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er_no |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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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개혁에 앞서 방송개혁을 실시하라
■ 무릇 바른 교육이 되고 참 교육이 되려면
■ 베옷을 입고 회개해야
■ 새 천년, 새 역사, 새 주역
■ 반인륜적인 범죄를 좌시해서는 안된다
피노체트의 사법처리를 주장하며
■ 의인 장준하 선생
죽임을 당한 후에 우리에게 말하는 지도자
■ 파산상태의 한국인의 도덕의식
이 보잘 것 없는 글들이지만,
평소에 늘 말없이 나를 사랑으로 격려해주고 지지해 준
향린교회 청년들에게 바친다
2000년 부활절
모든 개혁에 앞서 방송개혁을 실시하라1)
지금까지 눈먼 장님 같은 인사를 방송사의 사장으로 임명하여 방송사를 이끌도록 하는 방송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송사 사장은 전적으로 청와대 밀실에서 선임될 뿐 아무런 검증이나 인사청문 과정 같은 것을 거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임명된 방송사 사장은 권력, 재력, 인기에 눈먼 사람입니다. 결국 이것은 한국의 방송을 눈먼 사람의 인도를 따라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방송사와 정부 둘 다 개천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흰 페인트로 장님임을 표시하는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들이받아 그만 어이 없이 땅 바닥에 나뒹글게 되었습니다. 장님이 된 것도 억울한데 그렇지 넘어지자 너무나 화가 나서 그만 소리쳤습니다. 목사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야, 이새끼야, 눈깔은 두었다 어디에 쓰냐?' 그랬더니 저 쪽에서도 이에 못지 않는 험악한 욕설이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야 이새끼야! 보면 모르냐!' 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양 쪽이 모두 눈 먼 장님이었다는 것인데 양쪽이 모두 상대방을 눈 뜬 사람 같이 말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니까 장님을 부딛치게 되었지 두 눈을 가지고 앞을 보는 사람이라면 흰 지팡이를 집고 걸어가는 장님을 못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눈 먼 방송사 사장이 뭘 제대로 보지 못하면 방송사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국민의 눈과 귀인 방송사를 잘 이끌어 가지 못하면 그 방송을 보고 듣고 정치를 바로 할 수 있겠습니까?
방송은 통치자를 위해서 있지 않습니다. 방송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국민이 골르는 사람이 방송사 사장이 되어 방송사를 이끌어야지 통치자의 마음에 들고 그의 도구가 되어 방송사를 이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방송사 사장이나 방송위원 휘원을 임명할 때에는 공개 검증절차를 밟도록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도 물론 문제입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 보다 더 문제는 알고서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깨우쳐만 주면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고 불가능한 것은 알고 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 오늘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방송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권력이 방송을 장악하려는 것은 독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 자신이 스스로 그 독을 마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임시국회가 막 끝냈습니다. 그런데 방송개혁법을 심의조차 하지 않은채 끝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대량해고, 정리해고 제 1호에 해당하는 국회의원들이 아직도 해고되지 않고 한 달에 수백만원을 세비조로, 또 수백만원을 비용이네 판공비네 등등으로 우리 국민의 피를 빨아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김대통령은 정리해고로 실업자가 되어 자살하는 실직자들이 속출하였건만 이렇게 국민의 불신과 지탄을 받고 있던 국회의원들에게 수백만원씩의 금일봉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합니다.
지금 이 정권의 대통령은 거짖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수많은 말을 식언하고 돌리고 부인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늘어 놓고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국민을 배신하고 우롱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지금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고 큰 소리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만, 내각제 개헌은 이제 물 건너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할려는 것은 개혁을 하겠다고 했으면 개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개혁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개혁은 방송개혁입니다. 방송개혁은 개혁적인 방송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개혁되지 않는 방송법에 의한 방송은 방송이 국민의 눈과 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자의 도구로 되어 온갖 잘못을 가리우고 또 변명하면서 정부가 선전하는 일에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방송인을 앵무새로 만드는 것입니다. 앵무새는 그대로 정부의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앵무새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오늘 이렇게 방송개혁을 부르짖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실, 사실, 현실을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이 뜨거운 오후, 하루 중에 가장 뜨거운 시간에 이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곳은 뜨거운 아스팔트 광장입니다. 지금 뜨겁습니다. 그냥 햇빛에 노출된 채 앉아 있을 뿐 아니라 소리를 질르고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여러분이 그 뜨거움을 견뎌 냅니다. 아니 여러분들의 정의를 위한 뜨거운 심장는 오늘 이 아스팔트위를 불더위 보다 더 뜨거워서 그야말로 이열치열하는 식으로 여러분이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앉아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보통 다른 시위와 다른 이유와 동기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대개들 보면 직장에 보내달라거나 임금을 올려달라는 등 여러 가지 자신들을 위한 요구사항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요구사항 5개항을 아무리 보아야 여러분 자신들을 위한 요구사항은 아닙니다. 이 나라의 방송개혁을 위한 요구사항입니다. 그런 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통치자들이 거짓말을 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악질적인 독재자로 힛틀러가 있습니다. 그는 통치자는 아주 큰 큰 거짓말, 아주 믿기 어려운 거짓말을 하면 국민들은 오히려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현 대통령은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여 하면 결국 국민이 그것을 믿게 되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송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만일 개혁되지 않으면 이 정부의 말을 앵무새 처럼 반복해야 하게 되면 또 그렇게 하다가 보면 결국 앵무새 처럼 계속 거짓말을 반복해야 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 헌법의 저자라고 하는 토마스 제퍼슨은 한번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내게 신문 없는 정부, 정부 없는 신문,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방송의 자유 없는 정부, 정부 없는 방송의 자유, 이 두가지 중에서 택일하라고 하면 우리는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필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일반들이 아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바로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고 또 국민은 정부 이전에 자유와 자유 언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언론과 언론의 자유는 바로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한 순간이라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무릇 바른 교육이 되고 참 교육이 되려면2)
오늘 전국 대학교의 학생회, 강사노조, 대학노조 등으로부터 오신 교육계 종사자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교육자로, 또는 피교육자로 참여하고 있는 교수, 강사, 학생 여러분들과 교육행정 일선에 종사하는 교직원 여러분들께서 위기에 처한 이 나라의 교육을 바로 세워보고자 이렇게 투쟁하는 데 대하여 존경을 표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대로 이 정권이 개혁할 것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벌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정리해고하여 직장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동안 이 정권하의 교육 정책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환영할 수 없는 개혁을 한다고 하다가 장관이 바꿨습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 마다 교육정책이 바뀌고 입시제도가 바뀌는 그런 사회에서, 그런 시대에서 오래 살아 왔습니다. 일관된 교육정책이 없는 사회에서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호랑이 무서워서 길을 비켜가다가 사자를 만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그런 격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교육개혁을 한다고 하다가 드디어 소위 '교육발전 5개년 계획'이란 시안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정권의 교육 정책이 정리되고 완성된 모양입니다만, 이것은 그동안 올바른 교육에 대한 우리의 확신에 큰 도전을 의미하고 정리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반민족적, 반민중적, 그리고 반민주적인 특징을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육정책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하여 현 정권이 교육 정책을 IMF의 기초가 되어 있는 신자유주의 철학에 근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교육이 왜 문제냐 하면, 우선 신자유주의가 내세우고 있는 목표 그 자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것은 이 세계를 지구화하고 지구화된 세계는 이상적인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다고 여러 가지 환상적인 것으로 약속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대국의 자본에 의한 지구화이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돈과 기술공학, 정보와 통신망을 수단으로 하여 무한경쟁과 효율극대화를 내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세우는 구실일 뿐이고 실상은 이 세계를 소위 20대 80의 세계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지구화된 이 세계는 무한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인 20%의 엘리트만 필요하고 나머지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경쟁의 대열에 나서기를 거부한 80%의 사람들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필요한 80%의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티티맨트,' 즉 작은 작낭감 같은 것을 손에 쥐어주어 그것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다가 죽게 하는 그런 무서운 사회를 만들려고 음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권의 교육 정책이란 80%의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한 무한 경쟁에서 이기는 20%의 엘리트들을 교육해 내겠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교육의 효율성을 최고로 높이겠다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철학에 기본한 교육정책은 20%의 엘리트를 양성하고 나머지 80%의 인간은 우민화하겠다는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판 유대인 학살, 또는 교육에 의한 인간 대량학살 프로젝트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정책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철학에 근거한 악마적인 교육정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적 없는 교육을 배격합니다. 