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위기의 원인과 생태적 사유의 필요성, 생태주의 행정철학의 정립
인류문명 발전사의 이면은 생태계 파괴사이기도 하다. 환경사회학자 Dunlap은 자연환경의 3 기능으로 삶의 공간, 자원공급창고, 폐기물 저장소 기능을 드는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생명의 장소에서 단기적 개발이익의 유혹에 빠져 자원의 과도한 철회와 폐기물의 지나친 첨가를 가해 지구 생태계의 수용능력을 넘어서서 드디어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의 명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연 생태계는 문턱(threshold) 전까진 오염에 버티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급변해 삽시간에 붕괴하고 만다. 일단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이는 암(cancer)의 전이와 비슷해 처음엔 별 증상이 없다가 치료시기를 놓치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유사하다.
일찍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샤토브리앙은 “문명 앞에 숲이 있지만 문명 뒤엔 사막만이 남는다”고 경고하 바 있다. 인류가 뭔가를 도모하기 위해 지나치게 지구에 빼고 더하기를 한 이유로 인해 생태계 파괴라는 전염병을 창궐시킨 것이다. 즉 문명의 향유를 향한 우리 인간의 과속이 한땐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격언으로 받아들여진 시간이 있었지만, 이젠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이 우리의 생태문제 풀이의 정답이 되고 있다.
이미 환경오염 문제는 지역(국지적) 문제를 벗어나 전국적 문제, 아니 벌써 범지구적 차원으로 커졌다. 지구역사를 1년 365일에 대입한 cosmic 달력에 의하면, 지구 48억년 역사 중 인류의 출현시기는 마지막날인 12월 31일 오후 10시 반이고, 인류의 3백년 산업화 역사는 자정을 앞둔 2-3초에 불과하다. 극히 짧은 시간에 지구 생태계는 파괴되고 말았다.
1950년대부터 현시점까지의 파괴가 인류출현 시부터 1940년까지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별 대책이 없을 때 향후 30년 내에 생태계 파괴는더욱 급속화될 전망이다. 우리는 이미 peak oil을 넘어섰음은 물론 일본 아사히 글래스재단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인류의 환경위기시계는 9시33분이다. 밤 12시가 되면 결국 인류는 파국을 맞게 된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세계은행 수석연구원인 니콜라스 스턴 卿은 “기후변화는 자본주의의 최고 실패요인”이라고 비판한다. 즉 인간의 탐욕에 따라 지구에의 지나친 철회와 영혼 없는 첨가가 삶의 공간을 파괴했고, 그 결과 어머니 지구의 아픔이 홍수, 가뭄, 슈퍼태풍, 토양 및 해양 사막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젠 black color(원유, 석탄 등 화석연료경제)에서 green color(생명의 색)로 방향 전환해야 한다. 교육의 방향이나 국가정책의 방향도 다 바꾸고 궁극적으로 사회전체의 생태적 전환이 요구된다. 단 녹색에 숨은 블랙의 영향력을 경계해야 한다, 이른바 분리수거 의무화를 통해 소비자에게 환경문제 책임을 전가시키는 녹색세탁, 또 환경산업, 에비앙 등 물의 산업화, 유기농 식품으로 인한 물가 급상승 등 녹색상업주의는 경계가 요망된다.
무엇보다도 21세기 환경의 세기를 맞아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의 옷에 생명의 색인 green 색 물감을 들여야 한다. 생태요괴들, 즉 3살부터 고객충성을 시켜 1318의 꽃다운 나이에 자본주의의 노예를 만들어 쇼핑몰을 배회하게 만드는 쇼핑몰의 사원화를 경계하고 이들을 생태지킴이로 전환시키기 위한 생태교육이 필요하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태교육을 시켜야 할 성인들은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난개발 논리에 빠져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하지만 토건국가적 경로의 종착역은 강-->땅속-->산-->섬을 향한다. 그 다음은 과연 어디일까?
