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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 무엇인가 돌아보세요

이런저런 이야기/다양한 세상이야기

by 소나무맨 2013. 3. 30.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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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의 역사와 문화

 

 

복사 http://blog.naver.com/kohyj111/13014619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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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풍요로운 자연환경 

 

온화한 기후, 넓은 평야, 강과 하천의 발달, 바다와 개펄의 해산자원 

 

 2. 개방적, 진취적 문화 

 

3면이 바다. 해양 지향. 

 

 1) 마한 

 

호남문화의 기반은 마한. 

호남의 고대사는 마한의 전통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백제의 강력한 왕권에 의해서 포용된 과정. 

 

 2) 백제 

 

백제는 해양제국. 중국, 일본, 동남아까지 진출. 

 

 3) 통일신라 

 

청해진: 국제 교통의 요충지 

장보고의 해상왕국: 동아시아 해상무역 독점.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 기능. 

 

 3. 뚜렷한 명분, 자주의식 

 

 1) 고려 전기 

 

「훈요십조」: 차령 이남과 금강 이남의 인물은 기용하지 말라.  

전라도 차별의 근거로 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 「훈요십조」자체가 고려 현종대 발견. 위서일 가능성이 있음. 신라 중심 인식 반영. 

나조 오씨 장화왕후의 아들이 2대 혜종. 

고려 전기에는 전라도 인물이 실제로 많이 기용됨. 

 

 2) 고려 중기 

 

묘청의 난 이후 김부식의 개경, 경주세력이 정권을 잡고부터 전라도 차별. 

 

 3) 고려 후기 

 

무인정권 때는 전라도세력의 중앙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짐.  

불교계의 변화: 조계종의 성립. 수선사, 백련사 등 신앙결사 등장. 

삼별초의 저항(1270): 강화도→진도 용장산성→제주도 

3년 동안 저항하며 남해안을 지배 관할. 전라도 남해안 농민들이 적극 지원. 

대몽항쟁, 자주정신 

외세인 몽고, 외세의존적인 고려왕실에 저항.  

 

 4. 절의, 비판, 실천정신 

 

 1) 호남사림의 형성 

 

여말 불사이군, 세조의 왕위 찬탈 반대, 기묘사화 등을 계기로 낙향해 형성. 

소세양의 소릉복위 주장, 박상?김정의 신비복위소: 사림의 결집화, 훈척 공격에 기여.  

김인후, 박순, 유희춘, 기대승, 이항, 송순 등 기라성 같은 학자 배출. 높은 학문 수준.  

선조초 사림의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데 큰 역할. 

중종대-선조대 조선의 학계를 좌지우지. 인재의 보고로 일컬어짐. 

 

서경덕계열→정개청, 이발→동인 

송순(이이)계열→정철, 고경명→서인 

 

 2) 기축옥사(1589) 

 

정여립모반사건.  

중앙 정계 서인과 동인의 대립. 향촌사회의 주도권 다툼. 

호남지방의 분열→중앙정계로부터 소외→영조대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3) 임란의병 

 

임진왜란 발발.  

의병: 도학, 충절, 절의 

근왕의병. 모두 순절. 죽음으로 나라를 구함.  

임란으로 많은 호남인재 손실.  

향촌의 주도권을 잡은 정철계열은 문학에 경도. 

학문적 깊이가 없어짐. 절의만 계속 강조. 

 

 4) 호남실학 

 

17세기: 유형원(부안) 

18세기: 신경준(순창), 위백규(장흥), 황윤석(고창) 

19세기: 정약용(강진), 하백원(화순) 

널리 퍼지지 못함. 

 

 5. 대의(大義)를 위한 희생정신 

 

 1) 임란의병 

 

 2) 1894년 동학농민전쟁 

 

 3) 한말 의병전쟁 

 

 4) 광주학생독립운동 

 

 5) 광주민중항쟁 

 

 6. 예술로 승화 

 

시가문학, 판소리, 남종화, 서양근대회화, 광주비엔날레 

 

 7. 결론 

 

호남의 상징하는 말: 소외, 저항, 한(恨) 

 

이는 잘못된 것임. 

고려시대까지 호남은 소외된 곳이 아님. 오히려 동아지중해의 중심지역. 

