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의 저자 유성룡, 이이의 10만 양병론 반대했던 이유

2018. 2. 20. 18:12이런저런 이야기/볼거리 좋은 글 아름다움 곳




징비록

다른 표기 언어 懲毖錄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정유재란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사실을 기록한 책. 16권 7책 목판본이다. 저술은 1604년경, 간행은 유성룡의 외손자 조수익이 1647년에 한 것으로 추정한다. ‘징비’는 〈시경〉의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내용은 전쟁의 원인과 상황, 군국정무에 관한 문서와 기록, 류성룡 자신이 해결한 정책적 문제, 그리고 자신의 시절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문서기록과 필자의 객관적인 기술과 논평이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16권 7책. 목판본. 이 책은 현재 4종이 전하는데, 저자 자신의 필사 원본인 〈초본징비록 草本懲毖錄〉(국보 제132호)과 16권으로 된 〈징비록〉, 2권으로 된 간본, 필사본이 있다.

징비록

저술 및 간행 연도는 알 수 없다. 저술 연도는 1604년(선조 37)경이고, 간행 연도는 〈운양잡록 雲陽雜錄〉에 따라 저자의 외손 조수익이 경상감사가 된 1647년(인조 25)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자서에 밝혀진 편차에 의하면 이는 16권본의 서문이 분명하므로 2권본이 가장 늦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의 '징비'는 〈시경〉에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16권본에 따라 내용을 살펴보면, 권1·2는 전쟁의 원인과 상황을 약술한 것인데, 전전의 조·일 관계, 관군의 붕괴, 의병의 봉기, 한산도 해전, 명군의 원병, 강화교섭, 종전의 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권3~5에는 〈근포집 芹曝集〉이란 편명으로 1592~96년의 군국정무에 관한 차(箚)·계(啓) 등의 문건을 수록했다. 권6~14에는 〈진사록 辰巳錄〉이란 편명 아래 임진·계사 두 해 동안의 장계를 수록했다. 임진년 10월의 장계는 전국 각지에서의 전쟁의 시기별·국지별 상황과 그 대책을 조목별로 진술한 것이다.

권15·16은 〈군문등록 軍門謄錄〉·〈녹후집기 錄後集記〉이다. 〈군문등록〉은 저자가 4도체찰사로 재직하던 1595~98년의 기간중 각 도의 관찰사·순찰사·병사 등에게 통첩한 문건과 자서·자발을 수록했다. 주된 내용은 병사들의 군사훈련·지역방비·세금문제·식량조달·창고설치 등 국방과 정치 전반에 관한 포괄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권말의 '녹후잡기'는 당시의 일을 개괄적으로 논평한 것이다.

〈징비록〉은 제목에서 보이듯 뚜렷한 목적의식과 저자가 왜란의 전기간 동안 국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몸소 경험한 바를 기초로 하여, 전란의 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얻어진 풍부한 사료와 지식을 담은 것이기에 가치가 매우 크다. 난중의 사실이나 인물평은 당색에 구애됨이 없이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전란의 기록임에도 단순히 전쟁의 진행과정만을 적은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경제·외교 관계 등 전체적 구조하에서 서술했다.

임진왜란 관계의 사료로는 국내에 〈선조실록〉·〈임진장초〉·〈용사일기〉 등이 있고, 중국과 일본에도 몇 가지가 있지만 〈징비록〉만큼 체계적·종합적이지 않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 이이의 10만 양병론 반대했던 이유

배한철 입력 2018.02.16. 15:03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35] 율곡 이이(1536~1584)는 생전에 왜의 정세를 심상치 않게 판단하면서 '10만 양병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붕당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던 당시 조선 조정에서 이 같은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그런데 반대세력의 중심에 임진왜란 극복의 일등공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있었다는 점은 의외다.