더욱이 문제는 우리가 아직도 과학기술의 문제 해결력에 의존해 환경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는 지나치게 낙관론적인 환경개량주의, 환경관리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점이다. 피크 오일 시대인데도 아직도 더 자연을 파헤치고 더 버리는 경로의존성을 치유하지 못하는 철학의 빈곤, 영혼없는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하다.
과학기술만 갖곤 안 되고 왜 자연에까지 윤리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가? 자연 생태계는 오랜 세월 자연 선택된 결과물로 진화해 스스로 그러하기(self-so)에 가장 안정된 질서란 점이다. 그 결과 자연의 지금 이 상태가 최상의 상태이다(now=the best). 따라서 지나친 인위, 작위가 그 균형을 깨버리고, 한번 균형이 깨지면 암과 같이 별 증상이 없다가 문턱을 넘으면 생태계에 비가역성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환경과 생태의 차이점을 규명해야 한다. 먼저 환경(encironment)은 자연을 나를 둘러싼 단순한 주변으로 보는 것이다. 즉 나에게 영향을 주지만 내가 얼마든지 제어, 통제 가능하고 필요 시 나의 발전을 위해 이용 가능한 수단, 도구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면희 등 생태론자들은 이러한 자연의 주변화, 타자화, 도구화가 도구적 자연관,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을 낳고, 우리가 물질문명의 긍정 속에 ‘많을수록 더 좋다’는 공리주의 경제관, 사후관리 규제 일변도의 기술공학적 치유책 속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본다.
그 결과 인간은 생태계의 boss로서 생태계의 최고점에서 호령하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정당화된다. 즉 자연 따윈 안중에도 없이 자연과의 관계성을 부정하는 인간 존재론적 시각이다.
도구적 자연관이 처음부터 창궐했던 것은 아니다. 탁광일에 의하면, 초기 인류는 숲을 신령이 깃든 성지 혹은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암흑과 무법의 세계로 보았다. 자연을 경외(敬畏)시하며 경원하기도 했던 것이다. 숲 forest의 어원은 바깥을 뜻하는 foris였다. 그러나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며 숲을 베고 논을 경작하면서 인류문명을 우월시하는 풍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도시는 라틴어 civitas에서 파생되어 이는 문명, 시민 등 용어의 뿌리가 된 반면, 산림, 숲의 라틴어 silva는 야만 savage의 어원이 되고 말았다.
인류 물질문명의 논리적 근거를 대준 사람들이 근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란 말은 인간이 자연개발용 정복 지식을 축적하게 했고, 존 로크의 ‘사유재산 정당화 논거는 인간으로 하여금 개발흔적을 남기면 모든 땅이 그의 소유가 된다는 잘못된 토지관, 소유관을 제공하고 말았다.
예컨대 초창기 풍경화는 영주(領主)의 영지내 토지소유권을 보여주는 토지대장(土地臺帳)이었다고 한다. 인간의 소유욕, 정복욕은 그 끝을 모르는 것 같다. 그 결과 자기만 아는 존재론으로 인간-자연의 분리적 인식에서 그치는 소아(self)가 탄생했고, 자연은 기껏해야 자원(資源)으로서의 도구적 가치를 부여받을 뿐이었다.
이는 유럽의 해외식민지 개척 역사에서도 여전했다. 유럽의 해외식민지 개척은 식민모국을 위한 벌목지, 단일경작지 기능으로 황폐화 되었다. 이런 피식민 역사로 인해 지금도 후진국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청산하지 못하고 단일경작으로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식량난, 벌목 등 난개발을 묵인, 방조할 뿐이다. 특히 벌목, 광업, 플란테이션 경작을 위해 아마존 유역에 횡단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지구의 허파 하나가 곤궁에 빠져 있다.