호남은 대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음. 

처음부터 무능해서 중앙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했다기보다는 세력이 막강해서 견제당한 것.  

 

긍지를 갖자. 정체성을 갖자. 포용력을 갖자. 

삶의 질은 어느 지역보다 높음. 

풍부한 문화유산을 계승 발전. 

좀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부족한 점을 고치자. 

[출처] 호남의 역사와 문화|작성자 kohyj111

 
정여립 모반사건 전말과 후대의 의견들
호남은 과연 반역의 땅인가
지난 5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사업을 지원한다는 뜻을 피력, '역사적 화해'를 시도한 바 있다. 이같은 김대통령의 조처는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으며 대구·경북지역의 상징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우리 역사에 망국병이 되왔던 지역 갈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결단이란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갈등의 문제는 멀리는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 「훈요십조」의 문제, 조선조 정여립의 반란·이인좌의 난·임꺽정의 난, 가깝게는 5.16과 12.12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심화되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오면서 지역갈등의 원인은 일반 국민(백성)들과는 무관하게 권력층,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 왜곡된 정서로 자리잡았다. 그 가운데 조선조의 정여립모반 사건은 호남차별을, 이인좌의 난은 영남차별을, 임꺽정 난은 서북 차별의 빌미가 되었다. 먼저 호남차별의 원인을 제공한 정여립 모반사건의 전말을 알아봤다.
국가반란의 빌미 된 대동계
흔히 정여립(?-1589)은 조선 중기의 모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현대사가 그러했듯 정여립 또한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그러한 평가를 받아왔다.
정여립의 본관은 동래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 선조 2년(157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그는 본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사사한 서인(西人)이었으나 1583년 서인을 탈당하여 당시 집권당인 동인에 입당하였다. 동인 입당후 이미 사망한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여 서인들로부터 스승을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선조로부터도 배척당하자 고향인 전주 남문밖(현재의 완주군 상관면)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여립의 이름이 알려진데다 집권 동인의 실세였으므로 감사나 수령들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大同系)를 조직하고 매달 활을 쓰는 사회(射會)를 열었는데 이 대동계가 모반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모반의 진위 불투명
모반의 빌미가 된 대동계는 사실 비밀조직이 아니라 선조20년(1587) 전라도 손죽도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을 받고 공식적으로 출동해 왜구를 물리쳤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조직이었다. 모반설에 따르면 정여립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해주의 지암두, 운봉의 중 의연 등의 기인과 모사꾼을 거느리고 좥정감록좦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22년(1589)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해 일거에 병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정여립은 대동계를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서인의 모사 송익필의 사주를 받은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의 고변으로 역모로 몰리게 된다. 관군이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결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정여립 모반이 사실인지 불분명해서 조선시대에도 서인의 무고라는 주장과 모반은 사실이라는 주장이 대립되어 왔다. 사건 150년 후쯤인 영조때에 남하정이 저술한 좥동소만록좦에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 박살한 후 자결로 보고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책은 남인, 즉 동인의 자리에서 적은 책이라서 정여립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다.
반면 이이와 송익필의 제자인 서인 김장생이 지은 좥송강행록좦에는 고변이 있자 사람들이 정여립의 상경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정여립 사건에 대한 의문은 동인과 서인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당시 정여립은 도망간 것이 역모의 증거로 굳어져 국청이 열리고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을 비롯해 수많은 동인들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화를 입은 인물들이 무려 1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동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정여립이 살았던 전주지역 사대부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정여립 사건을 호남차별론에 연결시키는 논자들은 이 사건으로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호남 출신 사대부들의 관계 진출이 제한받았다고 주장한다.
호남차별론의 문제점
정여립 사건이 호남차별론의 근거가 되는 데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국청의 위관을 맡았던 정철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전주에서 가까운 전라도 담양출신이라는 점이다. 정철은 위관을 맡으며 심지어는 함께 수학했던 동문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 이 지역 사대부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 사건이 지역차별의 전제가 되려면 위관을 다른 지역 사람이 맡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또 정여립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원래 서인 지역이라는 점이다. 조선의 세력판도를 보면 동인은 영남이 중심이고 서인은 충청·호남이 중심이었다. 즉 집권당 지역에서 발생한 역모사건이 정여립 사건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호남 전체가 반역향으로 찍히지는 않았다. 다만 나주와 함께 호남의 대읍인 전주지역 연루자가 워낙 많아서 그 후손들의 출사가 제한되었으므로 호남이 지역차별 받은 것처럼 여겨진 것은 사실이다.
박종진 기자
<pjj@ilyosisa.co.kr>
[원본] http://www.ilyosisa.co.kr/ILYO/177/News/Culture/177_Cul_48-1.html