지금 이 정권은 미국만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한 예속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예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김 대통령은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되어도 한반도에 미군은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교육정책은 그러한 대통령에게 어울리는 교육정책일지 모르겠지만, 민족적이거나 민족자주적이지 못한 교육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정권에 들어 서서 비록 전교조가 합법화되기는 했습니다만, 종전 정권에 의해 규정된 한총련을 이적단체라 하여 탄압하고 있습니다. 한총련은 교육민주화는 물론 민족자주를 외치고 있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단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체를 탄압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 정권이 반민족자주적인 정권이냐를 말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민족의 얼을 빼고 우리 나라에서 무슨 교욱을 할 수 있고 그런 교육이 무슨 제대로 된 교육이겠습니까? 지금 우리 나라는 미국이란 제국주의 국가에 종속되는 길로 급속히 달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라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미국을 비판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면, 그 정권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 자칭합니다만, 비민주적이고 반민주적인 교육정책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릇 모든 정책은 물론이지만, 교육 정책을 민주적 의사 수렴이 아닌 소수의 교육관료들의 일방적인 교육정책 결정을 우리는 반대합니다. 교육정책은 공공적인 것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를 통해서 토의되고 채택되어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순간에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만일 경찰관이 범인을 현장에서 체포할 경우에 '당신은 변호사를 채용할 수 있고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해주고 수갑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비록 살인범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체포하였다는 사실이 들어나면 법정에서 그대로 석방이 됩니다. 이것은 비록 범죄인의 혐의를 받는 사람이지만, 그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정권의 교육발전5개년 계획의 내용이 얼마나 좋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하더라도 - 사실은 우리가 위에서 본 대로 문제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규칙을 전부 위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교육 정책은 다른 많은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지적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약자인 민중에 대하여 관심하지 않는 엘리트 교육에 반대합니다. 교육발전 5개년 계획에 의하면 국공립 대학을 민영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국가가 교육을 포기하고 이를 탐욕이 많은 교육 사업가들에게 팔아 넘기겠다는 말입니다. 그 전제는 교육을 받는 사람은 돈을 내고 교육을 사고 돈 많은 교육사업가들이 교육을 상품처럼 팔겠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파는 사람들은 교육에 투자를 하고 그 투자한 만큼 이익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돈 없는 사람은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돈 내고 돈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놀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국공립학교 기관을 민영화하겠다는 말은 돈있는 사람 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이나 노동자나 농민이나 도시빈민의 자식들은 대학 문전에도 얼신 할 수 없게 한다는 말입니다. 돈 놓고 돈 먹드시 돈 놓고 교육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도대채 국가는 왜 있고 정부는 왜 있습니까? 그것은 이 나라의 가난하고 힘 없는 국민을 돈있는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법 앞에서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고 보호하자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그렇게 돈 있는 사람들에게만 살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정부나 국가가 완전히 시장논리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지금 IMF로 많은 사람들이 생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며, 또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중단한다는 하여 이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현실이고 잠시 만의 불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교육을 지금 교육발전 5개년 계획에서와 같이 한다면 지금 IMF 관리 경제가 빚어내는 사회적, 국가적 불행이 오고오는 세대에게 오고오는 세월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육은 100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하는 말은 오늘 뿌린 씨가 100년 후에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교육을 상품시장의 논리로 한다면 100년 후에는 이 땅에는 진정한 교육은 사라지고 시장논리가 학교와 전 사회를 전적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예상해야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교육발전 5개년 계획에 나타난 교육정책이란 그 이름에는 '발전'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발전이 아니고 개악이고 후퇴입니다. 나는 60평생이 넘도록 이 하늘 아래 마치 밍크 코트를 수 천만원씩 돈으로 사고 파는 논리로 교육을 한다는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이 정권의 교육이 근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철학 그 자체가 적자생존의 법칙과 쟝글의 법칙, 즉 약육강식이란 논리인데 바로 이 정권은 그 논리를 교육에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교육정책은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민중적이라는 지적 외에도 반도덕적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교육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경제와 물질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빵으만 살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몸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나 G.N.P.의 수치나 그런 것이 나라를 문명국으로, 강대국으로, 또는 선진국으로, 또는 인간다운 생을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과 문명과 도덕, 인권과 인도주의가 그 나라를 문명국으로, 강대국으로, 그리고 선진국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오늘 여러분은 몸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정권이 표방하고 있는 교육정책은 반민족적, 반민중적, 반민주적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교육을 받아 자라나는 시민은 모두가 민족의 얼이 빠지고 외세, 특히 미국에 노예화된 시민이 될 것이고, 오직 돈 많은 특권계급 사람들의 자제들 만을 위한 반민중적인 부르죠아 교육을 하려는 것이며, 민주적 얼이 빠진 교육을 하여 모두가 독재 사회나 전체주의 사회에서 노예로나 살기에 적합한 반창의적 굴종적 시민이 될 것임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무릇 바른 교육이 되고 참 교육이 되려면, 그 교육은 민족적이어야 하고, 민중적이어야 하며,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의 교육을 반민족적 교육이 되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의 교육을 반민중적 교육이 되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의 교육이 반민주적 교육이 되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나라의 교육에 종사하는 여러분들이 모여서 이 정권의 교육 정책을 백지화하고 새롭게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토론 채택하고, 교육 철학을 경제논리에서 해방하여 참된 교육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경제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 논리와 도덕적 논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소리를 오늘 여러분들이 질러 온 국민이 듣고 청와대 깊숙히 있는 대통령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베옷을 입고 회개해야 3)
요즘 옷 문제가 온 나라를 들끓케 하고 있다. 옷이란 본래 문화의 문제이고 예술의 문제이며 인종과 문화와 종교 등에 따라 그 역사성과 정체성을 들어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관심할 '유니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흰 모시 옷'(묵시록 19: 8)일 터이다. 이는 우연일지 모르지만 우리 조상들이 평화의 상징으로 입었던 흰 모시 옷과 비슷하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온통 뒤흔들고 있는 "고급 옷 로비사건"은 모두 기독교인들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된 옷들이 '흰 모시 옷'이 아니고 그 반대로 '흉측한 것'으로 단정된 매우 사치한 고급 옷(묵시록 17: 4)이라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고급 옷 로비사건은 급기야는 대통령의 사과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모두 지냈던 김태정씨의 구속으로 이어지면서 금세기 말의 한국사회의 최대 정치적 문제의 하나로 불거져 가고 있다. 옷 로비 사건은 이 정권의 장관 같은 고위 공직자들의 부인들이 서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천만원대의 비싸고 사치한 옷을 사 입고 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면서 온갖 로비를 다 시도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급기야 소위 사직동 팀의 조사와 그 조사서를 유출시킨 사건, 이로 인해 사직동 팀 해산 여부의 문제, 기밀문서를 유출시켜 이를 변조, 복사하여 고의로 건네준 사건, 대통령의 영부인마저도 그 옷을 입고 있고 이 사건에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 수 많은 후속 사건들이 마치 대지진후의 여진과도 같이 계속 터지고 있다.
이렇게 문제가 커가자 마침내 청와대의 대통령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현 정권은 물론이지만,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세기의 비리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관심하려는 것이 이 정권의 도덕성 문제 등을 비롯한 정치계의 꼬이고 꼬인 역학관계 등 복잡한 이 사건의 실타레를 풀자는 시도가 아니다. 오직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성의 표시일 뿐이다.