우리는 이이의 주장대로 임진왜란 이전에 10만 대군을 키웠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글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서포만필'에서 "10만의 군대를 확충하는 과정에서 민심이 이반돼 병사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백성들이 조선을 배신해 전쟁에서도 패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문성공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청했을 때 풍원군 유성룡이 불가하다고 했다. (중략) 작은 나라에서 10만을 양병했다면 재앙이 백성에게 반드시 미쳤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오직 그동안 각박한 정치가 없어서 민심이 이씨에 대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민심이 한번 떠났더라면 양호(정유재란 때 명나라 총사령관)와 이여송(임진왜란 때 명나라 총사령관)의 구원병을 어떻게 먹이고 호남과 영남의 의병들이 어떻게 일어났을 것인가."

서포 김만중의 초상. 노론강경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어서 한글을 국자로 써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주자를 비판하기도 했다. 개인소장
김만중은 당나라 전성기 때 변방의 군사가 40만명에 달했는데도 안녹산의 난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았으며 송나라도 궁중을 호위하는 금위병으로 인해 스스로 병이 들었다면서 10만 양병설의 허구성을 비판했다. 서포만필은 김만중이 1687년(숙종 13) 지은 수필·시화평론집이다. 불가, 유가, 도가를 포괄하는 사상적 편력과 음악, 천문, 지리, 셈법 등을 망라한 박학한 지식을 잘 보여준다.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는 반정 전 여러 명의 추대 후보 중 하나였지만 한 부인의 도움으로 운 좋게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 세력들은 광해군이 1617년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김씨를 폐위하자 그를 쫓아내기로 최종 결론지었지만 누구를 차기 왕에 옹립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다음 왕은 반정의 주역인 김류의 부인에 의해 낙점됐다.

"하루는 장릉(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둘째 아들인 능양군)이 김류의 사저를 찾았다. 능양군이 막 문을 나서자 김류의 부인이 나와 '지난밤 꿈에 어가가 집을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곤룡포를 입은 분이 아까 오셨던 젊은 분'이라고 귀띔했다. 김류는 크게 놀라면서 추대 논의를 마침내 마무리했다. (중략) 부인은 손님의 정체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김류의 판단이 계속 미뤄지자 부인은 꿈을 핑계 대며 김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능양군은 가까스로 왕(인조)이 됐다. 인조의 집안은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 자녀들과 대립했다. 인빈 김씨의 딸 정안옹주와 결혼한 박미는 애초 반정세력과 교류했지만 자기 친처남인 의창군을 왕 후보로 밀다가 미운털이 박혔다. "최명길, 장유가 분서도위(분서는 호, 도위는 부마) 박미와 친해 일이 거의 이루어지려고 할 때 함께하자고 하는데 '의창이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 천의와 인심이 이미 돌아간 곳이 따로 있었던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중략) 박미 부자(박미와 그 아버지 박동량)가 유배에 처해진 것은 분서도위의 망발이 그 이유의 절반을 차지한다."

반정 성공 후 인조는 외사촌인 능천부원군 구인후를 시켜 어머니 인헌왕후에게 소식을 전하게 했다. "능천부원군이 명을 받들고 가서 보니 성모(인헌왕후)는 방 안에 앉아 있고 인평대군(인조의 셋째 아들)이 인열왕후(인조비) 품 안에서 젖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구인후가 아뢰기를 마치고 머리를 들어보니 두 부인이 울면서 목숨을 애걸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안옹주이고 다른 한 명은 의창군 부인이었다. (중략) 능창군(무고로 사형 당한 인조의 친동생)이 죽고 나서 열린 궁중연회에서 의창군 부인은 옆에 앉은 인헌왕후에게 '어찌 역적의 어미와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모욕했다. 인헌왕후는 당황하여 물러나 맨발로 나갔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속환돼온 부녀자들을 환향녀라고 했다. 환향녀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남편들의 배신이었다. 서포는 많은 선비들이 아내들을 내쫓은 사실을 두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함께 삼년상을 지냈거나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는 비록 죄가 있어도 내치지 않았다. (중략) 오랑캐에 포로로 끌려갔던 부녀자들은 절개를 잃었더라도 음란한 여인과 비교하면 사정에 차이가 있다. (중략) 사대부들이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만 유리한 계책을 세워 쓰니 이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문인 비평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서포는 16세기 여성 문인인 허난설헌(허균의 누나)의 재주가 과대포장됐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안타까운 것은 허균이 원나라와 명나라 문인들의 아름다운 구절이나 화려한 시편 중에 사람들의 거의 보지 못한 것들을 상당히 많이 채집하여 문집 속에 끼워넣어 명성과 위세를 떠벌렸다는 것이다. 문집은 중국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전겸익(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문인)의 남다른 감식안을 만나 속 내용이 모두 드러나 조선 사람들을 크게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애석하도다."