52334 역사 시사용어 제목 : 정여립 모반사건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 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 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 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 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출 처 :
작성자 : cybaek | 작성일 : 2005-03-18 | 조회수 : 215
[출처] http://kbank.nate.com/cmsense/diccm_read.asp?sno=52334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 [사상n철학n인물] 2005/01/07 04:28
http://blog.naver.com/cadline/9053654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선후기를 얼룩지게 했던 당쟁의 역사에 도화선 작용을 한 사건으로 보고, 정여립을 당쟁의 희생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처럼 기축옥사로 더 유명한 정여립 모반 사건은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 발생한 조선사 최악의 정치 모략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규모와 정도를 넘는 사대부의 피해는 조선 4대 사화의 희생을 합친 숫자와 비견될 뿐만 아니라, 정여립의 고향이었던 전주는 반역의 향으로 찍혀 조선 왕조의 집단 따돌림을 감내해야만 했지만 정여립 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변화에 대한 조선 사회의 무의식적 거부감과 내부 모순을 극복할 여력을 잃어버린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이 빚어낸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훈구 척신 세력을 청산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조선 선조 대에는 시스템의 붕괴에 따른 혼란과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요구하는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원래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기득권은 이런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고 선조 자신 또한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과 개혁 역량 미비로 사회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고 각종 유언비어로 민심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당파싸움은 상호간 증오를 바탕으로 한 전면전 상태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동인이 장악한 조정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선조는 초조해했고, 뭔가 정치적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 때 마침 전라도 전주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비밀 상소가 올라온 것입니다.

정여립은 동인이었고 정여립이 추진 중인 대동계는 성리학 질서에 명백히 반하는 불순사상이니 상소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평소 정여립은 선조가 갖고 있는 소인배적 기질과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있었음으로 선조와 서인측은 일시에 조정을 쇄신하고 요동치는 민심을 가라앉힐 계기로 이 사건을 충분히 이용하였습니다.

선조와 서인의 도살꾼으로 불린 송강 정철, 송익필이 주도하여 동인계 전라도 유림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가 시작됩니다. 사건 당사자인 정여립, 이발, 정개창, 정언신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비들이 모진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이들의 사지를 전국 팔도에 보내 역모를 꾀하고자 한 죄인들의 말로를 일반 백성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주입시켰습니다.

사건이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중세 마녀 사냥을 연상시킬 정도로 서인은 정여립과 일면식도 없는 동인계 선비들을 무리하게 엮어 넣어 주살하였습니다. 눈이 아파 눈물을 보여도 정여립 때문에 운다고 하여 처형된 사람, 임지를 옮기면서 정든 여인을 그리워하여 보인 눈물도 정여립 때문이라 하여 능지처참된 관리가 있었다 하니 정도를 넘어선 왕따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 공화주의자 정여립]

정여립은 동래 정씨 희증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다.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는데, 명종 22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2년에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이에 일세의 이목이 정여립에게 집중되고 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이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는데,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사망하자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배반하고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하여 여립의 배신을 공격하고 이 상소에 의해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샀다.

상소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어 마침내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선조 20년의 일인데 이로 인해 당시 동인이 쥐고 있던 삼사의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간 해이기도 하다. 여립이 서인을 공격하게 된 연유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는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 인사했다 하고,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여립은 그 후 진안 죽도 천반산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시회를 여는 등 날로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이들은 임진년에 있을 변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이의 뜻에는 동감하여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정해 왜변이 발발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의해 정여립의 대동계 무사들이 동원되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훗날 여립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은 이 대동계가 불측한 일을 위해 조직되었다 하여 모반 음모로까지 연결지어버리지만, 오히려 호국정신이 깃든 우국충정의 단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쨋든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해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잡혔다.