일부 선진국의 정부는 광산, 어류남획, 지하수 개발에 보조금을 주어 환경파괴에 일조한다. 예컨대 미국 산림청은 종이,목재의 가격 인하를 위해 벌채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에릭 스톤이란 자가 나오는데, 이 놈은 풍요의 숲을 마구 벤 벌로 자기 팔다리를 뜯어먹다 죽는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된다. 생태 모니터링을 강조하는 김재일은 “그린벨트를 마구 풀고 세수확장을 위해 난개발을 마구 허용하는 우리가 바로 그 꼴”이라고 안타까워 한다. 우리가 단기 개발이익을 위해 던진 개발의 부메랑이 위험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반면 생태(生態)는 자연 속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 그 됨됨이, 또 그런 맥락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자연 속 삶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가리킨다. 이는 자연히 기본적으로 생물과 서식지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계론적 접근에서 출발하며, 인간이 자연에 순응, 적응, 친화,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의 불가피성을 전제로 한다. 동양 산수화를 들여다보면 자연 한 구석에 작게 그려진 채 고개를 들어 자연을 올려다 보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을 자연의 일부, 생태계의 일원(citizen)으로 보고 생명 공동체적 시각과 전체론적 접근 속에서 인간-자연관계를 재설정하는 새로운 윤리해석이 생태적 관점이다.
따라서 여기선 양자의 관계를 존중해 자연을 신중히 이용하고, 더 이상의 지나친 파괴를 제한한다. 이 점에서 환경에 대비해 자연을 생태로 표현하는 새로운 개념 해석이 가능해진다. 생태적 관점은 자아-타자의 존재론적 구별을 않는 즉, 경계를 부정하는 관계론적 자아, 즉 Self를 낳는다.
자연 생태계는 ‘확대된 나’이며, 결국 인간의 본성(nature)은 자연(Nature)과 일치하며 human(인간)-humus(흙)-humility(겸허)는 어원을 같이하는 말이 된다. 또 이는 사랑해서 알려 하고 대상을 지켜주려 한다는 점에서 지혜의 사랑이란 추상적 느낌보다는 철학의 진정한 모습을 전해준다.
자연에 대한 이런 생태적 관점은 결국 생태적 전일성 속의 생태적 배태성을 알려준다. 일례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숲을 베면 곰, 연어가 사라지고 그러면 범고래가 줄어 그것에 의존해 연명하는 인디언에 타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애틀 추장은 후손 7세대에까지 미칠 영향을 고려해 자연을 활용해야 하며, 우리가 땅에 속함을 강조했다.
벌목을 반대한 인도의 칩코 안돌란 운동, 즉 나무 껴안기 운동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히말라야 갠지즈 강에서 자연에 의지하며 살던 인도 여성들이 외지 남성들의 무차별 벌목에 반대하며, “숲은 물, 식량, 생명이라오”하며 “나무를 베려면 내 등을 찍으라”고 나무를 껴안았는데, 이는 자연-인간 관계망을 존중하는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숲의 경제적 가치만 계산하던 공리주의 산림공무원에서 생태보전을 개념화한 생태철학자로 변신한 A. Leopold 역시, 대지에 우리 인간이 속함을, 즉 인간-서식지 간 관계를 중시하는 생태적 관점에서 자연을 보며, 대지의 생명 피라밋을 존중해 대지까지 인간의 윤리를 확장할 필요성을 피력하며 생태보전 사상을 제안한다.
Brower 역시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에 도로개설 공사를 하자, “성당 천장의 그림을 잘 보려고 성당에 배를 띄우기 위해 성당 내부를 수장시키는 꼴”이라 비판하며 이른바 CPR(conservation-preservation-restoration: 보존-보전-복원)을 주장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생태적 전통이 있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에 의하면, 도선 국사에서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자생풍수는 비보(裨補)풍수라 하는데, 이는 홍수 및 범람지역, 절벽 아래 등 위험한 곳, 모자란 곳에 탑, 절을 세워 어머니 땅의 병을 치유하고 부족한 곳을 메워주는 것을 강조하는 등 생태적 배태성에서 비롯하는 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이제 peak oil 시대를 맞아 어머니 자연의 병문안와 지극한 간호를 위해 눈높이를 낮춰 땅위의 지리학, 치유(治癒)의 지리학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즉 종래의 도구적 자연관,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인간 관계망을 인식하며 생태적 전환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결국 생태위기는 과학기술이 아닌 태도, 윤리의 문제이며,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의 윤리적 확장 필요성을 공감하게 된다. 즉 그간 문명의 극대화에 과속을 즐겼던 불광블급(不狂不及)의 폐해를 성찰하면서 지나치면 안하니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 아래 향후엔 지킬 것은 지키고 필요한 것만 겸손하게 이용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태주의와 행정철학의 만남을 도모해야 한다. 즉 환경정책을 입안, 집행하는 관료들의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관료들의 생태적 사유 훈련은 단기적 시간관(rime frame) 보다는 장기적 시간관을 갖게 해준다. 즉 지금과는 다른 렌즈로 세상을 보려는 이들의 태도 전환만이 진종일 모이를 쪼아대는 닭, 새보다는 배부르면 미동도 않는 최소한의 사자-되기를 가능하게 한다.
