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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다, 도시 3.0] ①함부르크는 더이상 항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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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다, 도시 3.0] ①함부르크는 더이상 항구가 아니다

함부르크(독일)=유한빛 기자 입력 2019.11.18. 06:02 수정 2019.11.18. 06:36

                          
      

[조선비즈 창간 10주년 기획]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재개발·재건축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인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되, 지속가능한 미래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종의 재창조 과정이다. 지구촌 곳곳의 거대 도시들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이 숙제를 해왔다. 이제 한국도 이 물결 앞에 마주 섰다. 2020년 창간 10주년을 맞는 조선비즈가 이른바 도시재생의 모범생들을 직접 살펴봤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참고하면, 쇠락한 도시에 더 활기찬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기사 보기
https://news.chosun.com/interactive/urban/index.html

쇠락한 항구 재탄생에 17조원 투자
‘밤에도 사람 사는 도시’ 만드는 게 핵심
30년 걸리는 우보천리 사업
좋은 도시 만들려면 시간 투자해야

행인들의 옷차림이 제법 두터워진 지난 10월 23일 독일 북부 최대 자치도시인 함부르크 잔트토어카이(Sandtorkai)지구. 평일 오후임에도 이곳은 강변을 산책하는 시민들과 항구를 돌아보는 관광객들로 활기를 띄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부부, 손을 잡고 걷는 연인, 헤드셋을 끼고 산책로를 걷는 학생들의 모습은 한가롭기만 했다.

엘프필하모니(Elbphilamonie) 콘서트홀에서 만난 베르거(Berger·22)씨는 인도에서 놀러온 친구 베룬(Berun·27)씨와 함께였다. 그는 "이 콘서트홀 전망대는 함부르크 시내와 항구를 구경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며 "오래된 도시에 지어진 새롭고 멋진 건축물이라고 생각해 친구를 데려왔다"고 말했다.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의 아헨(Aachen)에서 여행을 왔다는 40대 클라우스(Klaus)씨는 아내, 두 자녀와 산책 중이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업무차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상당히 황량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사람 사는 분위기가 제법 난다"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날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곳은 240만㎡짜리 옛 항구와 창고 부지에 30여년에 걸쳐 130억유로(한화 약 17조원)를 투자하는 유럽 최대 도시재생 사업인 ‘하펜시티(HafenCity)’ 프로젝트의 현장이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함부르크시의 면적은 40% 확장된다.

◇ 우보천리 자세로 사람 사는 도시 만든 함부르크

한때 유럽 최대 해운수송량을 자랑하던 함부르크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엘베강(江)에 면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함부르크항에는 수위가 높은 만조 때만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북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벨기에 앤트워프에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상시 정박할 수 있었고 함부르크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해운업과 함께 함부르크의 경제를 지탱하던 조선업 등 제조업의 경쟁력도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시 정부가 주거 정비 사업과 함께 서비스업·관광업 같은 경제동력을 모색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쓰임새를 다한 항구와 창고 부지를 하펜시티란 이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1990년대 말 시작됐다. 설계 단계에서 중시한 부분은 하펜시티를 ‘사람 사는 동네’로 만드는 것. 직장인들이 빠져나가면 텅 비는 업무지구나 주말에만 붐비는 상점가가 아닌, 문화·상업·주거·교육기능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목표가 설정됐다.

함부르크시는 서두르지 않았다. 1997년 ‘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의 공간분할에 관한 법’을 특별제정하고, 분야별 전문가들과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건물이 들어선 때는 2003년. 10개 구획을 차례대로 건설해 2030년 완공하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사업이다.

이 사업은 유한회사인 하펜시티함부르크가 총괄한다. 최대주주는 함부르크시 정부다. 시 정부는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만 받을 뿐, 사업에 일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펜시티함부르크의 직원은 모두 민간에서 영입한 건축, 디자인, 회계, 홍보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하펜시티를 대표하는 건물이자 함부르크의 변화를 알리는 새 얼굴은 엘프필하모니 콘서트홀이다. 하펜시티의 10개 지구 중 첫 번째로 지난 2009년 완공된 잔트토어카이·달만카이(Dalmannkai)지구 초입에 자리잡았다.

이 지구에는 엘프필하모니 콘서트홀을 비롯해 부두를 중심으로 새 건물 300여동이 들어섰다. 건물마다 시행사와 설계사무소, 건축업체가 제각각이다. 하펜시티 도시재생 사업을 주관하는 하펜시티함부르크의 방침 때문이다. 대형 건설사가 모든 건물을 맡으면 사업 속도는 빠를지언정 다양한 디자인을 반영하거나 주민들의 의견을 세심하게 수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해, 건물 부지를 하나씩 매각했다.

하펜시티에서 모든 건축사업은 △공공성 △다양성 △친환경성 △주변 환경과 조화라는 틀 안에서 진행된다. 주변 풍경을 해치지 않고 다양한 쓰임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건축을 지향한다.

건물의 1층에는 모든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만 입점시킬 수 있다. 1층은 카페와 식당 등 상점이, 2~3층에는 기업들이, 4층 이상은 주거지인 형태가 기본이다. 이렇게 하면 밤이면 텅 비는 도시가 되지 않는다. 글로벌기업인 유니레버의 독일 본사도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1층 공간을 개방했다. 누구나 들어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창밖으로 엘베강과 항구시설을 감상할 수 있게끔 했다.

상시 거주하는 인구를 늘리기 위한 하펜시티의 또다른 정책은 교육기관 유치다. 가족단위 주민에게 중요한 초·중등학교와 대학교, 놀이터·공원 등 시설을 계획 중심부에 놓았다. 이미 운영 중인 어린이집 6곳 외에 3곳을 더 짓는 중이고, 지난 2009년 카타리나초등학교를 시작으로 함부르크의대(MSH)와 퀴네물류대학, 프랑크푸르트경영대학원 분교, 하펜시티대학교(HCU)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HCU의 재학생 수만 2500명이 넘는다.

첨단 건축물과 글로벌 기업들이 들어선 하펜시티에서 다리만 하나 건너면, 함부르크의 과거로 이어진다.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창고 건물 지구인 ‘슈파이혀슈타트(Speicherstadt)’다. 이곳에는 해양박물관과 미니어처박물관, 커피박물관 등 함부르크의 발자취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자네 뷜러(Buehler) 하펜시티함부르크 홍보총괄은 "아시아의 기준에서 보자면 하펜시티는 정말 느리게 진행되는 사업일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가장 빨리 일할 수 있는 파트너보다 함부르크 주민의 삶과 미래에 가장 적합하게 일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공을 들이기 때문에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며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는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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