이 때 정여립은 변숭복이 이 사실을 알려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는 거의 제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명에 숙청된 이들은 천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그의 진보적인 사상과 혁명성은 역모라는 이름 하에 묻혀지고 말았다.


[조작설]

정여립이 모반을 계획했고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단한 번의 저항도 없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최후를 맞이하였을까?

정여립 사건은 서인에 의해 이루어진 모함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참설에 전해져 오는 '여립이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여 책망을 듣게 한 동네 아이를 죽였다.' 는 이야기나 '어릴 적부터 제비나 찢어 죽이는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등의 구전은 그의 모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립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각종 서신 문서들을 집안에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동인의 무리들을 죽게 할 리 없다.

또 급보를 받고 도망간 곳이라면 과연 죽도를 택했을까? 이미 그는 죽도를 자주 찾아 '죽도 선생'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세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깊은 산을 두고도 연고지를 택했을까? 또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정여립의 자결이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치고 나서 칼자루를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렀다 하는데 그 동안 관군들은 구경만 했단 말인가? <동소만록>같은 야사에서는 '여립이 진안 죽도로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살해한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 고 전해지는데, 기축옥사의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서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정철이 그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최고 지휘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는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지휘한 노비 출신의 송익필이 있었는데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이 송익필이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명을 환천시키고자 했으나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이 이를 반대하자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작에 동참한 것이라 보여진다.


[모반설]

정여립이 남긴 문장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사비군이란 말은 그 당시 사회 통념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여립이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목자(木子= 李씨)는 망하고 존읍(尊邑= 鄭씨)은 흥한다."

"요동에서 바라보니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나와 보니 전라도 땅 남문 밖에서 뻗었다."

"정팔룡이라는 신기로운 용맹 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존읍(尊邑= 鄭씨)은 그를 가리키고 그의 어릴 때 이름이 팔룡이며, 그의 출생지는 남문 밖이다. 정여립이 이 낭설을 퍼뜨려 믿게 한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무'에서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역적들의 문서 중에 정여립이 하늘에 제사 하는 제문이 일곱 장이나 나왔는데, 임금의 죄악을 말함에 있어서 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그리고 여립은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이행을 기도하였다 한다.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이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으나 역모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묵죽도, 하서 김인후의 시가 아래에 있다.