돈이 많아 주체하기 힘든 여성들이 수천만원 아니 수억의 사치스러운 옷을 해 입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사회적,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범죄행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들, 특히 IMF 등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자들과 노숙자들이 우글거리는 을씨년스러운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에 그들의 사치행각은 뻔뻔스러운 과소비 행태이고 몰인정하고 비애국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지도자급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 사건의 주동자들이고 또 실제로 유명한 한 교회가 그런 어이 없는 비리의 '소굴'이었다는 점이나 원로급 목사를 내세워 대통령에게까지 로비를 하려고 했다는 데에는 솔직히 정신이 멍할 뿐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정숙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다녀야 하고 "비싼 옷을 입지 말라"(딤전 2: 9)는 성서의 말씀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이 어찌 그리 사치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들 권사들이 성서의 말씀과 교훈을 무시했다는 것 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나아가서 그들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검이 구성이 되고 철저한 조사를 시작하자 어떤 신문에서는 이들 연루자들이 성서에 다시 손을 올려놓고 맹세해야 할지 모른다고 썼던 것 같다. 도대채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목사니 권사니, 하느님 앞에 참말이라니, 맹세코라니 등등의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해댔다는 데 대하여 우리는 충격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한 말이 이제는 명백한 위증이었다는 것이 다 들어났기에 우리의 충격은 더욱 크다.
그들의 남편이 장관이면서 교회의 장로나 집사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내노라 하는 교회의 권사들이였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참으로 변명할 말이 없고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거짓말을 한 것은 도덕적으로도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일반 형법에서도 명백하게 범죄 - 거짓 증언 - 가 되는 행위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명예를 추락시켰을 뿐 아니라 신앙적인 입장에서 명백한 범죄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회가 온통 거짓과 부조리와 범죄로 가득 차 있는데 하필 이 권사들의 옷 로비 사건이 재수 없이 터졌기 때문에 걸렸을 뿐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형법에서는 폭로되고 안되고 차이가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이 모두 중대한 죄이다.
이미 물은 없질러졌다. 이제 더 이상 추태를 부릴 수 없다. 고급 옷을 벗고 그대신 베옷으로 가라 입고 머리에 재를 덮으쓰고 회개해야 한다. 검소하지 않고 사치한 죄, 전사회적으로 어려울 때 불우한 이웃을 외면한 죄, 거짓말 한 죄, 거짖 증언한 죄, 법관과 국민과 하느님을 속이려 한 죄 등등을 회개하여야 한다.
새 천년, 새 역사, 새 주역4)
* 이야기를 시작하며: 3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2000년
금년 2000년 새내기들과 이 시대에 대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여러분을 환영한다. 특히 금년은 새 해, 새 세기, 새 천년의 첫 해란 3 중의 의미가 있는 해여서 더욱 의미 깊다. 요즘 IMF 상황으로 많은 대학생들이 중퇴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 아픔을 금할 길 없었다. 나는 요즘 대학등록금삭감.국민교육비부담경감 대책위원회 위원장직도 맡고 있어 운동권이든 아니든 오늘의 대학생 여러분들에게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요즈음 연세대.고대.이대.성균관대 등 전국 100여 개 대학 총학의 연대기구인 "교육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교육대책위)에서 이 달 중순부터 올해 분 등록금 인상을 저지하기 위해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에 들어가는 한편, 대학 단위로 동맹휴업과 단식농성에 들어간다고 발표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5)
수많은 변화와 격동이 예상되는, 그리고 인류의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큰 세기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21세기의 첫 해6)에 여러분이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은 자못 의의 깊다고 하겠다. 여러분의 대학입학을 축하하고 여러분의 장래에 축복이 있을 것을 빌면서 몇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 20세기, 21세기는 어떤 세기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어떤 생을 목표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물을 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이고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를 물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세계 안에서의 우리나라의 위치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들은 세계적인 상황에서 볼 때 어떤 위치와 상황에 있는가? 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인간은 없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여도 우리가 대기권을 우리가 생긴 그대로는 탈출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공간에 의해 규정되는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우리는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대기권을 벗어나고 다른 항성에로 여행하는 것도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예민하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여러분이 유산으로 받게 될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질문은 지금 맞이한 21세기의 첫해는 어떤 해였는가 하는 질문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맞이한 21세기의 시대는 어떤 세기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방금 역사의 뒷 무대로 보낸 20세기는 어떤 세기였던가? 라는 물음을 불가피하게 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현재를 결정하고 미래란 현재에 토대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20세기는 어떤 세기였는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던 즈음에 역사적 진보사상과 낙관주의가 지배적이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왔을 때 실제 역사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전쟁으로 얼룩졌던 것이 20세기였다.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 이외에도 130여 회의 크고 작은 전쟁을 겪었던 세기였고 인간이 동료 인간을 죽인 숫자가 어떤 통계에 의하면 1억 5천만 명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로써 19세기 말에 가지고 있었던 장미 빛 낙관주의는 물거품이었고 인간성과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가 우리 인간들의 가슴속을 채웠던 것이다.
또 20세기는 어떤 세기였는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무기에 의해서 인류가 전멸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는 세기로 특징 지워질 것이다. 21세기의 첫 해를 맞아 이제 역사의 낡은 장이 지나가고 단순히 새로운 세기인 21세기만이 아니라 진정한 영구적 평화가 정착되는 역사의 새 장이 열리기를 온 세계인류와 함께 흥분과 설렘 가운데서 기원하고 기다려 본다.
뭐니뭐니 해도 20세기는, 특히 20세기 말기에 두드러진 특징이지만, 정보.통신.교통 등의 폭발적인 발달에 힘입어 '지구화'7)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구화에 대한 꿈은 지구화론자들의 선전 그대로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소위 단극지배체제가 새로운 질서를 가져와서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앞으로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실현되고 또 세계 평화가 실현되어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낙원으로 화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가게 된 20세기의 말에 새 세기에 대한 부풀었던 희망은 무참하게도 도처에서 배반되었고 또 되고 있다. 그 대신 지옥과 같은 세계의 현실이 새로 맞은 21세기를 어둡게 하고 있다.
20세기는 냉전의 종식으로 더 이상 동.서 냉전이 사라진 만큼 더 이상 국방비용이나 안보비용으로 엄청난 예산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지고 모든 민족이 민족자주를 실현하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이고 유일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를 군림하게 된 미합중국은 소위 단극지배체제를 실현, 이를 강화하면서 거의 모든 나라들을 종속시켜 소위 신종속시대 내지 신식민지 시대가 도래한 듯 하다.
미국은 소위 지구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그 뒤에 숨기고 있는 이념인 신자유주의로 전 세계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지구화는 우리에게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풍요로 특징 지워지는 지상낙원을 약속하고 있으나 현실은 오히려 전 지구를 국경 없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상품화하며 따라서 생명의 역사가 아닌 죽음의 역사를 낳을 것이라는 위험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핵무기로 인하여 전멸의 위기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핵에 의한 전멸의 위기에 처해있고 인간은 물론이고 전 생태학적 파멸의 가능성이 매일 매일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면서 우리를 떨게 하고 있다.
지구화가 가속화되면서 결과적으로 빚어진 현상으로 빈부의 양극화가 더욱 벌어지기 시작한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빈부의 양극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빚어지는 것 같다. 하나는 국가 간의 차원이다. UNDP에 의하면, 세계 5대 최고 회사들의 매출액은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의 GDP 총액의 3배 이상이고, 남아시아의 국가들의 GDP 총액의 2배 이상이다.8) 이러한 국가간의 경제적 불평등의 관계는 빈국이 부국에 예속되고 식민지화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한다. 이에 따라 남.북 간에 전쟁의 긴장이 폭발 위기로 치닫고 있다. 평등 없이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인 것 같다. 이러한 남.북 간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지구화가 급속히 추진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기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있다.
