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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우리를 본다

숲에 관하여/숲, 평화, 생명, 종교

by 소나무맨 2015. 3. 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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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덕후의 조선수군사: 11. 약무호남 시무국가

2014/08/10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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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덕후의 조선수군사 연재

1. 조선과 일본의 전투함 비교: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2229/
2. 미션 임파서블(정유재란 배경):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2261/
3. 必死則生 必生則死(명량대첩 전):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2289/
4. 역발산 기개세(명량대첩):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2311/
5. 元맨쇼(한산도대첩 배경):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2735/
6. 대공세(한산도대첩 전):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2983/
7. 학, 날개를 펴다(한산도대첩):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3152/

8. 이여송과 이성량(당시 동북아의 정세):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3391/

9. 삶과 죽음(제 2차 진주성 전투):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3485/

10. 생존을 위한 사투(1593~94년 대기근과 역병): https://www.seiyon.net/board/anony/+804216/
11. 약무호남 시무국가(전라도 찬가)
12. 수송의 역사(수송과 보급의 중요성)
13. 백의종군(칠천량해전 배경)
14. 그날 조선수군은 전멸했다(칠천량해전)
15. 학의 부활(조선수군 재건기)
16. 반격(사로병진전략)
17. 오늘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 여한이 없겠나이다(노량해전)

(연재 일정은 추후 변동 가능)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이순신 빠돌이였던 조선 정조의 명으로 쓰여진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글귀이다. 글귀 그대로 해석하자면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1593년이 이순신 장군이 지인이었던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말이다. 훗날에 쓰여진 이충무공전서에서 이를 재인용한 것이다. 이 글귀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위해 한번 편지의 원문을 좀 더 찾아 보자.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산도에 진을 옮겨서 치고 이로써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국가 방위의 최전선이기에 호남이 무너진다면 곧 나라 전체가 위협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한산도에 통제영을 세우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재한 글에 잘 나와 있듯 전라도는 최전선 역할만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전라도는 조선 방위의 최전선이자 최대의 보급창고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그 어느 지역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 전체가 전란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는 상황에서 전라도만은 수군과 육군의 분전으로 인해 온전할 수 있었다. 드넓은 평야로 인해 예로부터 가장 부유하고, 또 인구가 많은 곳이 전라도였던 만큼 곧 전라도는 조선의 생산 및 보급창고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전라 감사 이광의 5만 병력이 용인 전투에서 싸그리 와해된 이후에도 전라도는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며 조선수군과 권율 장군을 지원했다.

 

수원 독왕산성과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했던 권율 장군의 병력 거의 대부분은 전라도 출신이었으며 조선 삼도수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것도 역시 전라좌수군, 전라우수군이었다. 그런데 계사년과 갑오년의 대기근과 역병을 거치면서 조선 팔도를 먹여살리기 위한 곡식과 또 역병으로 사망한 병력의 보충을 거의 전부 전라도에서 차출함에 따라 전라도 역시 엄청나게 피폐해졌다. 거기에 명나라 군대를 보급하는 역할 역시 거의 전적으로 전라도에서 맡게 되면서 어찌 보면 전라도는 일본군의 침략을 당한 다른 지역보다도 더 큰 시련을 겪었다.

 

전라 감영이 있던 전주를 시찰하고 온 좌의정 윤두수의 장계를 보면 이로 인해 당시 전라도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잘 알 수 있다.

"전주(全州)에 사는 백성들이 정장(呈狀)하기를 ‘조정에서 안찰 어사(按察御使)를 특별히 보내어 포루(砲樓)를 창설하므로, 온 고을의 대소 인민들은 이것을 힘입어 방어할 것이라고 다같이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변란이 일어난 후로 정장(丁壯)들은 전장에 나가고 노약(老弱)들은 성을 지키느라고 농사일을 전폐한 지 지금 3년인데 작년이 재작년보다 심했고 금년이 또 작년보다 심합니다.

 

온갖 요역(徭役)이 나날이 심해지고 다달이 가중되건만 모든 진영의 양식과 중국군을 공억(供億)하는 비용 및 일체 화포(火砲)와 기구를 마련하는 것 등을 전적으로 본부에서 담당하니 백성들의 가난은 뼈에 사무치고 재정이 탕진되었습니다. 더구나 전염병까지 성하여 거의 다 죽었고 황폐한 전지(田地)와 도망한 집이 열에 일곱 여덟입니다.