 기영정. 장성 삼계면에 있다. 송인수가 송흠의 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중종의 어명을 받아 지은 정자이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무등일보 연재 목록) ◆광주/전남 향토사◆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2부 집필 마친 김세곤 씨 2012-08-2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86. 정조임금, 김덕령에게 충장공 시호를 내리다 - 광주 북구 충효동 정려비각 2012-08-22
호남정신 뿌리찾아-85. 취하였을 때의 노래여, 恨의 노래여 - 풍암정, 취가정에서 2012-08-15
호남정신 뿌리찾아-84. 충용장 김덕령, 형문 끝에 옥사하다 2012-08-08
호남정신 뿌리찾아-제83회 선조 임금, 김덕령을 직접 심문하다. ... 2012-08-01
호남정신 뿌리찾아-82. 김덕령, 이몽학의 난 연루 다시 투옥 2012-07-25
호남정신 뿌리찾아- 81. 김덕령, 살인죄로 옥에 갇히다 2012-07-18
호남정신 뿌리찾아-80. 김덕령, 2차 진주성 전투 순절자 위해 제사 지내다 2012-07-11
호남정신 뿌리찾아-제79회 거제 장문포 수륙 합동 작전, 실패로 끝나다 - ... 2012-07-04
호남정신-제78회 김덕령, 거제 장문포 수륙 합동 작전 에 참전 ... 2012-06-27
호남정신 뿌리찾아-77. 충용장 김덕령, 팔도 의병 총수 되다 - 광주 충장사 2012-06-20
호남정신 뿌리찾아-76. 김덕령 부대, 경상도로 향하다 - 광주 충장사 2012-06-13
호남정신 뿌리찾아-75. 선조, 김덕령에게 충용이란 군호를 내리다 - 광주 충장사 2012-06-0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74. 세자 광해군, 김덕령에게 익호장군 칭호를 내리다 ... 2012-05-3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73. 김덕령, 의병으로 나서다 - 광주 충장사 2012-05-2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 72. 국난에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 굶어 죽다 ... 2012-05-1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71.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 장기적 계책" 2012-05-09
호남정신 뿌리찾아 -"70.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먼저 백성의 삶을 챙기는 것이 국난 극복의 지혜" 2012-05-0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9. 진주성 함락 이후의 전라도 의병들 - 최경장, 임계영, 변사정 2012-04-2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8. 진주성은 왜 함락되었나 - 제2차 진주성싸움의 패인 2012-04-1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8. 진주성은 왜 함락되었나 - 제2차 진주성싸움의 패인 2012-04-1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7. 왜군은 2차 진주성 싸움 후 호남을 점령했는가? 2012-04-1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6. 논개의 고향을 가다(2) - 전북 장수군 의암 주논개 생가지 2012-04-0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5. 논개의 고향을 찾아서 (1) - 전북 장수군 의암사 2012-03-2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4. 논개여 ! 아, 의기 논개여! (3) - 진주성 의기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2012-03-2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3. 논개여 ! 아, 의기 논개여! (2) - 진주성 의암사적비 2012-03-1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2. 논개여! 아, 의기 논개여! (1) - 진주성 의암, 의암사적비 2012-03-0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1.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 (7) - 이잠, 심우신, 민여운 2012-02-2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0.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6) - 문홍헌, 구희, 오방한, 김인갑, 김의갑 2012-02-2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9.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5) - 전라우의병장 겸 경상우병사 최경회 2012-02-0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8.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4) - 고종후, 오유, 오빈, 충노 봉이와 귀인 2012-02-0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7.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3) - 황진, 장윤, 고득뢰 2012-01-2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6.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2) - 김천일, 이종인, 강희열, 강희보 등 2012-01-1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5. 진주성에서 순절한 호남 의병들(1)- 창의사 김천일, 김상건, 양산숙 등 2012-01-1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4. 진주성, 9일간의 혈전 끝에 무너지다 2012-01-0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3. 호남 의병, 외롭게 진주성을 지키다 2011-12-2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2. 서울에서 철수한 왜군,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다 2011-12-2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1. 호남의병들,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 1593년 6월 2011-12-1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0. 변이중, 신무기 화차를 만들어 왜적을 물리치다- 장성군 봉암서원 2011-12-0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49. 권율,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3) 2011-11-2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48. 권율,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2) 2011-11-0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7. 권율,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1) 2011-10-2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6. 행주산성을 답사하다 - 행주대첩의 흔적을 찾아서 2011-07-2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5. 전라도 관찰사 권율, 경기도 오산 독성산성에 진을 치다 2011-07-2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4. 호남 의병장들, 왜군과 싸우다 - 변사정, 강희열, 임희진, 민여운 등 2011-07-1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3. 임계영과 최경회,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4) 2011-07-0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2. 임계영과 최경회,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3) 2011-06-2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41.최경회와 임계영,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2) 2011-06-2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0. 최경회와 임계영,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1) 2011-06-1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9.김시민,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다(5) 2011-06-0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8. 김시민,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다(4) 2011-06-0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7. 김시민,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다(하) 2011-05-2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6. 김시민,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이기다(중) 2011-05-1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1.김시민,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이기다(상) 2011-05-1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집필 마친 김세곤씨 2011-03-1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3. 녹도만호 정운, 부산해전에서 전사하다 - 고흥 쌍충사, 순천 충무사, 해남 충절사(2부 끝) 2011-03-0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2. 조선수군, 부산 해전에서 왜선 120척을 부수다 2011-03-0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1. 이응종 등 55명, 영광군을 지키다 - 영광 임진 수성사 2011-02-2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0. 