가진 북반구 나라 사람들과 못 가진 남반구 나라 사람들 간에 차이가 더욱 벌어지고 더욱 심각하게 되어 가고 있음은 물론 소위 선진국 내부에서도 빈곤의 문제가 심각하여 타격을 받고 있다.9) 지구화는 권력과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게 하고 그대신 방대한 지구의 다수 인간은 빈곤 상태에서 허덕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게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층을 이루고 있는 세계인구의 20%정도의 사람들이 세계 수입의 82.7%를 향유하고 있다.10) 이 사실은 결국 세계인구의 나머지 80%의 사람들이 세계 수입의 불과 17.3%를 가지고 살고 있고 밑바닥 20%의 사람들은 세계 수입의 1.4%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자 20%는 대부분이 북반구에 살고 있다. 이 세계가 남.북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미국과 유우럽의 인구는 전체 세계인구의 15%에 불과하나 세계 자원의 66%를 쓰고 있는 반면에, 제3세계(중국포함)와 제4세계(가장 가난한 지역)의 인구는 75%인데 이들이 쓰는 세계 자원을 불과 25%에 불과하다.11)
이 사실은 오늘의 인간 세계가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불의한 상태에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경제적, 사회적 정의가 결정적으로 심각한 정도로 부재하다. 정의가 전혀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들어서 알겠지만,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래로 앞으로의 세계는 지구화의 세계인데 이는 강대국과 자본의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실상은 오늘날 부르짖고 있는 지구화는 신자유주의에 토대하고 있다.
『세계화의 덫』이란 저서를 보았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지구화가 추진되고 있으나 결국 20%의 인구만 필요하고 나머지 80%의 인구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들 80%의 인구에게는 티티멘트를 주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당하고 있는 IMF 구제금융체제 역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그 토대라는 점이 큰 걱정이다.
사회정의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이 수도권에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4백만 명이 있다고 한다. 서울 인구의 72%는 집이 없이 남의 주택에 세를 살고있는 사람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불과 5%의 사람들이 남한 토지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세계는 평화가 없고 삶의 안정이 없다. 지금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북한을 제외하고 말하면, 세계적으로 매 시간마다 1,500명의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같은 시간의 길이동안, 즉 매 시간마다 군비를 위해서 쓰는 돈의 총계는 1억 8백만 불(매분 1백 8십만 불)이다. 여기서 정의와 평화의 문제가 불가분리의 문제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세계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정의가 없다.
또 지구화의 결과로 나타난 현실은 무엇인가? 최근에 또 더욱 긴급하게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는 생태학적인 문제이다. 이들 환경운동가들에 의하면 무차별적인 지구화로 인한 생태계의 심각한 상태는 인류공멸의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분별한 자본주의적인 개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권의 침해는 단순히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닌 전지구적인 문제이자 전 세계 민중의 문제이다. 얼마 전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과학자들의 모임에서는 지구온난화 방지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열대지방의 사막화, 중국의 대홍수 등 엘니뇨의 피해는 전 지구에서 나타나고 있다."12)
12) 김택천, "자본에 의한 환경권 침해." 평화와 인권(전북 평화와 인권연대, 2000.2.1, 제182호), 4쪽.
여러분이 유산으로 받게 되는 이 세계는 생태계가 사멸해가고 있는 세계이다. 공해로 인해서 물, 공기, 흙이 심각할 정도로 오염되어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마시는 물이 모두 오염되어 강, 호수, 바다의 생선이 병들어 죽고 있고 산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이러한 절박한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는 공해로 온실효과가 일어나고 있고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파괴적인 결과들이 따라 일어나고 있다. 매 10년마다 남한 크기의 4분지 3에 해당하는 열대림이 사라지고 사막으로 화하고 있으며, 매일 한가지의 종이 멸종되고 있고, 바다의 수위가 매 10년마다 1.5 미터나 상승하고 있어서 인간의 거주 면적이 유실되고 있고 아름다운 섬이 바다 물 속으로 잠기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의 세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내다보면서 이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 폴 케네디는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위와 다르지 않는 말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격은 크게 증가했다. {몇 십년 후면 나라 삼림이 온통 훼손될 것이다. 한 세대 후에는 한 지역의 표토의 대부분이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불과 20년 사이에 오존층 감소가 위급한 지경에 이를 수 도 있다.}....지구가 갈수록 심하게 파괴되어 간다는 비관론의 전반적인 취지는 그 타당성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진다."13)
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새 세계 질서로서 지구화의 결과는 환경 파괴적이어서 인간과 온 생태계를 포함한 이 지구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생명이 죽어 가는 세상, 생명 부재의 세상으로 화해가게 되었다. 독일의 신학자인 유리겐 몰트만은 오늘의 생태계의 파멸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빗대어 이제 하느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더 이상 수고하실 것까지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미 자신들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생태계의 위기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정치적-사회적 문제이다. 즉 그것은 생태계의 위기를 가장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래서 가장 크게 희생과 피해를 당할 자는 공해의 주범인 경제적 선진 산업국가들의 시민들이 아니고 경제적 후진국의 시민들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지구환경파괴의 주범이 자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소외계층이라는 점이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선진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는 후진국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14)
이 모든 것은 지구화로 초래된 새로운 문제들이다. 미국의 윤리학 교수인 챨스 캠머(Charles L. Kammer III)교수는 핵무기 경쟁을 벌리고 있는 오늘의 인류사회는 도덕적 체계가 파산된 것을 입증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 핵무기 경쟁보다 오늘 우리의 정치적, 도덕적 체제가 파산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더 좋은 증거는 없을 것이다."
생명(인간의 생명과 생태계의 모든 생명들을 포함)과 사회정의와 평화는 어느 사회가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가치나 목적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한다는 사실과 사회정의와 평화는 생명의 환경이고 조건으로서 정의와 평화 없이는 생명이 자유롭게 생장, 발전할 수 없고 그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없으며 생명의 목적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사회에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실현하는 길은 민족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성취하는 일이다.
오늘의 인류역사의 시점에서 이러한 세계에 살고있는 우리가 어떤 인간상을 지향하고 살아갈 것인가? 혁명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혁명적인 인간이란 어떠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자신의 인생의 목적, 대의, 의미를 사명으로 설정 또는 발견하고 이를 주위의 어떤 장애 요인이나 세력이 있다하더라도 싸워서 관철하는 인간을 말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살 대의를 갖지 않은 생은 살 가치가 없는 생이다'(Martin Luther King, Jr.). 자신이 자신의 생의 주인이 되고 참다운 생을 위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창의적으로 사는 인간이 혁명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적인 인간은 남이나, 사회의 풍조나 기존하는 관행을 모방하고 살거나 반성 없이 맹목적으로 사는 인간이 아님은 물론이다.
루터 킹 목사는 인간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즉 온도계(Thermometer)와 온도조절기(Thermostat)가 있다고 하였다. 전자는 방안의 온도를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 온도계이고 방안의 온도를 규정하고 만드는 것이 온도조절기이다. 마찬가지로 주위 환경을 그대로 모방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사람과 세계를 변혁하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철인은 모든 인간을 창조형 인간(Creator)과 수집형 인간(Collector)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한국에는 토지나 아파트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이 아파트를 70동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는가 하면 또 한 사람(장로 부인이라고 한다)은 수백만 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어느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서 온 인류가 행복하게 된다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거부한 사람이 있다. 그는 인류 전체의 행복이나 이익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이러한 이기주의자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집가형 인간은 모두 극도의 이기주의자이다. 이런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야 하고 우리 민족사회에서 제외시켜야 할 자들이라고 믿는다.
필립핀의 마르코스는 권력을, 이멜다는 신발을 수집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전두환과 이순자 내외도 이러한 대표적인 수집광인 것 같다. 그들은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은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그들은 나라의 살림을 거들내다시피 돈을 긁어모았다. 사실은 도둑질이다. 그런데 그들만이 나라의 재산을 도둑한 것이 아니다. 장인과 동생 뿐 아니라 사돈에 팔촌까지 모두 대들어 나라의 살림을 거들 내었다.