 

간간이 경종한 곡식은 수확할 일이 시급한데, 지금 포루에 소용(所用)되는 벽돌을 굽고 나무를 베고 돌을 캐내며 석회를 굽는 것 및 허다한 공역들을 한꺼번에 모두 조발하니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은 반드시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나무와 돌을 운송할 즈음에 화곡(禾穀)을 밟아서 상하게 하니, 역사에 동원하기가 편치 못합니다. 이런 사정을 갖추어 계달하여 근심을 풀어주소서."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년) 9월 6일, <좌의정 윤두수가 전주의 포루 창설로 민력이 고갈되었음을 아뢰다>

실제로 조정에서도 전라도의 여력이 이미 완전히 고갈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번 논의를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관아가 전부 불타는 바람에 전라도만 유일하게 온전한 호구대장과 토지대장을 갖고 있던 상황인지라 다른 지역에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는 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징발을 위한 기초 자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라도의 상황이 심각함을 잘 알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는지라 전라도에서의 과도한 징발은 전쟁 내내 지속되었다.

그런데 전라도는 임진왜란 전 그 어느 지역보다도 차별을 받던 지역이었다. 그 차별의 계기가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음모였던 바로 '정여립의 난'이다.

1589년 황해도감찰사 한준이 전주 출신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장계를 올렸다. 정여립이 벼슬을 그만둔 후 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모으고 병력을 훈련시켜 그해 겨울에 한강이 얼어붙은 틈을 타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정여립이 동인 계열의 인물이었기에 상황은 동인에게 매우 심각하게 돌아갔다. 동인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주도하며 말 그대로 동인을 작살냈다. 유성룡, 이산해, 김응남 등 동인의 거물 30여명이 연루되어 유배되거나 사사당했다. 그 후 3년동안 약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정여립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조선 역사상 그 어느 정쟁(政爭)도 이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희생자를 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서인이 기축옥사에서 일방적인 이득을 챙긴 점과, 정여립이 과연 모반을 꾸민건지 의심스러운 당시 정황 자료에 비추어서 이 정여립의 난이 서인이 꾸민 일종의 정치적 음모라는 설도 많다.

동인 뿐만 아니라 전라도도 작살났다. 조선 8도에서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던 곳이 바로 전라도였지만 정여립의 난 이후 전라도 출신이 과거에 합격하는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선조 이전까지 과거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 순위에서 전주가 2위, 나주가 4위, 광주가 6위, 남원이 7위었다. 그러나 선조 대 이후에는 전주가 10위, 남원이 9위, 나주가 11위, 광주가 12위로 확연히 떨어졌다. 기축옥사로 가장 피해가 심했던 전주와 나주는 하락율이 눈에 띌 만큼 두드러졌다. 조선 전기에는 전라도 출신 문과 급제자 260명 중 2명을 제외한 모두가 관직에 나가 99.2%의 진출율을 보였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323명 중 28명이 관직에 나가지 못해 92.1%로 감소했고 당상관(정3품)에 오른 자의 비율은 35.7%에서 19.5%로 크게 줄어들었다. 수많은 전라도 선비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학문적 분위기가 크게 위축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중앙 정부를 원망하는 전라도 선비들이 과거를 포기한 결과이기도 했다. 기축옥사 이후 전라도 사람들은 문과에 응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원보증서 같은 보단자와 경재소 관원 3인의 추천을 받기도 힘들었다.
- 신정일,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다산초당, 2007년, 363p

그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터졌고 전라도는 이 나라 조선을 위해 그 어디보다도 희생했다. 그리고 그 후 정유재란이 터지고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동안 조선군의 보급창고 역할을 한 전라도는 일본군에 있어서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파괴하라는 명을 내렸다.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1597년 여름의 짧은 기간 동안 학살당했다. 전라도는 희생했고, 파괴당했다. 일본에 있는 귀무덤, 코무덤은 전부 다 이때 희생된 전라도 사람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명량대첩 이후 일본군이 물러가기 시작하면서 선조는 그 어디보다도 극심한 피해를 입은 전라도 백성들을 위로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조서를 내렸다.