의곡장 기효증, 양곡 가지고 선조 임금을 의주에서 만나다 - 광주 칠송정 2011-02-1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9. 김경수,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다 - 장성 오산창의사, 창의비각(하) 2011-02-0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8. 김경수,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다 - 장성 오산창의사, 창의비각(상) 2011-01-2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7. 최경회와 문홍헌, 전라우의병을 일으키다 - 화순 포충사·삼충각 2011-01-1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6. 임계영·박광전·문위세, 전라좌의병을 일으키다 - 전남 보성 2011-01-1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5. 안의와 손홍록,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다 - 전주 경기전 2011-01-0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4. 송제민, 호남의병 모집하는 격문을 돌리다 - 광주 운암서원 2010-12-2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3. 양산숙, 선조임금 알현하고 의병의 일 아뢰다 2010-12-2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2. 고종후, 아버지 고경명 시신수습 후 복수 의병장 되다 2010-12-0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1.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 - 광주 포충사 2010-12-0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0. 의병장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하) 2010-11-2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9. 의병장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상) 2010-11-1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8. 권율과 황진, 이치전투에서 승리하다 - 금산 이치(하) 2010-11-1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7. 권율과 황진 장군,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 금산 이치(중) 2010-11-0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6. 권율과 황진, 이치전투에서 승리 - 금산 이치(상) 2010-10-2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5. 왜군, 금산에서 전주성을 넘보다 - 웅치전투 2010-09-2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4. 세계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 경남 통영 한산도(하) 2010-09-0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3. 세계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 경남 통영 한산도(중) 2010-08-0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2. 세계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 <상>경남 통영 한산도 2010-07-2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1. 이순신 장군, 당포·당항포·율포 해전서 승리 2010-07-0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0. 이순신, 사천해전서 거북선 첫 출전 (하) - 나주 나대용 생가, 소충사, 여수 선소 2010-07-0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9. 이순신, 사천해전서 거북선 첫 출전 (상) - 여수 선소, 나주 나대용 생가 2010-06-17
호남정신의 뿌리를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8.전라좌수사 이순신, 옥포 해전에 첫 승리를 하다- 여수 진남관(하) 2010-05-2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7. 전라좌수사 이순신, 옥포 해전서 첫 승리를 하다- 여수 진남관 (상) 2010-05-2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 양대박의 호남의병, 임실 운암 전투에서 승리하다. 2010-04-2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5.고경명의 마상격문 - 광주 포충사(하) 2010-04-2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4. 고경명의 마상격문 - 광주 포충사 2010-04-1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3.창의사 김천일의 길 - 나주 정렬사 2010-04-0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2. 김천일과 고경명 - 의병으로 나서다 2010-03-2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1.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2010-03-1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부 집필 마친 김세곤씨 2010-01-2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6-1부 연재를 마치면서 - 義의 길을 가다 이제 ... 2010-01-1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5. 일재 이항, 태산가 부르며 학문 닦기를 쉬지 않네 - 정읍시 남고서원, 보림사 2010-01-0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4.호남과 영남의 사림들이 함께 만나다 - 나주 경현서원 2009-12-2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3. 송천 양응정, 대를 이어 의를 지키다 - 광주 임류정, 양씨 삼강문 2009-12-1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2. 사암 박순, 절개와 겸양으로 사림의 재상 되다 - 광주 송호영당, 나주 월정서원 2009-12-1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1. 고봉 기대승, 시비가 분명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 광주 월봉서원, 나주 경현서원 2009-12-0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0.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송강 정철 - 담양 식영정, 가사문학관, 송강정 2009-11-2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9. 소재 노수신, 유배 중 진도를 개화시키다 - 진도 역사박물관 2009-11-19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8. 천지신명은 내 마음을 알리다, 규암 송인수 - 진도 벽파정, 장성 기영정 2009-11-1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7.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금호 임형수 - 나주 송재사, 광주 등임사 2009-11-0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6. 미암 유희춘, 유배 중 학문에 정진하다 - 담양 연계정·모현관, 광주 무양서원, 해남 해촌서원 2009-10-2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5. 석천 임억령, 동생과 인연을 끊다 - 담양 식영정, 해남 해촌서원, 화순 도원서원 2009-10-2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4. 하서 김인후, 인종 임금을 그리워하다 - 장성 맥동마을, 필암서원 2009-10-1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3.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관용의 선비 송순 - 담양 면앙정 2009-10-0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2. 나세찬,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다 - 나주 송재사 2009-09-2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1. 은둔의 미학, 작품을 남기다 2009-09-1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0.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2009-09-1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9. 적벽에 새긴 도학의 꿈, 신재 최산두 2009-08-1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8. 벽파를 건너며 - 기묘명현 김정 2009-07-30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7. 기준의 죽음과 그의 형 기진의 광주 이사 2009-07-1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6. 멈출 줄을 아는 선비, 송흠 2009-07-0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5. 최부, '표해록'을 쓰다 - 광주 무양서원 2009-06-18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4. 순천 옥천서원과 임청대 2009-06-0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 사람들의 피눈물, 화순 해망서원 2009-05-21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 죽어서도 향기로운 만남, 조광조와 양팽손 2009-05-0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강의 :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010.7.15(목)나주 시민회관, 전남문화관광해설사 90명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제1부 역사인물기행 -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제2부  연재 목차  


