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농가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31.4%에 불과했다. 농가소득의 3분의 2는 농업 이외의 소득으로 충당한다는 얘기다. 농촌이 살기 위해서는 농업을 살려야 하지만, 농업만으로는 농촌을 살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촌에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농촌에 사람이 들어와 살아야 한다”며 농촌 살리기에 주목한 기업이 있다. ㈜이장이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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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섭 ㈜이장 대표는 “농촌에 사람이 없어지면 농촌이 살 수 없다”며 “농촌에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
춘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장은 농촌 마을가꾸기의 선도적인 기업이다. 10여년 전 ‘마을만들기’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 ‘생태주의’와 ‘농촌마을 공동체 회복’을 위해 마을만들기를 개척해 왔다. 2007년 사회적기업이 처음 도입되던 해에 ‘잘 나가던 기업’이던 이장이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해 관심을 받기도 했다.
◇ 다양한 실험 = 폐업의 연속
이장은 마을만들기의 개척자적 기업이다. 지금은 수십여개의 농촌마을 컨설팅 회사가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이었다. 앞서 가다 보니 우여곡절도 많았다.
이장은 전북 완주에서 ‘퍼머컬쳐대학’을 운영하는 임경수 박사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환경을 연구한 임박사는 “환경을 전공하는 사람은 환경오염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모순에 부딪쳤다. 결국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농업에 있다는 데 결론을 내리고 박사과정에서 유기농업으로 전공을 바꿨다. 유기농업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며 유기농 생산자들의 고민을 알게 됐다. 귀농·귀촌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유기농 소비처가 없다는 생각에서 온라인 유기농 쇼핑몰인 ‘인터넷 이장’을 창업했다. 이때가 1999년이다. ‘이장’의 이름에는 마을 공동체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장의 역할을 되살리겠다는 기업철학이 담겨 있다.
이장은 농촌사회의 새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에 도전했다. ‘다양한 실험’은 대부분 ‘폐업의 연속’ 이었고, 고난의 과정이었다. ‘인터넷 이장’은 곧이어 유기농 도시락 전문점인 ‘이장네 밥집’을 시작했다. 밥집은 석 달 만에 문을 닫았다. 유기농 유통구조를 만들기 위해 ㈜텔러스라는 유통회사도 만들었다. 올해 이장의 대표를 맡게 된 신진섭 대표도 이때 결합했다. 하지만 유통에 뛰어드는 것은 녹녹치 않았고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유통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었다”는 게 신대표의 말이다.
이때 화천군청의 최수명 계장이 찾아왔다. 이장은 주민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화천군 신대리 마을을 만들었다. 이어 화천군 용호리 토고미 마을을 만들었다. 용호리는 최계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최수명 계장은 정말 보기 드문 공무원”이라는 것이 신대표의 평가다.
이 토고미 마을이 꽤 유명해졌다. 자연스레 인터넷 이장도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면서 생태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일이 의미 있겠다고 생각돼 2001년 지금의 ㈜이장을 만들었다. 당시 서울 봉천동에 본사를 뒀지만 그해 12월 춘천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장은 200개 이상의 생태마을을 컨설팅했다.
2002년 인터넷 이장을 폐업하고, 춘천에서 유기농 농산물 유통매장인 초록바람을 개장했다. 하지만 “1억원 이상 까먹고” 2년만에 문을 닫았다. 2003년부터는 이장의 경험과 고민을 전파하고자 매월 700~800만원의 비용을 들여 『월간 이장』을 발행했다. 이장의 경험과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월간 이장』은 2006년 12월을 끝으로 종간했다.
“시대를 선도하면서 어려운 농촌에 대안을 찾겠다”는 장의 노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장의 경험은 자산으로 남기 때문이다. 특히 앞서 모델을 만들면 후발주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먼저 가는 사람들은 돈을 못 벌지만, 후발주자는 돈을 번다”는 게 신대표의 생각이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도 10년 동안 이 일을 계속해 올 수 있는 힘은 있었다. 실패 경험과 축적된 경험이 언젠간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게 신대표의 믿음이다.
◇ 농촌마을 컨설팅 ⇒ 교육 지원 ⇒ 귀촌 지원 ⇒ 생태마을 주거단지(귀농귀촌단지) 조성
올해 이장의 대표를 맡게 된 신진섭 대표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업도 살려야 하지만, 농촌에 사람이 들어가는 게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람이 사라지면 농촌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장은 농촌에 생태공동체마을을 만들기 위한 컨설팅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농촌 가꾸기 컨설팅에 나서는 곳은 없었다. 컨설팅을 3~4년 하다보니 10개 정도의 마을이 생겼다. 하지만 곧 한계가 느껴졌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지만 운영이 잘 안 됐다. ‘사람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장은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중심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농촌에 있는 사람들도 교육하고, 도시 생활자를 귀농·귀촌시키기 위한 교육도 지원했다. 도시 생활자가 농촌에 가면 농사 외에도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귀촌 정착율을 높이기 위해 생태공동체마을 주거단지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도시인이 개인적으로 귀촌했을 때 적응하지 못하거나 폐쇄적으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팀을 만들어 함께 마을에 들어가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정착률을 높이는 방법을 택했다.
2005년부터 준비해서 2009년 4월 충남 서천군 ‘산너을’ 마을에 첫 입주가 시작됐다. 이를 시작으로 홍성 한울마을, 하동 작은마을, 서산 솔꽃모루 등 4개의 생태마을 주거단지가 만들어졌다. 특히 생태마을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주민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일반적인 전원주택들이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것과 대조적이다.
생태마을 주거단지는 자체적으로 규약을 정해 들어올 때 투자한 돈만 가져가도록 했다. 3~5%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기도 하지만, 물가상승율과 등기비용 수준에 불과하다. 또 공동사용주택 개념을 도입해 입주민들은 집을 살 때 6.6㎡(2평) 값을 추가로 내야 한다. 이 돈으로 어린이 놀이방과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짓는다. 이 편의시설은 공동소유·공동사용한다.
이장이 주거단지를 만들면서 ‘부동산업을 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귀촌을 지원하고 정착률을 높여 농촌을 살리겠다는 게 목표다. 신 대표는 “일반적으로 귀농·귀촌해서 3년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귀촌 정착률은 20% 이내지만, 생태마을 주거단지를 통해 취촌 모델의 사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 사회적기업 이장
이장은 2007년 사회적기업이 처음 도입되던 해에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했다. 신 대표는 “이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직원들간의 갈등도 있었다”고 귀뜸했다. 농촌과 지역, 공동체가 관점인데 굳이 사회적기업을 해야 하냐는 이견이 있었다. 이윤의 2/3 이상을 사회적으로 환원해야 하는데 대해서도 불만이 발생했다. 일부는 이장을 떠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사회적기업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구성돼 갔다.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고 더 어려워진 점이 많다는 게 신대표의 설명이다. 사회적기업으로 인증을 받았지만 지원은 부족하고, 오히려 서비스나 상품이 저평가되는 경향이 많다. 사회적기업인데 왜 이리 비싸냐는 지적도 들어온다. 1년에 컨설팅 사업으로 13억원을 벌지만, 15명에서 20명이 움직여야 한다. 인건비도 안 나오는 구조다.
이장은 자회사를 포함해서 최대 70명의 인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30명 수준이다. 매출은 50~60억원에서 20~30억원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이장은 적지 않은 부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신대표는 “농촌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이 전체의 12%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처럼 기존 기업이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본다”며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을 하고, 경험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우리의 경험을 다른 많은 팀들이 차용하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