또 요즘 우리가 놀라고 있는 얘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관 부인들이 옷 한 벌에 수천만 원씩 하는 옷을 팔고 사고 뇌물로 바쳤다는 것이 아닌가?
때로는 필요하면 인간의 양심도 내 팽개치고, 영혼도 팔고 마침내 인간이기를 그치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든가, 함께 나눈다는 생각은 정신이 나간 사람의 생각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이들은 결국 이기주의와 물질의 노예일 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생의 의의는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는 사실이다. 에릭 프롬(Erich Fromm)이란 철학자는 '존재(to be)냐 소유(to have)?'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인생의 의미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있다고 보았다.
* 오늘의 세계는 어떤 젊은이를 요구하고 있는가?
새 시대는 새로운 과제를 우리 인류에게 제시하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이러한 숨막히는 세기의 전환기에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여러분의 개인의 생애에서 뿐 아니라 민족에게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과 내일의 세계의 시대적인 특징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책임에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몇 가지를 말해 보려한다.
첫째 이 시대는 비판적인 지성인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계의 대표적인 지성인인 대학생 여러분들이 이 세계의 비판세력이 되도록 이 세계는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성세대에 의해 주도되는 이 세계는 온갖 불합리하고 불의하기까지 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위기상황에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단순히 불평을 늘어놓는 것, 트집을 잡는 것이나 부정적인 비난, 또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이성으로 사물이나 사리를 분석적으로 보면서 공정하게 냉철하게 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은 어떤 주장이나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옳다는 것을 인정, 확인, 평가할 수도 있다.
학문의 출발은 비판적이 되는 데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비판적이 되기 위하여 가장 도움이 되고 중요한 태도는 의심하는 것이다. 무엇이던지 당연지사로 받아드려서는 안 된다.
심리학자요 철학자인 에릭 프롬(Erich Fromm)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있는 유신론자나 종교인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고있는 무신론자나 비 종교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학생이 대학생 이전과 무엇이 다른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다르다.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른다'는 태도는 더 이상 대학생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은 지도자에 의해 부화뇌동하는 대중들이 아니고 지성인이다.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이 이 사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명이 무엇인가? 대학생이 이 사회에 공헌할 것이 무엇인가? 기성세대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이 사회에 전해주는 모든 유산, 이 사회의 모든 관행 등에 대하여 의심하고 그 타당성, 정당성, 도덕성 등을 의심, 비판하는 것이라고 본다. 여러분이 특히 의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일반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국가관, 종교신앙 등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무엇이든지 의심하여야 한다. 특히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 교훈 등을 의심해야 한다. 특히 여러분들은 이 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국시"라고 까지 주장되고 당연시되고 있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의심하라. 국가보안법을 의심하라. 자본주의를 의심하라.
지금까지 어떤 사실, 명제, 진리, 종교적 교리나 신앙 등 모든 것을 의심하라,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오랫동안 전해져 온 유명한 교훈, 관습, 풍습, 도덕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으라.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 자신의 의견을 도출하고 신념을 발전시키고 세우기를 바란다.
대학생은 그 사회에서 비판적인 세력이 되어야 그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대학생이 그 사회의 관행, 가치관 등에 맹목적으로 동화되고, 수용하고, 맹종하는 경우, 그 사회는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하게 된다.
비판적이 된다는 것은 양심적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가 양심적이라고 할 때 이는 보통 도덕적이라는 것,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당연하다. 도덕적으로 맹목적인 양심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비판적인 정신과 사색과 이성과 합리주의의 검증으로 비로소 양심적인 것이 무엇인가가 밝혀진다. 그러므로 비판적인 사람은 양심적이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둘째 '행동하는 양심'이 요구된다.
오늘 이 시대는 생각이 어두워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실천이 없어서 어둡다. 70년대에 미국이란 나라의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 비판세력으로 나섰던 시대였다. 바로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의 월남전을 반대하고 반전운동을 폈다. 이들은 미국이 타국을 침략하고 타국의 내정에 개입하고, 전쟁을 하는 것은 불법이고 반 도덕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비판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반전운동을 행동으로 전개했다. 미국의 양심세력이었던 이들 대학생들은 미국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동과 운동을 전개했다. 반전데모와 반전운동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학생들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존재하고 그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운동은 구체적이었다. 그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운동을 벌렸다. 이렇게 하여 감옥에 가는 사람, 징집을 거부하고 카나다 같은 데로 피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각양각색으로 반전운동을 구체적으로 폈다. 그들은 전쟁수행을 위하여 젊은이들을 징병하는 국가의 행정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운동을 벌렸다. 어떤 사람들을 병무청을 습격하여 병역대장을 불사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하는 비판세력인 대학생들이 국가의 과오와 죄악을 고치게 했다는 것을 볼 때 미국인이 아닌 나는 미국사회는 정말 운이 좋은 국가라고 생각하였다.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길을 오늘의 인류들에게 제시했다. 그들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할 때다.'
정말 양심에 따라, 정의를 위하여 행동하고 일하는 지성인과 양심세력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그러나 양심세력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해와 탄압을 받기 마련이다.
헨릭 입센(Henrich Ibsen)이란 19세기의 노르웨이 작가가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인민의 적}(An enemy of the people)이란 단편이 있는데 몇 년 전에 연극으로 각색되어 서울에서 공연된 바도 있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노르웨이에서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있었다. 이 지역은 온천으로 유명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듦으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지역의 유명한 의사인 스탁크만(Stockman)이 그 지역의 온천물이 심하게 오염되어 피부병을 일으킨다는 충격적인 실험결과를 발표하였다. 이에 온 마을은 큰 충격과 혼란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스탁크만 의사에 대한 항의와 비난이 빗발치고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마침내 부락회의가 열렸다. 동네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큰 파국에 이르고 망하게 된다는 우려에서 온천물이 정말 오염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대책은 어떻게 강구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이 아니고 스탁크만을 협박하고 안되니까 해고시키고 박해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결국 부락회의에서는 스탁크만 의사를 이 동네의 적, 인민의 적으로 정죄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탁크만은 "물은 독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을 경고하였지만 그 때 마다 부락사람들은 지도자들의 선동에 따라서 "좌경이다! 좌경이다!"라고 외쳐서 그의 말을 덮어버렸다.
입센의 작품에 나오는 스탁크만 의사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다. 고래로 양심에 따라 살고 정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 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위험과 희생과 박해를 개의치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정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초개같이 버리기로 하고 일하는 의로운 대학생들, 젊은이들이 많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고 이 나라의 희망인 것이다.
셋째로 넓은 시야를 가진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우주적인 시야를 가져야 한다. 오늘의 세계는 공동 유대관계와 공동운명에서 살고 있는 지구공동체의 세계이다. 인공위성 중계로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으로 축소되어가고 있고 점점 가까운 이웃으로 연결되고 있다.
"오늘의 인류는 지구라고 불리우는 한 작은 배를 타고서 시작도 끝도 없는 방대한 공간을 항해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들은 이 사실을 역사상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고 또 싫으나 좋으나 우리 인류가 공동운명인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들의 운명은 서로 한데 얽혀 있다. 당신의 운명과 나의 운명, 당신의 나라의 운명과 우리나라의 운명이 말이다. 이렇게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는 우리는 한 인간이다....우리는 한 가정의 딸들이고 아들들이며, 서로 서로에 대하여 형제자매인 것이다."15)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중심주의나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된다. 독선, 편견, 편협한 것, 옹졸한 것, 이것이 다 어디에서 오는가? 또 시기, 경쟁, 탐욕, 독점과 불평등, 갈등과 싸움, 이런 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시야를 넓게 가지지 못하는 것과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시야가 좁은 사람,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산꼭대기에 올라 간 사람만이 동서남북의 상황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고 동서남북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영국의 죤 돈(John Donne)은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어느 사회도, 어느 나라도 이 세상에서 고립된 섬으로나 혼자로는 존재하지 않고 또 존재할 수 없다. 오늘 우리 마을의 문제, 우리나라의 문제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들은 20세기의 마지막의 시기에 지구라는 배를 함께 타고 생사의 공동운명을 가지고 항해하고 있다.