1.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2.  조광조과 양팽손, 죽어서도 향기로운 만남이여

      - 화순 적려유허지, 죽수서원      

3. 사림들의 피눈물을 어찌 닦으랴

       -  화순 해망서원

4.  김굉필과 조위, 유배지에서의 도학자와 시인

       - 순천 옥천서원과 임청대    

5.  금남 최부, 해양 표류 기행집 <표해록>를 쓰다

      - 광주 무양서원   

6.  멈출 줄을 아는 선비, 지지당 송흠

      - 장성 관수정과  기영정      

7.  기묘명현 기준의 죽음과 그의 형  기진의 광주 이사

      -광주 월봉서원과 오남재

8.  벽파를 건너며 - 기묘명현 김정  

9.  신재 최산두, 적벽에 도학의 꿈을 새기었으나

        - 화순 적벽, 물염정, 도원서원에서  


10.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눌재 박상, 윤구와 신잠 그리고 고운에게 시를 보내다.

11.  소쇄처사 양산보, 대숲에 앉아서 귀거래사를 읊다.

         - 담양  소쇄원         

12.  송재 나세찬 ,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다.

         - 나주 송재사

13.  면앙  송순,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  담양  면앙정  

14.  하서 김인후,   인종 임금을 그리워하다. 

          - 장성 맥동마을, 필암서원     

15.  석천 임억령, 녹권을 불사르고 동생과 인연을 끊다.

    - 담양 식영정, 해남 해촌서원, 화순 도원서원

16.  미암 유희춘, 20년 유배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다.

        - 담양 연계정 , 광주 무양서원, 해남 해촌서원

17.  금호 임형수,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 나주 송재사, 광주 등림사

18.   규암 송인수, 천지신명은 내 마음을 알리다.                          - 진도 벽파정, 장성 기영정

 19.  소재 노수신, 19년 유배 중에 진도를 개화시키다.

          - 진도 역사관

 20.   송강 정철,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  담양 식영정, 가사문학관, 송강정  

 21. 고봉 기대승, 시비가 분명하여야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습           니다.  - 광주 월봉서원, 나주 경현서원

 22.  사암 박순, 절개와 겸양으로 사림의 재상이 되다.

          - 광주 송호영당 , 나주 월정서원      

 23.  송천 양응정,  대 代를 이어 의 義를 지키다.

             - 광주 임류정,  양씨 삼강문

 24. 호남과 영남의 사림들이 함께 만나다.

       - 나주 경현서원 

 25.  일재 이항, 태산가를 부르며 학문 닦기를 쉬지 않네.

           -  정읍  남고서원, 보림사

                   

 26.  마치면서               

제1부 역사인물기행 -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지 知 <호 好 < 락 樂 =  어느 책 ?


1. 역사인물 기행 책을 쓰다.


    o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2006)

    o  송강문학기행 -전남 담양 (2007)

    o 고봉, 퇴계를 그리워하다   (2009)


   2009.4월부터 2010.1월까지 9개월간 26회에 걸쳐 무등일보에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연재, 현재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연재 중


2.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 연재


  가.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1) 정체성 正體性 identity 찾기

   2) 자긍심 갖기 - 의향 義鄕

   3) 역사에서 느끼기 - 울림, 감성, 감명, 교훈


 나. 이 글의 배경은 ?


   1) 時 : 16세기 조선 - 4대 사화, 선조 시대

   2) 地 : 호남 (전라도)

   3) 人 : 호남의 선비들

       

  o 역사 책과 역사 현장에서 호남 역사 인물을 만나다  


  다. 이 글의 용도는?