결국 생태문제 유발자보다는 생태문제 해결자로서 정부의 존재이유 규명과 필히 지향해야 할 가치 및 윤리를 탐구하는 생태주의 행정철학 논의만이 사랑하는 대상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기 위해 공부하고 사유하고 행동책을 마련하는 액션플랜을 만들어 낸다.
그럴 때 정부에 의해 단순한 자연보호(상당히 훼손된 생태계의 제한적 이용, 단 지속적인 자연자원 이용을 위한 인위적 관리: 오염규제, 등산로 정비)를 넘어, 保存(제한적 이용은 하되 그 이상의 자연남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인위적 관리: 청정수질 보존, 국립공원 침식시설 설치), 保全(원시자연을 건드리지 말고 그냥 남겨두기: 동식물서식지 보전, 생태지도 작성), 復原(자연의 병든 곳을 치유해 원상회복시켜주기: 자연하천화, 야생동물 서식처 복원)까지 나아갈 수 있다. 즉 생태관료(eco-crat)가 육성되어 개발현장에서 제대로 인간-자연관계를 교통정리하며 푸른 자연을 지켜주는 생태지킴이를 목도할 수 있다.
이미 인접 사회과학들은 소학문(己)에서 벗어나 융합을 추구하는 대(大)과학을 추구한다. 즉 자신의 고유연구영역에 생태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학문으로 재탄생한다.
정치생태학은 인간의 정치적 결정이 생태계를 파괴시키므로, 정치-경제-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 일변도의 top-down 결정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거리를 고려하며 자연-인간의 공존을 꾀하는 쪽으로 bottom- up 접근을 하는 풀뿌리민주주의 등 지방영역의 생태화를 강조한다. 즉 직접 생태를 체험한 사람들의 생태적 자각과 책임있는 문제해결력을 생태문제의 정치적 해결에 십분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윤과 효용 극대화를 위해 자연생태계 개발에 집착하기 쉬운 경제학도 경제-환경의 불상용(不相容)이 아니라 양자의 공진화(共進化)를 위해 지속가능경제를 추구하는 생태경제학을 만들어 냈다. 즉 화석자원의 철회 비중을 줄이고 비(非)화석 자원의 첨가방식으로 환경을 생각하는 경제방식을 추구한다.
가장 자본주의 학문인 경영학도 환경경영론이란 새 분과학문에서 경영의 생태적 전환을 추구한다. 즉 생명주기적 접근에서 투입-전환-산출의 단계별 녹색화를 꾀한다. 즉 친환경적 생산방식, 에너지효율을 도모하는 생산,유통방식, 덜 환경파괴적인 폐기물 처리대책을 강구한다.
이제 행정학도 생태주의와의 학문적 결합을 통해 생태주의 행정철학이란 새로운 분과학문의 정련에 힘써야 한다. 즉 개발이익이 난무하기 쉬운 현장에서 과학기술과 법적 준거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 우선 공무원들이 생태적 전일성과 생태적 배태성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생태적 사유를 통해 보다 책무감을 갖고 사회전체의 생태적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생태적 가치, 생태윤리 및 생태친화적 정책철학, 생태친화적 리더십 철학의 체계적 학습을 통해 생태관료(eco-crats)가 되게 유도해야 한다. 자 이제 생태관료를 육성하는 학문의 길로 힘차게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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