우리가 졸업 선물로 어떤 물건을 사느냐는 것, 오늘 우리가 국산 단배를 피울 것인가 미국 담배를 사 피울 것인가 하는 것은 국제적인 문제이고 세계의 정의에 관계된 문제이다. 우리의 아침 식탁에 한국의 귤을, 또는 미국산 자몽을 얹을 것인가는 단순히 소비자의 기호 선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어느 남미 사람의 말을 반추해 보아야 한다: "한국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싼값으로 사는 것은 노동자들의 저임금, 한국의 탄압정권, 일본의 경제정책, 미국의 자본(교회의 돈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실업자,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영향이 미치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대학생은 적어도 이러한 정도는 생각할 줄 아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애국심이나, 민족적 의식에 대하여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오늘의 우리 한국인들은 애국심과 민족의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하여 아주 무관심한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지배 아래에 있을 때에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투쟁했던 우리들의 조상들과는 아주 대조적이고 아주 충격적이라고 생각한다.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동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아주 반동적이고 파괴적인 애국과 민족주의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수주의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는 위험하고 비도덕적이며 파괴적인 것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미국의 세계지배와 패권주의로서의 애국과 민족주의, 일본의 민족주의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야심 등은 잘못된 애국과 민족주의이므로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도 세계 강대국이 그들의 세계지배를 합리화하는 제국주의적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가 있고 제3세계지역의 약소민족이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해방, 독립, 민족자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가 있는 것도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후자의 애국, 애족, 민족주의는 신앙과 모순되거나 저촉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의 시민이기 이전에 이 지상의 특정 국가의 시민이다.
넷째로 남을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참된 인간이란 이웃과 더불어서 평화가운데 함께 나누면서 사는 자유로운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이라는 작은 우물에서 탈출하여 더 넓은 세상을 발견하고 거기에 살게 될 때 진정 인간은 참된 인간다운 생을 살 수 있다. 자기 자신이란 우물은 자아 중심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편견, 탐욕, 소유욕, 권력욕, 등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우리나라는 신념과 사랑과 혁명정신, 공동체 주의를 겸비한 젊은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성공주의, 출세주의, 자기중심주의와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인간의 인격, 인간성, 도덕과 정신, 영혼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인간은 자유, 자주, 자립하는 존재여야 한다. 우리 인간을 부자유하게 얽어 메고 억압하는 어떤 존재나 세력의 포로가 되어서는 그 인간은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 인간이기를 그친 존재로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이다.
우리가 북한이 내 세우고 있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물질주의(materialism, 보통 유물론이라고 하나 물질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임)를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이고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인 북한이 물질보다 사람을 중요시하고 경제성장보다 인정 있는 사회,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체사상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부자로 사는 것 보다 인간으로 사는 것, 경제성장보다 민족자주를 강조하는 것이 주체사상의 취지인 것 같다. 우리는 정말 이러한 북한을 보고 배워야 한다.
다섯째로 혁명적인 인간이 요구된다.
젊은이가 서야 나라가 선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비젼을 가진 젊은 이, 꿈을 가진 젊은 이, 이들은 현 체제 내지 현상질서(status quo)에 안주하는 사람들일 수 없다. 아무리 현상질서가 훌륭하고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젊은이들이 있을 때 그 사회는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혁명적인 인간이란 바로 그러한 인간들을 의미한다. 현상을 타개하고 극복하는 사람들이 요구된다. 니체는 '누구든지 새로운 성전을 지으려는 사람은 낡은 성전을 먼저 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과거지향적인 인간(옛날의 좋은 시절을 돌아다 보는 사람)이 그 사회를 이룰 때 그 사회는 미래가 없고 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인 인간(아무리 과거와 현재가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찬란함에 비할 수 없다)이 그 사회를 이룰 때 그 사회는 미래가 있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좌시해서는 안된다16)
피노체트의 사법처리를 주장하며
오늘 이 추운 겨울 날에 우리가 모였습니다. 이 장소가 우리 정부의 관청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는 영국대사관 앞으로 모여서 영국 대사에게 우리의 요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곳에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이곳 대한문 앞에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우리 나라에 쌓이고 쌓은 문제들 중의 한 가지에 대한 요구, 규탄, 또는 항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매우 이색적인 피노체트 사법처벌 요구로 모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영국 사법부는 칠례의 인간학살자 피노체트를 사법처리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입장을 천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칠례의 독재자였던 피노체트가 신병치료차 영국에 갔다가 스페인 정부의 요청으로 그곳 공안당국이 그를 체포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노체트와 칠례 정부 당국은 그가 종신 상원의원이라는 것을 내세워 그의 면책특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 사법 당국은 그의 면책특권을 부정하는 판결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2월 17일 영국의 대법원 재판부가 그 면책특권 부정 판결을 무효로 하고 다음주에 새로 심리를 하기로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피노체트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면책특권을 부정한 판결에 관여한 레너드 호프먼 경이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의 한 자선단체에 관계하고 있어 편견이 작용했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정의감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 어려움을 표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영국 대법원 재판부의 결정이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주장의 근거는 모든 법적인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요 인도주의적인 문제이고 또 국제사면위는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인권 전문 단체로써 설혹 레너드 호프먼 경이 피노체트의 면책특권 부정의 판결에 관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 피노체트 문제는 단순히 칠례의 문제만이나 스페인이나 영국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선 미국이 피노체트의 재판을 반대하고 인간 학살자인 피노체트에게 면책특권을 주도록 영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역사적인 사실이 개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1973년 칠레는 그들 국민의 선택에 의하여 살바도르 아옌데 민주 정권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등을 내세운 합법적인 아옌데 정부가 단순히 미국의 신식민지 통치를 협력하지 않는 좌파 인물이라는 이유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조종하고 도와주어 유혈 구테타를 통하여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켰습니다. 이 사실은 온 세상이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25년 전의 일인데 미국이 이용했던 피노체트가 영국에 지금 억류되어 있으면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본인과 칠례 정부 당국과 미국 등은 그의 면책특권을 주장하고 영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힘을 쓰는 모양인지 영국의 법원은 면책특권을 부정하는 판결을 하였다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대법원 재판부가 다시 그 결정을 재 심리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강건너 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를 재판하여 그가 칠례 국민에는 물론 인류에게 저질른 죄에 상당하는 징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면책특권 운운하여 재판을 하지 않거나 죄에 버금가는 정당한 징벌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류의 양심을 죽이는 것이고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는 물론 도덕과 인도주의와 법의 정의를 부인하는 것임을 우리는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과거에 피노체트를 이용하여 칠례에 대하여 경제적 착취를 일삼아 왔던 범죄가 드러날까봐 피노체트가 재판을 받지 않게 하려고 영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만일 피노체트가 법정에 서게 되고 재판을 받으면 그 과정에서 '미국이 피노체트를 조종하여 유혈 구테타를 일으켜 합법적인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키고 수천명의 무고한 칠례의 민주시민들을 살해하고 고문한 죄악이 폭로되고 그렇게 되면 피노체트 다음에는 미국의 통치자들이 기소되리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외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피노체트가 살해한 사람의 숫자가 적어도 3천명 이상이라고 하고 행방불명된 사람의 수는 1천 2백여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보았지만, 미국은 영국을 꾀어서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과거의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감안할 때 이번에 영국이 미국의 압력을 받아 피노체트 재판을 하지 않을 위험이 있어 우리는 경고하는 바입니다.