1) 호남 역사인물의 대중화 - 일반 대중에게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알린다. "나의 조상이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한다.  (광산김씨, 제주양씨, 울산김씨, 충주 박씨 등등)

  

2)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  - 이야기 거리, 스토리텔링으로  활용


3) 후배들에게 호남역사 알리기 - 중 ․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호남 역사 인물을 강의할 수 있는 교재가 됨.  



참고 :  <시작하면서>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정과 한의 역사기행”(2006년)  “송강 문학기행-전남담양”(2007년) “고봉, 퇴계를 그리워하다”(2009년) 책을 발간한 이후 다시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의 義의 길을 가다” 책을 출간합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모색하는 작업입니다. 호남의 역사인물을 통하여 오늘의 호남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생각하고자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2009년 4월부터 2010년 1월까지 9개월 동안 무등일보에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26회 동안 연재를 하였습니다. 호남 인물들을 역사책에서 만나고, 전라도 곳곳의 역사현장에서 이들을 다시 만나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었습니다.


  연재 제목을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라고 한 것은 1970년 대 후반에 본 “뿌리(Roots)”라는 TV 드라마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원작 소설 “뿌리”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쿤타킨테라는 흑인의 흔적을 찾는 책입니다. 필자 또한 호남인으로서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떤 원형질 인지', '나의 정신세계에 어떤 기질이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습니다. 세상이란 하늘은 같아도 땅과 사람이 다르므로 문화와 정신은 지역적 특징을 갖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16세기 조선시대 호남 인물에서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고자 합니다. 먼저 시간은 16세기 조선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시대를 거쳐 선조임금이 집권한 때입니다. 특히 16세기 전반부는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 1547년 정미사화로 사림들이 수난을 당한 시기였습니다. 1567년에 선조가 집권하자 사림 세상이 되었으나 1575년에 동서분당이 일어났고,  1589년에 전주의 정여립 사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큰 격동을 겪게 됩니다.  


  다음으로 공간은 호남입니다. 호남은 옛날 호강 (湖江 · 지금의 금강)아래이며 보통 전라도(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딴 지역)라고  부릅니다.  호남은 곡창지대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중앙정치의 영향이 덜 미친 곳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호남 사림들입니다. 이들은 유학을 숭상한 사람들로서 호남 태생이거나,  호남에 유배 또는 관직 생활을 하였거나 그 역사 흔적이 있는 선비들입니다.


   이렇게 만난 호남 역사 인물은 무려 30명이상입니다. 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들의 정신세계에는 의 義라는 큰 맥이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의리 義理, 정의 正義, 절의 節義로 표현되는 의 義는 사람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도리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한 의 義의 길이 호남 정신의 뿌리임을 알게 된 필자는 이 의 義의 길에서  호남인의 정체성 正體性과 자긍심을 찾습니다.  


자, 이제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의 義의 길을 가다’  역사 인물 기행을 시작합니다.  


< 호남 역사 인물>

o 박상   (1474-1530)

o 조광조 (1482-1519)

o 양팽손 (1488-1545)

o 김종직 (1431-1492)

o 김일손 (1464-1498)

o 김굉필 (1454-1504)

o 정여창 (1450-1504)

o 조위   (1454-1503)

o 최부   (1454-1504)

o 송흠   (1459-1547)

o 기준   (1492-1521)

o 기진   (1487-1555)

o 김정   (1486-1521)

o 최산두 (1483-1536)

o 윤구   (1495-1549)

o 신잠   (1491-1554)

o 고운   (1479-1530)

o 양산보 (1503-1557)

o 나세찬 (1498-1551)

o 송순   (1493-1582)

o 김인후 (1510-1560)

o 임억령 (1496-1568)       

o 유희춘 (1513-1577)

o 임형수 (1514-1547)

o 송인수 (1499-1547)

o 노수신 (1515-1590)

o 기대승 (1527-1572)

o 박순   (1523-1589)

o 정철   (1536-1593)

o 양응정 (1519-1581)

o 이황   (1501-1570)

o 이언적 (1491-1553)

o 김성일 (1538-1593)

o 이항   (1499-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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