생각건대 호서호남은 참으로 거실(臣室)과 세족(世族)이 사는 부고(府庫)로서 백성의 번성함도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었는데 병화가 일어난 후로 칼날과 기근과 역질에 죽은 자가 십에 팔구가 되니, 외롭게 남은 민생이 피폐가 심하므로 내가 항상 마음 아파하여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지금 왜적의 독기를 부림이 전보다 더 심하여 칼날이 미치는 곳에는 어린 아이도 남기지 않아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루니 서울 이남 천리 지역이 모두 살육하는 장소가 되었다. 혹시 도륙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더라도 창황 분주하다가 굶주림과 목마름을 이기지 못해 서로 시체를 베개 삼아 길거리에서 죽는 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다행히 병란과 기아에 죽지 않고 세상에 살아 있다 해도 늙은이와 어린이를 팽개치고 흩어져 다른 지역에 떠도는데 주머니는 탕진되고 생활할 계책도 없어 궁산 황야(窮山荒野)에 부르짖다가 끝내는 죽어가고 말 것이니 인류는 이제 멸망하겠다.
우리들에게 무슨 죄악이 있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조용히 그 이유를 더듬어 보면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으니 이 천지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도다. 나의 마음에 더욱 큰 아픔은 내가 비록 덕이 없고 어둡지만 백성의 군주가 된 지 30년이나 되었으니 변고를 치른 이후로 더욱 민심을 단결시키고 민력을 아낌이 급무인 줄을 알았고 보호 안집하는 방도에 마음과 힘을 다하고자 하였지마는 왜적이 문앞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틈을 엿보고 있으므로 왕사(王師)가 우리를 구원하려고 연이어 나왔다. 그 모든 방어의 준비와 접대의 수용을 모두 백성들에게 판출했기 때문에 다른 도보다 그 피해가 더욱 혹독하였다. 아, 우리 백성이 물과 불 속에 울부짖은 지가 이미 6년이 되었다. 하루 아침에 도적을 만나 방어하지 못하고 악독한 칼날의 아래에서 짓밟히게 되었는데도 구제하지 못했으니, 비록 백성을 해치어 내 몸을 받들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편안하게 해주려는 방도로 백성을 대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는 너희들의 고혈을 죽기 전에 짜내고 또 아울러 죽게 한 것에 불과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부끄러움이 더욱 심하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백성에게 임하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10월 8일, <상이 자신을 허물하는 교서를 전라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에게 내리다>

ps. 이 글에는 전란을 겪은 선조의 가슴아픈 심정이 구구절절하게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병신짓으로 인해 하삼도가 쑥밭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책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이 매우 잘 드러나는 글이다.

그리고 추후 서술하겠지만 전라도는 명량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다시 부활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해안가를 돌아다니며 해안가 고을을 수복하고 또 물자와 인력을 충당하였다. 명량대첩 당시 판옥선 13척 규모였던 조선수군이 불과 반년 만에 판옥선 60척 규모로 불어나는 데는 전라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전라도는 희생했고 파괴당했지만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에도 전라도는 정여립의 난 이전의 성세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선조~광해군 때 문신이었던 정경세와 김응남은 전후 전라도의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임진왜란을 치룬 이후 호남이 피해가 적다고 하여 모든 이바지할 음식물을 호남에서 거두었다. 호남의 피폐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심하니 남의 곡식을 훔쳐가는 도둑이 떼로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호남의 일이 모두 염려된다."
"전라도 유생들이 과거에 응하려 하지 않으니 그 인심을 알 만합니다. 전라도 사대부들은 뚜렷한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유념하소서."
- 신정일, ibid, 364p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 이 나라는 과연 400여년 전 정여립의 난 당시와 비교해서 얼마나 달라졌는가? 사람의 몸에 불필요한 부분이 없듯, 한 나라에도 불필요한 지방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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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無湖南 是無國家-

이 글은 울돌목 鳴梁大捷 記念公園에 세워진 語錄碑의 내용이다.

"湖南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왜~?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했을까?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다.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이순신 장군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은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한 듯 합니다.

 


임진왜란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

2015.01.15 10: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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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若無湖南 是無國家

     

    “이충무공전서”의 부록에 실려 있는 편지 가운데 들어 있는 구절입니다.

     

    현덕승에게 선물을 받고 답장으로 보낸 그 편지의 앞뒤는 통상적인 인사말이고 구체적으로 들어 있는 사안은 자신이 정헌(正憲)에 올랐다는 것과 다음 내용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남 지방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책으로 있습니다.” - 이은상 번역.

     

    당시의 전황을 반영한 글입니다. 이 편지는 1593년 7월 16일자로 되어 있는데, 실제 당시의 전세는 8월의 상황을 기준으로 보면 왜군이 울산, 동래, 거제 등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경주, 거창, 남원 등지에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곧 우리나라 부산 주위에 왜군이 몰려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명군이 주둔해 있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이라면 왜군이 부산에서 한양, 평양으로 죽 밀고 올라갔고 대략 그 선의 동쪽을 점령해갔으니 전라도가 회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과 특히 바다를 지킨 이순신 장군의 중요성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황은 호남만이 남아서 중요한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말은 당시의 전쟁의 요충지로서 호남의 중요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그 유명한 말도 남해와 서해를 지키지 않으면 왜군이 바닷길을 이용해서 바로 올라가서 한양을 칠 수 있음을 경계한 말이며, 바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군을 없애지 말라고 한 말입니다.

     

    여기서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진다.”는 말만 떼어서 호남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면 맥락을 읽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금 군사분계선의 GOP들이 남한을 방어하는 울타리로서 아주 중요한데 이때 “GOP가 우리나라의 중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말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지역이 다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역입니다. 서울지역도 호남지역도, 경상지역도, 충청이나 강원지역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지역도 언젠가는 통일시켜야 합니다. 특히 호남지역과 경상지역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거나 독립국이 되려 하지 않는 한에는 완전한 하나의 나라의 구성체로서 힘을 합하여 번영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翰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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