지금 칠레에서는 수천명의 산티아고 시민들이 피노체트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리고 있고 칠레의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탄 등으로 이 시위자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항의시위를 하고 있는 칠레의 시민들과 연대를 표하는 바입니다.
피노체트는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인정도 눈물도 없는 가장 잔인한 독재자로서 피노체트는 민주주의의 기본질서와 기본권인 선거의 정지, 정당결성 금지, 노조 결성과 활동금지, 정부 비판금지, 언론과 출판의 자유 부정, 등등의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완전히 부정하고 탄압하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무고한 민주인사들을 학살하고 투옥하고 박해하였습니다.
대통령궁 지하실은 고문처였고 칠례는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인간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고 할 정도로 야만적인 학살을 감행한 인간 학살자입니다.
피노체트는 인도주의와 인류도덕의 적이고 인권을 유린한 가장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1974년 유엔 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탄압에 대한 규탄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반인도적인 범죄자에게는 외교적 면책특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범죄자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그는 영원히 찾아내어 그 죄는 추궁되어야 하고 그 죄값은 지불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법의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없고 약한 나라들의 민족자주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는 1990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스스로 기소에 대한 면책특권을 지닌 '종신상원의원' 지윌를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자신이 독재자로서 범했던 죄악에서 면책되는 길을 보장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양심이 이러한 명백한 이중적인 반양심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좌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는 단지 독일 민족의 우월성의 관철에 협력적이 아닌 민족이라는 이유로 6백만명의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했던 인간 도살자 힛틀러나 다름이 없습니다.
의인 장준하 선생17)
죽임을 당한 후에 우리에게 말하는 지도자
선생님은 민족사의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던 기미년 3.1 만세운동 1년 전인 1918년에 태어나서 그렇게 반대하던 유신 독재가 그 마각을 들어냈던 1975년에 죽임을 당해 일생을 마쳤습니다. 오늘 이 나라 사람 치고 선생님이 등산에서 헛발을 디뎌 사고로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은밀한 산중에서 고의로 선생님을 살해한 사건이라는 것은 의심없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의문의 죽임을 당하셨을 때 선생님의 나이 5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였습니다. 60 회갑을 못보고 죽은 분들이 많습니다만, 유독 50대에 돌아가신 선생님의 임재가 요즘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하고 아쉽게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앞길이 매우 혼미하여 역사의 나아갈 길이 암중모색하는 것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가 살아계셨다면 그가 역사의 선두에 서서 지휘할 것이고 우리는 그의 인도함을 받아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선생님, 살아 남은 우리들이 부족하여 오늘까지도 선생님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불원간 그 의문의 죽음의 진상이 온 세상에 밝힐 때가 머잖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생동안 파란만장한 민족사의 미친 것 같은 급류를 맨 몸으로 막고 저항하고 투쟁하신 분입니다. 선생님은 57년이란 일생동안 세가지 싸움을 차례로 전개했습니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악독했던 저 일제와의 싸움이었고, 둘째는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으로 저 악랄했던 반민주 우익 독재자인 이승만과 반역사적인 유신 독재자인 박정희와의 싸움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위해 반민족자주적인 분단세력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민족의 해방, 민주주의의 실현, 민족의 통일, 이 세가지를 위한 선생님의 숭고한 싸움을 통하여 민족주의자가 가야할 험난한 수난의 길을 친히 걸어가시어 우리 후 세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젊은 청춘시절에는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6,000리 구국대장정을 감행하셨고, 광복군으로 총을 들고 투쟁하셨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던 때 선생님은 중년기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는 한편으로 펜과 사상으로 무지몽매했던 우리 국민을 깨우치고 이 나라의 지성과 양심을 일깨우는 계몽운동과 정신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악독한 독재정권과의 맨 손으로 투쟁을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그리고 민족자주와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외로운 민족주의자의 길을 친히 앞장서서 걸어 가실 때는 온 몸으로 싸우셨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그 투쟁의 삶의 과정에서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한 자신의 생명을 민족의 제단에 바치신 의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민족을 위하여, 역사와 정의를 위하여, 민족자주와 통일을 위하여 일생을 투쟁으로 일관하셨던 투쟁하는 지성인이셨고 민족의 의인이고 도덕 교사였으며 민족해방과 통일운동의 선구자셨습니다.
선생님은 일생을 통하여 많은 지도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당하신 후에도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지도력을 발휘하고 계시는 민족의 의인이시고 지도자이십니다. 의인은 죽어서 더 큰 목소리로 말씀하고 더 큰 역사적인 과제를 가르치며 더 큰 업적을 성취하십니다.
선생님의 일관되고 굽힘 없는 투쟁의 삶은 비록 못다한 생이었지만 우리 후세대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이고 등불입니다. 그 빛이 지금 우리의 갈길을 비치는 살아있는 빛입니다. 지금 현실, 특히 민족사의 현실은 깊은 밤중과 같이 어둡고 혼탁한 시간입니다. 민족사의 깊은 밤입니다.
선생님은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동표들에게 그러했겠지만, 제 개인의 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금년이 선생님의 24주기이니 선생님이 살아계시다면 올해 81번째의 생신일을 맞게 되실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부산 초량국민학교에서 열렸던 어느 해의 6.25 기념 강연회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선생님을 멀리서 보고서도 크게 감명을 느꼈었습니다. 그때 함선생님의 강연이 감동적이었지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막연한 기억이지만, 그 날 선생님의 모습에서 받은 감명은 오늘날 까지도 제가 잊지 못할 만큼 제 가슴 속에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선생님이 사회를 하셨는데 함석헌 선생님을 소개하고 그 할아버지께서 강연을 시작하실 때부터 끝까지 선생님은 6월의 한 낮의 태양의 뜨거움 아래에서 그 긴긴 시간동안 차려 자세로, 부동자세로 서 계셨습니다. 그 뜨거운 여름날 함 선생님의 강연은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부동자세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때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선생님께서 발행하셨던 사상계란 잡지를 보고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학생시절에 그때 유일하다시피한 사상계란 잡지를 애독했고 선생님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저항정신, 투쟁정신, 혁명정신에 크게 감명받고 영향을 받아 후에 커서 기독교 복음과 그 정신으로 이 민족을 해방하고 구원하는 '혁명'을 일으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옳은 혁명적인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인 마르틴 루터와 죤 칼빈의 길을 따른다고 하여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먼저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후 곧장 신학교를 들어갔고 졸업후에 목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사상계는 우리 민족의 긍지였고 자존심이었으며 제 개인에게는 몽매한 데서 계몽시켜주었고,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지게 했으며 미래의 꿈을 심어주었던 교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신학대학에 갔을 때 신학교에서 선생님을 또 먼 발취에서 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한신을 빛낸 인물에게 주는 한신상을 수여받으시러 학교에 오셨던 때였습니다. 그때도 학생이었던 저는 멀리서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더 가깝게 알게 된 것은 실상 선생님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후였습니다. 저는 그때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로 미국에 가고 서울에 없었던 때였습니다. 선생님의 죽으심의 소식을 멀리 이국 땅에서 듣고 얼마나 슬펐고 분이 치솟았는지 모릅니다.