전겸익은 '열조시집'에서 허난설헌의 시 '소전'이 사실은 자신의 첩 유여시가 지은 것이며 허난설헌의 많은 시는 중국 시인들의 시를 모방했다고 혹평했다. 대신 광해군 때 역모 혐의로 극형에 처해진 그녀의 동생 허균의 재능은 높게 쳤다. "허균의 감식력은 근대의 제일이었다. 택당(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은 매번 그의 자제들에게 '허균이 시를 잘 안다'고 칭찬했다. 그의 시는 형식과 격조는 별로 높지 않지만 재주와 정서는 남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

서산대사 초상. 임진왜란때 승군을 모아 명나라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했다. 김만중은 서산대사의 문집이 중국 고승들의 설법을 대충 본떠 시늉만 냈다고 혹평했다. 해인사 소장
기녀와 승려의 시는 전반적으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기녀 황진이의 시가 '속청구풍아(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시인들의 작품을 뽑아 엮은 책)'에 선택되어 실려 있는 것은 아주 졸작이다. 부녀자의 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혹 외워 전하고 있다. (중략) 승려 휴정(서산대사)의 문집을 보니 그 제자들에게 설법한 문장은 대혜종고(북송의 선승)와 고봉원묘(원나라 승려)의 해묵은 이야기를 여기저기 취해다 늘어놓아 사람의 눈을 가린 것이다. 정말로 대충 모양을 본떠서 시늉만 내었을 뿐이다."
반면 신라 28대 왕 진덕여왕(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의 시는 너무 수준이 높아 진위를 의심한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 태종에게 보낸 송덕시는 시 전체가 세련되고 우아해서 동방 이민족 나라로서의 기이한 풍습이 전혀 없다. 그 당시 삼한의 문자가 이와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니 황금으로 중국인에게서 사온 것이 아닐까."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의 무덤. 김만중은 진덕여왕이 당태종에게 보낸 송덕시는 우리나라에 찾기 힘들 만큼 세련되고 우아하다고 극찬했다. 경주시 현곡면 소재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갔다. 철령을 지나면서 '고신원루(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를 비 삼아 띄웠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철령가'를 지었다. 그를 쫓아낸 광해군이 그의 이 시를 전해 듣고 눈물을 뿌렸다는 일화를 전한다. "광해군이 뒤뜰에서 잔치하는데 궁녀 중 한 명이 이 노래를 불렀다. 광해군은 '참으로 새로운 노래구나. 어디서 얻었는가'라고 물으면서 궁녀에게 다시 노래 부르게 하고 슬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만중(1637~1692)=본관은 광산이며 증조부가 예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이다.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아우이자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의 숙부다. 호는 서포이다. 29세이던 현종 6년(1665) 정시 문과에서 장원급제했으며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을 역임했다. 노론강경파에 속해 남인의 공격을 받아 귀양과 관직 복귀를 거듭하다가 남해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사상적으로는 진보적이어서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고 불교를 옹호하기도 했으며 우리 문학은 한글로 쓰여야 한다는 한글 국자 의식을 가졌다.

[배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