정도로, 그 저항은 광범위하고 강력했다. 결국 초국적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은 98년 10월 공식적으로 '협상의 중단'을 선언해야만 했다.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은 영국에 기반을 둔 '쥬빌리(Jubilee) 2000'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외채탕감운동은 "희년(Jubilee)에는 너희들 가운데 가난한 자는 없을 지어다"라는 성경 구절로부터 최초 아이디어를 얻었으나, 그 근저에는 제3세계 '발전'과 '빈곤' 문제는 '외채' 문제의 해결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출발했다.

'쥬빌리 2000'은 1998년 영국과 1999년 독일에서 열린 G7+1 정상회담 때 수만의 시위대를 동원하여 제3세계 외채탕감에 대한 부유한 국가들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러한 시위는 1999년 G7+1 정상회담에서 '중채무빈국(HIPC) 외채탕감 계획'이 채택되는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향후 외채탕감운동의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쥬빌리 캠페인은 분화되었다. 쥬빌리 남반구는 제3세계의 모든 외채의 조건 없는 탕감을 주장할 뿐 아니라, 나아가 남반구 정부에 대해 '외채 상환 거부'를 촉구하고 있다. 남아공, 브라질, 필리핀등이 중심이 되어 현재 독자적인 네트워크 (쥬빌리 사우스)로 연결되어 있다.



1999년 시애틀 투쟁

1999년 11월 31일 시애틀에서의 세계무역기구 반대행동은, 이미 뉴라운드 출범이 예상되던 1999년 초부터 체계적으로 준비되었다. 다자간투자협정(MAI) 반대 투쟁 때와 비슷하게, 이번에는 '모라토리엄(Moratorium) 선언문'이 인터넷을 통해 배포되었다. 이 선언문은 "자유무역체제가 민주주의·인권·노동권·환경·문화 등 인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포괄적이고 충분한 조사·평가가 선행되기 전까지는 뉴라운드 출범이 유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담고 있었다.

즉, '더 많은 자유화·개방화'를 위한 어떠한 추가적인 자유무역 및 투자협상도 거부하며, 이것의 연장선에서 "어떤 새로운 이슈가 세계무역기구에 편입됨으로써, 그것의 영향력 과 권한이 확대되는 것"에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호소문에 전세계 80개국, 1300여개 이상의 사회운동단체들이 동참했다.

하지만 시애틀 현지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 반대, 뉴라운드 출범 반대'라는 포괄적인 슬로건으로 통일되어 보였지만,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 주장을 둘러싸고 '신자유주의반대 연합' 내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났다.

미국노총산별회의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 주장은 '모라토리엄 선언문'에서 밝힌 '새로운 이슈 및 영역의 세계무역기구 편입 반대, 세계무역기구 권한 확대 반대'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1999년을 장식한 시애틀 투쟁은 국제연대 투쟁의 연속성과 잠재력을 마음껏 보여준 반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연합 내의' 입장차이의 극복이 결코 쉽지 쉽지 않은 과제임을 또한 확인시켜주었다.



워싱턴과 프라하 - 이번에는 IMF다!

2000년 4월 16일 미국 워싱턴, 9월 26일 체코 프라하. 아이엠에프와 세계은행의 오만과 만행이 고발되었다. 각각 아이엠에프·세계은행 춘계회의와 추계회의를 계기로 벌어진 이 행동은, 두 국제금융기구가 행한 제3세계 만행을 고발하기에 충분했다. 시위대들은 '아이엠에프·세계은행 폐쇄, 구조조정 강요 반대'를 외쳤다.

이 행동들은 미국을 비롯한 북반구 민중들이 아이엠에프의 실체를 깨닫고,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격렬히 전개하고 있는 제3세계 민중들과의 연대를 실현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크나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4월 워싱턴 시위에 보수적인 노동조합이라는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가 워싱턴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도 상징적이다. 미국노총산별회의는 2년 전(前)만 하더라도 클린턴 행정부의 아이엠에프에 대한 180억불 지원 정책을 지지했었다.

4·16 워싱턴 행동과 9·26 프라하 행동은 다자간투자협정 반대 투쟁과 시애틀 투쟁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투쟁이 결코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해주었다. 또한 아이엠에프·세계은행 구조조정 반대를 매개로 한 제1세계와 제3세계 민중들간의 연대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