또 제가 선생님을 가까이 알게 된 것은 저의 스승 문익환 목사님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선생님 대신 통일운동에 나섰다고 말씀하곤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선생님을 가까이 알게 된 것은 선생님의 남시긴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돌베게란 자서전은 물론 민족주의자의 길이란 글들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민족과 통일에 관한 선생님의 말씀을 제가 통일운동을 하면서 자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은 선생님이 죽임을 당하기 3년 전의 것입니다. 그 말씀을 오늘에 다시 한번 듣고자 합니다:
"외세에 의한 자기분열을 강요했던 자기부정의 조건이 스스로 변화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부정을 고집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거짖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18)
그렇습니다. 만일 선생께서 오늘에 살아계시다면 총이라도 들고서라도 통일투쟁을 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정부는 통일정책이 부재합니다. 대북정책만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민족자주적이지 못합니다. 역대 반민족적이고 통일적인 통치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지금 김대중 대통령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통일에 대하여 많이 기대한 이 김대중씨는 '통일이 된 이후에도 미군은 한반도에 주둔하여야 한다.'는 망말을 말한 일도 있습니다. 아마 장준하 선생님이 그 말을 들었으면 가만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께서 시작하시고 생을 바쳐 투쟁했던 민족해방, 민주주의, 민족통일,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완성이 되지 못했다 하여 제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백범 김구선생이 민족통일의 험로를 뚫기 위해 몸을 던질 때, 이제 내가 가는 길은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 그 길을 이제야 우리는 다시 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다시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길이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19)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셨던 그 삶, 선생님께서 가신 그 길, 선생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그 의문의 죽음, 그것이 우리 후세대인들에게 따라가야 할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파산상태의 한국인의 도덕의식20)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석 하게 하는 사건들이 많지만, 그 중에도 연일연야 신문과 티.브이. 수상기 화면에 오르 내리는 '단골 메뉴'는 탈옥수 신창원의 체포 사건이다. 2년 6개월 만의 한 탈옥수의 체포가 그렇게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떠들석하게 방송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울하다. 우리 사회가 그런 큰 사건이나 화제꺼리가 없어서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어쨌거나 이는 우리 국민들의 도덕 의식이 파산상태에 있거나 우리 국민의 정신이 크게 병들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데에 우리의 우려가 있다.
미국에 30여년 살고 있는 한 친구가 최근에 한국을 방문하여 나와 한 동안 같이 지냈었다. 그런데 그가 유독 신창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창원이가 상류사회 부패의 폭로자라면서 그에 대한 보도를 꼭 봐야 한다며 저녁 9시 티.브이. 뉴스를 챙겨서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창원에 관한 책을 쓰면 '베스터 셀러'가 될 것이라면서 어떻게 그와 인터뷰를 주선해 줄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가 신창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신창원이 살인범이고 강도이며 탈옥수이고 또 그가 의적이 아니란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내 친구도 '그가 의적이었는데 ...'하고 애석해 했었다. 그가 의적이라는 것은 행위자체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랬다고 보는 것이다. 신창원 자신도 "나는 의적이 아니다...나를 의적으로 미화한 사람을 죽도록 혼내주고 싶다....언론이 나를 미화한 것 같아 오히려 싫었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 자신의 가족들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혀 금전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부자집으로부터 털었던 무려 수억원이란 거액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이나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그 탐욕의 부자들 처럼 자신이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그를 동정하고 심지어는 그의 체포를 애석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분명 문제다. 지금 우리 국민의 도덕의식과 이 사회의 도덕적 상태가 큰 문제이고 중병에 들어 있다는 증거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왜 그럴까? 그것은 권력을 가지고 잘 사는 높은 사람들, 부자나 재벌이라는 자들은 신창원 보다 더 흉악한 강도이고 죄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신창원이 잡히던 때에 현직 경기도지사인 임창렬씨 부부도 구속이 되어 신창원과 더욱 비교가 되었던 것 같다.
한 주간지는 "신창원 대 임창열: 동정받는 탈옥수와 지탄받는 도지사 전격 비교...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21)란 머리 특집을 꾸몄다. 그 주간지는 "나쁜 신창원 더 나쁜 임창열"이라는 박스 기사에서 지금 국민들이 신창원을 동정하는 이유를 암시하기를 "신창원이 살인자라지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활보하는 판에 이유있는 탈옥수 신창원을 무조건 욕할 수 없다."22)는 한 익명의 네티즌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 글을 쓴 양상우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글을 닫고 있다: "흉포한 탈옥수보다 더 부도덕하고 부패한 이들이, 권력과 가진자들 사이에 깊은 뿌리를 숨기고 있는 한 언제든지 제2, 제3의 신창원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23)
그렇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존경받아야 할 이 사회의 지도자들, 특히 정치지도자들, 도지사들이 철저히 썩었고 부패하였으며 아무리 부패척결을 부르짖어도 만성화된 이 사회의 부패가 일소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이 사회가 정수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썩어 문더러지는 상태에 있는 이상 대도나 흉악범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인이 국민으로부터 동정을 받고 심지어는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게도 된다. 이것은 분명 이상(異狀) 현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도덕의식의 현주소이다. 그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사회적 병리현상은 결코 퇴치될 수 없고 우리들의 도덕적 이상 현상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나 우리 후손들이 인간다운 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신명나고 아름다운 조국을 실현하는 일은 요원할 뿐이다.
1) 이 글은 홍 목사가 99년 7월 21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방송법 개혁을 위한 농성 시위에서 행한 연설문을 정리한 것이다.
2) 이 글은 홍 목사가 지도위원으로 있는 "반민족적, 반민중적 교육정책 전면수정과 교육공공성 확보를 위한 대책위" 주최로 99년 6월 5일(토)에 숭실대학교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행한 연설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3) 이 글은 홍 목사가 논설위원으로 있는 들소리신문 99년 12월 19일자 시사논단이다.
4) 이 글은 홍근수 목사가 2000년 2월 23일(수)에 있었던 서울신대의 2000년 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행한 강연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5) 한겨레(2000년 2월 10일자), 14쪽.
6) 언제가 21세기의 시작인가 하는 데 대하여 의견이 반드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서기 0년이 새 세기의 시작이 아니란 이유 등으로 2001년이 21세기의 시작이라고 하는 의견들이 설득력이 없지 않으나 사람들은 명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2000년에 이미 새 천년의 시작으로 기념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2000년을 서력기원이후 세 번째 마지하는 천년의 시작으로 한다.
7) 어떤 이들은 세계화, 또는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라고도 하나 여기서는 지구화(globalization)로 용어를 통일하기로 한다. 지구화란 교통, 통신, 정보 등의 혁명적 발전을 통하여 세계의 자본, 재화, 용역 등이 어떤 장벽도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어 하나의 세계가 된 현상을 두고 말한다. 지구화에 대한 정의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 globalization refers in general to the increasing integration of the world brought about partly through technological innovations in transportation, production and communication and partly through deliberate economic strategies designed to allow an unrestricted flow of goods and services around the world." The Employment Effects of Free Trade and Globatlization(Unpublished paper prepared by the International Labor Rights Fund for the Advisory Committee on Social Witness Policy of the Presbyterian Church(U.S.A.)(이 글에서는 '미국 장로교 논문'이라 약칭한다), p. 2.
8) 위의 미국 장로교 논문, 8.
9) 폴 케네디, 21세기 준비(변도은.이일수 역)(한국경제신문사, 1993), 421.
10) Ulrich Duchrow, Alternatives to Global Capitalism (International Books with Kairos Europa(1995), 11.
11) Allen O. Miller, ed., A Covenant Challenge to Our Broken World, p. 41.
12) 김택천, "자본에 의한 환경권 침해." 평화와 인권(전북 평화와 인권연대, 2000.2.1, 제182호), 4쪽.
13) 폴 케네디, 위의 책, 438.
14) 폴 케네디, 위와 같은 곳.
15)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페트리시야 패터슨(Pattricia Patterson)은 1989년 5월에 인천에서 열렸던 세계기독교 한반도 평화회의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16) 이 글은 홍 목사가 99년 1월 15일 영국대사관 앞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렸던 피노체트 사법처리를 촉구를 위한 시위에서 행한 대회사를 정리한 것이다.
17) 99년 8월 17일(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나사렛 묘소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24주기 추모사
18)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갈릴리 문고 10, 우리 민족은 하나다(갈릴리문고, 미국 뉴욕 파나인쇄소, 1986), 12.(본래 이 글은 씨알의 소리(1972.9)에 실렸던 글이었다.)
19) 같은 곳, 18.
20) 99년 7월 26일, 들소리신문 논단
21) 한겨레 21에( 1999.7.29.제268호), 10쪽 이하.
22) 같은 곳, 12.
23) 같은 곳,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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